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전통인 희년 정신 계승…교회와 정부의 동참 촉구
"윙- 윙-" 분쇄기가 진동 소리를 내며 작동했다. 옆에 있는 참석자들은 찢겨 나간 종이를 보며 박수를 쳤다. 10억여 원의 채권들이 모두 종잇조각이 돼 버린 순간이었다. 희년함께·희망살림·한국복음주의교회연합(복교연)은 21일에 열린 '2차 채권소각 및 토론회'에서 채무자의 빚 탕감을 선언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탕감된 채무자의 수는 총 99명으로, 대부분 10년 이상의 장기 연체자들이다.
▲ 희망살림은 대부업체로부터 10억여 원의 채권을 넘겨받아 전량 폐기했다. 장기 채무자 99명에게는 벼랑 끝에서 새로운 희망을 얻는 순간이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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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에서 발견한 빚 탕감 메시지
퍼포먼스에 이어 '성경의 부채 탕감과 한국교회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교회가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장기 채무자들의 빚을 갚아야 한다는 의견들이 제기됐다. 복교연 강경민 공동대표는 하나님의 자비를 베푸는 방법으로 개인의 자발성에 근거한 헌신과 나눔 그리고 희년이라는 제도가 있다고 말했다. 강 목사는 오늘날 개인의 자발성을 촉진시키는 것이 교회의 몫이라면, 희년 정신을 사회 속에서 실현시키는 것은 학자들의 몫이라고 했다. 교회와 학자들의 노력이 계속되어 사회 변화를 일으키길 바란다고 했다.
희년함께 방인성 공동대표의 사회로 진행된 토론회에는 정종성 교수(백석대)가 '부채 탕감의 성서적 근거와 교회의 역할'을, 제윤경 상임이사(희망살림)가 '부채 오늘의 현실'을 주제로 발제를 맡았다. 박득훈 목사(새맘교회)·이문식 목사(광교산울교회)·남기업 소장(토지+자유 연구소)은 패널로 참석했다.
▲ 정종성 교수는 복음서의 비유를 근거로 교회가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
첫 번째 발제를 맡은 정종성 교수는 빚 탕감의 성서적 근거가 복음서에 등장하는 비유에 있다고 했다. 누가복음의 청지기 비유(16장), 마태복음의 주기도문(6:9-12)과 왕의 비유(18:23-35), 이들의 공통적인 지향점은 인간에 대한 도리와 형제애, 그리고 가족적인 나눔을 통해 공동체의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인도주의적 각성에 있다고 해석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핵심 개념이라는 '주의 은혜의 해' 즉, 희년 제도의 선포는 사회의 최하위 계층과 고리대금의 수탈적 압박에 짓눌려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종교적 안전장치임에 틀림없다고 강조하며, 빚 탕감 제도를 설명했다.
정 교수는 채무자들에 대한 정부의 정책에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박근혜 정부가 지난 2013년 4월에 출범시킨 '국민행복기금'은 사실상 국민 행복과는 거리가 먼 제도라며, 오히려 극빈층에게 10년간 채권 추심을 '대행'하는 제도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이명박 정부가 도입한 4대 서민 금융 상품에 대해서도 채무 탕감의 실제적인 효과는 없었고 오히려 연체율이 도입 초기보다 3~5배 이상 늘어났다고 진단했다.
아울러 개인과 가계 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회단체들이 주체가 되어 빚 탕감에 나서는 동시에 기본 소득 보장·노동시간의 단축·신용 회복 프로그램 시행·금융 공공화 등의 제도적 보완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개인 파괴하는 가계 부채…제도적 장치 시급
▲ 희망살림 제윤경 상임이사는 대한민국의 가계 부채의 심각성을 지적하며, 정부가 채무자를 돕는 동시에 금융기관의 무분별한 대출을 제재해야 한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
둘째 발제자로 희망살림 제윤경 상임이사는 가계 부채가 매년 늘어나는데다가 계층이 확산되고 있다며 이를 심각하게 여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올해 1분기 가계 빚은 지난해 말보다 3조 4000억 원이 늘어난 1024조 8000억 원을 기록했다. 게다가 최근 국회 예산 정책처가 발표한 '소득 계층별 가계 부채 현황과 시사점'이란 보고서에 따르면, 가계 부채의 취약성이 저소득층에서 중산층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제 상임이사는 장기 채무자들의 경제적 어려움과 채권자들의 빚 독촉이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기까지 한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은 지난 10년 동안 OECD 가입국 중 자살률1위다. 자살한 5명 중 1명이 경제적 사유로 죽는다. 대한민국의 채무 독촉 방식은 선진국과 달리 채무자의 인권 보호가 취약하다는 점도 지적했다. 선진국에서는 빚 독촉 전화와 집 방문이 금지되어 있다. 제 상임이사는 채무자들에게 빚을 갚으라고 무조건 요구할 게 아니라, 오히려 금융회사가 무책임한 대출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토론회에는 면책을 받은 한 채무자가 자신의 사례를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IMF 때 빚을 져 11년 동안 장기 채무자로 지내다 최근 법원으로부터 면책을 받은 이정식(가명) 씨는 그동안 모아 온 채무 독촉 서류가 라면 상자로 3박스나 된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 씨는 자신이 만났던 법원 파산부 판사들조차 금융기관의 무분별한 대출과 카드 발급을 문제 삼았다며, 장기 부채는 개개인의 잘못으로 볼 게 아니라 사회구조의 모순에서 기인한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 11년 동안 장기 채무자로 지낸 이정식 씨(가명)가 금융기관으로부터 받은 독촉 서류를 보이고 있다. 이 씨는 채무자의 인권이 전혀 보호받지 못한 현실을 지적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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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상임이사는 미국이나 일본이 대출 광고를 규제하고 있는 것과 달리 대한민국에서는 대부 업체 광고를 하루에 두 번 이상 볼 수 있을 정도로 개인에게 과다 노출되어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한 국가적인 제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모든 발제자의 발언이 끝나고, 패널로 참석한 희년함께 토지+자유연구소 남기업 소장이 추가 의견을 냈다. 남 소장은 모든 사람들의 빚을 갚아 주기는 어렵더라도, 부채 탕감 운동은 채무자에게 지나치게 불리한 현 금융 제도를 개혁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채무불이행자는 약탈적 금융 제도의 피해자인 동시에 잘못된 토지제와 노동 제도의 피해자라며, 이에 대한 제도적 보완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남 소장은 복음주의에 속한 교회들도 희년 운동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다. 교회 내에서 채무자를 피해자로 바라보며 자체적인 부채 탕감 운동을 벌이고, 각 교회 실정에 맞는 희년 실천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지역사회의 전기세와 의료보험료를 연체하고 있는 이들을 조사해 대납하는 일 등으로 어려운 이들의 재활을 돕는 사역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희망살림은 지난 4월 14일 여의도 금융감독원 건물 앞에서 1차로 4억 6700여만 원의 부채를 소각해 119명의 빚을 탕감한 바가 있다. 채권을 매입하는 데 들어간 비용은 약 1300만 원에 불과했다. 이들은 금융기관이 장기 연체된 부실 채권들을 대부 업체 등에 5~10% 미만의 가격으로 매각한다는 점을 이용했다. 부채 소각 퍼포먼스는 단순히 채무자의 빚 부담을 줄이는 것뿐만 아니라, 오래된 채권이 금융 시장에서 헐값에 거래되는 현실을 고발하는 목적도 담고 있다.
희망살림이 벌이고 있는 '빚 탕감 프로젝트'는 미국에서 시작한 '롤링 주빌리(Rolling Jubilee)' 운동의 한국판이다. '롤링 주빌리'란 일정 기간마다 죄를 사하거나 빚을 탕감하는 기독교 전통(희년)에서 유래된 말이다. 미국 시민단체 '월가를 점령하라(OWS·Occupy Wall Street)'는 2012년 '롤링 주빌리' 프로젝트를 벌여 시민들의 성금으로 사들인 채권을 무상으로 소각하는 방법으로 약 155억 4500여만 원의 부채를 모두 갚았다.
▲ 참석자들이 '채무자에게 빚 탕감을'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이날 토론회에는 교회와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가계 부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