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3대 해전 - 살라미스 해전, 포에니 전쟁, 악티움 해전!
“바다를 지배한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진리이니 옛날
부터 해전으로 국가의 운명이 판가름난 경우는 부지기수 입니다. 해전(海戰) 은 선박
위에 탑승해서 치러야 하니 육상전 보다는 늦게 출현했는데 최초의 해전은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 해군과 페르시아 해군이 격돌한.... “살라미스 해전” 일 것입니다.
그리스 부터 로마 시대 까지 벌어진 고대 해전의 경우에는 원거리 전투가 근본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대부분 "근접하여 갑판전" 을 벌이는 형태가 주류였으니 이른바
충각전술 인데.... 함선들의 다량의 노 를 가지고 흘수가 얕고 길이가 긴 갤리선 계열
이라 바람의 영향을 적게 받으니 속도나 조향을 비교적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었습니다.
상대편 함선에 올라 타기 전에 충각을 이용한 충격으로 적 함선에 피해를 입히는 것만으로
상대 함선에 큰 피해를 줄수 있었고....... 충격시 요동으로 탑승 전투원을 줄이는 부수
효과도 얻을수 있었으니 대표적 해전은 기원전 480년 9월 벌어진 “살라미스 해전” 입니다.
다리우스가 죽고 페르시아 왕위에 오른 아들 크세르크세는 부왕의 유언을 받들어 제3차
그리스 원정을 준비했으니 BC 480년 봄 크세르크세스는 16만명의 병력과 1,200척
함선을 끌고 그리스 북부로 진격했는데... 그 전에 4년에 걸쳐 노예들을 동원해
헬레스폰토스(다르다넬스) 해협에 선박을 연결시켜서 만들었던 “다리” 를 건넜습니다.
아후 페르시아군은 테르모필레와 아르테미시온의 방위선을 돌파하게 되는데.... 페르시아
크세르크세스 1세의 대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했으나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 가
테르모필레에서 7일 동안 페르시아 군을 막아내며 “그리스 해군의 퇴각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아테네인들은 아티카를 포기하고는 살라미스 섬으로 도망치게 됩니다.
페르시아군은 아테네는 점령했으나 살라미스섬에 대한 공격이 여의치 않으니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는데... 아테네의 장군 테미스토클레스는 거짓 정보를 보내 페르시아군을
폭이 좁은 살라미스만으로 유인하니 BC 480년 9월 23일 아테네 함대를 주력으로
한 그리스 연합 해군은 살라미스 해협에서 우세한 페르시아 해군을 격파 하게 됩니다.
전투는 적의 정보를 최대한 수집한 다음에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방식
으로 전투하는자는 반은 이기고 들어가니 카이사르와 이순신에 나폴레옹이 그러한데
테미스토클레스도 이런 범주에 속하니 델포이에서 신탁을 받았는데, “나무 성벽만이
파괴되지 않고 그대와 그대의 자식들을 도와주리라”..... 신녀에게 돈 깨나 썼나 봅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호소로 아테네는 “3단 노함선” 을 건조했는데 170명까지 노를 저을수
있는 배는 1인당 하나의 노를 맡도록 했으며, 노는 3단으로 배열되어 있었으니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모두 총 380척의 함대 를 확보했는데.... 1,200척의 페르시아 함선
과는 비교가 안되는 숫자지만....... 그리스 3단 노함선이 질적으로는 더 우수 했다고 합니다.
전술적 이점은 그리스 쪽에 있었으니 페르시아 함대는 명량 해전 처럼 “좁은 살라미스해협”
때문에 모든 배가 동시에 싸울수 없었는데다가 대형을 유지하지 못한채 무질서 하게
공격하는데 비해, 그리스군은 “준비된 장소” 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반격을 취하는
것이 가능했으며...... 또한 “빠른 속도와 단단한 충각” 을 이용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일순간에 공격명령을 내림으로써 격전이 벌어지는데... 그리스 3단노
함선은 적선의 “노를 부러뜨리고” 적선 “좌우 측면을 들이받는”등 의 기술적 이점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니 7시간의 격전을 치른 결과 페르시아는 200척의 함선이 격침
당하고 200척이 그리스군에 포획당했는데 그리스 함대는 40척을 잃었을 뿐 이었습니다.
크세르크세스는 “해전에 패해 보급” 마저 끊길 위험에 처하게 되자 서둘러 회군하고 말았으니
그리스 해군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이듬해 여름에는 “소아시아 지역으로 출동” 하여
페르시아의 나머지 함대를 모조리 쳐부수었는데 이후 두번 다시 페르시아의 침공을 받지
않았으며 “막강한 해군력”을 가진 아테네는 오랫동안 지중해의 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습니다.
두번째 고대 해전은 “포에니전쟁” 이니 시칠리아섬의 “메시나” 는 그리스인의 식민도시인데,
BC 265년 시칠리아 섬 중서부는 “카르타고” 가 지배하고 동부는 메시나와 시라쿠사
로 양분 되어 있었는데, 강국 “시라쿠사가 메시나를 침략”하자 메시나는 해협 건너편에
로마에 굴복한 자치 도시 "레기움" 을 생각해 내고는 자기들도 “로마에 구원” 을 청합니다.
로마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디우스 는 2개군단 1만 7천명을 이끌고 출전하여 레기움에서 해협
을 건너 메시나에 상륙해 동맹을 맺자 앙숙이었던 시라쿠사와 해운 강국 카르타고 역시
위협을 느껴 동맹을 맺어 대항 하니 “제1차 포에니 전쟁” 인데.... 육상전에서 로마군이
승리한후 카르타고 4만 대군이 상륙하자 BC 260년 “메시나에서 1차 해전” 이 벌어집니다.
16세기 "조선 판옥선이 1단층" 이라면 지중해를 제패하고 있던 카르타고 해군은 “5단층 갤리선
120척” 을 소유하고 있었던데 비해, 로마는 동맹도시인 나폴리와 타렌토의 “3단층 갤리선” 이
고작이니... 3단층 갤리선 이란 노잡이가 갑판 아래 “3층으로 된 단 위에서 노를 젓는” 것으로
대략 100명의 노잡이 를 필요로 하며 승무원과 전투원을 합쳐 80명을 승선 시킬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5단층 갤리선 은 “5층의 단 위에서 노를 젓는데 노잡이가 무려 300명” 이요, 선원
100명에 전투원 120명 에 달하며 “갑판이 높아” 3단층 배를 내려다 보며 활을 쏘니
전투에 유리했는데, 로마는 원래 해군이 없었으니 나폴리와 타렌토의 3단층 갤리선에
의존하다가 나포한 카르타고 5단층 갤리선을 해체해 복제하여 5단층 갤리선을 건조합니다.
“로마 하층민들을 징집해 노잡이” 훈련을 시킨후 “선원은 나폴리등 동맹 도시” 사람들
을 소집하고 “전투원은 로마 중산층”이 승선하여 전투준비를 마치고 출진하는데
“100척의 5단층 갤리선” 에 “200척의 3단층 갤리선” 을 더한 300척 함대는
집정관 스키피오 가 맡고 육군은 두일리우스 가 지휘해 시칠리아 섬으로 파견됩니다.
집정관 스키피오가 17척 소함대로 리파리섬을 점령하려다가 “포로” 가 되니 해군 까지
합동 지휘하게 된 “두일리우스는 해전에 대해서는 무지” 한지라..... 머리를 써서
뱃머리 돛대에 "까마귀" 라고 불리는 “잔교” 를 설치하는데 해전으로는 도저히
카르타고 해군 을 당할수 없으니 함선을 근거리에 접근시켜 묶어 두고자 한 것입니다.
BC 260년 메시나에서 서쪽 밀라초 앞바다에서 양쪽 해군이 조우하니 “바다에 약한 로마군
은 함대를 진열도 못할” 정도로 항해술은 서투른지라 카르타고군이 비웃는 가운데
적선으로 돌격한 로마 함선에서 “잔교 까마귀” 가 내려지고 카르타고 배로 건너가
“육박전” 이 벌어지는데... 용병인 카르타고군 은 로마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패하게 됩니다!
카르타고 5단층 함대는 15척이 침몰되고 30척이 로마군에 노획되었으며 전사자 3천에 포로는
무려 7천명 에 달했으나, 로마군의 손실은 미미했으니.... 카르타고는 이 한 싸움에 전체
“해군의 3분지 1” 을 잃고 “해상 주도권을 로마에” 내주는데 훗날 로마는 “육지에서
한니발” 을 당하지 못하자 함대로 바다를 건너 “카르타고 본국”에 상륙해서 전쟁을 끝냅니다!
고대 3차해전은 BC 31년에 벌어진 “악티움 해전” 인데 로마에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는 시저(카이사르) 암살 세력인 원로원파를 타도하는데는 힘을 합쳤지만 공동의 적을
진압 한 후에는 “권력투쟁” 에 들어가니 BC 31년에 옥타비아누스 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한 안토니우스 장군의 함대” 가 운명을 걸고 악티움 해전 을 벌입니다.
안토니우스 는 그리스 서쪽 악티움 언덕 위에 중무장 보병 6만 5천, 궁병등 경보병
2만명에 기마병 1만 2천등 “전투병만 10만명” 을 대기시켰으며 이집트의
도움으로 “5단층 갤리선 520척”의 대함대( 선원과 노잡이에 전투원등 15만명 )
를 편성하여 그리스 “파트라스” 에 본영 을 설치한후 “이고멘시아” 로 출전합니다.
기원전 42년 카이사르를 암살한 원로원파를 추격해 그리스 마케도니아에서 싸운 필리피 전투
에서 옥타비아누스는 브루투스군에게 패했으나 카시우스군에게 승리한 안토니우스가
구해준 것처럼 전투에는 소질이 없는 옥타비아누스는 전권을 아그리파 장군에게 위임합니다.
옥타비아누스도 육군은 비슷한 병력을 동원하였으나 아그리파가 지휘하는 해군은 “5단층 군선
5척을 포함해 400척” 이니 배의 크기도 안토니우스- 이집트 연합군 보다 작았거니와 숫자
에서도 열세 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을 뒤엎고 옥타비아누스 군의 대승으로 끝나니
이는 원균은 졌지만 이순신은 이긴 것 처럼 “총사령관의 역량의 차이” 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시저(카이사르) 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의 전적인 신임을 받아서 대리인이
된 “아그리파” 장군은 “로마 해군의 현저한 열세” 를 만회하기 위해 먼저
배에다가 “화기” 를 장착 했으며..... 둘째로 로마 함선의 뱃머리를 날카롭고
견고하게 해서 적선을 들이받아 침몰 시키는... “충각 작전” 을 세운 것입니다.
반대편에서 보면은 “클레오파트라” 는 패전의 경우를 대비 했으니.... 결국 이 한번의
전투 에 모든 것을 걸지 못한 “안토니우스의 미련” 이 승부를 갈랐을까요?
사사건건 해전에 무지한 “클레오파트라의 주제넘은 간섭” 으로 안토니우스
휘하의 오랜 보수적인 골수 로마 군인들이 “탈영” 하는 와중 에서 해전이 시작됩니다.
안토니우스군은 “해군력의 우세” 에 “북서풍 바람”을 받아 서전에서 우위 를 지켰으나
전투가 시작되어 바다가 아수라장이 되는 불지옥 광경에서 “클레오파트라는 그만
"겁” 을 집어 먹었으니.... 졸지에 일개 아녀자로 전락하고는 마침 북풍이 불자
전투 중임에도 “돛을 달고 남쪽으로 내빼니” 이집트 군함 60척이 그 뒤를 따릅니다.
이것을 본 총사령관 “안토니우스” 는 전투고 뭐고 부하들을 다 팽개치고 “사랑을 쫓아”
돛을 올리고 클레오파트라를 뒤따라 “전선에서 이탈” 하니....
그다음은 말해서 무엇하랴? 아! 세기의 “위대한 사랑(?)” 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니면 그런 “나약하고 무책임한 사령관” 의 부하들이 너무나도 불쌍하다고 해야 하나!
육지에서 해전을 내려다 보던 10만 안토니우스군 지상군 은 이후에도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을 거부” 하고 이제나 저제나 자기네 “총사령관이 돌아오지 않을까” 간절히
기대하며 무려 여드레 동안 이나 총사령관 “안토니우스” 를 기다리며 분전 했으나,
이미 총사령관은 부하들을 버리고 “세기의 연인을 쫓아 이집트로 도망쳐” 버린 것을.....
안토니우스 는 여러차례 전쟁에서 승리한 유능한 장수이나 “옥타비아누스는 젬병” 이었지만
“제국을 창건” 하기 전에 묻자 옥타비아누스의 왼팔인 마에케나스는 당위성을 펼치며 찬성
했으나... 유능한 무장인 “아그리파는 단호히 반대” 합니다. 더 놀라운건 옥타비아누스의 반응
이니.... “화가 날만” 한데도 아그리파와 변치않는 우정으로 “딸 율리아와 결혼” 까지 시킵니다?
첫댓글 고대의 3대 해전 살라미스 해전, 포에니 전쟁, 악티움 해전
잘 배웟습니다.
세계 역사를 바꾼 대 해전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