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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원항이 전한 이이의 죽음과 이양길의 탄생
백원항(白元恒)은 1312년 제자 이이(李異)의 일대기(一代記)를 그린 “증 소년 이이 동(贈少年李異同)”이라는 제목의 고시(古詩)를 남겼다.
그는 이이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태어남과 죽음을 보았고, 또 아버지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태어난 이이의 자식을 기록으로 챙겨주었다.
贈少年李異同
白元恒
君不見南山於菟兒 始生三日窺牛胾 又不見丹穴鳳凰雛 一鳴已作王者瑞 李郞所蘊亦不凡 襁褓養出靑雲器 讀書不煩勞 涉獵輒强記 作詩不用心 妙盡西峯意 及看新月篇 更覺天生智 氷姿盈盈二六餘 朱絃入手人心醉 我疑東璧星降靈三韓主文字 我疑紫霞仙偶下人閒一遊戲 不然造物奚有偏 賦與才貌於君備 科登甲乙可前知 將相功名自家事 我初識子大人門 半面暗許平生志 往年相見在重陽 前年相見在冬至 今年何處樽酒同 杜鵑半落城西寺 別來幾多時 金鶯亂啼庭樹翠 人生聚散如旋蓬 羲和汲汲催龍轡 勸君須惜紅顔 勸君須知結交地 古人愛士信陵君 能爲侯生入屠肆 直窮下客靑松心 東海生塵北斗墜
譯 梁柱東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남산의 범의 새끼가 처음 나는 것을
난 지 사흘 만에 소를 잡아 먹으려 한다.
또 보지 못하였는가 단혈의 봉 새끼를
한 번 울면 벌써 왕자의 상서가 된다.
이랑의 자질이 범상하지 않나니
포대기에서 벌써 청운의 그릇을 길러 내었다.
글을 읽는데 번거로이 애쓸 것 없이
얼른얼른 보아도 오래도록 기억하고
문득 시를 짓기에 애쓰지 않아도
묘하게 서봉의 지은 뜻을 대했네.
그리고 또 신월편을 보니
하늘이 낸 지혜 새삼스레 알겠네.
얼음 같이 맑은 자질 이륙 세에
주현이 손에 들면 사람의 마음이 취하네.
동벽성이 삼한에 태어나서 문자를 맡았는지 나는 의심한다.
또 자하의 신선이 우연히 인간에 내려와 한 번 장난하는가 나는 의심한다.
그렇지 않으면 조물의 마음이 얼마나 편벽되어
재주와 얼굴을 그대에게만 갖추어 주었겠는가.
과거하여 갑을에 오를 것을 미리 알 수 있겠고
장상의 공명이 그대의 일임을 미리 알 수 있었다.
나는 대인의 문하에서 처음으로 그대를 알아
한 번 보고 가만히 평생의 뜻을 허락하였다.
그 전 해에는 중양절에 서로 보았고
작년에는 동지 때에 서로 보았건만
금년에는 어디서 동이 술을 같이 하는가.
두견화 반쯤 떨어진 성 서쪽 절에서
이별한 지 언제인데
황금 같은 꾀꼬리 요란스레 울고 뜰 앞 나무 푸르네.
인생이 모였다 흩어짐은 선봉 같은데
희화는 바쁘게 용의 고삐를 재촉한다.
권하노니 그대는 젊은 때를 아끼고
그대는 또 모름지기 사람 사귈줄을 알아 달라.
옛날에 신릉군은 선비를 사랑하여
후생을 위해 백정 집에 들어갔다.
아랫 손은 솔 같은 마음을 따진다면
동해에는 티끌이 일고 북두는 떨어지도록.”
申解 李容璨
이이(51쪽)는 개성 남산에서 태어났으며 태어날 때부터 범상치 않았다고 한다.
단혈의 봉 새끼가 한 번 울면 벌써 왕자의 상서가 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단혈은 봉이 나는(生) 곳을 말한다. 고어에 명봉재수(鳴鳳在樹)라는 말이 있다. 명군 성현(名君聖賢)이 나타나면 봉이 운다고 했다. 이이를 단혈에서 태어난 봉 새끼에 비유하며, 태어나 그 울음 소리가 웅장하여 재상이 될 인물이 될 것임을 짐작케 한 것 같다.
“이랑의 자질이 범상하지 않나니”에서 이랑(李郞)은 촉군(蜀郡)의 태수 리빙(李冰)의 아들로 아버지와 함께 청두[成都/四川省]북쪽에서 평원으로 흘러 들어오는 민강(岷江) 관개수로 공사를 BC 306~BC 251년까지 55년간 감행하여 홍수와 감뭄을 막는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이이는 포대기에 있을 때부터 큰 그릇임을 보였고, 가르쳐 주지 않았음에도 글을 읽고 슬적슬적 보아도 기억을 하고, 애쓰지 않고도 시를 지었다고 한다.
신월편(新月篇)에 신월은 ‘신비한 영감’을 의미하는 별자리이다. 이이는 하늘이 낸 지혜를 가진 인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이는 12세에 안향(安珦)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에 심취하였다.
동벽성은 문장을 주장하는 별(星)이며, 북두칠성을 말한다. 이이가 고려에 태어났음은 하늘이 내려준 별(星)로 생각하고 있다.
자하(紫霞)의 자하동(紫霞洞)은 고려 500년 사직의 궁궐터 만월대 뒤에 있으며 송악산 기슭에 있는 계곡 이름이다. 신선이 머물 정도로 경치 좋 은 골짜기다. 이곳에 선인교(仙人橋).영선루(迎仙樓)가 있다. 송악산 남쪽에 남산(南山)이 있고, 정상에 영웅호걸을 키운다는 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남자를 배출한다고 하여 자남산(子男山)이라 부른다. 송악산 정기를 받은 자하동의 신선(神仙)이 남산에 가 이이를 들게(孕胎) 했음을 뜻한다.
이이는 15세에 성균시에 합격 곧 과거에 올라 재상이 될 인물임을 의심하지 않았고, 백원항이 이이의 아버지 이혼의 문하생일 때부터 이이를 눈 여겨 보고 그를 가르쳐야겠다는 뜻을 허락하였다고 한다.
백원항은 이이가 죽기 전 3년간 만났다.
“그 전 해에는 중양절(52쪽)에 서로 보았다(往年相見在重陽)” 에서,
“서로”는 통상적 만남이지, 어떤 목적이 있어 만난 것은 아니다.
중양절은 음력 9월 9일이다.
여기서 그 전 해의 중양절은 몇 년도(年度)를 말하는가.
고려사는 1310년 9월 11일(을유) 최단(崔湍)을 첨의정승 경원군 행 계림윤으로 삼고 재상(53쪽)이 목사로 나가는 것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며, 10월 12일(을묘)에 “계림윤 최단에게 내고의 은 30근, 쌀 1백석을 노자로 하고, 역마 15필을 주어 보내게 하되 송별연과 숙소의 공대는 창고에 맡겨 지급하라” 하였다.
이이는 아버지(이혼)가 곧 회양부사로 발령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중양절에 백원항을 만나게 되어 아버지 이야기를 하였던 것이다. 그 해가 1310년이다. 이혼은 최단이 계림윤으로 떠나고 이어 회양부사로 떠났었다(1310년 10월 12일 이후~11월).
작년에는 동지 때에 서로 보았다(前年相見在冬至)에서,
동지는 음력 11월 17일경이다.
동지에 이이와 백원항은 서로 만났는데, 백원항에게 영해에 있는 아내가 임신하였음을 전하였던 것이다. 이때 이혼(56쪽)은 영해부사 봉직 중이었다.
임신된 아이가 이양길이다. 이양길은 1312년 4월초에 태어났다. 동지에 만났으니 임신 4~5개월 째 되는 달(月)이 된다. 시아버지인 이혼은 며느리의 배가 부른 것을 보고 기쁨에 차 개성에 있는 아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이이는 결혼 후 첫 딸을 낳고 10년만에 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아버지의 소식은 흥분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이때가 1311년 동지다.
아기를 가지기 위한 노력, 그리고 출산의 글이 있다.
“성(宮城) 서쪽 절(寺)”이라는 글이다.
성 서쪽에는 복령사(福靈寺/57쪽)라는 절이 있다. 이 절은 후사(後嗣)를 얻기 위해 복지(福地)의 역할 즉, 기도를 올리는 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또, “동해에는 티끌이 일고(東海生塵)”라는 글이다.
티끌(遺業)을 이을 자식 즉 생(生), 아들이 태어났음을 말한다.
고려사에 충렬왕은 3번, 공민왕은 4번 공주와 함께 복령사에 행차해 후사(後嗣)를 얻게 해 달라고 기도(60쪽)하였으며, 충숙왕의 왕사며 국사인 일연(一然)의 제자 보감국사(寶鑑國師) 탄생비화에 부모가 복령사 수월보살상(水月菩薩像)에게 기도(62쪽)하여 낳았으며, 또 이제현의 처부(妻父) 권부(權溥)도 수월보살상에게 빌어(63쪽) 낳았다고 기록한다.
금년에는 어디서 동이 술을 같이 하는가(今年何處樽酒同)에서,
금년은 1312년이다.
여기서 동(同)은 이이를 말하며, 술은 두견주(杜鵑酒/68쪽)를 말한다.
백원항은 이이와 두견주를 마시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두견화 반쯤 떨어진 성(城) 서쪽 절에서(杜鵑半落城西寺)”에서,
“두견화 반쯤 떨어진” 이때가 언제인가.
고려 9대 명절(名節) 중 3번째 명절인 삼짇날(3월 3일/70쪽)이다.
여기서 성(城)은 어디를 말하는가.
개성성(開城城) 궁성(宮城)인 만월대를 에워싼 성(城/72쪽)을 말한다.
서쪽 절(寺)은 “복령사(福靈寺)”이다.
이이는 아들을 낳기 1개월 전 삼짇날에 백원항을 만난 것이다.
“이별한 지 언제인데” 에서,
복령사에서 이이를 만나고, 몇일 후 이이가 죽었다는 이야기다.
백원항은 영해에 갔다와서 인생무상(人生無常)의 글을 남겼다.
“황금 같은 꾀꼬리 요란스레 울고 뜰 앞 나무 푸르네.”라고 하였다.
여기서 꾀꼬리는 임의 생각 즉 그리움을, 푸른 나무는 생동을 뜻한다.
죽음과 태어남에 대해 깊은 상념(想念)에 빠져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 살아 가는 모습이 선봉같다고 하였다. 민들레 꽃이 바람따라 나는 모습처럼 살다 간다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이는 봉(鳳凰)이 나는 곳에서 태어 났지만 왕자의 상서(祥瑞)가 되지 못하고 희화와 함께 용이 끄는 마차를 타고 하늘 나라로 갔구나 하였다.
백원항은 죽은 제자에게 “그대”라고 하였다.
부담없이 편안히 불러보고 싶은 “나의 모든 것”.....이라는 호칭인 것 같다.
“권하노니 그대는 젊은 때를 아끼고, 모름지기 사람 사귈줄을 알아 달라”는 간곡한 부탁의 말을 던졌다. 이이의 약점을 이야기 한 것이다.
여기에 죽음의 원인이 있는 듯 하다.
아버지와 심한 충돌(글 또는 만남)이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충돌의 글귀가 되는 말이 뒤에 나온다.
“아랫 손은 솔 같은 마음을 따진다면(直窮下客靑松心)” 이다.
아버지는, 이이에게 아들이 태어나면 요즘처럼 살지 말라고, “만약”이라는 말을 했을지 모른다.
고려사 열전 이혼에, “이혼은 성품이 관후(寬厚)하며, 오랫동안 전선(銓選/人事行政)을 맡아 성품이 청렴치 못한 고로 그 집이 부(富)하매 산산(散産)하기를 힘썼고 빈객(賓客) 맞기를 즐겼다고 한다. 또「중호(中護) 이혼이 심양왕소(瀋陽王所)에 나아가 선법(選法)을 의정하여 두 아들을 뽑아 올리고 그 나머지 천거한 바도 친척과 고구(古舊)가 많아서 상(上)을 속이고 사(私)를 행하였으니 임용함이 마땅치 않다」고 하니 혼(混)이 크게 부끄러워하였다고 한다.
상기 열전은 이혼의 성품과 성격을 잘 말해주고 있다. 자식에 대한 애착심이 많다는 글이다. “어느 봄날 강가에서(78쪽)”의 시(詩) 역시 같은 맥락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이러한 후광에 삶을 풍족하게 누렸다면 노력을 게을리 하였을지 모르며, 아버지의 말에 충격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젊은 때를 아끼고 사람 많이 사귈줄을 알아달라고 한 후 그 예로 신릉군(信陵君)은 선비를 사랑하여 후생을 위해 백정 집에 들어갔다고 하였다.
신릉군( ~BC243)은 전국시대 말기 위(魏)나라 위소왕(魏昭王)의 아들이며, 안리왕(安釐王)과는 이복형제며, 정치가요 군사가다. 그는 성문 문지기인 후생(侯生)이란 노인이 어질다는 말을 듣고 잔치에 초대하기 위해 친히 영접하러 가서 수레에 태워 오는데, 중도에 후생이 ‘내가 친한 사람인 주해(朱亥)가 백정들 속에 있는데 잠깐 같이 들러서 갑시다.’ 하여, 신릉군이 수레를 몰고 그리로 갔다. 같이 간 신릉군의 하인들이 모두 가만히 후생을 욕했지만 신릉군은 말고삐를 잡고 더욱 공손히 하였다. 후일 마침내 후생과 주해의 도움으로 조(趙)나라를 구하기 위해 임금의 병부를 훔쳐내어 위나라 군사를 이끌고 진나라 군사를 물리쳐 주었다. 그의 집에는 식객이 3천명이 넘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이는 아버지가 충선왕의 왕비였던 숙비(淑妃/金就礪의 曾孫女)의 모함을 받아 회양부사로 폄출, 영해부사로 이배되었는데 이로인한 충격, 고려의 정치는 원의 간섭과 원에 붙은 권세가들의 책동으로 인한 국왕 부자간의 갈등이 왕의 중조(重祚/한 왕이 두 번 왕위에 오르는 것을 말함)라는 불행한 사태를 초래하였고, 원의 경제적 수탈, 인적 물적 요구 등으로 재정이 궁핍해지고 사회적 모순도 심화되었으며, 특히 충선왕은 4년 4개월(1308. 11~1313. 3) 동안 원나라에서 전지를 통해 국정을 운영하였다. 왕권을 대행한 제안대군(齊安大君/1238~1312.7)은 전지를 통한 국정운영을 하였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천재 이이는 그 속에 있었다.
이러한 환경들이 젊은 이이에게 삶의 목표를 잃게하였는지 모른다.
동(同)이라는 말을 넣어 이이와의 관계를 강조하면서 두 번 다시 술자리를 할 수 없음을 아쉬워한다. 이이는 술을 마실 정도로 건강하였다.
마지막 글귀에, 이이가 죽고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전한다.
“直窮下客靑松心(아랫 손은 솔 같은 마음을 따진다면)
東海生塵北斗墜(동해에는 티끌이 일고 북두는 떨어지도록)” 이다.
여기서 “따진다면”의 표현은 만약이라는 “가정”의 뜻이다.
直窮(직궁)은 몸을 곧게 가진다는 뜻이고, 靑松心(청송심)은 靑松丈夫心(청송장부심)을 말하는데 변함 없는 절개(節槪)의 뜻을 가지고 있다.
백원항은 생각했을 것이다.
만약에 하객(下客)이 직궁과 청송심 같은 성격과 성품을 가져 준다면..... 였다.
백원항은 왜 이런 “따진다면”의 표현을 사용하였을까. 백원항은 이이를 “한 번 보고 가만히 평생의 뜻을 허락하였다.”고 하였다. 그런 제자가 죽었으니 마음의 상처가 컷기 떼문이었으리라.
하객(下客)은 누구인가.
뒷 글귀를 보면 이양길이다.
“동해생진북두추(東海生塵北斗墜)”.
동해(東海)는 이혼(李混)이 봉직하고 있는 영해(寧海)를 말하며, 생진(生塵)은 “유업(遺業)을 이을 자식이 태어나다” 라는 말이다. 북두추(北斗墜)는 북두칠성이 땅으로 떨어졌다는 뜻이다.
즉, 백원항이 영해에 내려갔을 때 이양길(李陽吉)은 이미 태어나 있었으므로 생진(生塵)이라는 낱말을 사용하였다. 북두성(北斗七星/東璧星)인 이이는 북쪽 개성에서 죽었다고 시(詩)를 마무리 하였다.
의지할 곳 없이 태어난 청송심 같은 하객.
동해에서는 유업을 받들 자식이 태어났지만, 북쪽의 아버지는 아들 얼굴 한번 보지도 못한체 이 세상 떠났다 ....... 라고 풀이하고 싶다.
(이자료는 울산에 계시는 계파 이용찬씨가 연구한 내용 입니다
시를 기준으로 이양길에 대한 연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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