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1542-1616)는 미카와쿠니(三河國:愛智縣)의 작은 다이묘(大名)였지만, 점차 세력을 길러 히데요시가 죽자 1600년에 세키가하라 전투(關が原の戰い)에서 도요토미家를 제압, 정이대장군(1603)이 되어 에도(江戶:지금의 東京府)에 막부를 열고, 그 후 약 260년간을 에도시대(江戶時代:1603-1867)라 한다. 에도막부는 전국의 약 1/4에 해당하는 넓은 영지(領地)외에도 교토(京都), 오오사카(大坂), 나가사키(長崎) 등의 주요한 도시를 직접 지배했다. 또한 도쿠가와 일족과 이전부터의 가신(家臣:후다이 다이묘)에게는 에도에 가까운 영지를,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가신이 된 자(토자마 다이묘)에게는 東北, 四國, 九州 등의 먼 영지를 나누어 주었는데 이를 藩이라 한다. 막부는 전국의 藩을 지배하기 위해 간단하지만 실제적인 조직(幕府體制)를 만든다. 쇼군 아래에 중요한 정무를 도와줄 로우쥬우(老中)을 두고, 그 밑에 정무를 나누어 맡을 부교우(奉行)을 두었다. 또한 비상시에는 막부 최고의 관직인 타이로우(大老)를 두었다. 막부는 다이묘가 지켜야 할 규칙(武家諸法度)을 정하고, 위반하면 영지를 바꾸거나 몰수해 버리는 무거운 벌을 내렸다. 그러나 막부의 정책 범위내에서는 다이묘는 藩에서 독자적인 정치를 할 수 있었다. 막부는 그 외에 조정의 권한을 제한하고 사원(寺院)의 행동에도 간섭했다. 3대장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1604-1651)는 다이묘의 처자를 에도에 살게 하여, 다이묘가 1년마다 에도와 영지를 왔다갔다하게 하는 산킨코우타이(參勤交代)라고 하는 제도를 만들었는데, 이 제도에는 상당한 비용이 들었다. 또한 막부는 다이묘에게 전국의 임시 공사 등도 부담시켰다. 그래서 다이묘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고, 쇼군에게 반항할 힘도 갖을 수 없게 되었다. 막부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총 인구의 약 80%를 차지하고 있는 농민을 어떻게 지배하는가 였다. 그것은 농민으로부터 거둬들인 세금이 막부의 주된 제원이었기 때문이다. 막부와 각 藩은, 규칙을 정해 농민의 일상 생활을 세밀히 지시하고 제한했는데 '쌀은 세금으로 거둬들일 것이니, 많이 먹지 않도록 보리나 무 등을 썩어 먹을 것, 술이나 차를 사 마시지 말 것, 옷은 마(痲)나 무명 이외의 것을 입지 말 것' 등으로 하였다. 또한 5-6가구에서 5명을 1조로 뽑아, 납세와 방법의 책임을 공동으로 지게 했다. 막부는 소수의 무사가 많은 농민과 쵸오민(町人:평민)을 지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농공상(士農工商:武士, 農民, 職人, 商人)이라고 하는 신분제도를 만들고, 상인계급의 아래에는 다시 에타(菲人)이라는 천민계급을 두어 차별했다. 이러한 사회에서 최상위의 무사는 무예나 학문을 닦으며, 허리에는 두 자루의 칼을 차고, 농민과 평민(町人)들이 무례한 행동을 하면 그 자리에서 베어 죽일 수도 있게 되어 있었다(切り捨て御免:무사들의 면책 특권). 농민과 평민은 무사와 달리 성(姓)도 없고 다이묘의 행렬과 마주치면 길에 엎드려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안되었다(도게자:土下座). 이렇듯 상·하를 차별하는 생각은 무가사회에서는 주인과 게라이(家來)의 관계(주종관계)를, 가정내에서는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막부는 이러한 방법으로 막번체제(幕藩體制)를 튼튼히 하며, 봉건사회(封建社會)를 유지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해외항해를 허락하여 슈인센(朱印船:막부의 공인장을 받은 선박)으로 무역하는 일을 허가했다. 그리하여 많은 일본인이 필리핀, 타이, 베트남 등에 나아가 활약하여 니혼마치(日本町)를 만들었다. 타이에 갔떤 야마다 나가마사(山田長政:?-1630)가 활약했던 것도 이때였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기독교가 대단한 세력으로 확산되어 가는 것을 보고 위기감을 느껴, 기독교 금지령을 내렸고, 이어 3대장군 이에미쓰 시대에는 일본인의 해외 도항(渡航)과 해외 이주자의 귀국을 금지하였고 이 규칙을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했다. 이러한 때, 규수의 시마바라(島原:長崎縣)에서 농민이 무거운 세금과 기독교 금지에 반항하여 16살의 소년 아마쿠사시로 우토키사타(天草四郞時貞:1621-1638)을 필두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島原の亂 1637). 막부는 4개월 가깝게 걸린 이 난을 토벌한 후, 한층 더 기독교를 경계하게 된다. 그래서 기독교나 마리아 상의 그림을 밞게 하는 방법 등에 의해, 기독교가 어떻가 하는가를 살펴 기독교도 임이 밝혀지면 벌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에도 숨어서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없어지지 않았고, 막부의 탄압과 크리스챤의 순교가 계속 이어졌다. 막부는 1639년에 포루투갈 사람들이 일본에 오는 것을 금지하고, 기독교와 관계가 없는 네델란드 사람들과 중국인들에게만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에서 무역하는 것을 허가하게 된다. 이렇듯 국가가 외국과의 교역·교류 등을 금지하는 것을 쇄국이라 하며, 이로 인해 일본은 서양문명으로부터 고립되었으나 일본의 독자적인 문화나 산업은 발달을 하게 되었다. 에도막부가 전국을 지배하며 전쟁이 없는 세상이 되자, 농업은 한층 진보했다. 농민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전답을 넓히고, 농기구를 개량하거나, 작물의 종류를 늘리기도 하였다. 쌀 이외에도 목화·생사·유채기름 등 각지의 특산물을 재배하여 상인에게 팔았으며 비단·술·종이 등의 수공업도 발달했다. 산업의 발달과 산킨코우타이(參勤交代)의 영향으로 교통도 활발해져, 도로가 발달했고, 에도를 중심으로 東海道·中山道·甲州街道·奧州街道·日光街道라는 다섯 개의 길(五街道)이 나서, 街道에는 역참(宿場)이 생겼다. 막부는 군사상의 필요에 의해 각지의 통행인을 조사하는 세키쇼(關所)를 두고, 큰 강에는 다리를 놓지 않았다. 쌀이나 대량의 물자를 운반할 때는, 배가 주로 사용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항로가 발달했다. 세상이 평화롭게 되자 학문가 예술이 활발해졌다. 막부는 중국의 학문인 유학 특히 주자학을 보호하여, 막부에 학문소를 설치하고 무사의 자제들을 가르쳤다. 주자학은 상하의 질서를 지키는 일을 중시했기 때문에 막부의 정치에 딱 들어맞은 것이었다. 또한 쵸오닌(町人)도 읽기, 쓰기, 주판 등의 교육을 중시하게 되었다. 서민들의 교육은 처음엔 사원(寺院) 등에서 행해졌으나 차츰 각지에 데라코야(寺子屋)라고 하는 교육기관이 생겨나 승려나 낭인들의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고, 이는 점차 활발해져 메이지(明治)초까지 이어졌다. 5대장군 도쿠가와 쓰나요시(德川綱吉:1646-1709)때는 가미가타(上方:오오사카·교토지방)을 중심으로 쵸오닌들의 새로운 문화(元綠文化)가 탄생하게 되고, 오오사카의 쵸오닌이었던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1642-1693)는 元綠時代의 서민생활을 好色一代男, 世間胸算用 등의 소설로 써 냈다. 사이카쿠의 소설에는 화폐경제가 발달하여 돈이 인간생활을 지배하게 되었던 사회에서 돈에 운명을 좌우당하는 町人들의 모습과 당시의 개방적인 향락생활이 리얼하게 그려져 있다. 마쯔 오바쇼(宋尾芭蕉:1644-1694)는 古池や かわず飛びこむ 水の音와 같은 五七五, 합쳐서 열 일곱자로 된 詩인 하이쿠(俳句)를 대성시켰고 奧の細道와 같은 기행문도 남겼다. 에도시대가 시작된지 100년 정도가 지나 겐로쿠(元綠)때에 이르러 幕府의 제정이 어려워졌다. 이에 질이 나쁜 화폐를 자꾸 만들었고 결국 경제가 붕괴되어 물가가 오르고 사람들의 생 활이 어려워졌다. 그 중에서도 하급무사들은 영주로부터 받는 돈(俸祿)으로 생활이 어려워지자 상인들로부터 돈을 빌리거나 했으며 무사의 신분을 파는 사람도 나타났다. 18세기 전반에 8대장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1684-1751)는 막부의 제정을 바로세우기 위해 여러가지 개혁을 단행했다. 우선 새로운 논밭을 개간하여 세금으로서 연공미(年貢米) 징수를 계획하고 무사들에게는 사치를 금지시켜 근검·절약할 것을 명령했다. 경제가 점점 발달하고 화폐가 농촌에서도 쓰이게 되자 농민들 사이에 빈부의 차가 커지게 되고, 이에 농촌을 떠나 도시로 나오는 가난한 농민들이 많아졌다. 또, 냉해 등으로 대기근이 발생하여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등 농민들의 생활은 비참한 상태였다. 18세기 말에 막부는 다시 정치개혁을 하고자 무사의 근검 절약을 명하고 학문과 무예를 권장하면서 무사가 상인들로 빌린 돈을 갚지 않아도 좋다라고 하는 명령을 내기도 하며 무사들의 생활을 도우려 했으나, 이 개혁은 실패하고 만다. 막부의 제정이 어려워지자 농민들의 세금을 점점 무겁게 책정했고, 생활이 곤란했떤 농민들은 연공(年貢)을 가볍게 해 줄 것을 한슈(藩主)와 관리에게 요구하였고, 들어주지 않을 때는 힘으로 맞서 싸웠다. 막부는 이를 엄하게 금지했으나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이러한 농민반란이 간간히 일어났다. 가난한 쵸오닌(町人)들도 에도(江戶)와 오오사카(大阪)에서 쌀을 매점매석하여 가격을 높이는 쌀집이나 고리대금업을 하는 큰 상인들에 대항하여 집을 부수거나 불을 지르기도 하고 물건을 빼앗기도 했다. 전직 관리였던 오오시오 헤이하치로우(大鹽平八郞:1792-1837)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오오사카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1837) 곧 진압되었다. 이 난이 있은 후, 막부는 정치를 바로 세우고자 세 번째 개혁을 단행하며, 무사에게는 근검·절약을 명하고 대상인에게는 매점매석을 금지시켰으나 이 개혁도 역시 성공하지 못하고 만다. 겐로쿠(元綠)시대에 번성했던 쵸오닌문화는 간사이(關西)지방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으나 18세기 후반부터는 에도(江戶)를 중심으로 한 문화가 번성하게 된다. 이 시대 서민들의 읽을거리로서는 짓펜 샤잇쿠(十返舍一九:1765-1831)의 도우카이도우츄우히 자쿠리게(東海道中藤栗毛)가 해학적인 도우츄우키(道中記:여행일기)로 유명하다. 하이쿠(俳句)에서는 요사 부손(與謝蕪村:1716-1783)이 회화적이고도 아름다운 구(句)를 지어 냈고,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1763-1827)는 일상의 생활가운데에서의 소박하고 따뜻한 구(句)를 지었다. 회화에서는 우키요에(浮世繪)가 유행했는데 이는 가부키(歌舞技)나 스모(相撲), 유곽 등의 세계를 그린 그림을 말하며 에도시대 말엽이 되면 주된 소재가 풍경으로 옮겨가게 된다. 학문에서도 이제껏 유행하던 유학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에서 국학(國學)과 양학(洋學:서양학문) 등의 새로운 학문도 생겨난다. 국학은 일본의 고전을 연구하여 일본 본래의 사상을 추구하는 학문으로 국학자는 万葉集과 古事記를 실증적인 방법으로 연구했으며, 국학자들 중에는 古事記傳라는 古事記의 해설서를 쓴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1730-1801)이 유명하다. 국학은 후에 천황의 직접정치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존왕(尊王)사상과 외세를 물리치고자 하는 양이(攘夷)사상을 길러내어 막부말기에 일어난 존왕양이운동(尊王攘夷運動)의 추진력이 되었다. 서양의 학문과 지식은 쇄국을 하는 동안 막부가 무역을 허락한 네델란드로부터 전해진 것이기 때문에 란가쿠(蘭學)로 발달했으며 그중에서도 의학부문의 연구가 활발해 마에노 료우타쿠(前野良澤:1723-1803)와 쓰기다 겐바쿠(杉田玄白:1733-1817)는 네델란드의 해부학 서적을 번역하여 解體新書로 출판하였다. 또한 히라가 겐나이(平賀源內:1729-1779)는 일본 최초의 발전기를 제작했고, 이노우 다다타카(伊能忠敬:1745-1818)가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여 일본 전국의 실측지도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洋學에 의해 서양의 모습이 알려지자 막부의 쇄국정책과 양이사상에 반대하여 일본 개국을 주장하는 사람이 많아졌고 이러한 사상은 도막운동(倒幕運動)으로 이어져 갔다. 일본이 쇄국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 구미 각국은 근대 국가의 조직을 정비했다. 18세기 후반 영국은 산업혁명(産業革命)과 함께 세계로 진출하여 해외시장을 손에 넣었고, 미국도 아시아로 진출하려 하였다. 러시아가 일본과의 통상을 요구했었으나 막부는 쇄국을 계속했었고, 그 후 영국과 미국의 배들이 일본근해에 와서 물·식량 등을 요구하는 일이 잦아지자 막부는 더욱 더 신중해져 異國船打拂令(1825)을 내면서 개국론자들을 벌했다. 19세기 중엽에는 구미 각국이 일본의 개국을 강하게 요구하게 되고 1853년에는 미국의 사절 페리(1794-1858)가 군함 4척과 함께 우라가(浦賀:新奈川縣)에 왔는데 막부와 에도(江戶)사람들은 대포가 있는 군함에 놀라가 그것을 구로후네(黑船)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1854년 막부는 미국의 강한 요구를 받아들여 가나가와(新奈川:지금의 요코하마市)에서 미일화친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막부는 외국의 배가 시모다(下田:靜岡縣)와 하코다테(函館:北海道) 두 항구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1858년 미국의 총영사 하리스(1804-1878)가 시모다에 와서 미국과의 통상을 요구했고 막부는 조정, 다이묘들과 논의를 하였으나 반대에 부딪쳤다. 이 때 다이로우(大老)였던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1815-1860)가 조정의 허가를 받지 안흔 채,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으로 5개의 항구를 무역항으로 쓸 수 있도록 허락하였으나 여기에는 두 가지의 불평등한 내용이 있었는데 그 하나는 수입품에 대해 일본이 자유롭게 관세를 정할 권리(關稅自主權)가 인정되지 않은 점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외국인 일본에서 죄를 지어도 일본의 법률로 는 재판을 할 수 없다는 점(治外法權)이었다. 존왕론자(尊王論者)와 양이론자(攘夷論者)는 이이(井伊) 다이로우가 조정의 허가를 받지 않고 이러한 조약을 체결한 것을 강력히 비난했다. 결국 이이 다이로우는 그들 반대파를 사형에 처하거나 엄한 벌로 다스렸고 이에 반감을 품은 반대파들에 의해 에도죠우(江戶城)의 사쿠라다몬(樓田門) 근처에서 암살당하고 만다(1860). 개국으로 인해 무역이 시작되자 생사(生絲)나 차(茶)의 수출이 급격히 늘어 국내의 물자가 부족하게 되고, 물가가 올라 경제가 혼란스러워지자 이로 인해 하급무사와 서민생활이 한층 더 어려워졌다. 이러한 때 사쓰마(薩摩:鹿兒島縣)와 쵸우슈우(長州:山口縣)의 하급무사들 사이에 존왕론(尊王論)과 양이론(攘夷論)이 결부된 존왕양이(尊王攘夷)운동이 시작되었다. 막부는 조정과 협력하여 정치를 하려 하였으나 사쓰마와 쵸우슈우 등지의 존왕양이파(尊王攘夷派)는 더욱 더 자신들의 생각을 강화시켜 갔다. 결국, 사쓰마항은 영국의 함대와 쵸우슈우항은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델란드의 4개국 연합함대와 싸우게 되었고 이 전투에서 서양 열강의 힘을 알게 되자 자신들의 양이(攘夷)운동이 불가능함을 인정하게 된다. 이에 뙽?무사들은 막부를 쓰러뜨리고 천황중심의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여 존왕도막운동(尊王倒幕運動)을 추진, 새로운 정부를 세우기로 비밀리에 약속하고 영국에 접근하여 서양식의 군비(軍備)를 갖추었다. 한편 막부도 프랑스의 원조를 받아 군함과 무기를 사들여 군비를 정비하고, 두 차례에 걸쳐 쵸우슈우항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자 이에 뙽? 무사들은 무력으로 정부를 쓰러뜨릴 계획을 추진했다. 이 무렵, 정치와 경제의 혼란으로 인해 에도(江戶)와 오오사카(大阪)에서 대규모의 폭동과 파괴가 발생했고 전국적인 농민반란도 일어났다. 그러자 사회적인 불안으로부터 구원받고자 이세(伊勢) 신궁에 참배하는 일이 유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가운데 15대장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1837-1913)는 위기를 피하기 위해, 1867년 정권을 천황에게 반환하기로 자청했고 조정은 이를 받아들여 천황의 정치가 부활되었음을 선언했다. 그러나 신정부가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관직을 부여하지 않고 그의 영지를 조정이 걷어 들이기로 결정하자 막부측의 무사들이 불만을 품어 교토(京都)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며, 여기서 승리한 신정부군은 장군 요시노부를 치기 위해 에도로 향했다. 이 때 막부측의 가쯔카이 슈우(勝海舟:1823-1899)와 사쓰마·쵸우슈우측의 사이고 우타카모리(西鄕隆盛:1827-1877)와 회담을 한 끝에 막부는 신정부군에 에도죠우(江戶城)을 돌려주고 그 대신에 도쿠가와 가문을 존속시켜 주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에도의 거리는 전장(戰場)이 되지 않을 수 있었으나 약 260년간 계속되어 온 에도막부의 정치는 이로써 끝을 맺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