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독도인식과 불법침탈
일본은 이미 17세기 안용복의 도일과 울릉도 쟁계를 통해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영유권이 조선에 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 있었다. 또한 17세기 이후 작성된 일본의 각종 고문헌과 고지도에도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로 명기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1877년 3월에는 당시 일본의 최고 국가기관인 태정관에서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과 관계없는 땅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는 당시 일본 내무성에서 근대적인 지적(地籍)을 편찬하던 중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 영역으로 포함할지 여부를 태정관에 질의한 것에 대한 답이었다.
「일본여지도」를 저본으로 한 일본 전도로서, 일본 본토인 혼슈, 시코쿠, 규슈와 부속 도서와 조선의 부산 및 울릉도 독도를 함께 그린 지도이다. 일본의 경우 각 군·현 별 경계는 굵은 실선으로 표기하고, 지역별로 채색을 달리하여 구분하였다. 조선은 부산을 표기한 지역 일부가 그려졌으며, 조선 영토는 흰색으로 채색하였다. 이 지도 상에 부산을 포함시킨 것은 당시 조선과 일본 사이에 교류가 활발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울릉도와 독도는 죽도(竹島)와 송도(松島)로 표기하고, 부산의 동쪽에 위치시켰다. 이 두 섬은 조선과 같은 흰색으로 채색하여 조선의 영토임을 명확히 표현하고 있다.
이렇듯 일본 스스로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고, 대한제국이 「칙령 제41호」의 반포를 통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다시금 대내외에 천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제국주의적인 태세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침입을 계속했다. 특히 일본인 어부 나카이 요자부로(中井養三郞)는 독도일대의 어업 독점권을 획득하기 위해 일본 정부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할 것을 요청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외무성 관료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독도를 일본으로 불법 편입하려고 했고, 일본 각의는 나카이 요자부로의 요청을 받아들여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키며 독도침탈을 본격화하였다.
일본 각의의 결정을 근거로 시마네현은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 제40호」의 발표를 통해 독도를 다케시마라 칭하고 시마네현의 오키도사의 관할로 둘 것을 결정하였으며 오늘날의 일본은 고시를 근거로 독도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고시는 관보 또는 대중매체에 전혀 고시하지 않았다는 점, 이 고시문의 작성 5년 전 이미 대한제국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주지라한 점, 상급기관에 전혀 보고되지 않고 단순히 내부에서 돌려보는 회람(回覽)형태의 문서에 불과한 점 등 수많은 오류가 있기에 국제법적 효력이 전혀 없는 불법문서에 불과하다.
시마네현 고시 발표 후 일본은 1906년 3월 울도군수에게 독도가 일본의 영토로 편입되었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당시 울도군수였던 심흥택(沈興澤)은 이를 강원도 관찰사 이명래(李明來)에 보고했고 이명래는 이 사실을 의정부에 보고했다. 강원도 관찰사의 보고를 받은 참정대신 박제순(朴齊純)은 「지령 3호」를 통해 ‘독도가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므로 다시 조사하여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이는 대한제국이 독도에 대해 명확하게 영유권을 행사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일본에게 외교권이 박탈된 후 급격히 주권이 잠식되고 있었기에 「지령 3호」는 큰 효력을 거두지 못했고, 결국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고시문은 일본의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정부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영토편입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보나 언론에 공표되지 않았음은 물론 영토편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대한제국에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따라서 국제법적 측면에서 전혀 실효성이 없는 불법문서이며, 현재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은 허구임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 ; 독도박물관
https://www.dokdomuseum.go.kr/ko/page.do?mnu_uid=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