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정진(奇正鎭) 찬(撰)
[생졸년] 1798년(정조 22년) 6월 3일 ~ 1879년(고종 16년) 12월 29일
서씨(徐氏)는 본래 이천(利川)의 망족(望族)인데, 장성(長城)을 관향으로 둔 것은 대체로 고려의 시중공(侍中公)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시중공은 후세에 유림들이 칭한 절효 선생(節孝先生) 휘는 릉(稜)이요 자는 대방(大方)이라는 분이다. 자손 중에 고향 마을을 지킨 사람은 몇 명 안 되고, 멀리는 해서(海西)ㆍ관동(關東)으로 갔고, 가깝게는 동성(同省)ㆍ열읍(列邑)으로 나갔다.
금년 갑자년(1864, 고종 1)은 위로 수보(修譜)한 경자년(1840, 헌종 6)과의 거리가 겨우 25년일 뿐인데, 그것을 중수(重修)함에 경자보(庚子譜)가 근족(近族)만 수보하고 원족(遠族)은 누락시킨 것은 흠이었다. 책을 또한 완성할 때 정진(正鎭)에게 서문을 요청하였다.
정진이 삼가 살펴보니, 장성은 승국(勝國) 때에 궁벽한 고을이어서 의관을 입은 벌열(閥閱) 집안이 매우 드물었다. 이제 보니 세족(世族)에 있어서 서씨 외에 장성을 관향으로 한 사람은 없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기록한 인물 중에서 원편(原編)에 보이는 것도 서씨 시중공 한 사람 뿐이니, 이를 알 수가 있다.
이제 와서 시서와 예악으로 유명한 고을이라 일컬으니, 그 유래한 바를 알 수 없다. 하서(河西) 김 선생(金先生)이 있어 아조(我朝)에서 발천(發闡)하였고, 절효 서 선생이 있어 승조에 창명(倡明)했으니, 이를 힘입은 것이다. 이 고을의 선배가 선현을 향사(享祀)할 때에 절효를 맨 먼저 하고 하서를 이었으니, 이에 의견이 있어서였다.
우리 기씨는 타향살이로 왔다 하나 10세의 분묘가 이제 이 땅에 있으니, 이 땅이 바로 고향 마을이다. 이제 서씨의 족보에서 마땅히 고향 마을의 말을 해야지 범박하게 글을 짓는 사람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또 서씨 사암공(思庵公)은 우리 선조 금강공(錦江公)과 동문이면서 동서인데, 두 집안 자손의 친밀함이 다만 고향 마을일 뿐만은 아니다.
사암공은 일찍이 상소문을 올려 삼감(三憾)을 배척함으로써 양선정(兩先正)을 신원(伸寃)하였으니, 이는 고을의 인사(人士)들도 영광을 함께 하였다. 이를 나는 마땅히 외워 말할 것이다. 대를 이어서 관직에 오른 것과 봉정공(奉正公)의 절의 같은 것은 정진이 아니더라도 옛 기술에 대략 갖추어져 있으니 여기서는 생략한다.
대현(大賢)의 후예가 마침내 쇠퇴하지 않아 서 상사(徐上舍) 한풍(漢豐) 및 그 조카 학권(鶴權)의 문장이 남쪽에서 으뜸으로 드러나니, 서씨가 그 중간의 쇠미했던 것을 떨치는 것이 장차 여기에 있도다. 서씨의 뛰어난 재사(才士)들이 어찌 여기에서 그치겠는가. 나는 우선 친숙한 것에 나아가 말하였다.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ㆍ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 | 박명희 김석태 안동교 (공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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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長城徐氏族譜序
徐氏本利川望也。別貫長城。蓋自高麗侍中公始。侍中卽後世儒林所稱節孝先生諱稜。字大方者也。子孫守鄕井者無幾。遠者海西關東。近者同省列邑。今秊甲子上距修譜庚子。僅二十五秊耳。而重修之。病乎庚子譜之近修遠漏也。冊且成。問弁卷于正鎭。正鎭謹按長在勝國爲僻鄕。絶少衣纓閥閱家。今見在世族。徐氏之外。無貫長者。輿地勝覽所錄人物。見於原編。亦徐氏侍中公一人而已。此可驗也。到今詩書禮樂。以名鄕稱者。其可以不知所自耶。有河西金先生以闡之於我朝。有節孝徐先生以倡之於勝朝。是之賴耳。此鄕先輩之俎豆先賢也。首節孝而繼河西。其諸有見於此歟。吾奇雖流寓而來。十世墳墓。今在此土。此土卽鄕井。今於徐氏之譜。當爲鄕井語。不當泛爲作者語。又徐氏思庵公。於吾先祖錦江公。同門也僚壻也。兩家子孫之綢繆。不但鄕井而已。思庵公嘗疏斥三憾。伸兩先正。此鄕人士與有光焉。此吾所當誦言者。若連世簪組及奉正公之節義。微正鎭。舊述略備。此可略也。大賢之後。竟不陵遲。徐上舍漢豐及其從子鶴權。文章首出南土。徐氏之振其中微。將在斯歟。徐氏俊彥。豈止於此。吾姑就所親熟言之。<끝>
노사집 제18권 / 서(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