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저 너머의 세계, 그리고 인류의 이야기를 그리다"
이 책은 “역사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위대한 상수는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이다.”라는 진화론적 명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 책이 묵직하다. 진즉에 사서 책꽂이에 꽂아두고 있다가 마침내 펼쳐들었다. ’사피엔스‘가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인류가 처음 시작된 이래 오늘까지 흔적을 추적한 것이라면, ’호모 데우스‘는 지금부터 변화해갈 인류에 관한 책이다.
따라서 ’호모 데우스‘는 ’사피엔스‘의 후속편 같은 책이다. 여기서 ’호모 데우스‘는 라틴어 Homo와 Deus의 합성어이다. Homo는 사람 또는 인간을 의미하며, Deus는 신을 의미한다. 따라서 ’호모 데우스‘는 훨씬 우수한 인간 모델을 의미한다.
유발 하라리는 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호모 사피엔스가 ’호모 데우스‘로 발전해 간다고 한다. 사실은 인류가 어떻게 진화해갈지는 누구도 가늠할 수 없다. 그러함에도 유발 하라리는 역사발전 단계를 추적하고 거기에 오늘날의 과학의 발전을 더함으로써 그 과정을 유추하고 있다.
유발 하라리
그러므로 이 책은 “역사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위대한 상수는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이다.”라는 진화론적 명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유발 하라리는 역사학자임에도 철학과 과학을 넘나들며 엄청난 지적 역량을 과시한다.
그에 의하면 ’호모 데우스‘로의 이행은 필연인 것처럼 보인다. 마치 마르크스가 공산주의 사회의 도래가 필연이라고 했던 것처럼. 마르크스가 생산 수단을 중심으로 역사 발전을 설명했다면 유발 하라리는 그 동인을 집단신화에서 구했다.
’사피엔스‘는 인간이 가진 신, 인권, 국가 또는 돈에 대한 집단신화를 믿는 독특한 능력 덕분에 지구에서 최고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오래된 신화들이 혁명적인 신기술과 짝을 이루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것이 바로 이 책이 갖는 문제의식이다.
인류는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기아, 역병, 전쟁은 늘 함께 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지난 몇 십 년 동안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인류는 전례 없는 수준의 번영, 건강, 평화를 이룩하였으며, 이는 그 동안의 경이로운 경제성장 덕분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에 대해 우리는 상호주관적 신화를 버리고 객관적인 과학 지식을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러나 근대과학이 확실히 게임의 룰을 바꾼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신화를 사실로 대체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신화는 계속 인류를 지배하고 있고, 과학은 그런 신화를 더 강화할 뿐이다. 과학은 상호주관적 실재를 파괴하기는커녕, 상호주관적 실재가 객관적 실재와 주관적 실재를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하게 통제하게 할 것이라고 한다.
기아, 전염병, 폭력은 통제 가능한 관리할 수 있는 문제가 되었으므로 인류는 이러한 성취를 토대로 목표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것은 노화와 죽음 그 자체를 극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을 극도의 비참함에서 구한 다음에 할 일은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류의 다음 목표는 불멸, 행복, 신성이 될 것이다. 인류는 암, 세균, 유전학, 나노기술 등의 연구를 통해 조금씩 불멸을 꿈꾼다. 그런가 하면 생화학적 기제를 바꾸고 몸과 마음의 재설계를 통해 쾌락을 영원히 지속되도록 함으로써 행복을 추구할 것이다.
인간이 행복과 불멸을 추구한다는 것은 성능을 업그레이드해 신이 되겠다는 것이다. 인간을 신으로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생명공학, 사이보그 공학(인조인간 만들기) 그리고 비유기체 합성 같은 기술이 동원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런 일은 어쩌면 21세기가 끝나기 전에 도래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불멸, 행복, 신성은 인본주의가 품어온 오랜 이상의 논리적 결론이다. 20세기 인간의 거대한 프로젝트(기아, 역병, 전쟁을 극복)는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풍요, 건강, 평화의 보편적 표준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21세기의 새로운 프로젝트(불멸, 행복, 신성을 얻는 것) 역시 포부는 인류 전체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들의 목표는 기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능가하는 것이라서, 새로운 초인간 계급을 탄생시킬 가능성이 높다.
과학의 발견과 기술 발전이 인류를 쓸모없는 대중과 소규모 엘리트 집단의 업그레이드된 초인간들로 나눈다면, 혹은 모든 권한이 인간에게서 초지능을 지닌 알고리즘으로 넘어간다면 자유주의는 붕괴할 것이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데이터교가 차지할 것이다.
“인류가 실제로 단일한 데이터 처리 시스템이라면 그 산물은 무엇일까? 데이터교도들은 ’만물인터넷‘이라 불리는 새롭고 훨씬 더 효율적인 데이터 처리 시스템이 그 산물이 될 거라고 말한다. 이 과정이 완수되면 호모 사피엔스는 사라질 것이다.”
자본부의가 그랬듯이 데이터교도 처음에는 가치중립적인 과학 이론으로 시작했으나, 지금은 옳고 그름을 결정할 권한을 주장하는 종교로 변화하고 있다. 이 새로운 종교가 떠받드는 지고의 가치는 ’정보의 흐름‘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정보의 흐름에서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는 데이터교의 충실한 신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미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기 무섭게 스마트폰을 집어 든다. 그리고 그것으로 집안의 온갖 전자기기를 작동시키고, 웨어러블을 이용하여 건강을 체크한다.
이 책은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을 예언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예언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책의 예측은 예언이라기보다는 현재 우리 앞에 놓인 선택들에 대해 논의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이 논의로 인해 우리가 전혀 다른 선택을 하고 그래서 이 책의 예측이 빗나간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다.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는 데 무엇하러 예측을 하겠는가?”
책의 끝 부분은 얼핏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출산의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고 인간 부화공장에서 태아를 대량 생산되며, 아기가 태어나는 모든 과정은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진행된다.
인간들은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고 모든 인간들의 평등한 것이 아니라 역할이 다른 4개의 계급이 존재한다. 이러한 계급은 태어날 때 병아리 감별 하듯이 선별된다. 그리고 그 계급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그리되면 자연선택을 거스르는 것이므로 황당한 일이 될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유발 하라리의 상상력은 끝 간 데가 없으며 그 상상력을 뒷받침하는 논리는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치밀해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말대로 ‘논의의 한 가지 방식’이 아니라 유일한 방식으로 보일 정도였다.
책을 번역한 역자는 이 책을 평가하면서, ‘호모 데우스’에서 저자는 전기 영화(사피엔스)에 공상과학 장르를 섞었고, 여기에 서스펜스까지 더했다고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책의 어디에서도 공상과학 같은 부분을 읽어내지 못했다. 내 무지 탓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