Unchained meiody 가 은은하고 여운있게 온통 장내를 안타까운 슬픔과 애틋함과 절명적인 심정을 가눌길없게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나갈때, 우린 그 주인공이 되어보기도하고, 옆에 있어주어야할 정의의 사도같은 심정으로 슬픈이야기의 흐름을 지켜보아주었다.
운동은 일신의 건강과 정신의 고매한 성숙과 일순 일순 판단하는 그 건강함의 유지를 위해 신체적관리에 필수인지라, 밥을 안먹으면, 움직일수없게되고, 심하면 죽는것처럼 비슷한 행로의 과정이므로 누구에게나 권장되는 일신의 활동인것이다.
그러나, 유독 무술운동은 건강을 위한 체력증강및 유지의 술책일뿐만이 아니라 일신의 방어적개념인 "호신"의 역할에서 아마추어와 프로에 입각한 선수및 파이터로서의 자질향상의 방법도 됨과 동시에 재패의 기량여부가 되기에 못된자에게는 가르치지말라고 가르쳐져왔다.
또한, 잘잘못을 모르고, 우격다짐으로 쳐서 이기기에급급한자나 이를 수단으로하여 돈을 탐하고, 승리매매를 일상화하고, 위아래를 무시하는데 거리낌이없는 못된자들을 염려하는 의미에서 이를 경계하라는 이야기가 중국무술교본 첫 마디에 명문화 되어있슴을 무술공부를 한 회원이라면, 아는 상식적인 심득사항이다.
무술시이 기격동작위 주요내용, 이 기격동작화 투로운동형식, 주중 內外兼修적 동양체육무술지일~
喪理者 不可敎之 야_
옳고그름을 모르거나, 무시하고 함부로 제멋대로 저지를때~ 그런자를 가르치면 안된다고 하였다.
전, 전두환 대통령, 그가 한 행위가 잘된것일까 ? 하긴 잘낫다고 하는 사람도있고, 심지어 죽여야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긴하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인천지역 대선배셨던, 노수전노사님을 제외한, 그 후대 노수덕, 유순화사부님들과 우리 한국인사부님들시대에 우리가 그나마 학습했던 쿵푸를 본산지라 여겼던 대만에가서 투로며, 산타며 겨룸을 희망했던 시절의 단편이다.
사회단체 통합이란 당시 교육청은 국무총리령의 시행령에따라 우릴 계도했고, 우린 이에 따라 합했고, 싯점 바로전, 사단법인을 통해 1980년 미국 하와이 제3회 세계쿵푸토너맨트참가로 그 상호교류를 통한 우리의 쿵푸를 고양시켜야한다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어렵사리 대한우슈협회창단과정에서~ 각지역에 산재했던 각 단체들은 무조건 통폐합의 원칙론에 입각 자진해산을 행했는데, 우리인천은 그 전에 자체조직들의 통합이란 내부사안이란 한겹의 일이 더있었다.
소위 인천지역내 있었던, 사회단체 두 조직의 통합이었으니, 한국십팔기협회와 한국쿵푸무술협회였다.
그 조직은 화교사부님이었던 두사부의 즉 , 무당팔괘총회와 무단팔괘문총회 제1관이었다.
그 조직들과 연관 내부단합및 자율적 행로에 따라 주로 대만과의 교류를 행했었고, 주로 중화민국국술회와 대북시국술회 대만성국술회와의 교류활동이 주종이었다. 인천지역의 특성상 대만과교류하는 라인의 형성은 ~
무당팔괘총회는 한국쿵후무술협회(사회단체)와 내부융홥을 꾀하고, 한국십팔기협회 와 무당팔괘문 제1관은 각각 독자적 으로 중화민국국술회 대북시국술회등과의 교류를 도모했다.
그러나, 그때도 역시 교류를 행하는데는 자비가 소요되었고, 평균 당시 백만원씩이상 들어갔다 매회차~
노수덕,유순화사부님때부터 줄곳그래오다가 , 김명철 법무사회 회장을 모시면서 그 첫단추부터 사고가났다.
지난일이지만, 까내벌릴필요까지는 없으되, 주모자인 친구가 오히려 적반하장식으로 김명철씨앞에가서 "안"이 시키는대로 했다고불었다는것임을 김명철씨가 내게 이야기해서 난, 알게되었고, 그분은 이어말하길~ " 당신은 그럴사람이 아니란것은 말안해도 내 알지만, 친구면서 그렇게 하려는것을 말리지 않은것또한, 용납될수없고, 똑같다" 면서 변상에 같이 행함을 통고받았다.
여기서 한가지 특기할만한것이 있다.
이미 고사성어에도 나와있고. 어른들도 누차 말씀해오셨던바지만, 누가 평상시처럼 잘 나가던사람이 몰락하면, 이를 일으켜세워주고, 토닥이면서, 혹은 용기와 위로를 주는이가 있는반면에, 때는 요때다하여 다시없는 기회로알고, 가세하거나, 짓밟는데 동조내지는 더 나서는자가 속출하고, 그 자리가 자리인지는 모르되, 이를 가로채는자 있다는것을 평상시는 몰랐다.
물론, 친구가 후배한사람에게 못마땅해서 욕을 하고 위세를 부렸다고하여, 김명철 당시회장에가서 고자질하였고, 문제삼아 우리의 전권을 박탈하고, 돌려내지않으면, 형사고발하겠다고하는 법무사신분의 김명철 당시회장의 다그침에 울상이되어있던 우리를 몰아세운 또다른 후배가 있었으니~
그는 스스로 국장이라는 직칭을 사용하면서, 한참을 사무실과 우리를 번갈아 갔고, 언젠가는 "한국쿵후협회" 사무국장 동남아순방계획이라는 명분으로 김명철회장에 품의한일도 있었다.
다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 그 내용을 아는 나는 어안이 벙벙할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그져 웃을수밖에 없고, 그들 후배들과 친구는 지금만난다면 껄껄 웃으면서 지난날을 회고할수있을것이다.
여기서 또 한가지 꼬집을 부분이 있다.
그 친구의 그 지난날의 제자들이 있다.
우린 만난다.
이젠, 인생길의 동반자요 넓은의미의 프랜드다.
내가 내 자식에게 코치받고, 때론 돈도받고 혹은 빌리고, 갚듯이 우린 이제 동도의 동지다.
최소한 그런 마음자세로 그들을 만난다.
내가 과거 그들의 사부요, 그들의 아버지인들 그때의 그친구와의 일은 그때있었고, 지금은 다른 세상이 되었다.
친구의 제자나 아들은 그런관계나 내용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모르되~ 난, 그런 과거지사를 한번쯤은 되새겨서 실수안하려 조심한다.
그런그들이 날 찾아왔을때 난, 내심 기뻤고, 내 이들을 내제자이상으로 도와줄수있는힘을 다해 내가 아니라 우리들의 앞에 내세유리라고, 맘 먹었다.
그런데, 결과는 옛 사부님들의 말씀이나, 유언처럼 옳고그름을 모르는 사람을 키운것이나 다름이 없었던가?
간단히 말하면, 날 해롭게하는 방향의 일만 골라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대로 가다가는 도장이 멀지않아 망할 판국지세에 몰리겠다는 느낌이 왔다.
내가 왜 지네들 사범이었던 못된친구의 대를 이어가면서 이래야되는가 ? 그만 숙명론에 접하게 되는것이었으므로 내가 도와주었던 넓은 의미의 선배의 처신에서~ 조용히 만남을 절제해야됐었다.
그들은 이런 나의 마음을 헤아리기나 할까 ? 이렇듯 쿵푸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대만대회를 그렇게 매년 다니던어느해엔, 69년 중정배(中正盃)쿵푸토너맨트때, 가은일행이었던 박기자란분이 내게 찾아와 가라데 한국분회를 자기가 갖고있는데, 최영의 가라데대회 선수가 필요한데, 선수를 인솔하여 가보자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다. 직장에 몸담고 있던때라, 난 내 회원중 임성규와, 내 제자는 아니었으되;~김재호를 추천하였고, 박기자님이 동대회에 참가를 할수있게끔 도와준적이 있었다.
임성규유단회원이 갔다와서 내게 고하길, 최영의 선생이 다가와서하는 말씀이 한국에서 왔냐고 물으시면서, "꼭 승리해달라" 고 당부하더라는 것이었다.아주 먼 엣날일이 되었다.
그때의 재호는 풍문에 의하면, 같은건물 3층에 들어잇던 병원 간호사와 Side love가 이루어졌는데, 그만 너무 가까운데서 벌인 바람이 들켜 잘못되었는지~ 고행끝에 목사가 되었다. 한번 내게 찾아왔기에 알게된 사실이다.
빗ㅅ한 일은 그 말고도 두번이 더 있었다.
무슨 사고만 나면, 귀의한다. 그리스도 혹은 불가다.
이때, 최영의선생도 살아계셨을무렵이고, 이소룡의 영춘사형인 노문금선생도 대만대회가면 항상 만날수있었다.
그뿐이랴~ 요즘 유명한 "팔극권'의 불세출의 영웅 二打不要 이서문 노사의 제자 "유운초" 선생도 매년한번씩 두해를 이어 만났다.
그런 시절에 사단법인체와 나란히 서서 활할한 움직임을 강구했던 인천만의 조직이었으니~~
,
여하튼 김명철선생과 합의하여 새로 일으켜 운영하기로 합의하고, , 그일이후 ~ 그는 주안의 도장을 정리하여, 다시 시작하는 의미에서 내게 당시 전권을 위임하여, 간석제일시장길건너로 이전하게 했다.
그리고, 바로 전국산타대회를 개최하여 선수를 선발하고, 대만대회에 임하게된다.
당시 전국에서 산타대회에 참가 대만의 국제대회에 가겠다고 신청한 젊은 선수는 무려 80명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하여 대만대회에 참가한 우리 ":한국쿵후협회"는 박격경기 종합2위와 3위 끝내는 관군(1위)를 마크하게된다.
경기이천의 최성묵선수(1964)와 인천의 박인호선수(1960) 김창석(1958) 안형주선수(1947)등의 당시적 선수들은 각체급에서 금메달선수들이다.
그외, 황용철선수(1955) 서중원선수(1955) 안철균선수(1952) 이상의 선수들은 동메달과 은메달을 여러대회에서 마크했다.
대회참가를 명분으로 개인주머니를 채우려했던 행위에대한 보답으론 , 반환이란 요구로 이어져서 한푼틀림없이 요구하는대로 응해야했고, 김명철씨는 당시 유**부회장이 김회장 당사자에 돈을 빌려달라고하자, 내가 반환하기위해 빌린돈의 여분이 있는줄알자 자기가 보증설테니 그분을 빌려주라고해서 500만원을 빌려주었다가 유사장의 사업이 부진을 면치 못하자 떼이는 정황이 연출되기까지했다.
그이후 7년여만에 원금만을 회수했다.
그가, 내가 친구와 결별아닌 결별이후 한국쿵후협회를 새로이 시작하는 의미에서 정리및 신장개업하다시피한 그 일에서도 역시, 공짜는 없었다.
난, 짤짤이 그 댓가를 지불했다.
심지어 내집을 담보로 돈을 빌리는데, 내가 차주가되어 돈을 쓰게한 일도 있었다.
그는 나를 철저한 이용감으로 사용했다.
그러는 동안 우린 11회 아시안게임이란 당면한 일에서 인천의 진정한 대표는 아니었을지라도,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있었던지라
자연스럽게 연락이 닿는 길목에 서있게되었으며, 당시 좁혀진 대한우슈협회 창단의 목적과 필요성을 통감한국내 8 개단체의 하나가되게이르게 된것이며, 사단법인 대한쿵푸협회, 한국쿵푸협회,한주쿵푸무술협회, 중무회, 달마회, 국제쿵푸연맹 , 중화국술국제연맹총회, 신무회등 8개단체의 만남은 일상의 중요사안이 되었다.
1988년 11월 23일 ---
근 일년여의 싸움과 타협과 끊임없는 대화를 끝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사단법인쿵푸협회의 회장이었던 유영주씨는 전무이사에 전무였던 김만현씨는 부회장에 사무국장엔 안철균등이 내정되었다.
그리고, 그 초창기에 몇번 김명철회장을 주축으로 각종대회및 참가에 비용을 충당하였고,
나는 그 숱한 암울한 선후배사이의 갈등을 벗어나기도 해야겠거니와 새로 탄생하는 대한우슈협회만들기에서 투쟁한 결과 그 진행과 보다큰 꿈의 실현을 위해서, 개인진로를 마다하고, 재정의 자유얻기를 포기하며, 가족의 만류도 뿌리친채 서울로 갈 그런 알량하고 병들기 시작하는 길의 매진을 재촉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