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피히테의 “지식학” 입문
부제 : 지식학의 3대 원칙 이해, 절대의식과 인공지능(AI)
①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의 철학 특히 그의 주저 “전체 지식학의 기초”는 간단히 말해서 데카르트주의와 칸트주의 철학의 종합이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주관주의 철학과 칸트의 선험적 통각 (지식적 이성) + 오성의 범주(카테고리) 을 종합하려고 한다.
칸트 철학을 계승한다. 82. 칸트 “순수이성비판” 참조. 칸트의 철학 특히 이론철학은 선험적 관념론이었다. 우리의 지식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경험 이전에 선천적인 요소들이 작동한다는 것이었다. 즉 감각은 외부에서 주어지나 그것이 1. 감각의 형식인 시간과 공간 2. 선험적 통각(인간의 지식적 이성) 3. 오성의 범주(category)를 통과함으로서 비로소 대상으로 정립된다는 것이다.
② 절대적 자아 absolute ego, absolute I
피히테의 주저는 “전체지식학의 기초” 라고 불린다. 이 책의 주제는 자아 혹은 절대적 자아 das absolute Ich , the absolute I 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칸트 이전의 데카르트로 다시 복귀한다.
절대자아는 단순히 말해서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자아 “thinking I” 와 같다. (근세 철학의 주체는 모두 나 혹은 자아 이다) 단 그 의미를 좀 더 깊이 추적할 뿐이다.
절대자아는 초자연적이거나 막강한 자아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나의 생각이 가장 확실하다는 철학적인 사고이다.
물론 이것은 일상적인 자아 즉 늙어가고, 실수하고, 삶에 부대끼는 경험적 자아 혹은 인격적 자아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지식과 진리의 관점에서 절대적이다. 즉 의심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자아 개념에 이런 엄청난 의미를 부여한 것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에서 다시 보자. 나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은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이란 활동의 일종이다. 혹은 주관이라고 한다. Subject. 그런데 세상은 모두 내가 보고 느끼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나는 세상의 주인이다. 세상을 다 가져라! 이를 쇼펜하우어는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Die Welt ist meine Vorstellung. The world is my representation.
그런 면에서 절대자아는 석가모니의 혹은 천상천하유아독존 (天上天下唯我獨尊)와 같다. 혹은 일체유심소조 (一切唯心所造)와도 같다. 모든 것이 마음의 작용이다.
이 활동에는 삼라만상이 다 들어온다. 세상은 모두 생각의 대상이다. Object.
③ 데카르트의 코기토와 피히테의 절대자아
생각하는 자아(나)는 이처럼 생각 기능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정한다. 이를 데카르트는 cogito ergo sum 이라고 표현했고 피히테는 자아가 자신의 존재를 정립한다 Das Ich setzt ursprünglich schlecthin sein eignes Seyn 라고 한다.
여기서 정립한다는 setzen, posit 말은 고정시킨다, 정착시킨다는 말이다. 날뛰는 애를 붙잡아서 앉힌다는 뜻이다.
이 뜻은 자아는 활동하지만 곧 자신을 정지한 존재로 정착시킨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생각하며 동시에 자신을 특정한 존재로 규정한다. 예를 들어 나는 이성적 존재로서 사고하지만 동시에 이름도 있고 누구 누구의 아들이거나 남편이다 는 것이다. 즉 자아의 활동성은 무한하지만 동시에 어떤 한 개인으로 한정이 된다. 혹은 여러 가지 상념에 빠져 몰두해 있다가 누가 야! 정신차려 할 때 다시 자신으로 돌아 옵니다. 자신의 처지와 주제를 파악한다.
이런 자아 혹은 나를 피히테는 절대 자아라고 한다. 이는 순수사유이며 동시에 한정적인 존재 혹은 사물이다. 즉 자아 안에서 주관과 객관이 통일된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생각하는 자아는 AI 컴퓨터 프로그램과는 다르다. 컴퓨터와 인간의 사유(두뇌)는 비슷하다, 그러나 큰 차이는 바로 사유에 해당하는 존재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은 사유만 하지 자신을 한 존재로 혹은 인격으로 정립하지 않는다.
이처럼 활동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정립하는 자아를 피히테는 절대자아라고 한다. 즉 자아 = 주관이며 동시에 객관이다.
④ 지식학의 제 2원리 : 자아(自我)에 대하여 비아(非我)가 정립된다.
위의 논지에서 본 것처럼 자아는 어떤 면에서 세상의 주인이다. 이런 면에서 자아는 절대적이다. 이를 피히테는 절대자아라고 한다. 그러나 위에서 본 것처럼 자아의 사고 할동은 자신을 존재로 정립한다. 즉 활동이 어떤 것(something)이 된 것이다. 여기서 활동과 존재는 대립이 된다. 활동과 존재가 대립되면서
나 아닌 것, 비아(非我)의 개념이 정립한다. 다시 말해서 주관과 객관이 다시 분리된다. 다시 말해서 주관과 객관이 다시 분리된다. 위의 명상과 각성의 사례에서 볼 때는 사유의 순수활동성과 현실적인 나의 대립이 일어난다. 즉 나는 사유하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ID가 있다. 보통은 이런 나의 ID를 진정한 나라고 한다. 즉 국민이요, 가장이요, 직원인 나의 모습이다. 그러나 철학에서는 반대로 본다. 현실적인 나를 도리어 비아 (非我)라고 간주한다. 혹은 타자의 개념이 나타난다. 이것이 확장되어 자연, 세상, 물질 등 온갖 개념이 나타난다. 이는 달리 말하면 부정성 범주가 출현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생각하는 자아(thinking I)의 자기 분열을 통해서 이제는 비아(非我)가 탄생한다. 즉 내가 아닌 것으로서의 타자 혹은 부정성 개념이 나온다. 이는 칸트의 범주의 연역, 즉 도출과 같은 것이다.
⑤ 3원리
"자아는 자아 즉 가분적(可分的) 자아에 대해 가분적 비아를 반정립(反定立)한다"는 제3의 원리가 설정된다.
위에서 우리는 순수 자아의 활동성 혹은 사유활동을 통해서 피히테의 제 1 원리와 제 2원리가 도출됨을 알았다. 비아 즉 존재 혹은 자연 개념이 자아 속에 있음을 느낀 절대자아는 이제 양자를 종합하기에 이르런다. 다시 말하면 순수 사유로서의 나는 자신의 원래 기능과 달리 수동적인 존재가 자신 안에서 이루어 짐을 알았고 다시 이를 자신의 산물로 가져와야 한다. 활동과 존재를 자아 속의 부분들로 보고 이들은 서로 대립시키고 다시 이들을 자신의 활동 속으로 가져 온다.
https://youtu.be/i0S5lVyGvB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