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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제롬에 대한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었다. 뒷날 제롬은 알리사의 죽음을 통보 받고 슬퍼하면서 알리사에 대한 사랑을 간직한 채 일생을 독신으로 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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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지드의 작품과 생애
앙드레 지드는 폴 발레리, 폴 클로델과 더불어 20세기 전반기에 있어서 프랑스 문학의 삼고봉(三高峯)을 이루는 작가이다. 지드는 1869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신교도인 아버지는 파리 대학 법학 교수였으며 천주교도인 어머니는 막대한 유산의 상속자였다.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엄격한 청교도적 분위기로 인해 정신적으로는 자유롭지 못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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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지드의 문학
/ 유홍림
앙드레 지드(Andre Gide)...
"좁은 문", "전원 교향곡" ...그의 작품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사랑받는 프랑스 작가중의 한 사람이다. 지드의 작품이 우리의 사랑을 받는 이유를 찿아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루어질수 없는 비극적 사랑이 주제라는 점에서 이 작품들의 작가인 지드는 한국인의 정서에 그 어떠한 프랑스 작가보다 가깝게 느껴질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는것이다. 지금은 지드가 어느만큼 번역되어 있는지 몰라도 나의 학창시절에 전원 교향곡을 읽으며 가슴쓰리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있다.
그러나 그는 단지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만을 쓴 작가인가? 그가 말년(1947)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신프랑스평론” 이라는 문학잡지의 편집자로써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은 그의 문학적 위치가 매우 단단한 기초와 심오함에 근거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우리가 막연히 알고있는 피상적인 막을 지나 그의 삶과 문학세계에 좀더 깊게 들어 가보려는 노력은 분명히 의미있을것이다. 비록 지드에게 이르는 길이 좁은길이라해도...
1) 지드, 그는 누구인가?
그는 파리에서 태어나서 파리에서 죽었다. 이점에서 그는 파리지엥이다. 그러나 그는 일생에 걸쳐 많은 여행을 했고, 많은 문인들과 활발한 교류가 있었으며, 사회적으로도 적극적으로 활동한 사람이었다. 작가로써도 대단히 다산적이었다. 소설, 에세이, 여행기, 평론, 일기, 서간문.. 그의 문학적 유산은 양으로 볼때도 결코 그 누구보다도 적지않다.
한마디로 말해 말해 그는 문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우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살았다 할수 있겠다. 이 모든 성과 이외에 우리의 존경을 자아내는 또 하나의 삶의 면이라면 지드는 전쟁중 피난민들이나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많은 헌신을 했다는 사실이다. 에밀 졸라와 더불어 지드는 당시 프랑스의 참여 지식인의 전형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그의 삶과 재능은 어디에서부터 온것일까? 그의 삶의 선천적 조건을 추적해 보면 우리는 몇가지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첫째, 원래 그는 매우 약한 아이였다. 특히 신경쇠약증이 일생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대부분 집에서 교육을 받는 시간이 더 많았다. 따라서 그는 제대로 공부를 따라 가지못했지만, 이러한 정서적 불안은 그러나 그에게 문학적 예민함과 감수성을 열어주었다.
둘째, 그는 프랑스라는 나라에서 서로 기질이나 풍습이 다른 두 지방에 뿌리를 두고 자란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남불의 우체, 어머니는 루앙 즉 북 프랑스의 노르망디 출신이었다. 이 때문에 어렸을때 부터 두 지방을 수시로 왕래하면서 자랐다. 뿐만 아이라 아버지와 어머니의 집안도 서로 매우 달랐다는 사실이 그에게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나중에 법학교수로 성공했지만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루앙의 부유한 모직 산업인의 딸이었다. 이 신분과 부 덕택에 지드는 브르조아 가정에서 자랄수 있었다.
셋째, 이런한 부계와 모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집안을 하나로 묶는 절대적인 상위가치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집안의 종교적 뿌리가 개신교라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거의 99%가 카톨릭인 프랑스 전통 사회에서는 매우 특이한 예외였다. 지드 자신은 후에 무신론적 입장을 취했지만(이 때문에 그가 죽었을때 장례식에서 축복기도를 한 목사는 호되게 비판을 받았다) 그의 종교적 배경은 언제나 개신교였다. 뿐만 아니라 카톨릭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했고 이것은 1914년에 발표된 작품 "바티칸의 지하실"(Les Caves du Vatican)으로도 표현되었다.
넸째, 지드가 막 11살이 되었을때 아버지가 죽었고 이후 지드는 거의 여자들에만 둘러 쌓여 자라게 된다. 이것이 이유인지는 알수 없지만, 지드는 동성애자였다. 그는 후에 동성애를 공개적으로 옹호했다. 그가 13살때 에 사촌 마들렌 롱도(Madeleine Rondeaux)를 사랑하게 되었을때 그는 아직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다. 그가 스스로 이 사실을 알게된것은 1893-1894사이에 있었던 북 아프리카 여행중에서였다. “소년의 몸”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지드는 마들렌을 만난지 12년후, 아프리카 여행에서 돌아 온 일년후에 한때 청혼을 거절하기도 했던 그녀와 결혼했다(1895). 지드는 자기 부인이 된 사촌 마들렌과는 부부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가 1923년에 얻게된 유일한 자식인 딸 카트린은 다른 여인(Maria Van Rysselberghe)과의 사이에서 난 아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드는 동성애자였고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는데 앞장섰다.
이러한 네가지 선천적 조건이 지드의 삶과 문학을 일생 동반하고 있었다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2) 지드의 삶과 문학
지드의 문학- 그것은 어떻게 시작하고 있는가? 지드는 문학적으로 일찍 성숙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정규학교 수업에서 흥미를 갖는 대신 일찍부터 당대의 유명시인 말라르메의 문학살롱에 출입하면서 지인을 넒혀 나갔다. 발작, 괴테, 르낭, 입센등 작품들도 하루에 한권씩 소화해 낼정도로 읽었다. 이 열매로 첫 선을 보인것이 바로 "앙드레 발테의 노트"(Les Cahiers d'Andre Walter)! 1891년 그러니까 지드 나이 22살에 발표한 첫 소설이었다. 주제는 이미 이때도 이룰수 없는 사랑으로써 사촌인 엠마누엘을 사랑한 젊은 문인이 사랑이 거절되자 미치게 되고 결국 죽는다는 것으로서 여전히 자신의 청혼을 거절하고 있던 사촌 마들렌에 대한 일종의 "경고장"이었다. 이 젊은 시절은 그의 일생의 지우가 된 폴 발레리와 프란시스 쟘을 만난 때이기도 했다.
이어 지드는 1893에서 1894년 사이 9개월간 북 아프리카 여행을 하게된다. 위에서 언급한바대로 동성애가 “발견된” 바로 그 여행이었다. 95년에도 두번째로 알제리를 여행한다. 그러나 이 해는 어머니가 죽고 마들렌과의 결혼을 하는 해이기도 했다. 긴 신혼여행(프랑스어로 白결혼이라고 불리는 몸에 손을 대지않은 신혼여행이었다)에서 돌아 온 그는 오자마자 라 로크-베냐르라는 곳의 시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897년 "지상의 음식", 1902년에 "배덕자"를 발표하고 1909년에 문학잡지 "신프랑스 평론"지를 동료문인들과 창간하고 "좁은문"을 발표했다.
지상의 음식은 산문체 시의 형식으로 쓰여진 작품으로 나타나엘이라는 가상의 제자에게 자유와 욕망에로의 해방을 설파하고 있다. “가족, 행복의 질투어린 소유..너를 묶어두는 모든것으로 부터 탈출하라, 떠나라!” 여기에서 지드가 사용하는 마법의 언어는 단연 열정(faveur)이다. “너를 부리려는 세상으로 부터, 남으로 부터 자유하라. 나는 너에게 열정을 가르치노라” 이 멧세지와 함께 이 책은 초판판매가 1650권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 젊은이들에게 컬트북이 되기도 했다.
배덕자 역시 역사가인 미쉘이 결핵 치료차 부인과 함께 튜니지로 간뒤 자신의 과거를 부인함으로써 변신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말하자면 과거의 도덕, 신앙, 영적인것에 대한 우위로부터 탈출하여 생의 원초적인 본능을 찿아가는 “역순례”과정을 그리고 있는것이다.
하지만 지드가 진정으로 넒은 독자층에 일려진것은 이미 40세에 이른 지드가 "좁은문"를 썼을때였다. 제롬과 외사촌 누이 알리사의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 그들의 고뇌와 희생…서정적 문체에 주인공들의 청순함이 어필됨으로써 처음으로 그는 작품 좁은문으로 자비출판 형식을 벗어나게 되었다. 역설적으로 좁은문 덕택에 지드는 넒은문으로 들어가게된셈이 된것이다. 하지만 1914년에는 카톨릭을 통렬히 비판한 작품 "바티칸의 지하실"을 썻고 이로써 오래전부터 친구이던 폴 클로델과는 결별하게 되었다.
일차대전중 지드는 벨기에 피난민들을 위해 일했다. 신약성서 복음의 의미에 대해 진지한 회의를 시작하기 시작한것, 지드 나이 47세때 17살된 막 알레그레와 동성애적 애정관계를 갖게 된것도 일차대전중의 사건들이었다.
우리가 가장 잘 아는 작품"전원 교향곡"은 전쟁이 끝나던 해 1919년에 발표된다. “벌써 3일간 쉬지않고 눈이 내렸다. 길은 다 막혀버렸다. 때문에 한달이면 두번가서 예배를 인도하곤 하던 R. 마을에 갈수없었다. 이날 아침 브레빈(Brevine)의 작은 예배당에는 겨우 30여명의 신도들이 모였을 뿐이었다….” 눈에 막혀 집에 있을수 밖에 없게된 목사는 자신이 어떻게 게르트뤼드를 만나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2년 반년쯤..내가 쇼드퐁(Chaux-de-Fond)에서 돌아 왔을때….” 이렇게 눈과 더불어 시작하는 이 작품은 1946년에 Jean Delannoy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전원 교향곡의 무대가 되고 있는 스위스 지방의 지도)
우리의 기억을 채우고 있는 지드는 1919년의 전원 교향곡과 함께 사라진다. 하지만 우리는 전원 교향곡 이후 지드는 31년을 더 살았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좁은 문”, “전원 교향곡”은 오히려 그의 前期작품에 속한다는 점이다. 정작 지드의 문학적 절정이 시야에 들어오고 그것이 노벨 문학상으로 까지 이어지는 최고의 시기는 전원 교향곡 너머에 놓여있다. 바로 이점에서 지드를 알려는 노력은 전원 교향곡 이후에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전후 지드의 작품활동은 활발하게 이어진다. 코리동(20), “도스토예프스키”(1923), "화폐위조자"(25), 한알의 밀알이 죽지 않으면(26)이 발표되었다. ‘코리동’은 소크라테스 대화형식을 빌려 동성애 편력을 고백하고 이를 변호한 문제작이었다. 이것도 당시 충격이었지만 정작 또 한 차례의 충격은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강연에서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지드에게 문학의 본질을 열어 보여준 매우 중요한 작가였다. 그가 도스예프스키에 대한 강연에서 모든 예술에는 악마성이 존재한다라고 선언했을때 청중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뿐만 아니라 비평가들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 발언을 통해 지드는 악마성과 지옥의 의미를 진지하게 인간성과 천당에 대비함으로써 현실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고저 하는 희망을 피력한것이었다.
화폐위조자는 지드문학에서 유일하게 진정한 소설이라고 불릴수있는 작품으로써(지드 스스로 이 작품을 자신의 첫 소설이라고 부르고 있다) 문학적으로 가장 높이 평가받는 작품이다.(혹시 번역되어 있는지 모르겠네요..). 일종의 청소년 성장소설로써 여기에는 모험, 범죄, 도덕, 배움등의 과정이 서로 어울려가며 그려져 가고있다. 더욱 중요한점은 이 소설은 전통적인 사실주의 기법을 거부하고, 일기, 편지, 여러 목소리들을 복합적으로 참여시키는 소설기법을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처음에는 비평가들의 유보에 부딪쳤지만 오늘날에는 프로스트의 작품과 더불어 20세기 프랑스 현대문학을 연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27년과 28년에는 각각 아프리카 콩고와 챠드 여행기가 발표된다. 이를 통해 그는 식민지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30년대에 지드는 사회적 활동속에서 공산주의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1936년에 쏘련을 여행하고 돌아온 그는 소비에트의 시스템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담은 두권의 책 ”쏘련에서의 귀환” (Retour de l'U.R.S.S.) 과 «다시한번 쓴 쏘련에서의 나의 귀환 »(Retouches à mon Retour de l'U.R.S.S)를 썻다. 이것은 곧 공산주의에 대한 결별선언이었다.
30년대에 특기할만한 사항으로는 지드가 아내의 죽음(1938)을 겪으면서 일기를 출판하기 시작했다는점이다. 일기는 지드에게 적어도 그가 14살때부터 중요한 문학수단이었던것이다. 지드는 51년에 사망하기 전까지 49년까지의 일기를 출판하였다. 지드문학에서 일기가 차지하는 위치는 결코 주변적이거나 단지 보충적인것이 아니다. 아니..실로 핵심적이다. 오히려 지드문학 전체를 일종의 일기로 보려는 평론도 존재할 정도이다. 그만큼 지드는 일기에서 자신과 외부세계에 대한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관찰의 묘를 보여주고 있는것이다. 38년에는 쇼팡에 대해 쓰기도 했다.
이차대전중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북 아프리카에서 보낸다. 전후 46년에는 문학적 유언이라고 할수있는 테제가 발표된다. 그의 모든 문학적 업적은 드디어 1947년에 78세에 이른 지드가 노벨 문학상을 받음으로써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된다.
노벨상 이후 노년에도 그의 작업은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죽음에 다가서고 있었다. 그가 죽기 일년전 그의 일기(1942-1949)와 참여문학(Littérature engagée)이 출판되었다.
그는 1951년 2월 19일 그가 오랫동안 살던 파리 뤼 바노(Rue Vaneau)의 집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는 마지막 말로써는: 나의 문장들이 문법적으로 불완전하지나 않은지 두렵다, 그것은 항상 이성적인것과 그렇치 못한것 사이의 싸움이었다"라는 말을 남겼고 마지막 쓴 문장으로는: 하늘에서의 내 자리가 덜 아름다운 오로라를 발견하게 하는 위치이어서는 안될텐데" 라는 글을 남겼다(세상에..죽기전 걱정이 이 정도 아름다울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는 처가의 공동묘지인 쿠르빌에 묻힌다.
(지드가 28년에서 51년 죽을때까지 살았던 1 bis rue Vaneau에 있는 파리의 아파트)
3) 지드문학의 의미
이 글을 읽는 분들의 인내심도 한계가 있을수 있기 때문에 모든 작품을 하나 하나 소개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이제까지 소개한 지드의 삶과 작품을 근거로 우리는 지드에 관해 나름의 평가를 내릴수 있을것이다. 지드는 한 인간으로써 누구나 그 자신이 스스로 유폐되어 있던 “존재의 운명”을 벗어날수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동성애처럼 자신이 긍정적으로 고백하고 받아 들인 운명이 있는가하면, 기독교 처럼 이에대해 저항하고 초극을 지향했음에도 결국 그 문학적 동기(좁은문, 한알의 밀알이 죽지 않으면, 돌아온 탕자, 지상의 양식등..)자체를 버릴수 없었던 세계가 있었다. 반면 그는 공산주의 이념을 과감하게 청산했고, 대신 인본주의적 도덕성의 실천에 지식인으로써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그는 단순한 도덕주의자는 아니었다. 그의 삶 그리고 그의 문학을 관통하는 화두는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발견한대로 악마성과 지옥 그리고 인간성과 천당 그 사이의 긴장과 갈등의 현실세계였다. 그러나 그는 이 해결을 종교적 구원에서 기대하지도 않았고 정치적 혁명에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기존질서, 현실의 규범으로 부터의 탈출, 자유를 추구했다.
이 점에서 우리는 그가 간길은 결코 넒은길은 아니었다고 말할수 있다. 그가 선택한 삶과 자유의 길은 좁은길이었다. 우리가 지드를 행해 가는 길도 아니..우리가 스스로 걸어야 할길도 여전히 좁은길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삶에서 할수있는 선택의 문 부터가 여전히 좁기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좁은 문-그것은 어쩌면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자신인지도 모르겠다.
Andre Gide, in 1891 at the time of the publication of his first book
- The Notebooks of Andre Walter.
앙드레 지드의 작품 세계
- <좁은 문> 외
/ 洪承完
너무나도 성스럽고 깨끗한 소녀 알리사와 제롬의 사랑은 문자 그대로 순결무구한 것이다. 알리사는 사촌동생인 제롬을 사랑하면서도 지상에서의 사랑을 피하고 남몰래 죽어간다. 알리사의 그러한 행위에는 불륜한 어머니로 인해 괴로워하면서도 제롬을 마음속으로 사랑하는 등 몇 가지의 원인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다운 원인은 그녀의 신비적인 금욕주의에 있다.
자그마한 예배당에서 목사가 엄숙한 목소리로 힘을 다하여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는 성구를 낭송한다. 제롬의 알리사에 대한 사랑의 결정 작용이 시작되는 것이다. 알리사의 명상에 잠긴 눈초리가 제롬에게는 성녀가 짓는 명상의 표시이며, 아무렇지도 않은 그녀의 몸짓도 그에게는 <덕>의 완성을 지표로 삼는 노력의 증거로 여겨지는 것이다. 제롬은 알리사를 단테의 베아트리체로 견주어 미화시키고 있는 셈이다.
제롬의 노력의 목표는 오로지 알리사의 <덕>에 견줄 만한 청년이 되는 것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속세의 온갖 즐거움을 내버리고 성서에서 가르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괴로움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작품은 작가의 자전적인 요소가 짙은 것으로서, 장차 자기의 아내가 된 마늘렌느의 영상을 많이 엿보게 한다.
아무튼 이 작품의 여주인공 알리사는 천국에서의 영혼의 합일을 꿈꾸나, 그녀가 그런 생각을 품게 된 것은 단순히 어머니의 불륜을 목격한 절망감뿐만 아니라, 자기가 사랑하는 제롬을 자기 여동생 쥘리에뜨가 사모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 데서 자기 희생을 각오한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고행은 그녀에게는 너무나 벅찬 것이어서, 그녀는 마침내 <덕>과 <천국>과 <신>에 대한 신앙마저 잃고 요양원에서 짧은 패배의 생애를 마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연인을 읽고, 순애의 꿈이 깨어져 폐인이 되다시피 한 제롬에게 현실의 가정생활의 행복을 구축한 알리사의 여동생 쥘리에뜨가 "자아, 이제는 잠을 깨지 않으면 안 되요."하고 울면서 충고하기까지 이른다. 그러나 그 충고의 이면에는 신랄한 야유가 뒤섞여 있지 않겠는가. 앞에서 지적한 결정 작용이란 스탕달의 《연애론》에서의 결정작용을 가리키는 것이다.
현대의 모럴을 탐구한 위대한 지성
유럽이 위기에 처해 있던 시대, 바로 그 20세기 전반기에 유럽의 정신을 대표하는 작가 앙드레 지드(Andre Gide)는 1869년 프랑스 파리의 어느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파리 법과대학의 교수로서 남프랑스 출신의 캘빈파 신자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북프랑스 출신의 구교도인 카톨릭 신자였다. 이와 같이 그의 양친의 이질적인 성분은 지드의 성장과정에 있어서 그의 성격을 형성하는 데, 복잡성을 안겨 주었다. 양친이 지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상반되고 있다는 점은 곧 어떤 의미에서 모순을 띠고 있었다고 하겠다.
지드의 소년시절은 그가 51세 때인 1920년에 발표한 바 있는 《한 알의 밑알이 썩지 않으면 (Si le Grain ne meurt)》에서 솔직하게 묘사해 놓았다. 이것은 그의 자서전적인 작품으로, 그후 1926년에 증보판으로 완간되었다.
그가 11세 되던 1880년 , 아버지가 장결핵으로 사망하자 어머니 밑에서 엄격하기 그지없는 교육을 받았고. 그러기에 그는 가정의 분위기에 위화감마저 느꼈다. 그는 8세 때에 알사스 학원에 입학했으나 곧 휴학을 했고 그 후에도 몇 번인가 학교에 들락거렸다. 그는 병적인 겁쟁이였으며 한편으로는 성적인 본능이 조숙해서 이미 13세 때에는 사촌누인 마들렌느를 사랑하기에 이른다. 마들렌느가 어머니의 정사에 충격을 받고 번민하는 데 대해 그는 가련한 사모의 정을 바치게 된 것이다.
1887년에 알사스 학원 수사학 학급에 편입한 그는 그때 피에르 루이즈 (뒷날 시인이 됨)와 한반에서 친구가 되었다. 루이즈는 지드에게 문학에 대한 자극을 주었고, 지드 자신도 갑자기 문학열을 올리게 되었는데, 이때 지드의 나이 18세였다.
루이즈는 지드와 전혀 성격이 맞지 않는 기질의 청년이었으나, 그 당시 지드를 문학에 접촉시키는 구실을 했다. 학급에서는 지드와 르이즈가 서로 수위를 다툴 정도로 둘 다 성적이 뛰어나서 경쟁이 심하기도 했다. 바로 지드가 처녀작 ≪앙드레 왈테르의 수기(Les Cqhieys d' Andre Walter)》에 손을 대게 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이 무렵에 지드는 앙누시 호반에서 피아노에 앉아 쇼팽과 슈만의 곡을 쳐보면서 서정적인 고독에 잠겨 이 작품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작품은 현실에서 차단되어 버린 청춘의 꿈이며, 청년 지드의 뇌리에 끊임없이 일고 있는 인생의 문제, 이를테면 정신과 육체의 상극, 신교주의와 해방의 욕구, 행복의 탐구와 안일을 벗어난 파멸에 대한 의지 등, 아직까지는 뚜렷한 형태를 이루지 못한 채 혼돈 속에 묘사되어 있다. 여하간 온갖 것이 분열된 자아의 대화이며, 격한 긴장에 사로잡혀 있는 등 이 대화는 현실에 대응하지 못하는 가공의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 작품은 쉽게 말해서 사촌누이 마들렌느에 대한 사랑을 주축으로 해서, 그 당시에 자신이 번민하고 있던 영혼과 육체의 다툼과 형이상학적인 번민을 일기체로 쓴 것이다. 그런데 현실의 연인 마들렌느는 이 작품에서, 꿈에서 보는 환상의 아가씨와 전혀 별개의 인간인 것이다. 즉 사촌누이 마들렌느는 이 작품을 읽은 다음, 지드의 구혼을 거절했을 뿐 아니라 두 사람 사이의 편지 왕래 마저 끊어버린 정도였다.
이러한 작품을 낳게 한 이면을 좀더 쉽게 살펴본다면, 그의 신교도적인 소년시대의 인습적인 좁은 환경, 그리고 인생이라는 바다를 향해서 힘차게 노를 저어 나가야 할 때 부딪친 비장한 투쟁 따위가 큰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아무튼 여성들의 사랑의 세계에서만 자랐던, 연약하고 열정적이고 병적인 소년 지드는 일찍부터 양심의 괴로움을 받았고, 욕망과 후회와 가책 속에서 내성적이고도 명상적인 소년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앞에서도 말 한 것처럼 음악을 즐겨했고, 또한 독서와 식물학, 성서 같은 것을 벗삼아 호숫가와 숲 속과 언덕을 누비면서 홀로 미치지 못하는 젊음을 불사르곤 했다. 더구나 몸이 약했기 때문에 그는 신경병적인 괴로움을 받았으면서, 관능적인 정열과 신비로운 풍경을 조화시켜 보려고 무한히 애썼다.
그의 처녀작은 마들렌느를 크게 실망케 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작품이 계기가 되어 고답파 또는 상징파의 문인과 사귀게 되었다. 물론 대부분의 문인들이 이 작품을 묵살해 버린 것은 사실이었으나, 상징과 시인 말라르메를 사귀게 되어, 말라르메가 이끄는 <화요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 당시 말라르메는 새로운 문학을 간절히 탐구하고 있었던 만큼, 청년 지드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을 만하다.
지드는 이러한 자신의 상징주의 시대에, 즉1891년부터 97년 사이에 《나르시스론(Le Traite du Narcisse)》를 썼다. 《나르시스론》은 이 무렵 지드의 심정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그는 일찍부터 눈으로 살필 수 있는 이른바 가시계에 매혹되어 자기 자신을 깊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작품에서 지드는 현상을 통해 실존을 정열적으로 탐구하는 자신을 표현하려 했던 것이다.
바로 이 무렵에 지드는 그리스도교 문명이 휩쓴 세계, 즉 유럽을 벗어나고 싶다는 욕구가 강렬해졌다. 그래서 뜨거운 태양 아래 살아본다면 새로운 생명이 소생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하간 퓨리탄의 도덕적인 구속에 지친 그는 그러한 생각에서 1893년 10월 친구인 뿔 아벨 로랑스와 함께 알제리를 향해서 여행을 떠났다. 사막, 낙타, 맹렬한 열기, 토인 소년 등등 이 모든 것이 욕망에 굶주렸던 지드의 욕정을 채워 주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여행 중에 병에 걸려서 정양을 하다가 돌아와야 했다.
그는 1895년에 ≪팔뤼드(paludes)≫를 썼다. 이해 5월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또한 그의 인생의 새로운 반려자로서 사촌누이인 두 살 손위의 마들렌느와 결혼했다. 엄격하기 그지없는 어머니를 잃자, 그는 해방감을 느끼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지주를 잃은 것에 당황한 나머지, 어머니 대신으로 마들렌느에게 다시 구혼을 해서 이윽고 결혼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그의 특이한 양면성을 바탕 삼은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양면성의 주인공은 한쪽의 극에 고정될 수는 없는 법이다. 시계추는 커다랗게 양쪽으로 진동하면서 움직였고, 그는 결혼을 하자 아내를 거느리고 다시 이교도의 터전인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아무튼 그해에 발표된 ≪팔뤼드≫의 주인공은 모든 인간과 사건에서 떠나서 하루종일 연못가에서 벌레를 낚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서 주인공은 한결같은 넋두리를 한다.
"인생은 이다지도 창백하고, 권태롭고, 산문적이냐? 세계의 상태는 권태다. 탈출, 탈출만이 유일한 의무이다. 떠나가자! 어디든지 어두운 동굴 속에서 눈뜰 줄 모르는 장님에게 비하면 어떠한 세계라도 가치가 있다."
이러한 권태감 속에서 그는 남부 이탈리아를 거쳐 아프리카 땅으로 갔다. 바로 그 여행에서 쓴 것이 《지상의 양식
"나따니엘아. 나의 노래를 부른 다음에는 모두 버려버려라. 지상에는 우리가 붙잡아야 할 아무것도 없었다. 사랑해야할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우리는 언제고 자유롭게 출발할 수 있는 마음만을 갖자. 지식이라는 것은 일체의 것을 메는 것이며, 특히 소유욕을 버리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기로 하자!"
그런가 하면 아프리카 땅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 지드에게 어떠한 문학적 주제가 제시되었던가. 그는 자아의식에서가 아니라, 자아의 신앙을 노래하기에 이르렀으니, 그것이 곧 《배덕자(L'lmmoraliste)》(1902)이다. 생명의 충실을 희구하여 도덕·인용·가정에 반역하고, 자아주의(自我主義)를 끝까지 밀고 나가려고 했다. 주인공 미셸은 소생(蘇生)의 비방을 병든 아내에게 알려주려고 하지 않고, 순종만 하는 그녀를 작열하는 아프리카 땅으로 끌고 다니다가 죽음에 이르게 하고 만다. 그러나 아내의 죽음은 그에게 있어서 참다운 해방이며 자유였다는 말인가? 그의 마음의 고향은 아내로 화신한 유럽이 아니고, 정말 아프리카였다는 말인가? "여기서 끌어내 주게"하고 외치는 미셸은 아내의 죽음에 의해서 얻어진 자유에 결국 괴로워하는 것이다.
《지상의 양식》에서의 생의 찬가는 《배덕자》의 패배의 비탄으로 끝나고, 1903년에서부터 1908년경까지 지드에게는 슬럼프에 빠진 시기가 계속되었다. 그리나 마침내 1909년, 지드가 슬럼프에 벗어나는 새로운 전기가 이룩되었다. 즉 그는 그 해에 《좁은 문(La Porte etroite)》을 발표해서 지금까지의 침체에서 벗어나게 된다. 《좁은 문》은 《배덕자》의 음화(陰畵)이다. 여주인공 알리사는 미셸과는 반대로 청교도적 신비주의를 신봉하고 자기희생의 계율 속에 살려고 한다. 그녀는 제롬에 대한 사랑을 거절하고 신의 사랑 속에서 마음의 평안을 찾으려고 했으나, 오히려 신마저 잃게 되는 위기에 이르러 자연으로부터 복수당하고 만다. 여기에도 패배가 있다. 즉 지드는 제롬도 알리사도 아니었다. 그의 눈은 작품의 배후로 후퇴해서 문제의 행선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제 시대가 큰 변동을 일으킨다. 즉 제1차 세계대전의 위기가 닥친 것이다. 1918년, 제 1차 세계대전이 폭발한 이 해에 《교황청의 지하도(Les Caves du Vaticon)》가 출간되어 지드는 새로운 국면을 타개했다. 이 새로운 작품은 지드의 비극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었다. 즉, 만약 인간에게 순수한 자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떠한 도덕에도 구속되지 않는 무동기의 무상의 행위리라. 라프까디오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메데를 기차 밖으로 밀어뜨려 죽이듯이, 마침내 지드는 온갖 도덕적 구속을 깨뜨리고 만 것이다. 말기 증세를 보이고 있던 19세기적 합리주의에 이 작품은 새로운 돌파구를 열었으며, 이윽고 세계대전 후 문학의 복음서가 되기에 이르렀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의 문학은 1919년에 《전원교향악(La Symphonie pastorale)》과 1926년에 그의 자서전 《한 알의 밀알이 썩지 않으면》을 발표한 뒤, 1926년에 그가 말하는 로망(소설)을 묘사하기에 이른다. 주관이라는 시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종래의 작품에서 그는 현실의 객관적인 인식으로 옮겨 보려는 시도로서 자기 스스로 <로망>이라고 정의한 작품 《사전꾼들(Les Faux Monnayeurs)》를 출판한다. 이 작품은 당연한 것이지만, 19세기의 사실주의 소설처럼 단선적이지도 직선적이지도 않다. 인물과 인물의 우연한 접촉에 의해서 이야기의 줄거리는 무한히 늘어나가고, 확산되어 작품의 양상을 변하게 하는 것이다. 아무튼 이 작품을 통해서 지드는 유한한 개체를 전체에 참여시키려고 하는 윤리적인 간접적 표명을 하고 있다.
1925년에 《사전꾼들》을 탈고하여 이듬해에 출판했는데, 그는 1925년, 탈고하자 곧 콩코로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이제는 지난날처럼 자연의 미에 도취하거나 하지 않고, 식민지에 대한 예리한 비판을 가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 여행을 통해서 프랑스의 식민지 정책에 희생되고 있는 원주민들의 상태를 보고, 그것을 크게 사회문제화시켰다. 그러기에 그가 쓴 《콩고 기행(Voyage au Congo)》이 큰 여론을 불러일으켰으니 그것은 1927년의 일이었다.
1936년 6월에 지드는 병상의 고리끼를 문병하기 위해서 소련으로 갔고 돌아온 뒤에는 곧 《소련 기행》을 발표했다. 이것은 지드의 소련에 대한 비판으로,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는 지드를 격심하게 비난하는 반대문을 실었다.
그의 나이 69세 되는 1938년, 마늘렌느 부인이 세상을 떠났고, 머지않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나찌 독일에 의해 파리가 점령당하고 말았다. 그는 남프랑스 깐느 근처의 한 촌락에 한때 숨어 살다가 1942년 5월에 마르세이유에서 북아프리카로 떠나갔다. 그는 그러한 피난생활 속에서 분노와 슬픔의 나날을 보냈고,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파리에 돌아왔다. 그러나 그가 귀환했을 때는 이미 그는 74세의 고령으로서 그의 시대는 끝나 있었으며, 그의 가까운 벗인 폴 발레리도 그 해에 그 위대한 생애를 마쳤다.
"나는 지상의 좋은 것을 다 맛보았다. 내 다음 세대가 나의 덕분에 사람들이 보다 행복하고 보다 훌륭하고 보다 자유롭게 된다는 것을 인정하면, 내 마음은 아늑해진다. 미래의 인류의 복지를 위해 나는 나의 일을 하였다. 나는 나의 생애를 다했다."
이렇게 지드는 1946년에 간행한 희곡 《테제(Thesee)》에서 유언이 될 만한 말을 했다.
1947년에 옥스퍼드 대학에서 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고, 노벨문학상이 그의 전작품에 대해 수여되었다. 그러나 만년이 되어서도 그는 붓을 놓지 않고 집필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6일 전까지도 《아멘(Amen)》이라는 작품을 썼을 정도로 노익장이었다. 드디어 1951년 2월 19일에 그는 파리의 자택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난다.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그는 20세기의 위대한 지성의 숨결을 이 세상에 전지고 있었다.
Andre Gide from the back cover of the first American edition of Corydon.
앙드레 지드의 문학과 사상
Gide는 법학교수인 아버지와 프로테스탄트인 엄격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1세에 아버지를 여읜 그는 편모 슬하에서 세심하면서도 많은 구속이 뒤따르는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는 한편, 병약했던 까닭에 대부분의 수업을 가정교사 밑에서 쌓았다. 그의 문학에의 취미가 적극적으로 표현된 것은 Mallarme의 <화요회>에 출입하면서 동인지를 편집하고 문인들과 교제하면서부터이다.
그는 1891년에 처녀작인 「Les Chaiers d'Andre Walter」와, Symbolisme 미학에 대한 모색과 그것으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한 「Traite du Narcisse」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청년기의 불안과 정신적 고뇌의 갈등이 점철되어 있는 그의 초기작들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22세때 폐결핵으로 인해 요양차 떠난 아프리카 여행은 그에게 자연에 눈뜨게 함으로써 태양과 같은 타오르는 생명력과 관능을 찬미하게 되는 정신의 전환기를 가져다 준다.
「Les Nourritures terrestres」(1897)는 그와 같은 전환의 소산으로, 기성의 도덕과 질서에 대한 도전과 욕망의 충족에 대한 추구를 보여 준다. 그러나 Gide는 육체와 정신의 해방과 자유를 생각함과 동시에 구속과 절제의 필요성을 또한 자각하고 있었던 까닭에 「L'Immoraliste」(1902)에서는 욕망의 한없는 추구에서 오는 정신의 타락과 파멸을, 그리고 「La Porte etroite」(1909), 「La Symphonie pastorale」(1919)과 같은 작품에서는 자기 통제의 고귀성과 한계, 그 필요성을 그림으로써 작가의 양면성을 보여 주게 된다.
이후, 그는 내면의 갈등에서 좀더 객관적 세계로 탐구의 방향을 돌리고 소설 형식에 있어서도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로 산출된 것이 바로 「Les Faux-Monnayeurs」(1926)인데, Gide 자신이 그 이전의 작품들은
그는 다시 아프리카로 떠나 그곳에서의 체험을 토대로 냉혹한 식민정책을 규탄하는 「Voyage au Congo」(1927)를 발표하는데 이것을 기점으로 사회 참여와 행동의 시기가 전재괸다. 그는 Malraux와 함께 세계평화 회의, 반독재 운동 등에 가담하면서 점차 코뮈니즘으로 기우나, 소련의 방문을 계기로 또다시 기만과 노예정치의 탄압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을 「Retour de l'U.R.S.S.」(1936)를 통하여 고발한다. 그러나 정치적인 참여와 더불어 그는 창작생활의 공백기를 맞이하게 되며, 말년에 이르러 그의 사상적 유언이라 할 만한 「Interview imaginaires」(1943), 「Thesee」(1946)를 발표하고 1947년 노벨상을 수상한다.
이러한 모든 편력을 통하여 그는 전통적인 종교와 모랄의 구속과 타율성을 거부하고 진정한 모랄의 탐색을 위한 고통스럽고 충실한 작업을 통하여 새로운 정신적 풍토를 만드는 데 기여하였다는 평가를 받기에 이른다. 1919년에 발표된 「La Symphonie pastorale」은 한 눈 먼 소녀를 기르면서 자신의 신분과 의무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애정을 떨쳐 보릴 수 없어 번민하는 목사를 통해 일체의 허위나 안이성을 배제하기 위한 극기와 <성실성 sincerite>의 문제를 보여준다.
A painting by Theo van Rysselberghe, husband of Gide's long time friend Mme van Rysselberghe. The painting is titled "The Reading (Emile Verhaeren and Friends)", 1903. Standing from left to right: Felix Feneon, Henri Gheon. Seated, left to right: Feliz Le Dantec, Emile Verhaeren, Francis Viele-Griffen, Henri-Edmond Cross, Andre Gide, Maurice Maeterlinck.
지드와 기독교
지드는 <교황청의 지하도>에서, 소티의 형식으 빌어 가톨릭 신자들의 맹목적인 신앙과 교화 자체가 보여주는 당파적 정책의 추한 모습과 그 기만성을 노출시켜 묘사하였다. 과감하게 가톨리시즘에 반항하여 신의 존재와 성직자의 위치가 무관함을 증명하여 신에 대한 관념을 인간의 마음 속에 환기시키고자 했다. 지드는 "나는 가톨릭교도도 아니거니와 신교도도 아니다. 그저 단순한 그리스도교도이다"라고 말하고, 교회의 교의에 구애됨이 없이 오로지 그리스도교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지드와 문인동료
지드는 자크 코포, 슐룅베르제와 함께
사회 문제에 눈뜬 지드
그는 <콩고 기행>에서 마르크 알레그레와 콩고 여행 중 가혹한 프랑스 식민 정책에 희생되고 있는 불쌍한 토착민의 비참한 상태를 발견하고 이를 고발했다. 이후부터 그는 허위, 부정에 대한 증오, 피압박자에 대한 사랑, 진실 추구의 욕구 등의 정서적 태도를 간직했다. 이로써 지드는 "현대의 양심"이라 불렸다.
공산주의와 지드
1932년에는 공산주의로 전향했다. 그는 1)개인주의 모랄의 필연적인 진전으로, "참으로 이해된 개인주의는 공동체에 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적 개인이 자유로이 살 수 있는 세계를 공산주의에서 찾았다. 2)현재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발하여, 공산주의는 결국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반으로부터 생긴 것이라고 보았다. 만약 기독교가 그리스도교의 정신을 철저하게 살렸더라면 공산주의의 존재 이유는 없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소련 기행>에서 소련의 현실 정치와 날카롭게 대립하여 소련을 강하게 자극했다.
앙드레 지드의 작품 분류
1)모랄리스트로서 : 인간의 발견, 즉 인간의 본성과 능력과 그 운명의 탐구에 평생의 정열을 쏟았다. <문학과 도덕에 관한 몇 가지 고찰>, <프로메테우스>, <앙젤에게 부치는 편지>, <프레텍스트>, <신 프레텍스트>, <아이즈 궁전의 추억>, <가상 회견기>, <일기>
등을 통해 인간의 복합성을 역설했다.
2)평론가로서 : 그가 평론을 쓴 것은 독자로 하여금 빨리 그리고 충실히 자신의 사상을 이해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독창적이고 공감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도스토예프스키론>, <몽테뉴론>, <오스카 와일드론>, <쇼팡 주해> 등.
3)희곡 작가로서 : 별로 이렇다할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캉돌 왕>, <사윌>, <오이디푸스> 등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내용을 고대 우화에서 발췌, 각색한 것이 대부분이다.
4)소설가로서
레시 : 비교적 분량이 적고 간결한 것으로 감정적이거나 정신적인 드라마를 그 내용으로 한다. 보잘것없는 단역들과 함께 극히 소수의 주인공을 등장시켜 이 주인공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어떤 모형에 대하여 나레이터 형식으로 때로는 내면적이고 때로는 동정적인 분석을 가하면서 사건을 설명한다. 긴 독백을 삽입하거나 일기의 형식(<전원 교향악>)을 구사하기도 한다. 완만하면서도 예리한 감정 분석을 도압ㄴ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은 심리 소설의 계열에 속한다.
소티 : 본래는 중세 소극(笑劇)의 형식이었던 소티는 지드에 와서는 경쾌하고 익살맞으며 의식적으로 희극적인 레시의 자의적인 형식으로 변모하였다. 이 형식을 빌어 인간과 인생에 대한 견해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팔뤼드>, <사슬 풀린 프로메테우스>가 대표작이다. <교황청의 지하도>에서는 여러 형식을 혼합하여 그 속에 익살과 풍자와 모험의 요소를 담고 있다.
소설 : <사전꾼>에서는 소설의 총화라고 볼 수 있는 형식으로 발전시켰다. 다수의 인물을 등장시키는 등 여러 가지 기법상의 문제를 다루는 동시에 인생의 다양성과 당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던 사상들을 취급했다.
지드 평가
지드의 작품은 어느 것이나 인간성의 자유를 찾아 방황한, 그 순례의 길 위에 세워진 도표이다. 시대와 함께 괴로워하고 시대와 함께 성장하는 무한의 미완성으로, 따라서 고정된, 발전 없는 완성의 적이다.
1947년 노벨 문학상 수상 선정 이유도 "지드 씨는 광범위한, 그리고 예술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그 저작에 있어서 인간성의 제문제와 제상태를 두려움을 모르는 진리애와 심리학적 통찰력으로 제시했다"는 것이었다.
앙드레지드의 <지상의 양식>
Gide with his daughter Catherine in 1947.
인용문(알베르 카뮈의 <결혼, 여름>, 장 그르니에의 <섬>과 더불어 프랑스 3대 미문이라고 일컬어지는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 중에서)
"학교의 책상 앞에서, 조그만 걸상 위에 앉아 읽는 책이 있다.
거닐며 읽는 책도 있고(책의 크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어떤 것은 숲속에서, 어떤 것은 벌판에서 읽기에 알맞다.
그리하여 시세롱은 말하였다 - "그들은 우리들과 더불어 전원에 있다"고.
마차 속에서 읽는 책도 있고, 헛간 속 꼴 위에 누워 읽는 것도 있다
사람에게 넋이 있다고 믿게 하기 위한 책도 있으며,
넋을 절망케 하기 위한 책도 있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도 있고, 신에게 다다를 수 없게 하는 것도 있다.
개인의 서고 속에서밖에는 허용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권위 있는 많은 비평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은 책들도 있다.
양봉에 관한 이야기만 씌어 있어서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 전문적이라고 생각되는 책도 있고,
자연에 관한 이야기가 어떻게 많던지 읽고 나면 산보할 맛이 없어지는 책도 있다.
점잖은 어른들에게는 멸시를 받지만 어린이들을 열광케하는 책들도 있다.
사화집이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무엇에 관해서나 명문을 모아놓은 것도 있다.
인생을 사랑하게 하여 주려는 책들도 있고,
쓰고 난 뒤에 저자가 자살했다는 책도 있다.
증오의 씨를 뿌리고 뿌린 것을 스스로 거두는 책들도 있다.
유혈이 넘치고 그지없이 자비로와 읽을 때 찬란하게 빛나는 듯한 것도 있고
우리보다 순결하며 우리보다 낫게 산 형제들처럼 사랑하게 되는 것들,
이상한 말들로 씌어져 있어서 많이 연구하고도 이해할 수 없는 책들도 있다.
나타나엘, 모든 책들을 언제 우리는 불태워 버리게 될 것인가!
너푼짜리도 못되는 책들이 있는가 하면 엄청나게 값진 책들도 있다
왕과 왕후의 이야기를 하는 책들도 있고,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있다.
정오의 살랑거리는 나뭇잎들보다도 더 부드러운 말로 된 책들도 있다.
장이 파트모스란 섬에서 쥐처럼 먹었다는 책이지만,
나는 차라리 나무딸기가 좋아.
그 책 때문에 그의 오장육부는 쓰디쓴 맛으로 가득히 차서 결국은 많은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나타나엘, 모든 책을 언제 우리는 불살라버리게 될 것이냐!"
이 작품은 한 마디로 말한다면 소생된 생명에 대한 광열적인 찬가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끊임없는 생에 대한 탐구이며 발굴이며 재확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생명이 기껏 일상적인 인습에 얽매인 채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수록 이 <지상의 양식>은 새로운 자기 세계에 대한 삽질을 스스로 가눌 수 있도록 하는 거대한 힘을 우리에게 부여해주고 있다.
작가 스스로가 밝혔듯이 이 책은 "도망과 해방"의 안내서이다. 지드는 1927년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지상의 양식>은 병자가 쓴 책이 아니다. 적어도 회복기의 환자, 병이 나은 사람-병이 들었던 자가 쓴 책이다. 이 책 속에 있는 서정에는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했던 것으로서, 생을 껴안는 자의 과격성이 있다.
또 한 마디. 어떤 사람들은 이 책에서 다만 욕망과 본능의 예찬밖에 볼 줄을 모른다. 혹은 보고자 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에게는 좀 짧은 견해라고 생각된다. 이 책을 다시 펼쳐들 때 내가 거기에서 보는 것은 그보다도 헐벗음의 옹호이다.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을 버리고도 내가 그대로 간직한 것이요, 바로 그것에 나는 여전히 충실한 채로 있다. 그리고 이 문제에 관해서는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지만 내가 그 뒤, 복음서의 교리를 따라 자기 멸각 속에 가장 완전한 자기 완성, 가장 드높은 욕구, 그리고 행복의 가장 제한 없는 가능성을 발견하기에 이른 것도 실로 그 헐벗음의 덕분이었다."
"나의 책을 던져버려라. 그것은 인생에 대하여 취할 수 있는 수천의 태도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대 자신의 태도를 찾아라. 남이라도 그대와 마찬가지로 잘할 수 있었을 일이라면 하지 말라. 남이 그대와 마찬가지로 훌륭히 말할 수 있었을 것이라면, 말하지 말라.
그대와 마찬가지로 남이 쓸 수 있는 것, 그것은 쓰지 말라. 그대 자신 속에서가 아니고는 아무 데도 없다고 느껴지는 것 외에는 집착하지 말라. 그리고 극성스럽게 또는 참을성 있게, 아아!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존재를 스스로 창조하라."(<지상의 양식> 마지막 구절)
글 출처: http://www.france.co.kr/literature/gide.htm
사진 출처: http://www.andregid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