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토월을 잡으러가다
정 군 수
전주팔경의 하나인 麒麟吐月(기린토월)은 기린봉에서 떠오르는 보름달의 장관을 상찬해서 일컫는 말입니다. 기린봉은 전주시의 동쪽에 가장 높게 솟아오른 상서로운 산봉우리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공원입니다. 보름달이 떠오르는 밤이면 많은 사람들은 기린봉에 떠오르는 달을 보며 마음에 품은 소망을 기원했습니다. 정월대보름날 우리 월천님들은 기린토월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더 높은 곳에서 달을 맞으러 기린봉에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만나기로 약속한 기린봉 입구의 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하였습니다. 한 분이 정성스럽게 보름밥을 싸가지고 오셔서 서로 맛나게 몇 입씩 나누어 먹기도 하였습니다. 음식점에서 나오자 가로등과 네온이 도시의 거리를 밝혔고, 동쪽하늘에는 보름달이 둥두렷이 떠올라 있었습니다. 떠오르는 달을 보며 ‘망월이야’를 외쳐야 하는데, 보름달은 벌써 기린봉이 아닌 만덕산 너머로 덩그렇게 솟아올라 있었습니다.
기린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수많은 계단이 가파르게 놓여있었습니다. 무슨 소망이 담겨있었을까? 우리 임들은 정상을 향하여 한 계단 한 계단을 밟으며 말없이 올랐습니다. 한 고비 숨을 돌리고 주위를 살펴보자 어느새 우리를 따라왔던 보름달도 잎 진 나무 가지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내가 한 계단 오르자 달은 세 걸음 먼저 오르고, 내가 쉬어가자 달도 높은 가지에 몸을 얹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상이 가까워오자 휘황찬란한 도심의 불빛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벤치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뒤에 오는 분들을 기다렸습니다. 목소리 고운 분이 두 분과 함께 마지막으로 올라왔습니다. 그의 노랫소리가 오늘밤 저 달빛을 타고 그리운 님 창문에 닿을 것 같은 맑은 모습이었습니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도 마음을 열어 보이기가 아까운 듯, 모두 말없이 도심의 불빛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저 불빛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은 삶의 애환이 담겨있을까? 저 불빛 아래서 지금 우리가 오르고 있는 기린봉의 달을 보며 소망을 기원하는 눈물 많은 사람을 생각합니다. 웃음 많은 소녀도 생각해봅니다. 달은 어느새 우리를 앞지르고 반공으로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르는 세상을 찾아가는 소년처럼 부픈 설렘으로 정상을 향하여 올라갔습니다.
麒麟吐月(기린토월)을 잡으러 갔지만 기린봉 정상에는 달이 없었습니다. 달은 저만큼 떨어진 아중리 저수지 위로 번듯이 솟아 세상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정상 바윗돌에 키를 더하고 서서 하염없이 달을 바라보았습니다. 心心相印(심심상인), 달을 보았으면 그만이지 말을 하여 무엇 하랴? 마음속에서는 情念(정념)의 불꽃이 조용히 타올랐습니다. 누구를 향한 그리움인지, 무엇을 위한 소망인지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들을 가슴에 안고, 흐르는 달빛에 몸을 맡기고 망부석처럼 서 있었습니다. 보석처럼 뿌려졌을 하늘의 별들은 보름달에게 빛을 내어주고, 그 뒤에서 보일 듯 말 듯 제 자신의 모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도심의 불빛은 보란 듯이 다투어 제 빛을 뽐내고 있었습니다. 도시의 건물들이 기린봉을 에워싸고 위세를 부리고 있어도 역시 발아래의 불빛에 불과했습니다. 보름달은 옛 모습 그대로 반공에 솟아올라 우리의 가슴에 또 하나의 달을 안겨주었습니다.
정상 바로 아래 벤치가 놓여있는 작은 터가 있어 우리는 그 곳으로 내려갔습니다. 자상하신 분이 보름 음식과 귀밝이술을 준비해 가지고 오셔서 벤치위에 차려놓았습니다. 음식은 조촐했지만 달빛과 함께 차려져 소담스런 잔칫상이 되었습니다. 먼저 기린봉 산신령께 고수레를 하고, 귀밝이술로 건배를 하고, 참말로 맛있게 보름음식을 먹었습니다. 달은 세상 벗님네의 한숨까지, 가슴의 잔물결까지 비춰 주려는 듯 하늘을 향하여 더 높은 곳으로 떠올랐습니다.
오를 때 가쁘게 몰아왔던 숨을 정상에 놓아두고, 우리는 노래라도 하듯이 가벼운 몸으로 하산을 하였습니다. 달빛을 받고 엎디어있는 무덤들, 그 사이로 난 작은 오솔길, 오솔길을 훤히 알고 지나가는 바람소리, 바람 끌어다 움 틔우는 상수리나무의 기침소리 - 오를 때 없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들리지 않던 것들이 귀에 들어옵니다. 나뭇가지며 계단이며 돌멩이에 지천으로 쌓이는 달빛 속을 걸어 기린봉을 내려왔습니다.
우리는 풍진세상으로 내려왔습니다. 기린봉을 오르며 보았던 휘황찬란한 인간의 불빛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찬란하지도 않고 빛나지도 않습니다. 그저 樵童汲婦(초동급부)일 뿐. 정월대보름 기린토월을 잡으러 기린봉에 올라간 우리님들, 정상에서 잡지 못한 기린토월은 벌써 인간세상으로 내려와 우리의 가슴속에 있었습니다. 내일이면 가슴을 열고나와 우리의 토방이며 마루에 옛날처럼 쌓일 것입니다. 달빛은 한없이 내리는 눈처럼 푹푹 쌓여 우리님의 머리맡에서 차고 고운 시가 될 것입니다.
첫댓글 그날밤의 정서 를 어쩌면 이리도 세세 하게 담을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분들과 함께해서 행복했고~~이렇게 좋을 작품을 대할수 있어서 여러 가지로 행복합니다.
일상 세상에서 떨어져나가 다소 떠있는 듯한 선인의 마을을 맛봅니다.. 시가 반드시 짧지만은 않군요!!
기린봉을 늘 바라보고 빙빙돌며 살았어도 30여년만에 올라보았습니다. 더구나 보름달을 만나로 밤을 더듬어 간 기억은 또 다시 30년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추진해 주신 교수님이하 회장님, 총무님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그 밤이 새롭습니다. 달빛아래 돌층계를 오르던 님들의 행렬이 아름다운 여운으로 남아 오래토록 기억될 것입니다. 행복한 시간이었답니다. 교수님의 자상하고 섬세하신 글에 다시한번 그 밤을 떠 올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