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계와 성장과정
충무공은 1545년(인종원년) 한성 건 천동(乾川洞: 현 을지로 4가 인현시장 근처 남산북쪽기슭) 본가에서 아버지 덕수이씨 (李氏) 정(貞)공과 어머니 초계변씨(卞氏) 사이에 3째아들로 태어났다.상조(上祖)를 고려조에서 중랑장을 지낸 돈수(敦守) 공으로하며 조선에 이르러 4세 윤번(允藩)공은 도사(종5품)를 지냈고 7세 변(邊)공은 대제학(正二品)을 지냈으며 9세 거( )공은 홍문관박사에 병조참의(정3품)를 지낸 분으로 공에게는 증조부가 된다. 정랑 직에 있을 때에는 관원의 전형을 도맡았으며 장령재 직시에 불의를 모르는 성품으로 사정을 두지 않아 호랑이 장령(虎掌令)이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조부는 백록(百祿) 공으로 생원 출신이며 참봉직책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다음에 평시서 봉사직을 역임하였다. 아버지는 음사(蔭仕)로 병절교위(秉節校尉(종6품)) 훈련원 주부를 지내니 모두 선세의 음덕이라 하겠다. 건천동에서 출생한 공은 그리 멀지 않은 묵사동(현 묵정동 남산북쪽기슭)에 유성룡이 살았는데 연치가 3살 많았으나 자라면서 동문수학하는 등 죽마지우로 절친하였다. 공이 태어날 때 어머니 변씨 부인이 꿈을 꾸었는데 증조부가 꿈에 나타나 서 이 아이는 장차 나라에 큰일을 할 사람이니 이름을 순신(純臣)이라 지어 부르면 자라서 유용한 인재가 되리라 하였다. 자라면서 남다른 체격에 영특한 지혜가 있었다. 같은 또래들과 놀 때에도 곧잘 전쟁놀이를 좋아하였는데 언제나 대장노릇을 하였다. 때마다 유성룡친구가 대장으로 추천하고 뽑히도록 주선하여 주었으며 활과 화살을 만들어 들고는 평소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을 만나면 얼굴에 대고 노려하므로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두 형과 함께 글방에 다니며 경학 공부를 할 때도 그 진도가 월등하여 조카 분(芬)이 장래 문관으로 나가면 대성할 것이라 권했으나 스스로 무관이 되겠다며 무술공부에 열중하였다. 서당공부로 경서에 두루 조예가 깊어 당시 웬만한 선비는 당해내지 못하였으며 탁월한 문장능력과 수려한 필체는 후일 난중일기나 임진 장초의 문헌과 각종 서신 등에서 그 면모가 들어나고 있다.
공은 20세(1565)때에 상주 방씨(方氏) 보성군수 방진의 딸에 장가들어 22세에 큰아들 회( )를 낳고 26세에 차자 위(蔚)를 낳았다. 진작부터 결심한 무관의 꿈을 실현 하기위한 공부를 혼인한 다음해부터 더욱 본격적으로 열중했다는 기록을 보면 청빈한 가계의 원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무술 공부에 필수 조건으로 최소한 좋은 말 한필과 쓸만한 활과 화살 장창등 장비준비가 적지 않은 비용이 드는데 장가든 후 내조의 덕과 보성군수인 장인의 후원으로 무난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무술공부를 한지 6년 되던 해 1572년 8월 식년 무과별시에 응시하여 실기시험으로 말달리기 활쏘기 창쓰기 기능시험중에 달리던 말이 넘어져서 왼쪽다리가 골절상을 입게 되었다. 공은 주저 없이 몸을 추수려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부상한 다리를 싸매는 과감성에 시험관들이 놀랬으며 실기시험은 차기로 순연되었다. 4년 후 1576년 2월 다시 식년 무과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하니 31세 때이다. 어려서 이후에 대장이 되겠다는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을 얻었으며 같은 해 12월 함경도 백두산 밑 동구비보 권관이 되어 여진족 방어의 최전선 소대장의 보직을 받았다. 10년간의 긴 세월 속에 큰형 희신(羲臣)은 분(芬)등 4형제와 둘째형 요신(堯臣)은 두 아들로 6명의 조카와 4명의 조카딸 등을 남기고 별세하였으며 슬하에는 본부인에서 3남1여 첩부인에서 2남2여 모친 형수 두 분 제수까지 합하여 24명의 대가족을 이루고 있었다. 무술공부중에 애로도 많았지만 가정살림이 어려운 가운데 장성한 조카들의 성혼시키는데도 차례를 지키고 자기 자녀들은 뒤에 성혼시킨 절차와 도리등은 군자의 면모라 하겠으며 38세 되던 해 건원보권관 재직 시 부친상을 당하여 2년 간 휴직으로 상기를 마치고 1586(41세)년 1월 사복시 주부로 복직하였다. 모친은 1597년 명량대첩 무렵 복상중 이었다.
2. 무과급제와 파란의 무관역정
1576년 식년 무과에 응시 병과에 급제하여 같은 해 12월에 백두산 밑동구비보권관(종9품)의 보직으로 2년간 임기를 마친후 1579년(34세) 2월에 훈련원 봉사(종8품)를 받았으니 병조정랑 서익(徐益)의 부탁에 불응하였다하여 충청병사 군관으로 좌천된 후 8개월만의 일이다. 다시 충청병사 소속군관 보임 20개월 만기 후 1580년(35세) 7월 전라좌수군 관하의 발포만호(鉢浦萬戶 종4품)를 받으니 이례적인사라 이론이 있었다. 이는 참찬관 유성룡의 숨은 배려로 된 것이다. 발포만호 관사의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를 만들겠다는 전라수군 절도사 성박(成 )의 요구가 있었는데 옳치않다 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그 후임 이용(李庸)이 감정으로 단위지휘관 근무평가를 최하위로하여 파면하기로 관찰사와 합의했으나 전라도사 조헌(趙憲)의 거절로 모면 되였다. 1582년(37세) 1월에 서울의 병조로부터 갑자기 군기검열관이 내려와 군기검열에 발포의 무기상태가 나쁘다고 평가보고가 되어 결국 파면되고 말았다. 1582년 1월 계속된 인사의 감정 관계는 훈련원 봉사 재직 시 병조정랑 서익(徐益)의 비열한 음모 때문이었다. 발포만호에서 부당하게 파면당한 후 보직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을 가슴 아프게 여긴 사람은 대사간 유성룡뿐 이었다.1582년 5월 4개월 만에 다시 훈련원 봉사로 보직을 받으니 전직에 비하여 8품이나 강등되는 인사로 당시 관기(官紀)가 얼마나 문란한가를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충무공은 묵묵히 자기 직책수행에 최선을 다하였으며 그 후 14개월 만에 1583년(38세) 7월에 함경도 남병사 이용의 군관으로 전근하게 되었다. 이용은 전라 좌수사 재임 시 남의 말만 듣고 처벌하려 했던 허물을
뉘우치며 남병사로 온 후 공을 군관으로 달라고 조정에 요청을 한 것이다. 충무 공을 만나자 몹시 환대하며 친절하게 대하여 대소사 군무를 반드시 상의하며 예우하였다. 이용은 3개월 만에 충무 공을 건원보권관으로 전보토록 조치했다. 건원보는 함경도 경원읍에서 40리 지점으로 여진방어의 전초보루였다. 충무공은 오랑캐의 우두머리 울지내(鬱只乃)를 유인하여 복병으로 사로잡는 전공을 세웠으나 단독으로 큰 전공을 세운 것을 시기하는 병사 김우서가 사전승인없이 작전을
했다 트집하여 큰상을 받지 못하게 방해한 사건이 있었다.(충무공전서 권9) 1583년 11월 훈련원 봉사 임기를 마치고 참군(7품)으로 승진하여 권원보 권관으로 전직근무중 아산에서 부친상의 부고가 1년만에 당도하여 귀향후 2년간 상기를 마치고 1586년(41세) 1월에 사복시 주부(종6품)로 보직되었으나 16일후 함경도 조산만호(종4품)로 임명되니 발포만호에서 부당하게 파면된 지 4년만에 지휘관인 만호로 복귀한 셈이다. 모두 우찬성 유성룡의 배려로 된 것이다.(선조실록 선조30년) 이때 함경도 순찰사는 정언신(鄭彦信)으로 조산만호인 충무공에게 녹둔도의 둔전관을 겸무토록 명령한 사람이다. 녹둔도는 두만강하구에 위치한 삼각주로 수비 병력이 부족하여 직속상관인 북병사 이일(李鎰)에게 수차 병력 증강을 요청하였으나 묵살되었다.
1587년 8월 녹둔도의 둔전에서 추수하는 틈을 타서 여진족이 대거 습격으로 추곡을 약탈한다는 급보를 받은 충무공은 급거 전승 대고지로 달려가 병력을 잠복 배치하고 적이 통과할 무렵 지휘관만을 집중 발사하여 모두 사살하니 졸개들은 분산 도주하였다. 곡물 운반중인 봉수군 60명은 구출하였으나 2명의 군관과 8명의 병사가 전사하고 106명은 포로가 되었어며 15필의 말을 약탈당했다. 이로써 녹둔도수비 책임문제로 논란이 될 때 직속상관인 병사 이일이 모든 책임이 충무 공에게 있다하여 군법으로 처벌하려 하자 수차의 수비병력 증강요청서 사본을 내보여서 참형이 보류되어 석방은 되었으나 조산만호직을 유지한채 백의 종군하라는 처벌이 내려졌다.
감형된 일은 순찰사 정언신의 배려 때문이었으며 이 사건 이후 충무공은 순찰사를 평생토록 스승으로 섬겼다. 그해 가을에 녹둔도 사건이 무혐의가 인정되어 백의종군의 형이 면제되었다. 임기만료로 조산만호에서 물러난 다음해 1589년 12월 정읍현감(종6품)으로 전보할 때(뒤에 태인 현감겸무) 24명의 부양가족이 같이 갔는데 자기직계 밖의 형제자녀까지 가게 되니 남솔(濫率 ; 지나친 식솔)이라 하여 비난을 받았다.
정읍현감 부임시(1589∼1591)는 대소 관원에게 녹봉이 지급되지 않을 때라 당시 관원에게는 자기 직책을 이용하여 생활비를 마련하도록 하는 제도가 있었다. 지방수령은 백성들로부터 여러가지 명목의 세금을 징수하는 직책이 주어졌기 때문에 생활비 조달이 가능했다. 그리하여 양심 있는 수령은 청백리라 불릴만큼 청빈했고 그렇지 않은 수령은 백성에게 가렴 하여 물의를 이르키기도 하였다. 이같이 관기가 문란한 세상에서 정읍현감만은 유독 양심 있는 수령이라 중론이 모아졌다. 공은 남솔에 대한 눈총을 받은 터라 향민의 감시 아래에서 최소한의 생활비로 대가족들이 검소하게 사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더욱 철저했던 것이다. 1591(46세) 2월에 진도군수(종4품) 임명으로 제임 중에 가리포첨사(종3품)로 추가 임명되고 같은 달 13일에 전라좌수사(정3품)로 거듭 임명되어 진도에서 곧바로 좌수영 여수로 부임한 것이다. 이로써 사간원에서 관작의 외람됨이 막심하다 취소하라 임금에게 계품하는 등 이례적 인사에 대하여 후일 원균(元均)등의 중상모략에 한 구실이 되기도 했다. 이는 시국관이 밝은 우찬성 유성룡의 배려로 이루어진 것이다(선조실록 선조30년 정월27일조) 이때 왜구가 침범하리라는 소리가 날로 급해졌으므로 라 했는데 이것은 왜의 강요에 못 이겨 조선이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함으로써 왜의 실정을 파악한 것과 관련이 된다. 통신사 정사에 황윤길(黃允吉) 부사에 김성일(金誠一)이 임명되어 1590년 4월29일 대마도주 종의지(宗義智)의 안내로 7월22일 일본에 도착 풍신수길을 만났다. 통신사 일행이 귀국한 것은 다음해 1591년 3월이었다. 풍신수길이 곧 만나주지 않아 5개월간이나 기다리게 하였으며 왜의 국서에 조선왕을 전하(殿下)라 하지 않고 합하(閤下)라고 하고 예물을 방물(方物)이라고 낮추어서 호칭하려는 문제로 왜측과 옥신각신했기 때문이다. 국서내용에서도 문제로 왜가 명나라를 칠터이니 조선은 왜의 앞장이 되라는 오만한 언투등과 귀국보고에 통신사의 견해에서 정사 황윤길은 왜가 반드시 무력침범을 할 것으로 왕에게 보고한데 반해 부사 김성일은 그런 기색을 느끼지 못하였다는 견해와 윤길이 인심을 동요시키는 것이 옳지 않다 등 상호 상반된 보고에 유성룡이 김성일에게 군의 보고가 황정사와 다른데 만일 왜가 침범해 오면 어떻게 하겠는가 다시 물었다. 이에 부사 김성일은 나 역시 어찌 왜가 군사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보장하겠는가 다만 황정사의 말이 너무 중대하기에 민심을 생각하여 삼가 말했을 뿐이라 대답했다. 부사 김성일을 추천한 사람이 유성룡이며 같이 퇴계의 문인으로 절친한 사이였다. 왜가 머지않아 처들어 오리라는 심중은 모든 사람들이 다 갖고 있었다. 이리하여 비변사는 장수가 될만한 인재를 천거하라했고 우의정 유성룡은 이례적으로 충무공을 전라좌수사로 발탁케 한 것이다.충무공이 진도군수 부임도중 울돌목 나루를 건너며 천험의 협수 로와 급류의 실태를 면밀히 파악하여서 세계 해전사에 유례없는 자연의 힘을 절묘하게 이용하여서 대승 첩의 기회를 만드는 등 모두 국난극복을 위한 유성룡의 배려는 위대한 선견지명이라 하겠다.
3. 충무공의 왜란극복전략
충무공은 수사로 부임하자마자 경오왜변(1510년) 기록을 검토하면서 왜구침입수로에 수중장애물인 철쇄를 횡설 하는 것으로 경오왜변시 도원수 유순경의 착안된 것을 충무공이 방어수단으로 활용하고자함이었다. 거북선에 철판을 씌우고 용두를 만들어 철갑돌격선으로 화포장치등을 개장하고 정해년 왜변때 포로가 되어 일본에 잡혀갔다가 1589년에 돌아온 공태원 김개동 이언세 등으로부터 왜군의 정보를 청취 대비에 만전을 기하였으며 해이한 군기의 확립 강화와 각종 무기를 점검 수리하고 해안 성벽을 수축 보수하며, 성밑에 호자(수로)를 파서 물을 채우고 통신망 봉수대를 다시 쌓고 함선을 정박해 두는 방파제를 보수 수축하여 완비하고 병력수의 확보와 부패 방지책을 세우고 군병의 훈련 및 경시회로 전투력의 강화와 우수자의 군관 발탁으로 조직의 확립은 물론 주요 요새지인 여도, 녹도, 발포, 사도, 방답등 5포를 수시 전투준비 상황을 검열하였다. 미비한 곳은 서둘러 완비토록 독려하였으며 수중장애물 장치로는 철쇄와 통나무를 물속에 횡설하는 것인데 수영성 동쪽 소포와 그 건너편 돌산섬 북단사이로 약200m였다. 이 수로는 역사적으로 적군이 경상도에서 전라 좌수영으로 침범할 때 통과하는 요충지로 무슬목 이라고도 한다. 좌의정 유성룡이 보내준 증손전수방략책(增損戰守方略冊)은 수전, 육전, 화포사용법 등을 서술한 책으로 왕명을 받고 국토방위의 방책 20여가지가 담긴 병사훈련 교범책으로 만든 것이다.
①척후(斥候) ②장단(長短) ③속오(束伍) ④약속(約束) ⑤중호(重濠) ⑥설책(設柵) ⑦수탄(守灘) ⑧수성(守城) ⑨질사(迭射) ⑩통론형집(統論形執) 등이 적혔다.
4. 임진왜란 발발과 부산 함락
1592년(임진) 4월15일 오후8시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파발병이 한통의 공문을 가지고 충무공에게 도착했다. 내용은 부산진성이 함락되었다는 것이다. 발송날짜는 4월14일이며 원균은 14일 오전 10시에 부산진이 함락되었다는 사실을 가덕첨사 전응린과 천성보만호 황정으로부터 통보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원균의 두번째 공문은 15일밤 늦게 12시경 도착되었으며 경상좌수사 박홍의 공문이 가덕첨사의 보고로 왜선 150척이 부산포로 가고 있다는 내용이다. 난중일기에는 원균의 제2차통보에 왜선 350여척이 부산포 건너편 해변에 도착했다고 적혀있다.(난중일기 4월15일조)다음날 4월16일 오전 8시경 경상순찰사 김수가 보낸 공문에는 4월13일에 왜선 400여척이 부산포 건너해변에 정박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충무공은 관하의 각 기관에 파발을 놓아 강구대변(江口待變)하라 명령했다. 왜의 기록으로는 4월13일 오후 5시에 왜선 7백여척이 부산에 도착했다고 써 있다.(서정일기 왜승천형종군기)경상우도 병마절도사 김성일이 4월14일 오후 8시에 보낸 공문과 좌수사가 보낸 공문도 16일 오후 4시에 모두 받았다. 이 두 공문에 따르면 황령산의 봉수군 배돌이(裵乭伊)가 14일 오전6시에 보고한 것으로 부산포 편암에 왜군 3부대가 진을 치고 새벽에 부산진성을 공격하는데 조총소리가 산천을 진동하였다는 내용이다. 16일 오후 10시 경상좌수사 박홍이 원균에게 보낸 공문이 당도했는데 부산진성은 14일 오전 10시에 교전 4시간만에 함락되었으며 왜군의 주력부대는 부산포의 북쪽 당천에 진을 치고 선봉군은 동래성 밖에 도착했다는 것이다.임진왜란때 왜적은 9개군으로 편성하여 吉野日記에 따르면 부산을 함락한 적은 제1군이며 적장은 소서행장(小西行長)으로 예하 5명의 군장하에 병력은 18,700명이라 하였고 조선군의 부산진성 수비군은 첨사정발(鄭撥)의 지휘아래 함정은 대맹선(大猛船) 1척 중맹선(中猛船) 3척 소맹선(小猛船) 5척 무군(無軍) 소맹선 1척이며 군졸은 약700명으로 4시간 교전끝에 일방적으로 무너진 참상은 목불인견이었다 한다. 부산진성의 전투상황에 대하여 왜국자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임진년 4월14일 오전6시 배에서 내린 즉시 성을 공격했다. 성내에서 화살이 비오듯 쏘아졌으나 우군(왜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4시간 동안 조총을 쏘아 화약연기로 하늘이 컴컴한 지경이었다. 산천이 진동하도록 조총을 쏘아대는 바람에 적(조선군)은 방패고 뭐고 모조리 붕괴되어 의지할데를 잃었다. 이로써 오전 10시에 성은 함락되였다. 난중일기는 4월 18일 오후2시에 경상도 우수사 원균이 통보하기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것이다. 또 경상도 관찰사 김수는 원균에게 요격명령을 내린후 19일 충무공에 통보하기를 전라 좌수군은 경상도 우수군이 구원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조정에 장계를 냈으니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라 하였다. 4월27일 조정의 명령을 받은 충무공은 각, 관, 포의 모든 전선(戰船)을 4월29일까지 전라 좌수영(여수)에 집결시켰다. 한편 경상 우수사 원균은 요격명령을 받은 후 관하의 수군을 집결하여 수영내에서 함선과 무기를 모아놓고 불을 지른 후 수군을 자패자괴하고 사천선창으로 도망쳤다. (자침함선 100척 자패시킨 병졸 1만명으로 유성룡기록) 경상순찰사 김수는 이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우수사 원균은 수군의 대장인데도 불구하고 제장을 거느리고 내지로 물러나 적을 피했으며 우후 우응진을 시켜 관고(官庫)를 불타게 했으므로 2백년 동안 쌓아둔 재물이 하루아침에 없어져 버렸다.(선조실록 25년 6월치계)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은 원균의 수군자패자괴 사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장계를 올렸다. 적이 일어나 출몰하니 연해안과 여러섬에 있는 진포의 장수들은 겁을 먹고 서로 다투어 육지로 도망쳤으므로 바다를 지켜야 할 여러 진포는 텅 비어버렸다. 경상도 우수영은 수사와 우후가 수영을 스스로 불태우고 어디로 도망쳤는지 알 수 없고 수사는 단 한 척의 배를 타고 사천 포구에 호위병 수명과 함께 몸을 은신하였다. 군졸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다(실록선조 25년 6월 김성일 치계(馳啓))
5. 충무공 함대의 제1차 출전
중위장을 방답첨사 이순신(純信)으로 삼고 좌부장에 낙안군수 신호로하였으며 전부장은 흥양현감 배흥림으로 하였다. 중부장에 광양현감 어영담을 발탁하고 유격장에는 발포가장 나대용이 맡았으며, 우부장은 보성군수 김득광으로 삼고 후부장에 녹도만호 정운이 되었다.좌척후장에는 여도권관 김인영이 맡았고 우척후장은 사도첨사 김완을 세웠다. 우부기선통장에는 사도진군관보인, 이 춘으로 발탁하고 좌부기선통장은 순천대장 유 섭이 되었다. 한후장은 영군관급제 최대성이 되었으며, 참퇴장은 영군관급제 배응록이 발탁되었다. 돌격장에는 영군관보인 이언량이 맡았다.
충무공은 함대편성을 위와 같이 마치고 4월30일 오전4시에 여수를 출항하여 남해도 미조목을 거쳐 당포로 갈 예정으로 남해현령은 미조목, 첨사, 곡포, 상주포, 만호와 평산포, 권관을 인솔하여 미조목에 대기하라 명령하였다. 원균의 제보에 따르면 왜적의 함정이 500여척이라 했는데 우군의 함대는 겨우 24척이므로 남해도의 수군함대를 보강하여 전열을 강화하고 남해도 단위 지휘관들의 수로 안내와 경계임무를 수행시키고자 하는 의도였다. 남해읍성에 간 이언호가 4월29일 귀영보고에 의하면 읍성내는 이미 관, 민과 군량창고, 무기창고가 비어 있었고 한 사람이 있어 원인을 물으니 왜적이 가까이 온다는 소문에 모두 도망갔다며 행방을 모른다고 하였다. 의심이 나서 다시 군관 송한련을 보내 확인한 후 충무공은 큰 충격을 받았다.
첫째는 남해도에 전라좌수군을 도와줄 수군이 전혀 없다는 것. 둘째는 원균과 만나기로 한 당포 항해도중 왜군의 복병에 대한 대책이 전무한 것, 셋째 보강하려 했던 계획이 허물어진 것, 넷째 미조목에서 당포까지 함대안내할 경상우수군 장수가 한사람도 없게 된 것, 전라 좌수영의 군의 사기와 민심의 동요가 문제였다. 밤길에 수영성을 빠져나가는 사람이 길을 메웠다. 이에 포망장(도망병 체포군관)을 요로에 배치도망병을 잡아들이며 그중 두명을 참수 효시하여 동요를 막았다. 이에 전라 순찰사 이광에게 전라 우수군의 지원을 요청하여 우수군이 도착할 때까지 출전을 연기했다. 우수영에서 좌수영까지 거리는 수로로 200㎞로 역풍만 아니면 5월1일∼2일에는 여수에 도착할 것이라 믿으며 좌수영 예하의 수군은 4월29일까지 모두 여수에 집결시켰다. 4월30일 출전을 위한 준비점검을 실시하고 5월1일 함대를 편성하여 실습을 하고 출전에 대한 제반 작전계획을 완료하고 모두 결연한 의지로 출전을 위한 사기는 충천하였다. 5월2일 함대의 진형운동(陳形運動)을 실시하고 밤에 사용할 암호를 용호(龍虎) 복병시 사용할 암호를 산수(山水)라 결정했다. 5월3일 광양현감 어영담과 흥양현감 배홍림과 작전회의에서 어영담에게 여수 → 미조목 → 당포까지 물길과 함대 안내를 책임지게 한 것은 경상도와 전라도 수군 장수직을 여러번 역임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녹도만호 정훈이 와서 왜적이 서울에 접근한다는 소문이니 큰일이다. 경상도 출전시기를 더 이상 늦추면 곤란하다. 언제올지 모르는 이억기를 그만 기다리고 당장 출전하자고 촉구하면서 경상도의 왜적을 공격하면 자연 호남을 지키는 것이 되며 또한 영남을 돕는 것이되니 시일만 허송하지 말고 출전하자고 주장함에 송희립등의 찬동으로 드디어 충무공은 전수군에게 명령하여 5월4일 오전2시 출전하였다. 여수를 출항한 함대는 해안과 도서를 수색하며 항진하여 소비포 앞바다에서 하루밤을 지내고 5월5일 낮12시에 당포에 도착했다. 원균이 5월6일 합류로 결진하고, 5월7일 옥포, 함포해전을 하였으며 5월8일 적진포 해전후, 5월9일 낮12시 당포에 돌아왔다.제1차 출전기간은 여수에서 출발 적진포 해전을 마치기까지 6일간이었다. 충무공 함대는 판옥전선(板屋戰船) 24척 협선 15척 포작선(鮑作船 고기잡이배) 46척으로 편성되었으며 5월6일 원균이 제공한 정보에 따라 왜군이 정박하고 있다는 천성(天城 : 창원천성리) 가덕(加德 : 천가성북리)으로 향하면서 가는 수로가 둘인데 내해로 가는물길과 외양(外洋)으로 가는 물길이 있는데 척후선을 앞장세우면 수색이 필요없으므로 외양으로 가는 물길이 좋다하여 당포를 오후에 떠나 송미포에서 밤을 새우고 5월7일 아침 4시에 출발 낮12시경 옥포 앞바다에 도착하니 척후선이 신기전(神機箭)을 발사 적의 출현을 신호하였다. 이에 제장들에게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조심하고 진중하라 당부한후 함대를 전투용으로 앞세우고 쾌속하여 옥포만으로 진격 왜선 30척이 정박된 것을 발견했다.적선은 붉고 흰기를 수없이 매달아 대나무 장대로 장식했는데 기리가 짧은 기는 번(幡:표시기) 긴기는 당(幢)으로 기마다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많은 기가 바람에 펄럭이니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이는 심리전의 하나로 쇠로 만든 탈에 뿔을 달고 말털로 가로세로 수염을 단 것이 귀신같고 짐승같아서 처음보는 사람은 놀래게 되었다. 왜적은 마을에 들어가 분탕질 중에 불을 놓아 연기가 산을 가릴 정도였다. 왜적은 우리 함대가 진격해 오는 것을 보고 배를 저어 포구 밖으로 도주했다. 충무공은 왜적이 함대전열을 갖추고 대항할 시간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하여 급히 포구의 중앙을 진격했다. 동서양안으로 분산되는 적선을 함대로 추격 함포와 활을 집중 발사하여 격파했다. 조총으로 대항하다가 약탈한 물품을 바다에 던지고 도망하는 적선을 들이받는 충파전을 감행했다. 전과로는 적선 26척을 충파후 불태우고 도살한 군졸수는 4080명으로 완승했다. 옥포해전에서 전멸한 왜군은 정예수군인 등당고호(藤堂高虎)의 수군이다.(근대일본 국민사 풍신씨시대 丁篇 p.620) 등당의 수군은 왜의 수륙 병진 전략의 선봉수군으로 유명하다. 옥포에서 왜군을 섬멸한 충
6. 민간의 사기충천과 의병 궐기
임진년 4월14일에 부산진을 상륙한 왜적은 5월3일 저항한번 받지 않은채 서울에 무혈 입성하였다. 부산∼서울간을 19일만에 진군한 셈으로 하루평균 24㎞를 진군하여 총 460㎞ 행군한 것이다. 이처럼 무애 지경으로 진군한 원인은 우리측의 전쟁준비의 불비와 왜적이 20만이란 대군에 조총등 신무기의 무장으로 각 읍성의 수령 방백들이 겁에 질려 스스로 패잔하여 백성은 여지없이 짖밟히고 희생을 당한 것이다.육전은 절망적으로 붕괴되었으나 충무공의 경상도 남해안 해전은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왜적선 42척 군졸 6920명을 도살하였다는 소식이 순식간에 전파되어 백성들의 희망과 사기를 충천시켰다. 충무공이 연해안의 적을 칠 때 곳곳마다 피난민들이 승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흐느껴 울부짖으며 다시 살게 되었다고 기뻐하며 적의 동태를 서로 알려주기도 했다.(임진장초 5월10일 계본)곽재우(郭再祐) 권응주(權應銖) 김면(金沔) 정인홍(鄭仁弘)등의 의병이 경상도에서 궐기했고 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 송제민(宋濟民)등이 전라도에서 궐기했다. 의병들은 의병장에 의하여 집결되어 적을 공격하고 보급로를 습격했다. 경상도의 의병궐기는 충무공의 승전장면을 본 백성들의 고무된 발동이요 전라도의 의병 궐기는 충무공의 수하 장병이 전라도 출신으로 승전의 기쁨을 부모형제 친지들에게 전했기 때문이다.고경명은 몸소 기병하면서 충청도,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에 격문을 보내며 궐기를 촉구했다.(징비록 3번격문)
7. 충무공함대의 제2차 출전
제2차 출전 함대편성은 제1차 출전때와 다르게 하였다.
① 왜란이 발발하자 전라감영에 파견 근무한 순천부사 권준(權俊)을 수군에 복귀 중위장으로 삼고
② 중위장이던 방답 첨사 이순신(李純信)이 전부장으로 발탁하였으며
③ 전부장이던 흥양현감 배홍립을 후부장으로 하고
④ 후부장이던 녹도만호 정운이 좌척후장으로 삼았다.
⑤ 귀선 돌격장으로는 급제 이기남이 추가임명되었으며
⑥ 한후장은 군관 최대성에서 군관 가안책으로 삼고
⑦ 참퇴장은 전 참사 이응화로 발탁하였다.
⑧ 유수장이던 우후 이몽귀는 좌별도장으로 삼고
⑨ 출전후의 수영을 수비하기 위하여 군관인 윤사몽을 발탁하여 책임시키고
⑩ 조방장 정걸을 전라우수군과의 경계인 흥양에 파송하여 서울을 침범한 왜적이 한강에 조운선을 탈취 전라도에 침범하려 한다는 소문이 있기 때문이다. 출전함대는 23척으로 제1차에는 24척이었으나 1척을 나누어 정걸에 주었기 때문이다. 5월29일 여수출발 사천에서 해전을 거행하고, 6월1일 사랑포에서 휴식한 후, 6월2일 당포해전을 거행하였으며, 창신도에 도착 밤을 지냈다. 6월3일 추도(통영) 정찰을 마치고, 6월4일 당포 앞바다에서 이억기 함대와 합류하여 착량에서 하루밤을 쉬었다. 6월5일 진해 앞바다에서 해전을 하고, 당항포 해전후 그곳에서 밤을 지냈다. 6월6일 새별 왜선 1척을 당항포 해구에서 격파하고 도살하였다. 6월7일 율포에서 접전하고, 6월8일 마산포, 안골포, 제포, 웅천등지를 수색한 후 휴식하였다. 6월9일 웅포앞바다에 함대를 주둔시키고 협선으로 가덕, 천성, 안골포, 제포를수색하고 당포에서 밤을 지낸후 6월10일 미조목에 와서 연합함대를 해산하여 각진으로 귀영하였다.
(1) 사천해전
원균은 사천선창에 있다가 충무공 함대가 오는 것을 보고 전선(戰船) 3척을 이끌고 노량에 나와 충무공 함대와 결진한 후 왜적의 동태에 대하여 상황설명을 하였다. 왜선 1척이 해안선을 따라 사천선창으로 도망가는 것을 보았다. 이 배는 왜군의 척후선으로 추격하자 배를 버리고 상륙 도주함으로 충파하여 불태워 버렸다. 계속 항진하여 사천선창에 이르자 왜적 진영이 발견되었다. 선창뒤산에는 왜적이 진을 치고 있었고 적진밑에는 대선(大船) 12척이 매어 있었다. 충무공 함대가 접근하자 왜적들이 칼을 휘두르며 짓밟을 기세로 완강했으나 화살의 사정거리 밖으로 대적도 되지 않고 썰물때라 충파도 할 수 없어 적전상 후퇴하여 적군을 유도하여 바다 가운데서 섬멸해 버릴 방책을 세웠다. 그러나 쫓아 나오지 않았으며 이때 밀물이 되어 판옥전선이 적선에까지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함대보다 먼저 거북선을 적진에 돌입시켜 천(天) 지(地) 현(玄) 황(黃)자 총통등 각종 함재화포를 적선과 적군에 집중 발사하자 산위에 적과 선창가의 배에 탄 왜군이 일제히 충무공 함대에 조총을 빗발같이 쏘아댔다. 이에 모든 함대에 돌격 명령을 내려 적군 함대에 피령전(皮翎箭)화전등 각종 화포를 발사하고 화살은 장편전으로 발사하니 그 소리가 바람치는 소리 같았으며 화포소리와 함께 천지를 진동하는 듯 하였다. 수많은 왜적이 쓰러지자 나머지는 산위로 도주하여 빈배는 충파한 후 불살으니 산위에 적들은 발을 구르며 대성통곡했다.소선 2척을 일부러 태우지 않고 남겨둔채 사천만입구 모자랑(毛自郞)으로 함대를 이동한 후 그날밤을 지냈다. 다음날 남겨둔 배를 타고 도망쳐 나오는 적병을 모조리 소탕하기 위한 전술이다. 이튿날인 6월1일 새벽에 경상우수사 원균이 충무공에게 와서 어제 남겨둔 적선 2척이 도망갔는지 여부를 확인도 할겸 전사한 적군의 목을 베고자 요청하므로 허락하였다.원균은 평소 적병의 수급을 조정에 보내 자기의 전공을 삼는데 이력이 있었다. 아침 8시에 돌아왔는데 왜졸의 목3개와 남겨둔 배를 불살아 태웠다고 했다. 낮12시에 함대를 사랑포 앞바다로 이동 장병들을 휴식시키고 이곳에서 하루밤을 지냈다. 이번 출전에서 전과로는 적의 누각 대선 12척과 척후선 1척을 불사르고 적병 2600명을 도살했다. 패잔병은 굶주려 죽거나 병으로 쓰러진 것을 우리 백성들에 의해 거의 타살되었다. 이 해전에서 충무공이 조총의 탄환에 왼쪽어깨를 맞아 총상을 입었다. 피가 발뒤꿈치에 흘렀고 철환이 박힌 깊이가 2치정도라 했다.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선두에 나가서 싸우다 적탄에 맞아 상처가 매우 심하였다. 어깨뼈에 부상하여 악즙(고름)이 나와 옷을 입을 수가 없었으며 백방으로 치료하였으나 효험이 없었고 활을 쏘지 못해 고민이다(임진장초 6월14일계본)사랑앞바다에서 밤을 보내고 6월2일 오전8시 척후선의 제보에 의하여 당포선창에 왜적선의 수색을 명령하였다. 당포 선창에는 왜군대선 9척, 중·소선 12척이 매어 있는데 제일 큰 배에는 붉은 일산을 세우고 있었으며 그 장막안에는 왜장이 앉아 우리 함대가 접근하여도 두려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왜적 300여명은 절반은 상륙하여 분탕질하고 반은 산에 진을 치고 있다가 충무공 함대가 접근하자 조총으로 맹열히 반항했다. 거북선은 2층 누각선인 대장선에 접근 용두(龍頭)를 치켜들고 용구(龍口)에 설치된 현자 총통으로 철환을 발사하며 천자지자 총통으로 대장군전(大將軍箭)을 쏘면서 동시 뱃머리로 왜장선을 충파했다. 뒤에 탔던 사수들이 화포와 화살을 집중으로 대장선에 발사했다.중위장 권준이 왜장선으로 돌격하여 왜장을 향해 활을 쏘아 명중시켜 왜장이 바닷물에 떨어지자 첨사 김완과 군관 진무성이 목을 베었다. 대장이 죽고 군졸이 수없이 쓰러지자 나머지는 패주하여 배는 모두 불태웠다. 패주병을 뒤쫓던 척후선이 제보하기를 왜대선 20여척이 많은 소선을 거느리고 거제에서 당포로 오고있다는 것이다.
(2) 당포해전
당포앞바다에서 싸우기를 계획하고 항진중에 적군들이 우리 함대를 보고 도망가자 뒤를 추격하다가 날이 져물어 중지하였다. 함대를 창신도로 이동 밤을 새우고 이튼날 당포해전을 거행하여 왜적선 대선 9척 중·소선 12척을 충파한 후 불태우고 병졸 2820명을 도살하였다. 전날 당포해전에서 도망친 왜군함대를 수색하려 추도에 도착하여 온종일 그 일대 섬들을 수색하였으나 함대를 발견치 못하였다. 추도 앞바다에서 밤을 지내고 당포앞 바다로 이동, 적 함대를 계속 수색하던중 오전 10시경 당포 주둔병 강탁이 산으로 피신했다가 충무공 함대를 보고 달려와 적정에 대하여 6월2일 당포해전에서 도망친 왜군함선이 거제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즉시 닻을 올려 거제로 출발하려 할때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함대를 이끌고 오고 있었다. 6월4일 낮12시로 함대는 판옥전선 25척으로 형성되었다. 지원군이 오는 것을 보고 충무공 진영은 좋아서 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8. 3도수군 연합함대의 제1차 출전
조선수군의 함대는 전라좌수군 전선 23척, 우수군 전선 25척, 원균의 패잔전선 3척으로 51척의 연합함대로 위용을 갖춘후 당포 앞바다에 정박하고 오랫동안 전략 회의를 한후 충무공에게 총지휘권을 위임하기로 결정한 후 해가 지자 계속 항진하여 착량에 도착,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6월5일 아침에 안개가 걷히자 출범을 서두르는데 거제에 산다는 김모(金毛)등 수명이 작은배를 타고와서 충무공에게 왜군의 적정을 소상히 보고하였다.
(1) 당항포 진해해전
항진을 재촉하여 급히 당항포로 향해 진격하라 명령을 내렸다. 오후 1시경 소소강 입구에 연합함대가 도착할 때 진해에서 왜군 대선 4척과 소선 수척의 소함대가 바깥바다로 빠져 나가려 할때 좌척후장 녹도만호 정운이 추격하자 배를 버리고 도주하여 함대를 충파한 후 불태웠으며 880명을 도살하였다. 연합함대는 진해성 밖의 들판에 기를 세우고 진을 친후 함안군수 유승인에게 사람을 보내어 소소강과 당황포 지형을 물은 후 판옥전선 3척을 강안으로 보내어 지형을 정찰케 했다. 만일 적선을 만나면 후퇴하여 유도하라 명령하고 연합함대는 소소강 지형을 이용 함대를 은신하였다가 적선이 척후선을 쫓아나오면 섬멸할 것을 명령하였다.척후선이 강입구로 돌아나오면서 신기전을 발사 적선이 있다는 신호를 보내 전선 4척을 강입구에 배치하여 적의 지원함대 습격을 대비시키고 전 함대를 이끌고 강안으로 들어갔다. 당항포에 이르러 적선의 규모를 보니 검정색 칠을 한 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이 매어 있었다.충무공 함대가 접근하자 조총을 발사 항전하였으나 적선을 포위하고 거북선이 적의 대장선을 먼저 공격하여 천자 지자 총통을 집중 발사하자 선체가 관통되는 등 전세가 불리해지자 도주할 것을 짐작하여 제장들에게 포위를 풀고 거짓 후퇴하는 듯 물러 나오도록 하였다.
전략과 같이 강가운데로 쫒아온 적선을 4면으로 포위 거북선이 선봉으로 접근하여 용구(龍口)를 치켜올리고 현자 총통을 발사 적대장 선의 누각을 파괴해 버렸다. 집중 불화살을 맞은 배는 전소되면서 지휘하던 왜장이 화살에 맞아 물위로 떨어지고 호위하던 배들도 도주하였다. 혼란에 빠진 적선들을 포위 모두 소탕하고 43급의 머리를 베고 적선 1척만 남겨둔채 도망친 패잔병이 이용하여 나오도록 유도 섬멸전략을 세웠다.6월6일 새벽 2시 방답 첨사 이순신(純信)에게 소소강 입구에 은신하여 전날 예비한 배를 타고 나오는 패잔병을 잡으라고 명령했다. 생각대로 100여명의 패잔병이 타고나오자 유도 사격하여 섬멸시켰다. 적선에는 24∼25세로 보이는 젊은 왜장이 화려한 전복차림에 칼을 짚고 독전하던중 10여개의 화살을 맞은 뒤에 물에 떨어지자 첨사가 목을 베었다.이로써 소소강구의 싸움은 오전 8시에 끝났다. 빈배를 수색하는데 냉방장치가 되어 있었으며 치장이 화려했다. 작은 나무상자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3040명의 이름을 기록한 명부가 있었다. 이름 밑에는 각자의 서명에 선혈(鮮血)이 발라져 있었다. 충무공은 승첩장계에서 이 문서가 삽혈동맹지서( 血同盟之書)라 지적했다. 이 말은 삼국사기의 기록과 같이 김유신과 김춘추가 서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마신 맹세에서 온 말이다.
이 전투에서 전사한 왜장은 왜수군 최정예 수장인 신농수(信農守) 내도통지(來島通之)이다. 적함선의 깃발 색깔은 식별하기 위한 것으로 옥포는 붉은색 사천은 흰색, 당포는 황색, 당항포는 흑색이었다.경상우수사 원균은 이번 전투에서 50여급을 베었다. 전쟁마다 전과의 몫을 챙기는 셈이다. 당항포해전의 전과는 적선 26척을 충파하여 불태우고 도살한 적군병은 2720명이다.6월7일 이른 아침 연합함대는 시루섬(창원, 구산)으로 이동, 진을 치고 척후선을 가덕도와 천성보에 보내 수색하였다. 10시경 귀환하여 가덕도 앞바다에서 도주하는 왜적 3명의 목을 베고 선박을 불살은 보고를 받고 치하하였다. 다시 천성보 수색을 명령하여 낮 12시 연합함대가 영등포 앞바다에 이르자 왜군 대병선과 중선이 부산을 향해 도주한다는 제보를 받고 추격하여 충파한 후 불살으거나 포획했다. 도살한 병졸은 1100명이다.
9. 3도수군 연합함대의 제2차 출전
연합함대의 제2차 출전을 위한 준비를 서두르고 있던차 왜군전선 10여척 또는 30여척이 가덕도 거제도 등지의 연안과 도서지방에 출몰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육지에선 충청도의 접경과 전라북부지역 금산에 적이 크게 번지고 있다는 정보를 접수하고 왜적이 수군과 육군으로 나누어 전라도를 침범하려 했다(임진장초 7월15일계본) 7월6일 2차 출전명령을 내렸다.전라우수사 이억기는 약속대로 함대와 같이 7월4일 오후 여수에 도착하였다. 다음날 7월5일 좌·우도 수군은 연합훈련을 실시한 다음 7월6일 노량으로 출전하였다. 이억기 25척 충무공 24척 경상우수사 원균도 수리한 전선 7척을 참전시켜 7월6일 노량에서 원균과 만나 창신도에서 밤을 보내고 7월7일 당포에서 쉬고, 7월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왜적척후를 쫓은후 견내량 앞바다에 진을 치고 밤을 보냈다. 7월9일 온천도를 거쳐 외줄포에서 밤을 보내고, 7월10일 안골포에서 출몰하는 적선을 물리치고, 7월11일 양산강, 김해포구, 감동포, 가덕도 연해안등을 수색한뒤 몰운대에서 함대훈련을 하고, 7월12일 한산도에 와서 휴식한 후, 7월13일 귀영하여 8일간의 2차 전투를 마쳤다.
(1) 한산도 앞바다 해전
왜군대선 중선 소선 70여척이 오후 2시경 견내량에 정박했다는 주민 김천손의 제보가 들어왔다. 7월8일 적의 대선 1척과 중선1척이 3도수군 진영을 정탐후 견내량으로 도망치는 뒤를 연합함대가 추격하던중 견내량 남단 입구에 서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덕포리 포구안에서 발견하였다. 지형이 좁고 암초가 많은 곳이라 해전은 불리한 곳이므로 판옥선 5∼6척을 파송, 적의 척후선을 추격하여 적의 함대를 동요케 하고 작전상 후퇴하는 식으로 적함선을 유인 넓은 바다로 이끌어내서 학익진(鶴翼陳)으로 포위한 후 지, 현, 승자 총통으로 사격하여 적선 2척을 파괴하자 겁을 먹고 패주하는 적선을 추격, 소탕하였다. 한산도 해전의 전과는 충무공함대에서 충각대선 포획 3척 불태움 3척 대선포획 6척 불태움 3척, 소선 2척 총 17척의 전승을 거두었으며 전라좌·우도 수군에서는 대선 20척 중선 17척 소선 5척 충파 불살움 총 42척과 적병 도살 8980명과 수군대장 협판안치를 비롯 적장들이 이 해전에서 모두 사살하여 완승을 거양하였다.
(2) 안골포해전
7월9일 연합함대가 가덕도를 향해 항진하던 중 척후선이 안골포에 적선 40여척이 정박하고 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연합함대가 온천도 외줄포에서 밤을 지내고 7월10일 새벽에 안골포를 출발했다. 해상거리가 21㎞로 시속 7㎞로 3시간 걸려 오전 7시경 도착하였다.충무공의 전략으로 이억기함대는 송도에 잠복했다가 접전이 되면 달려오도록 하고 원균의 함대는 함께 항진하였다.안골포에는 대선 21척 중선 15척 소선 6척으로 결진되었는데 3층루각대선 1척과 2층루각 대선 2척은 포구앞에 정박하고 나머지는 포구안에 열박해 있었다. 연합함대는 포구앞에 있는 3층루각대선과 2층루각대선을 집중사격하여 3척의 탑승요원을 거의 사살했다. 왜군은 작은 배로 사상자를 실어내며 새로 병력을 보충했다. 온종일 반복된 해전으로 누각대선은 파괴되었으며 나머지 왜병들은 육지로 도주하였다. 날이 어두어지자 연합함대는 외양 앞바다로 이동 밤을 보내고 다음날 대적할 계획을 세웠다.7월11일 오전2시에 연합함대는 안골포를 포위하였으나 적병이 이미 도주한 후였다. 왜적들은 전사한 군졸들을 12곳에 모아 불태웠으며 안골포는 온통 붉은 피자욱으로 얼룩진 모습이었다. 13시간 동안 격전속에 2/3이상 군졸이 도살되고 나머지는 배를 타고 부산으로 패주하였다. 한산도, 안골포 해전은 순 조총으로 무장한 구가, 가등의 수군이 강행하였는데 이들은 당시 왜수군중에서 최정예 수군이었다. 연합함대는 10시경에 가덕도에 이르러 수색함대를 편성 양산강, 김해강의 강구를 수색하고 낙동강을 거슬러 감포동(구포)까지 수색했으나 적선이 없었다. 다시 몰운대 앞바다에서 함대시위를 감행했다.
(3) 함대시위 감행
충무공은 장계내용에서 열을 지어 함선을 결진한 후 수군의 위력을 과시했다 하였다. (임진장초 7월15일계본) 함대시위란 함대가 결진 또는 진형운동을 하며 온바다가 진동하도록 함포를 발사하면서 장병들이 함선의 갑판위에 도열한 후 북을 치고 나팔을 불고 각종 기를 휘두르며 일제히 고함을 지르면서 충천의 기세를 올리는 것이다.부산에 집결해 있는 왜군의 사기를 꺽기 위한 전략으로 감행한 것이며 부산까지 거리는 15㎞정도이다. 왜군이 몰운대 동쪽 중요 포구에 척후 소함대를 배치 감시 경계하고 육지에는 후망군( 望軍)을 배치하여 바다에서 활동하는 충무공 수군을 감시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왜장들에 공포를 주기위한 충무공의 전략이었다. 11일 오후 10시간 동안 함대시위를 마치고 가덕도 서안 천성보로 이동 상당기간 정박하여 적으로 하여금 천성보에 오래있을 것처럼 보이게 한뒤 한 밤중에 함대를 한산도에 이동하였다. 7월12일 10시에 도착하여 하루를 휴식하고 7월13일 연합함대를 해체하여 각자의 수영으로 개선하였다.
10. 3도수군 연합함대의 제3차 출전
충무공은 왜적의 침략의 기지요 총전략기지인 부산을 공격하기 위하여 40여일간의 준비를 하였다. 함선과 협선을 새로 만들고 새로 만든 화포를 새함선에 설치하고 사격군의 확보와 확보된 군병을 합동훈련으로 8월1일부터 8월23일까지 23일간이나 실시하여 전투역량을 함양하고 8월24일 출전하여 여수에 집결하였다. 공격지 부산에는 왜의 병선이 500여척이 정박하고 있고 병력이 6∼7만이나 주둔하고 있으므로 준비상 시간이 요청되었다.충무공의 최종 공격목표는 왜적의 침략 총 기지인 부산을 공격하여 적군을 섬멸하여 왜군의 본국과 부산간의 해상 병참선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종래의 연합 병력이 미약했기 때문에 이를 보충하고자 전라 좌·우도 수군의 판옥전선이 74척 협선이 92척으로 2차 출전때 49척보다 25척이나 신조 증강한 것이다. 좌수군 산하 관, 포는 5관5포이며 우수군 산하 관, 포는 15관 12포였다.(임진장초 9월초계본) 전라좌수군이 전선9척 협선 15척을 신조하고 우수군이 전선 15척 협선 25척을 신조하여 병력을 증강하였는데 좌수군 산하의 백성들이 충무공의 애국충정에 감동하여 희생적 부담을 더한 덕분이다. 신조한 전선과 협선에 탈 탑승병력과 각종화포는 1척당 14문으로 전선 수의 화포신조와 그에 따른 전(箭)과 포탄화약 병졸이 뒤따라서 추가 준비되어야 했다.8월24일 오후 4시에 여수를 출항하여 관음포에서 밤을 지내고 8월25일 사랑에서 원균과 만나 당포에서 쉬고 8월26일 밤중에 견내량을 통과 각호사(角呼寺-거제사동) 앞바다에서 밤을 쉬고 8월27일 우고포에서 밤을 보내고 8월28일 장항포(창원장항)에서 정박 낙동강일대를 수색하고 천성에서 밤을 보냈다. 8월29일 몰운대 해안과 여러 도서를 수색한후 장림포에서 왜선 6척을 불태우고 9월2일 개선 귀영하였다. 연합군의 3차 출전은 8월28일 아침 척후의 정황보고에서 창원 구곡리에 사는 어부 정말석(丁末石)이 김해강에서 왜군에게 사로잡힌지 3일만인 8월27일 밤에 탈출하여 보고하기를 왜선들은 3일전부터 몰운대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하며 정말석도 이런틈에 도망쳐 나왔다. 김해강 일대의 왜선은 모두 부산방면으로 피주하였다는 것이다. 어부 정말석의 왜군동향에 대하여 듣고 충무공은 즉시 원포를 출항하여 장항포로 포구 깊숙이 연합함대를 은익시키고 왜적이 탐지할 수 없도록 하였다. 방답첨사와 광양현감에게 명령하여 김해, 양산강 강구의 섬들에 은신하여적정을 살피는데 2척의 전함으로 형성된 척후였다. 오후 5시경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여 결과보고에 왜군 소선 4척이 김해 양산강을 나와 몰운대로 갔을 뿐이라 했다. 충무공은 함대를 장항포에서 천성보로 이동하여 밤을 지냈다. 이는 왜적의 장항포에 야습을 피하기 위한 전략적 이동이었다. 8월29일 새벽 2시에 천성보를 출항 남쪽 바다에 진을 치고 쾌속 척후선단을 김해 양산강 깊숙이진입시켜 수색토록 하였다. 적선 4척과 소선 2척이 장림포를 향해 항진하는 것을 발견 이에 즉각 포격하자 군졸들이 육지로 도주하고 적선은 충파하여 불태웠다.다시 함대를 장항포로 은밀히 이동한 후 밤을 보내고 다음날 부산 공격을 위한 계책으로 야간에 회의를 하였는데 9월1일 부산포공격을 결의했다. 새벽2시 연합함대는 장항포를 출발 부산으로 향했다. 몰운대 앞바다에 도착이 오전8시 역풍으로 함대의 항진이 어려웠으며 서로 부딪쳐 적지않은 손상을 입었다.부산 앞바다 동북방 화준말구에서 적의 함대 5척을 마주쳤는데 왜수군 부산방어 제1전초 경계 함대였다.연합함대를 화준말구 앞바다에 정박시키고 조방장 정걸의 지휘로 특별기동 함대를 출격 적선을 섬멸케 했다. 화준말구 북방 다대포에 왜군 함정 8척이 정박해 있었다. 이 배는 부산 방어 제2전초 경계 함대였으며 정걸의 지휘로 공격하여 충파후 불태웠다.다시 두송말(頭松末)을 지나자 그 북방 서평포에 왜군함선 9척으로 편성된 왜의 제3전초 경계함대가 있었다. 이 또한 정걸이 공격하여 충파후 불태웠다.낮12시경 당강말(當崗末) 앞바다를 지나 부산진포를 향해 항해하는데 절영도(絶影島) 외양(外洋) 송도 앞바다에 왜군함선 2척이 보였는데 제4 전초 경계함대로 또한 공격하여 섬멸하였다.
11. 부산진포 해전 쾌승과 제해권 장악
녹도만호 정운이 선봉으로한 5척의 돌격함대가 왜적의 요격함대 4척을 초량목에서 순식간에 섬멸하는 광경을 지켜본 연합함대의 장병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기를 흔들고 북을 치며 함성을 지르면서 일제히 부산진포를 향해 돌진했다. 부산진포해전은 오후4시경에 시작되어 오후7시에 끝냈다. 3시간 전투가 된 셈이다. 충무공 함대가 선봉에 섰으며 그 뒤에 이억기 함대가 또 그 뒤에 원균 함대순으로 함대 진형에 장사돌진(長蛇突進)이라 한 것으로 보아 일제향전(一齊向前)의 함대공격 진형을 취한 것이다.전과에 대한 충무공의 장계는 다음과 같다. 부산진성에서 동쪽으로 5리쯤 떨어진 해안의 세곳에 진을 치고 정박해 있던 왜군함대는 대·중·소로하여 대략 470여척이며 이들은 충무공함대의 무위(武威)를 바라보고는 두려워서 감히 나와 싸우지 않았다. 이에 여러 배가(연합함대) 왜선의 앞을 곧바로 찌르자 배안과 성안(부신진성안)과 산위의 진지에 있던 적이 조총과 활을 옆구리에 끼고 거개가 산으로 올라가서 여섯곳에 나누어 진을 친후 우리를 내려다 보면서 조총과 화살을 비가오듯 발사했다.조선군 포로병같은 차림의 병졸이 편전과 모과(木瓜)만한 철환과 수마석괴(水磨石塊) 등을 우리 함선에 많이 쏘아 맞히는 것이 발견되었다. 포로를 역이용한 것 같다.이에 3도 연합군들은 더욱 분격하여 천, 지, 총통으로 장군전, 피령전, 장편전 철환 등을 발사 항전하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적선 100여척을 충파하였고 화살에 맞아 죽은 병졸의 수는 알 수 없었으며 3도 연합군은 병선 충파를 위주로 싸웠다.(임진장초)녹도만호 정운이 부산해전에서 돌격전을 감행하다가 전사했다. 충무공은 몹시 애통하며 군관 윤사공을 호상 차사원으로 임명하여 정운의 영구를 고향 영암으로 운구 장례를 후이 지내도록 하며 몸소 조사를 지어 애도하였다.(충무공 실기권1)부산 해전에서 노획한 것은 무기와 군량 필목이 많았다. 함선 충파가 100여척 불태운 것이 34척이다. 왜적은 부산진포가 공격을 당한 후 본토와의 해로가 차단될까 공포심으로 전전긍긍하였다.
12. 명나라, 조선연합군 평양수복
계사년 1월8일 조, 명 연합군은 왜군이 점령한 평양성을 수복하였다. 이로써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 황해도 등 서울 이북지방이 1월30일까지 왜적이 자진퇴각하여 수복되었으며 왜군은 서울에 집결하였다.이때 왜군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1월 하순부터 3월이 될 때까지 오늘 하루 사는 목숨을 다행으로 생각하면서 떨어져 가는 군량에 절망하고 있을 때 명나라 유격장군 심유경이 한강으로 배를 타고 들어왔다(吉野日記) 궁지에 몰린 왜군에게 치명적 타격은 권율 순찰사의 행주 대첩이다.
(1) 권율이 지휘한 행주대첩
전라 순찰사 권율(權慄)은 전라도 관군 1300명 전라도 의승군(義僧軍) 승장 처영(處英)이 1000명이 서울을 수복하기 위하여 행주성에 진격했다(再造藩邦志2)왜적은 서울에 주둔군 중에서 정예병 3만여명을 선발하여 계사년 2월12일에 행주성을 포위 공격했다.(선조실록 2월24일 고산현감 신경희 기술. 吉見家朝鮮陳日記)왜적은 조선 의병의 병참선 차단으로 군량은 물론 무기 탄약 화약의 공급이 불가능하여 주 무기인 조총을 사용하지 못하고 주로 대검과 창으로 의승군이 수비하는 목책(木柵)을 향해 도전했다. 의승군은 창과 칼로 결사적인 육박전을 감행하였다.(선조실록 1월) 관군은 접전으로부터 안전한 성루에서 화포와 화살을 쏘아 의승군 뒤에서 지원하였다. 총 지휘관인 권율의 지휘로 행주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행주 전투에서 참패한 왜군은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었을 뿐 아니라 조선 의병들이 군량창고인 용산창(龍山倉)을 불질러 군량을 모두 태워 왜군은 굶어 죽던지 부산으로 총 퇴각 하던지 양자 기로에 처하였다. 이와같이 극한적인 궁지에 몰린 왜군에게 구세주 같은 명나라 유격장군 심유경(강화사)이 온 것이다.
(2) 명,일조약과 왜군서울 철수
피를 흘리지 않고 서울을 탈환 하려한 심유경과 굶어 죽기 직전에 놓인 왜군장 소서행장간에 극비의 조약이 성립되었다.그 내용으로
① 왜군이 서울에서 철수할 때 명군이 추격하지 않는다. 조선군이 추격 하려해도 명군이 이를 제지하여 왜군의 서울 철수를 보장한다.
② 조, 명군이 철수하는 왜군을 추격하지 않는다는 보장으로 심유경이 왜군과 함께 부산으로 같이 간다.
③ 심유경은 왜국에 건너가 풍신수길을 만나 왜군의 조선철수를 설득한다.
위와같은 조약으로 심유경은 4월13일 서울에 도착하고 소서행장 등 왜장들은 철군을 개시 4월19일 서울을 완전 철수하고 4월 20일 조, 명 연합군은 서울을 수복했다.
13. 3도수군 연합함대의 계사년 제1차 출전
충무공은 부산해전에서 개선한지 5개월 후인 계사년 2월6일에 다시 출전하였다. 계절적으로 바다의 파도가 심하여 출전할 수 없는 시기로 전선(戰船) 만들기에 전력을 기울였다.충무공은 8척의 배를 더 만들었다. 1차출전시 42척 이억기
40척 원균 7척 도합 89척이었다. 2차 출전시에는 충무공이 새로만든 8척의 배와 이억기의 새로 만든 배가 14척이 있었으나 출전하지 못했다.새로 만든 배출전시키려면 사격군이 탑승되어야 한다. 배1척당 최소한 155명의 사격군이 확보되어야 하는데 병력충당이 문제로 척당 130명 정도 보충하기도 어려운 사정이었다. 전라 우수사 이억기도 14척의 배를 만들어 놓고도 1차에 출전시키지 못한 이유도 병력 충당이 어려운데서 비롯된 것이다. 아울러 전선에 장치해야 할 화포를 주조해야 하고 화포를 발사하는데 화약과 포탄과 화살을 제작해야 하는 준비가 필요하였다.난감한 사정은 재정과 화약을 만드는 유황과 쇠를 구하는 일이 어려움이 있었다.(임진장초 정월26일)적은 충무공 연합함대의 부산공격을 저지하기 위하여 이미 웅포(진해만 옆 웅진)에 강력한 전방 수군 기지를 구축해 놓고 최정예 수군인 협판안치, 구귀가룡, 가등가명의 수군을 주둔시켰다. 적의 전력으로 함선이 115척 수군요원이 16,000여명이다. 충무공은 장계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웅포의 적이 부산길목을 막고 험한 곳에 배를 감추어 두고 소혈(小穴)을 많이 만들었으니 부득이 이 적을 먼저 게거한 후 부산으로 진격해야 한다. (임진장초 4월6일 계본)충무공 함대는 함선 89척 사격군 약 14,000명으로 구성되었다. 웅포는 낙동강 강구에서 서쪽으로 13㎞ 지점으로 낙동강 수로를 확보하기 위한 적의 전방기지로 조선 초기부터 부산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수로로 낙동강을 이용하였다. 낙동강은 조령의 문턱인 함창까지 선박이 내통되는 280㎞ 거리이며 함창에서 내려 육로로 조령을 넘어 한강의 지류인 금천까지 약 80㎞로 서울 왕래통로로 이용이 되었다. 변덕이 심한 봄날 일기를 피해 2월6일 오전2시에 출전하려 하였으나 역풍이 심해 정오 12시에 출범했다. 사량에 도착한 것은 해가 진 뒤인 오후 7시경었다.여수 → 미조목 → 사량까지의 거리는 87㎞로 7시간에 항해한 것은 서풍 이 불어준 덕이었다. 그날밤 경상 우수군 제장으로부터 적정을 청취할 수 있었으며 우수사 원균이 견내량에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2월7일 새벽 4시에 출항하여 착량을 거쳐 곧바로 견내량으로 향하여 오전10시에 도착했다. 원균을 만나 적정에 대한 상세한 보고를 받고 공격 목표를 웅포로 변경하여 밤을 보냈다. 2월8일 정오에 이억기 함대가 도착 연합함대를 형성하였다.충무공 함대 42척 이억기 함대 40척 원균함대 7척 도합 89척으로 편성 오후 4시 출항 8시에 외줄포에 도착했다. 2월9일 종일 비가 내려 쉬고 2월10일 오전 6시에 출항 웅포에 9시 도착 공격을 개시하였다.송도에 함대를 감추어두고 거북선과 쾌속전선 7∼8척을 시켜 교대로 웅포안으로 진입 화포로 목책안에 감추어 둔 적선을 공격하여 당파하는 한편 고지의 적을 화포로 공격하여 사살하였다. 이같이 공격하여 추격해 오면 포구 밖으로 후퇴하여 적선을 유인하려 했다. 그러나 적은 나오지 않았다. 거북선과 쾌속선으로 포내로 진격하여 각종 화포로 집중발사하였다. 밀 물때를 이용하여 웅포입구에 진입적선과 산상의 적에게 화포의 집중발사로 적선을 당파하고 적을 사살했다. 이와같이 전투를 2월10일, 12일, 18일, 20일 4회에 걸처 수많은 적을 사살하여 적세를 파괴시켰다. 2월22일 전투에서 왜군 도장(都將)을 비롯하여 수많은 적의 사체를 화장했는데 통곡소리가 충천했다하며 도장은 협판의 부장인 웅곡저조라 한다. 2월28일, 3월6일 웅포를 공격하여 많은 적병을 사살하고 웅천 앞바다에 복병선을 잠복시켜 적을 감시케 한 다음 3월10일 진영을 사량으로 이동하였다. 4월2일까지 사량에서 장병을 휴식시키고 또 훈련을 시키면서 조, 명 연합육군을 기다렸다. 수륙 합동 작전으로 웅포의 적을 소탕한 후 부산공격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적정이 뜻에 맞지 않아 수병들을 귀가시켜 농사준비를 시키기로 하고 4월3일 귀영을 단행했다.
14. 3도수군 연합함대의 계사년 제2차 출전
연합함대의 전선수는 충무공이 42척 이억기 54척 원균 7척 충청수군 1척 도두 104척이었다. 5월7일 여수를 출항 미조목에서 쉬고 5월8일 사량을 거쳐 9일 거을 망포에서 원균과 합류했다. 5월10일∼5월19일 견내량에 정박했다가 5월20일∼23일까지 외줄포를 경과하고 5월24일 칠천도 북단까지 함대시위를 한 후 5월25일∼6월12일까지 유자도에서 머물다가 6월13일~18일까지 세포를 살피고 19∼20일 견내량을 통과 적포에서 쉬고 21일∼25일까지 망하 옹포에 머물다가 26일∼7월3일까지 불을도에서 지내고 7월4일∼9일까지 거을 망포를 살피고 7월10일 망하 옹포를 지나 11일∼13일 거을망포를 다시 관찰하고 쉬었다가 7월14일 한산도 두을포에 정박 통제영을 설치하였다. 뒤에 3도 수군 통제영의 작전 지휘본부인 운주당(運籌堂)을 건립하여 빛나는 사적지가 복원되어 후세에 영원토록 추무공 의 업적을 밝혀 나갈수있게 되었다.2차출전의 목적도 부산을 공격하기 위해 옥포의 적 수군기지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경상우수사 김성일을 비롯하여 체찰사 유성룡 전라순찰사 권율에게 공문을 보내어 웅천의 적에 대한 수륙 합공전을 감행하기 위해 육군 동원을 간청했다(임진장초 5월10일 계본)옥포의 적수군은 1차출전때 보다 적선이 200여척으로 강력한 지원함대가 출현했기 때문에 수군 단독으로 공격하기는 위험하므로 육군과 합공전이 절대 필요했던 것이다. 서울에서 철수하는 아사 직전의 적군을 추격할 것을 유성룡은 명장 이여송에게 요청했으나 여러 가지 핑계로 듣지 않았고 조선군 단독으로 한강을 건너 추격하는 것조차 폭력으로 막았다.왜군이 남해안 지역에 도착한 후인 6월1일에야 조선왕에게 공문을 보내 명군은 물론 조선군의 추격금지를 해제했다. (선조실록 5월3일)명의 경략 송응창은 조선왕에게 보낸 공문에서 명군에 앞서 조선군이 먼저 부산을 공격하여 왜선을 불태우라 했다.조정에서는 충무공에게 2차례나 유서(諭書)를 발송 부산으로 출격하라고 명령했다.(임진장초 5월14일, 7월1일 계본)경상도 남해지방으로 철군한 왜병은 병력, 무기, 군량등을 본국으로부터 보급받아 부산 동쪽으로는 울산, 서생포 서쪽으로는 양산 김해 창원까지 반 영구적인 요새를 구축했다.
(1) 진주성 함락
웅포(진해만의 웅진)의 왜적에 대해 충무공이 요청한 수륙 합공전을 하기 위해 함안에 진군한 전라 순찰사 권율등이 지휘하는 관, 의군(5천여명)을 진주로 옮기게 한 것은 창원의 왜적이 6월14일 진주를 공격하기 위하여 출발했기 때문이다. 가등청정, 소서행장등 14명의 적장은 10여만명의 육군을 동래에 집결시킨 후 6월14일부터 진주를 향해 진군을 개시했다. 이들 적군은 감동포(구포)에서 수백척의 대선으로 낙동강을 통해 진주로 수송되었다. 6월20일까지 진주 교외에 집결하여 6월21일에 진주성을 3중으로 포위하고 22일 공격하여 전투를 개시했다. 이것이 제2차 진주싸움이다. 진주성을 사수하기 위한 의병장 김천일을 위시하여 우수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의 병장 고종후, 장윤, 이잠, 김해부사 이종인, 거제 현령 김준민 등으로 수성(守城)병력은 관, 의병 합해서 6천여명이다. 진주성의 처절한 공방전은 8주야간이나 계속되었으나 중과부적으로 6월29일 함락되었다.진주성을 점령한 적은 전라도까지 침공하려 하였으나 한 왜장이 가등청정에게 진주성 공격에 정예군 손실이 막대하여 그만두자는 건의에 청정이 옳다고 하여 철군을 명령했다.(진수서사)
(2) 견내량에서의 대치
충무공 연합함대가 계사년 1차 출전때 까지는 작전이 끝나면 연합함대를 해체하여 각자의 수영으로 귀영시켰으나 이번 제2차 출전부터는 적의 대수군이 진해만 일대에 포진하고 견내량을 돌파하여 서진(西進)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므로 각자의 수영으로 귀환할 수 없었다.적군은 진주를 함락한 후 계속 병력을 주둔시켜 전라도 진격을 도모했으나 충무공 연합함대의 견내량 고수로 불가능하게 되자 7월14일 웅천서쪽인 경상도 연해안으로 철군하면서 수륙 병진전략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진해만 일대의 중요 포구에 성채(城砦)를 구축하고 목책과 뗏목등으로 장애물을 설치한 후 그 안에 함선을 감추어두고 전라도 침공의 만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계속하여 왜군은 김해강 서쪽지방에 937척의 함선을 배치하였으며 대치한 충무공 함대는 불과 104척으로 중과부적 상태였다.
충무공은 함대격차를 줄이기 위하여 각도에 함선 증강계획을 세워 통보한 내용은 전라좌수군 18척, 전라우수군 36척, 경상우수군 33척, 충청수군 20척 총 107척을 동절기를 이용 만들도록 명령하였다. 갑오년 3월 증강된 함대는 전라좌수군 18척 우수군 21척 경상우수군이 7척 총 46척으로 61척의 차질을 가져 왔으며 전라좌우군이 만든 26척은 군량과 사격군이 확보되지 않아 취역하지도 못하는 실정이었다.
(3) 당황포 진해 해전
왜적은 수륙 병진책이 무산되자 거제도의 내륙을 횡행하면서 살인, 납치, 약탈을 일삼았다. 신설된 감시 초소는 삼봉산과 벽방산으로 모두 거제도에서 견내량을 건느는 통영반도에 있으며 견내량을 접근하거나 진해만에서 활동하는 적군을 감시하는데 좋은 위치였다. 항시 척후선과 경계 함대가 배치되어 정찰이 완전 무결하였다. 이 양초소는 그 정확성과 신속성으로 적정 파악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갑오년(1594) 3월4일∼5일 양일간의 당항포 진해 해전은 압승을 가져왔다. 3월4일 첫새벽에 충무공은 함선 20척을 견내량으로 보내어 수비 토록하고 동시에 전라 좌수군과 경상 우수군에서 각각 함선 10척 전라우수군에서 11척을 선발하여 공격 함대를 편성하고 어영담을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극비리에 당항포 오리량으로 출전케했다.충무공은 잔여 3군 함대를 친히 거느리고 학익진으로 진해만을 왕래하면서 함대시위를 하였다. 적수군이 당항포 진해해전의 지원을 차단할 목적과 침범한 적선들이 적주둔 지역으로 도피를 방어 그물로 고기잡듯 일망타진 전략을 썼다. 어영담의 공격함대는 읍전포에서 6척 어선포에서 2척 시구질포에서 2척의 왜적선을 당파(충파)한후 불태우니 당항포의 왜적은 전의를 상실하고 상륙하여 포구에 숨은채 공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충무공은 순변사 이빈에게 기병을 출동시켜 적을 공격토록 하고 어영담에게 당항포 적선에 대한 공격명령을 내려 적선을 당파후 모두 불태우고 진해등지를 침범한 적선 31척을 일망타진하였다.3월5일 아자음포에서 밤을 보내고 3월6일 거제 앞바다 흉도로 향했다. 척후선이 적선 40척이 청솔포에 도착했다는 보고에 추격하였으나 3도 수군의 위용에 놀라 도망치고 없어 잡지 못하였다.충무공이 몸살로 선상에 누워 있는데 명나라 선유도사부도사(宣諭都司府都司) 담종인(譚宗仁)이 공문을 보내 왔는데 조선 수군은 왜적을 치지말고 속히 본영으로 돌아가라는 내용이다. 즉각 반박 공문을 보냈으나 그후 담종인의 제지로 진해만에서 수군 활동을 못하고 3월7일 한산도로 귀영하였다.
15. 장문포작전과 충무공 제거음모
갑오년(1594) 9월29일부터 10월4일까지 5일간에 걸친 장문포 작전은 경상우수사 원균이 도체찰사겸 좌의정 윤두수에 건의하여 윤두수 자의로 거행한 수륙 합공전이 장문포 작전이다. 윤두수는 왕의 사전 재가를 얻지 않은채 작전을 감행하여 좌의정과 도체찰사직에서 파직은 물론 당쟁으로 까지 비약시킨 사건이 되었다.윤두수가 원균과 척친관계로 원균에게 전공을 세우게하여 3군 수군통제사 충무공을 꺾고 원균에게 통제사의 직책을 임명받도록 하기 위한 계책이었다. 장문포 작전은 원균과 윤두수가 결탁한 충무공제거 음모사건으로 윤두수는 장문포 작전개시 10일전에 작전에 대한 장계를 냈는데 허가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작전이 있다는 것을 조정에 통보하려는 계책이었다.이 장계는 비변사 유성룡(영의정겸 도제조)에게 이송되었으나 즉각 작전 중지토록 임금에게 건의됐고 임금은 이를 재가했다. 조정의 장문포 작전중지 명령이 도체찰사부의 남원에 도착하기 전에 작전은 이미 전개된 상태였다.10월1일 사도(蛇渡)의 제2호 함선이 갯바닥에 걸리자 적의 포격을 받아 명중되었으나 불이 번지기 전에 이를 진화하였다. 충무공을 시기하는 내부자들이 사도에서 함선이 불탔으며 탑승요원이 모두 전사 하였는데도 충무공은 이를 감추고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다고 무함하였다. 장문포 작전은 적을 섬멸하지 못한 분한 전쟁으로 지휘권의 분열을 조장한 원균과 윤두수의 책임이 있다.
(1) 장문포 작전과 당쟁의 도화(導火)
10월14일 소집된 대신 회의 석상에서 선조(宣祖)는 왜적을 1명도 잡지 못한 전과에 진노했으며 영의정 유성룡은 병사가 전의가 없는 것은 매우 한심한 일이라 개탄했다. 어떤 대신은 새삼 최영경을 무함하여 죽게한 서인(西人)을 공격하면서 장문포작전을 독단 감행한 윤두수는 서인의 영수로 책임을 따졌다. 북인들은 장문포 작전의 실패를 계기로 윤두수 제거를 획책하였으며 10월20일 사헌부는 윤두수 탄핵문을 냈다. 내용으로 서인 윤두수가 죄없는 최영경(북인)을 죽게한 것, 몹시 탐욕한 인간으로 뇌물에만 급급하고 국사를 돌보지 않았다는 것, 상황판단을 잘못하여 장문포 작전을 일으켜 실패한 것을 들었다. 이로 인하여 북·서당쟁이 야기되었다. 윤두수는 북인들의 맹열한 탄핵에도 선조의 비호와 남인의 영수 유성룡의 강력한 반대가 없자 다시 판중추부사가 되었으나 당쟁의 도화(導火) 책임은 면치 못하였다.
(2) 충무공의 거듭된 수모
비변사 유성룡은 명·왜간의 강화가 결렬되면 반드시 왜적의 대군이 다시 쳐들어 올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유성룡은 왜군의 재침 대비책을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① 재야 인사를 발탁 등용할 것 ② 군대를 정비할 것 ③ 왜적의 서울침범 주요 도로상의 요충지 조령(鳥嶺)의 방비를 견고히 할 것, ④ 전라도 방비책을 시급히 강구할 것(선조실록 6월25일) 위와 같은 건의가 있은 다음날인 6월 26일에 선조는 조정회의에서 이순신이 어떤 사람이냐고 정신들에게 물었다. 당시 상황으로 보면 원균을 내세우고 이순신을 제거하려는 정론을 모으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선조의 물음에 좌의정 김응남은 장병들은 순신이 잘한다고 말들하지만 거제진에는 원균을 꼭 보내야 한다며 이 사람을 빼고는 거제를 수비할 사람이 없다고 말하였다. 선조는 재차 거제에서 수군이 철수된 후 비변사에게 철병이유를 물었다. 거제보다는 한산도를 지켜야 한다는데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에 윤근수는 한산도는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선조는 한산도의 진을 비울 수는 없다. 만일 지금 거제를 지킨다면 병력이 분산되며 군량 공급도 문제가 생긴다. 김응남은 이에 거제를 지키면 왜적의 군량보 급로를 끊게 되므로 쳐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선조실록 6월).선조와 김응남 윤근수는 원균을 내세우고 이순신을 폄하하는 쪽으로 회의를 몰아갔으나 추후 유성룡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또 재침에 대한 방비책을 조정 대신들과 의논하기 위하여 수륙 총 지휘관인 도체찰사 이원익이 상경하여 논의과정에서 여러 장수중에 충무공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다. 거듭 강조하여 장내에서 더 이상 충무공에 대한 비난하는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8월 23일 부사 김륵과 종사관 노경임을 대동하고 수군 관할하의 연해안 지방과 3도 여러 진포를 순시할 때 충무공이 대동하고 일일이 설명하며 질문에 대답했다. 체찰사 일행은 25일∼27일까지 3일밤을 한산도 통제영에서 지내면서 3도 수군의 해상방어 상황을 확인하며 왜군의 재침에 대한 대비책을 충무공과 토의했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체찰사의 호궤( 饋 : 장병위로연 소30마리를 주다)에 참가한 병사가 5840명이었다.(8월27일)통신사로 왜국에 건너간 황신(黃愼)은 명, 왜간의 강화가 결렬되자 11월6일(1596)에 귀국 장계를 조정에 제출하였다. 왜국추장 풍신수길이 재침할 것이며 왜군은 조선사람을 모조리 죽이는 전쟁을 선언하고 있다. 선조는 장계를 가지고 온 두 군관을 직접 만나 왜정에 대하여 상세히 청취했으며 내년 2월에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 보고를 받았다.(선조실록 29년 11월6일)선조는 대신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원균의 사람됨을 물었다. 유성룡은 몸을 돌보지 않고 싸우는 장점을 들었다. 그러나 장병을 위로하고 무마하라 하면 반드시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이산해는 대체로 수전은 육전과 달라 어렵지 않으므로 승리할 수 있다. 원균이 처음에 왜적을 잘 잡았는데 다른 직책으로 전보된후 근래 수군활동에 대한 말을 듣지 못했으니 분하다 하였다.정탁도 수전은 원균이 능인이다 단점만 버린다면 장점을 살릴 수 있다. 유성룡은 다시 원균은 한번 수전에서 착오를 빚었으므로 다시 수사로 임용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선조는 다시 묻기를 이순신도 역시 그러한가. 이원익은 이순신은 자기를 변명하는 말이 별로 없다. 그러나 원균은 언제나 성을 마구내고 이순신을 향하여 비방하는 말을 많이 한다.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전임시켜서는 않된다. 원균을 타일러 병사로 그냥있게 하는 것이 좋다. 도 체찰사 이원익은 11월17일 선조를 독대하여 왜군이 재침 대비회담에서 수군에 대하여 논할 때 윤두수가 원균이 과감하게 싸우는 사람으로 꼭 쓰려한다고 단언하자 원균을 경상도 통제사로 임명하고 충무공을 파직하는 문제를 이의없이 수락하여 3도 수군 지휘체계의 양분과 수군세력의 이분이라는 실책을 방조한 결과를 낳았다. 1597년 5월20일 백의종군길에 오른 충무공은 구례읍에서 일시 체류중인 이원익 체찰사가 그 소문을 듣고 수차 사람을 보내어 충무공과 만났다. 이원익은 음흉한 원균의 무함이 극에 달했으나 왕이 이를 살피지 못하니 나라일이 어찌될지 모르겠다고 탄식했다. (난중일기 정유5월20일)
(3) 소서행장과 대신들야합
명·왜간의 강화가 결렬된 후 풍신수길은 또다시 대군을 일으키고자 소서행장으로 하여금 조선의 이순신을 제거하고 3도수군의 제해권을 분쇄하고자 소왜간첩 요시라를 시켜 경상우병사 김응서를 포섭 이순신 제거장계음모를 획책하였다.(선조실록 : 30년 정월23일)간교한 소서행장의 3도 수군궤멸책으로 충무공의 지휘권을 방해한 사건은 가등청정이 거제로 온다. 가덕도로 온다. 허위사실 유포로 수군의 전략과 3도수군이 적기 출동 시기를 분별치 못하게 하고 가등청정이 먼저 도착하도록 하는 시간상 어긋나게 한 전략으로 충무공을 무함하는 조정대신들로 하여금 왜장을 잡을 시기를 그르쳤다고 주장하도록 하여 충무공을 체포하기 위한 명분과 왜국의 제해권 분쇄전략이 치밀하게 실행되여 조정의 충무공 구속과 왜적의 3도수군의 궤멸음모가 맞떨어지게 된 것이다.
(4) 원균의 3도수군 지휘권 장악
원균을 경상도 통제사로 임명한 2월4일 사헌부에서 충무공이 왜적을 치지 않은 큰 죄를 범했으니 체포하여 국문하고 처형해야 한다고 규탄하자 선조는 2월6일 체포령을 내렸다(선조실록). 동시에 원균을 3도수군통제사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행록에 따르면 충무공은 원균에게 업무를 인계하고 포박당한 후 금부도사의 호송을 받으며 2월26일 서울로 압송되어 3월4일 금부의옥에 수감되었다.선조는 충무공의 죄명을 조정을 속였으니 무군지죄(誣君之罪:역적죄)를 범했고 적을 놓아 주고 치지 않았으니 부국지죄(負國之罪: 국가반역죄)를 범했다. 사람의 공을 빼앗고 사람을 무함(원균의 공을 빼앗고 무함했다는 말)한 죄등을 범했으며 인신(人臣)으로 임금을 속인자이니 죽여야 하며 용서할 수 없다.(선조실록 30년 3월) 충무공에게 씌워진 죄는 역적죄, 국가반역죄, 탈공죄(奪功罪) 무함죄를 적용 처참한 형장(刑杖)을 가했다.이와같은 상황에서 유성룡은 정탁을 시켜 충무공을 살려달라는 신구차(伸救箚)를 3월12일 선조에게 제출하였다.……臣은 일찍이 외람되게도 명관(命官)이 되어 죄인을 국문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는데 대체로 죄인은 한차례의 고문을 당하고 나면 몸이 많이 상(傷)하여 죽게 됨으로 혹시 정상의 참작이 있다해도 죽은 뒤라 어찌할 방법이 없어 신은 몰래 불쌍하게 여겨왔다. 이순신은 이미 한차례 고문을 했으므로 다시 형을 가(加)한다면 생명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다.(이충무공전서 권12 신구차)신구차는 인재를 아낄 것을 강조했다. 정탁은 대저 인재(人材)란 국가의 이기(利器)이다. 일개 통역관이나 산사(算士)같은 미천한 직책자도 재간이 있으면 모두 사랑하고 아끼는 것이 도리인데 항차 장신(將臣)의 재목에 있어서랴 하며 선조의 뜻을 돌리려 간청했다.아무리 원균과 결탁하여 이순신을 무함한 대신들이라 해도 충무공을 천거한 유성룡이 2회나 사표를 내고 선조의 신임을 받아 영의정 비변사, 도제조로서 나라의 기무를 총관하는 처지에 감히 직책을 내놓고 맞서지는 못하였으며 뒷날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수군장병들을 위시하여 역사의 증인들이 엄존하기 때문이다.「난중일기초」에 따르면 충무공은 1597년 4월1일에 출옥되었다. 투옥 27일만에 나온 것이다. 충무공은 출옥후 도원수부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하였다. 백의종군이란 죽을 죄를 범한 중죄인이 특사로 생명을 보전한 후 죄인의 신분으로 종군하는 것으로 충무공은 두 번째 백의종군이었다.
16. 원균의 대패와 3도수군 몰살
소서행장과 조정대신들의 공모로 충무공을 제거하는데 성공한 왜군은 제해권을 분쇄 재침의 승기를 조성하였고 원균은 목표의 3도수군통제사가 된 후 패전을 거듭하면서 외줄포 춘원포 해전에서 3도수군을 전멸케하여 반국가 이적죄를 지었으며 이를 비호한 군신과 당인들은 천추의 역적죄를 면기 어렵게 되었다.
원균은 충무공을 무함하는 장계에서 자기가 수군의 책임자였다면. 가등청정이 절영도 앞바다에 재침했을때 즉각 진격 퇴치하였을 것이라 장담하여 충무공을 범법자로 만들어 투옥케하고 자신은 통제사의 발탁을 성사시키는 계기를 잡은 것이다.원균은 통제사로 부임한후 왜적이 계속 부산진으로 처들어오는 데도 그 입구인 절영도에 출전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권율도원수의 출전명령도 묵살하였던 것이다. 충무공을 무함할때는 절영도에 즉각 진격을 주장하더니 자신이 통제사가 되어서는 부산으로 통하는 해로를 가로막는 안골포 가덕도의 적수군을 수륙합공으로 섬멸하지 않으면 진격할 수 없다는 주장에 도원수와 비변사는 참을 수 없어서 조정에 출전명령을 장계로 건의했으며 선조는 체찰사와 도원수의 재량으로 처리하라 회신하였다.원균의 태도는 선조가 뒤에서 밀어주니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것으로 조정에 건의하여 체찰사나 도원수에게 명령하여 수륙합공을 하도록 오히려 독촉하는 도전적 장계를 내고 있는 것이다.이 양편의 의견에 비변사 유성룡은 도원수, 도체찰사의 주장이 옳으므로 원균은 지휘에 따르라고 하였다. 왕도 그 주장이 옳다고 원균에게 명령을 하달하였던 것이다.
원균이 핑계로 진격하지 않자 도체찰사는 종사관 남이공을 한산도로 보내 서 출전을 종용하여 원균은 할 수 없이 6월18일 출격하였으나 안골포 가덕진의 적을 공격하다가 단위 지휘관만 전사케하고 소득없이 패전귀영하였다.
(1) 원균 장형(杖刑)을 받다
도체찰사, 도원수 비변사는 적수군 기지가 있는 안골, 가덕, 낙동강하구를 거치지 말고 직접 부산 앞바다로 출격하라 했다. 3도 수군전진 기지를 옥포에 설치하고 가덕도의 남방 외양으로 항해하여 몰운말로 직행한후 연해안으로 항해하여 부산을 진격하라 했으나 원균은 계속 묵살하고 출전하지 않았다.비변사는 원균의 거동을 왕에게 장계하여 왕의 재가를 받은 것이다. ……통제사가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의당 복종하게 해야 하는 것이 법이다 ……도체찰사, 도원수에게 하유(下諭)하여 그들이 군법을 분명히 적용하도록 하여 통제사로 하여금 거역하지 못하도록 왕명을 시행하라 하였다.남원에서 왕명을 받은 것은 6월29일이다.도원수가 곤양으로 직행 원균을 불러 부산 출전을 명령하여 만일 핑계만 늘어놓고 회피하면 왕명대로 군법에 따라 곤장을 시행 출전을 강행시키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도원수는 남원에서 구례를 거쳐 곤양으로 직행했다. 도착과 동시 원균을 곤양으로 급히 불러 출전을 명령하였으나 종래 주장과 같이 회피하므로 왕명대로 곤장으로 처벌한 후 명령하자 7월5일 출전했다. 한산도의 두울포를 출항하여 칠천량의 외줄포에서 밤을 보내고 7월6일 옥포에서 하루밤을 지내고 7월7일 새벽4시 옥포를 떠나 몰운말로 항진했다.3도수군의 전선은 134척이며 협선도 같은수로 총 268척의 대함대였다.
(2) 절영도 앞바다 해전
절영도에는 이미 적선 1000여척이 집결해서 3도수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균이 절영도에 이르자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었으며 해는 이미 저물었으나 정박할 곳이 없는데 왜선이 출몰하는 것을 보고 진격을 독려하였다. 그러나 하루종일 노를 저어 피로하고 허기지고 목이 마른 병사들은 군령이 먹히지 않았다. 왜군은 고의로 전열을 흐틀기 위하여 다가오는 듯 물러나며 심리전으로 자극하며 피로를 더하게 하였다. 밤이 깊자 바람이 거세어 우리 배는 사방으로 흩어져 표류되었다가 간신히 수습하여 가덕도에 이르자 목이 타는 병사들이 상륙하여 물을 마실 때 왜의 복병이 급습하여 우리 병사 400여명이 희생되었다.파죽지세로 모여든 왜적에게 3도수군은 절영도 앞바다 해전에서 20여척의 함선을 손실하고 1880명의 군병을 잃었다. 가덕도의 400명 희생과 함께 군병 상실이 2280명이 되었다.
(3) 3도수군 전멸
3도수군이 칠천량 외줄포에 도착한 것은 7월9일 4시경이다. 정박시킨후 급식과 휴식을 하며 하루밤을 지내는 데 곤양의 권도원수가 고성에 와서 원균의 승첩보고를 고대할때 3도수군이 패전하고 외줄포에 있다는 급보를 받고 원균을 호출 태형을 가한 후 다시 부산으로 출격하라 독전하였다. 원균이 진중으로 돌아와 분을 이기지 못하여 성을 내며 폭음한 후 누워 잠만 자므로 제장들이 작전계획을 할 수가 없었다. 원균은 적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없이 밤낮으로 술을 폭음하다가 간신히 진영을 결진 하였는데 7월16일 새벽4시경에 왜적의 함선이 3도 수군을 3∼4겹으로 포위하였을 뿐 아니라 견내량과 한산도 쪽으로 물러나지 못하도록 흉도 일대와 견내량을 차단한 것이다. 3도 수군이 포위망을 뚫고 견내량으로 탈출하려 하였으나 이미 봉쇄되어 돌파하지 못하고 적진포 역시 왜군이 대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 북방 춘원포로 선수를 돌려 싸웠으나 적의 기세는 충천하여 중과부적으로 3도수군 함선은 전부 불타버리고 수군들도 함께 타거나 물에 빠져 전멸하였다.(선조실록 30년 7월22일)배설이 지휘하는 함선 12척이 15일밤 미리 탈출하여 안전하였으나 통제사 원균은 견내량이 봉쇄되고 한산도로 후퇴가 불가능하자 견내량에서 배를 버리고 육지로 탈주하자 제장들도 상당수가 도주하여 수군주력 부대가 더욱 약화되었다. 왜란 발발이후 충무공과 더불어 수많은 해전에서 불후의 전공을 세우고 3도수군 건설에 큰 공을 세운 전라 우수사 이억기는 수군의 대장답게 바다에 투신하여 장열한 최후를 마쳤다.
17. 정유재란 발발
1597년(정유) 7월16일 3도수군이 전멸하자 왜장 모리수원(毛利秀元) 가등청정(加藤淸正) 흑전장정(黑田長政) 길천광가(吉川廣家) 천야행장(淺野幸長) 과도직무(鍋島直茂)등이 지휘하는 왜 제1군 약7만명은 부산 서생포를 출발하여 경주, 대구, 성주, 금천, 청주, 천안등지로 진격하고 경상도, 충청도, 경기지방을 유린 촌락을 급습하여 군량을 약탈하고 살인 방화는 물론, 산골짜기 피난민을 수색하여 참살한 후 코를 베었다. 선봉부대 흑전의 군대 5∼6백명은 9월초에 충청도 전의(全義)를 거쳐 직산의 소사평에서 명나라 군사와 충돌하였으나 왜군은 군량확보가 급선무이므로 서로 휴전하고 각기 본국의 지원을 기다리는 시간 벌기로 들어갔으며 왜군은 지원수군이 한강에 도착하면 군량과 무기를 확충하여 대열을 정비한 후 수륙군이 합세하여 서울 공략 할것을 목표하였다.전라도 일대를 침범한 제2군은 9월16일 충무공이 울돌목에서 저지 파탄시키자 경상도 본영으로 도망하였다.제2군 왜장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 소서행장(小西行長) 도진의홍(島津義弘) 장증아부원친(長曾我部元親) 생구일정(生駒一政) 등의 약8만명중 3만명은 부산출발 양산, 창녕, 의령, 초계, 거창, 진안을 유린한후 8월20일 전주에 도착하고, 나머지 5만명은 고성, 진주, 사천, 곤양 연해안을 유린한 후 하동에 도착 수군과 합류하여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가 8월6일 구례를 침범 8월13일에 남원성을 포위 공격하여 16일 함락시켰다. 8월19일에 전주성을 함락 진안을 거쳐온 3만명과 합류하였다.전주에서 합류한 적2군중 3만명은 충청, 경기지방으로 진격하고 잔여 5만은 전라도 일대를 유린하였다.왜적 수장 등당고호(藤堂高虎) 협판안치(脇坂安治) 가등가명(加騰嘉明) 내도통총(來島通總) 삼고정(森高政) 봉수하가정(蜂須賀家政) 중천수성(中川秀成) 복원우마조(福原右馬助) 등이 인솔한 수군은 하동에서 왜제2군과 합류하여 남원을 함락한 후 하동으로 귀환하여 전라도 연안을 거처 서해로 서울 한강으로 진격하였다. 서진(西進)한 왜수군은 전선 200여척에 수병 4만명으로 구성되었다.
(1) 조선군의 방어계획
1596년 9월초에 명·왜간의 강화가 결렬되자 통신사로 왜에 가 있던 황신은 귀국길에 일본섬 일기도(壹岐島)에서 풍랑을 피하는 동안 군관으로 하여금 은밀하게 왜의 동정을 살펴 본국 조정에 재침의 계책을 상세히 장계하였다. 남원에 있던 도체찰사 이원익에게 회송되어 11월에 이원익이 상경하여 선조와 비변사 요인들과 왜의 재침에 대한 방비책을 의론하였다. 11월17일 최종 방어책의 합의안으로 ① 3도수군으로 적수군의 서침(西侵)을 저지한다.
② 청야전법(淸野戰法)을 철저히 시행하여 단 한톨의 양곡이라도 적군에게 약탈되지 않게한다.
③ 산성을 보수하여 거점방어를 실시한다.
④명나라 원군으로 적을 격파한다.
모든 산성이 말과 활 화살이 없었으나 다만 화왕산성은 수비가 되었고 황석산성(경남 안의현 :성주 곽준장군)만이 수비하다 함락되는 정도 이외는 적이 침공한다는 소문에 자패자괴하는 실정이었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서울을 수비하기 위하여 평안도군 5천명 경기, 황해도군 2천명이 한강을 수비하고 창고를 지켰으나 9월7일 명·왜군이 직산의 소사평에서 접전하였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조정은 몹시 당황한 나머지 왕족이 평안도 지방으로 피란 하므로 백성들이 다투어 도성을 빠져나가 성안은 텅비어 버렸다. 명나라 주둔군으로 서울은 지휘관 경리양호(楊鎬)와 제독 마귀(麻貴)로 병력이 2천이었으나 곧 직산으로 이동하였고 전주는 지휘관 진우충(陳愚衷)에 병력 3천이었으나 8월19일 전투에서 전멸되었으며 남원은 지휘관 양원(楊元)에 병력 3천이었으나 8월16일 전투에 전멸되는 실정이었다.명나라 지원군이 11월부터 추가지원 되었으며 조선군은 분산되어 주둔지에서 싸웠다.
18. 충무공 통제사로
재기용
1597년 7월18일 새벽 도원수 군관 이덕필(李德弼)과 변홍달(卞弘達)이 충무공의 거처에 찾아와서 7월16일 새벽에 왜적이 3도수군의 격파로 전멸된 내용과 통제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의 전사한 사실을 같이 전했다. 비보를 접한 충무공은 망연자실중에 도원수 권율이 참모들을 대동하고 방문을 하였다. 6월8일 원수부에서 백의종군이후 처음 만나 서로 시국을 걱정하며 5∼6시간을 논의한 후 충무공이 자진하여 연해안을 살펴본후 대책을 강구하겠다는 말에 고대하고 기다린듯 도원수는 몹시 기뻐했다. 충무공은 즉시 군관 송대립(宋大立) 유황(柳滉) 윤선각(尹先覺) 방응원(方應元) 현응진(玄應辰) 임영립(林英立) 이원룡(李元龍) 이희남(李喜男) 홍우공(洪禹功)등 9명으로 조사대책반을 편성 대동하고 배설의 전함 12척이 정박된 하동의 노량진으로 출발하여 19일 초계를 거쳐 삼가(三嘉)에서 숙박하고 20일 진주 정개산 동굴에 도착 이희만 집에서 쉬고, 25㎞를 달려 단성 현감 진주부사와 작전대책을 논의하면서 우천으로 쉬고 21일 곤양의 32㎞ 지점에서 점심하고 22㎞ 더달려 하동 노량에 도착했다.거제 현령 안위와 영등포 만호 조계종(趙繼宗)등 10여명의 장수가 달려와서 읍소하면서 전후 사정을 말하여 밤을 새우고 배설이 22일 나타나 원균의 수군전멸된 상황을 자세히 청취하고 23일 밤새 작성한 보고서를 송대림에게 주어 도원수에 제출토록하며 진주로 출발 운곡에 도착하여 26일까지 3박하면서 정개산성 방어준비를 마친후 26일 정성(鼎城) 아래 민가에 거처를 정했다. 정성은 하동, 진주 곤양근처 산성으로 경상도에서 전라도를 통과하는 로선으로 도원수가 수비대책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수비병들이 활쏘고 말달리기 등 훈련대책을 논의하고 진주목사와 제장들과 방어책을 협의했다. 원균의 기함에 동승했다가 견내량에서 원균과 같이 상륙탈주한 선전관 김식(金軾)이 서울에 도착하여 3도수군 전황을 장계한 것이 7월22일이다. 선조는 장계를 받고 대신들과 비변사의 당상관 회의를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한후 결론으로 통제사를 새로 임명하여 수군함대의 수습이 급선무임을 합의하고 충무공을 3도수군 통제사겸 전라좌도수군 절도사로 재임명하였다.충무공은 8월3일 정성밑에 있는 숙사(宿舍)에서 임명장을 받았다. 충무공은 즉시 군관단을 편성하여 밤을 새워 섬진강을 건너 두치(豆峙)에 8월4일 도착하니 새벽이다. 구례를 거쳐 8월5일 곡성에 도착 군관 척후를 사방에 파견 적세를 감시하였다. 8월6일 구례가 적군에 의해 분탕질을 당하였고 남원이 적의 공략대상이기 때문에 남해현령을 급파하였다.8월6일 곡성을 떠나 옥과에 이르니 순천 낙안으로 향하는 피난대열이 도로에서 충무공을 만나자 울면서 다시 오셨으니 우리들은 살게 되었다고 반가워했다. 순천으로부터 찾아온 이기남 귀선 돌격장이 합류되고 정사준 정사립 조응복 양동립도 합류하였다. 8일 순천에서 광양 구덕령 나주 판관 원종의 옥구군수 김희온이 합류하고 군량창고와 군기창고가 건재하여 모두 땅에 묻어 다음에 쓰기로 표시해 두었다.9일 낙안에 도착 모든 창고가 불탔음을 확인하고 순천부사 우치적 김제군수 고봉상이 와서 합류되었고 보성 조양창은 국가의 양곡을 보관하는 큰창고로 다행히 무사하여 군관 4명을 지정 수비케 했다. 12일 거제 현령 안위와 발포만호 소계남이 와서 함대실정을 보고하고 명령과 지시를 받아갔다.17일 군영구미(軍營仇未)(강진)에 도착하여 경상우수사 배설에게 3도수군이 탈 배를 보내라 명령을 하고 보성군수가 와서 대열에 합류했다. 13일 전라좌수군 우후 이몽귀를 태형으로 벌하고 하동현감 신진이 와서 합류하였다. 14일 장계7통을 군관 윤선각에 주어 서울로 보내고 15일 보성읍 군기고를 점검 4필의 말에 실어 군영구미로 보냈다. 16일 보성군수에 명령하여 군관을 산골 굴암으로 보내어 피난한 관원들을 찾아오게 했다. 함대요원 확보를 위함이었다. 궁장(弓匠) 지이(智伊) 궁도장(弓刀匠) 태귀생(太貴生) 선의(先衣) 대남(大男)등이 와서 합류하고 군관 김희방, 김봉만이 와서 합류했다. 17일군영구미를 향해 출발했다. 배설은 배를 보내오지 않았다. 그간 내륙지방에서 우회 확보한 무기와 군량을
(1) 충무공 수군 전폐령 반대
충무공은 8월7일 8월15일 양차에 걸쳐 유서(諭書 왕명)를 받았다. 따라서 유서에 대한 회신장계를 냈다. 유서내용은 수군전폐령과 충무공을 육군 지휘관으로 임명한다는 요지이다. 조정에서는 수군함정 12척으로는 막강한 적수군을 대항할 수 없으니 3도수군은 전폐하라는 령이다. 충무공은 수군함정 12척을 지휘하여 왜수군을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했으면 첫째 3도수군 통제사 임명장을 받지 않았을 것이고 수군을 전폐해야 한다는 유서를 가져온 선전관 양호에게 장계를 작성하여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12척의 함대를 정상 가동하기 위한 사격군, 군량, 무기를 보충하여 지휘하면 적의 대군을 격파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임명장을 받고 만반의 준비뒤에 취임식을 가진 것이며 12척의 함선으로 천험(天險)의 요새인 울돌목 해협을 가로막는 전술을 연구하여 왔던 것이다. 조정의 대신과 선조는 충무공과 일언반구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수군 전폐령을 하달하니 심기가 몹시 사나워 과음하며 밤잠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수군전폐 불가의 장계문은 다음과 같다.……임진년으로부터 5∼6년간 적이 감히 호남과 호서를 범접하지 못한 것은 3도수군이 적수군의 진격로를 차단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전함 12척이 있으니 사력(死力)으로 막으면 적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수군을 전폐한다면 이것은 곧 적이 바라는 것이며 적은 곧 호남, 호서 연해를 거쳐 서울 한강에 직행할 것입니다. 이것을 신(臣)이 두려워하는 바이며 비록 함선은 적으나 못난 신(臣)이 살아있는 한 왜적이 감히 깔보지 못할 것입니다. 이와같은 충무공의 의연한 장계내용으로 수군 전페론은 중지된 것이었다.
19. 울돌목대첩
8월20일 충무공은 12척의 함대를 직접 지휘하여 회령포 앞 해협이 협착한
이진(梨津)으로 옮겼다. 21∼23일까지 배탈이 나서 요양하고 24일 적군이 접근해 오고 있다는 척후의 보고를 받고 아침식사후 함대를 어란포(남해)로 이동 정오에 현지에 도착했다.25일 유언비어를 퍼트린 어부를 처벌하여 민심을 진정시키고 26일 육지로 파견한 척후 군관 임준영이 적선이 이진에 접근하고 있다는 첩보를 받았다. 신임 전라 우수사 김억추(金億秋)가 부임해 왔고 28일 아침 8시경 적선 8척이 래습하고 있다는 정보에 배설이하 함대 병졸들은 겁을 먹고 떨고 있었다.충무공은 의연한 자세로 함대의 선두에 선채 나팔을 불고 기를 휘두르면서 적선을 맹열히 추격하니 이때 모든 배가 뒤를 따랐다. 적선은 외양으로 도주하여 갈두(남해)까지 쫓아 물리쳤다. 또 다른 곳에서 적선 50척이 근접하고 있다는 척후군관의 보고를 받고 밤사이 함대를 장도(獐島)로 이동했다. 이는 야습(夜襲)을 피하기 위함이었으며 29일 함대를 다시 벽파진(진도)으로 이동하여 정박하고 30일 적의 대수군이 공격해 올 것을 대비 정찰군관을 육지와 바다로 나누어 파견하였다. 배설이 계속 전쟁공포증으로 요양을 청해와 충무공은 우수영관할 남해로 허가하였다. 배설은 임의로 우수영에서 성주 본가로 몰래 피신 잠적하였다가 다음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선조실록 32년 3월을유). 9월7일 적수군이 어란진에 집결 침공태세라는 육지로 파견한 임중형이 보고해 왔다. 충무공은 모든 배에 출전준비를 명령하고 대기시켰다. 오후 4시경에 적선 13척이 벽파진 우리 함선에 접근해 와서 요격하여 물리쳤으나 그날밤 10시 다시 조총을 맹열히 발사하며 침공해 왔다. 이때 충무공은 함대의 선두에서 적선을 향해 돌격하면서 산천이 진동할 정도의 총통을 발사하였다. 네차례나 진퇴를 거듭하며 격전을 3시간 동안 지속하다가 왜군이 패주하였다. 9월8일 충무공은 작전회의를 마치고나서 신임전라 우수사의 전술능력이 미숙하여 걱정하는 글을 남겼다.(난중일기 9월8일)9월9일 중양절이라 충무공은 장병들에게 특별급식으로 전일 어부가 제공한 소 5마리를 도축하여 먹도록 하였다. 충무공은 마침 모친 상중으로 삼갈 때였다. 야음을 타서 적선 2척이 감보도(진도)에서 우리수군을 정찰하는 것을 발견하고 영등포만호 조계종(趙繼宗)이 공격하여 물리쳤다. 14일 육지에 파견한 군관 임준영이 귀영하여 보고하기를 척후 활동중에 적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여온 김중걸의 제보로 전에 적이 3차에 걸쳐 충무공 함대를 공격하던 중에 적선이 불타고 적병의 상당수가 살상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3도수군을 격멸하고 서울 한강으로 진격하여 육군과 합세하여 서울을 점령한다는 정보까지 입수한 것이다. 충무공은 제장들과 작전회의를 통하여 왜적의 대군을 좁고 긴 울돌목 해협으로 끌여들여서 역조류(易潮流)를 이용하여 적을 격멸한다는 전략을 세웠다.(난중일기 정유9월15일)이날 충무공은 조류를 타고 함대를 전라 우수영으로 이동하였다. 울돌목은 천험의 지형과 조류의 급류를 이용하면 적은 병력으로 대군을 물리치는데 천혜의 지형이기 때문이다. 척후장의 보고는 어란진에 적선 200여척이 집결되어 16일에는 울돌목으로 침공할 것 같다는 보고를 받았다. 예정대로 16일 이른 아침에 척후군관의 급보로 적선함대가 울돌목을 향해 항진하고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200여척의 적선중 울돌목해협으로 진입한 것은 133척으로 병력은 26600여명이었다. 나머지 67척은 울돌목해협 남동방 입구에 대기하고 있었다.적의 함대 133척은 4명의 대장이 지휘하는 연합함대로 1개 함대는 33척 또는 34척으로 결진되었다. 울돌목해협의 폭은 500m로 양안에 각각 50m의 암초가 해협안으로 나와 있어서 실지로 함대의 전개수역은 400m 정도이다. 편성함대를 33∼34척으로 4개진으로 결성 진입한 것은 지형실정에 따른 것이다. 적의 선두함대는 내도통총함대로 충무공에 대한 과거패전의 복수심을 감안하여 앞세운 것이라 한다.충무공은 척후장의 보고에 따라 즉시 지휘관 회의를 소집 작전 계획을 설명하고 망신(忘身) 분전할 것을 당부한 후 닻을 올려 우수영 앞바다로 출전하였다. 제장충무공은 해류가 북서류에서 남동류로 바뀌어 흐르기까지 실로 1시간 동안 단독으로 적의 선봉함대와 결사전을 전개하여 적수군의 울돌목 통과를 저지시킨 것이다. 이 1시간 동안 단독으로 울돌목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울돌목 대첩의 결정적 전기를 잡은 것이다. 안위가 근접하자 충무공은 기함위에서 큰소리로 안위를 질타했다.안위는 들어라 : 참형을 받을 것이냐?안위는 들어라
: 참형을 받을 것이냐?네가 도망가서 살 수 있는 곳이 어디있겠느냐! (난중일기 정유 9월16일)안위는 질타소리를 듣고나서 과감히 적선 속으로 돌격하여 들어갔다. 뒤이어 중군장 김응함이 당도하자 또한 질타하였다. 너는 중군인데도 불구하고 멀리 물러나 있으면서 대장을 구하지 않은 죄를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느냐! (난중일기 초) 어서 돌격하라.이에 김응함도 적진으로 돌격해 들어갔다.왜적의 대장선은 요격선 2척으로 안위의 함선을 집중 공격하자 전투요원들이 벌떼처럼 안위의 배에 기어오르려 할 때 안위의 군사들은 한사코 능장(稜杖) 장창(長槍)으로 무찌르고 수마석괴(水磨石塊 : 돌을 공같이 다듬어 겉을 연마한 화포탄)로 항전하는 모습을 보고 충무공이 왜선 3척에 화포와 화살을 집중발사 탑승한 적병들을 사살할 때 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가 합공하여 적병을 전멸시켰다. 당시 우리 함포는 수마석 철환 각종 대형 전(箭)과 조란환(鳥卵丸)이라 부르는 새알만한 철환으로 기함에 장치된 지자(地字) 총통은 동시에 200여개를 현자(玄字)총통은 100개를 발사할 수 있었다. 3도수군함대의 기함을 포함한 3척의 함선에 설치된 지·현자 총통이 40여문으로 그 반이 지자총통이라면 조란환이 동시에 4000발이 발사되는 위력이 나온다는 계산이다. 울돌목 해전에서 왜의 대수군을 대파시킨 것은 실로 우리의 대포와 왜적의 소총 싸움이었기 때문이었다.집중함포 사격을 받은 왜대장선에서 대장 마다시(馬多時 : 내도통총)가 바닷물에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하자 충무공은 수병 김돌손을 시켜 쇠갈고리(要鉤)로 낚아 뱃머리로 끌어올리게 하여 그 목을 베어 돛대 꼭대기에 매달아 기함위에 높이 세우자 "적장 마다시가 죽었다"고 일제히 소리높여 외치자 우리 수군의 사기는 충천하였다. 북을 치며 일제히 맹공격을 감행한 우리수군의 위력에 왜군은 사기가 땅에 떨어져 우왕좌왕하였다. 때는 오후 3시경으로 울돌목의 조류(潮流)가 남동류(南東流)가 되어 강류(强流)로 흐르기 때문에 더욱 우리 수군에게 유리하였다. 왜적 선봉대 내도통총의 함대 20척은 함포에 적중되어 파괴되고 나머지 11척은 충파한 후 불태워 완전히 소탕하였다. 이로써 왜수군의 3개선대 100여척은 울돌목을 통과하지 못하고 해협안에서 전파당하는 꼴을 왜적은 발을 구르며 관망할 수 밖에 없었다.이 울돌목 해전에는 거북선이 한척도 없었다. 다만 함포의 집중발사와 충파전(당파)으로 적선 133척을 전파시킨 것이다.…피난민들은 높은 산봉우리에서 해전을 바라다 보았다(조총의 사정거리는 약 110m 안팎) 내습해 온 적선은 300척만을 눈에 해아릴 수 있었으며 나머지는 큰바다에 꽉차 있어서 바닷물이 보이지 않았다. 3도수군 함대는 겨우 10여척으로 마치 바위돌이 새알을 누루는 것 같은 형세였다. 우리장수들은 패전을 한지 얼마되지 않은 때, 갑자기 큰 적을 만나 공포심에 질려 떨고있는 기색이 완연한데 충무공만은 분연히 바다 한 복판에 닻을 내리고 포위도 의식치 않고 전운으로 가득찬 어둠속에 단독으로 격전하는 것을 보고 의연하게 대처하였다.피난민들은 서로 얼굴을 맞대고 통곡하며 이르기를 "우리들이 여기에 온 것은 오직 통제사만을 의지하고 온 것인데 이제 일이 이러하니 우리는 장차 어디로 가야하는가" 자탄하던중에 전황은 변하여 갑자기 왜적함대가 물러나는 듯 보이며 충무공의 탄배가 우뚝 솟아나 적선을 격파하니 왜적은 혼비백산으로 크게 무너져 패주하였다.남해연안에 사는 백성중에는 왜적을 피하기 위하여 충무공의 함대가 정박한 곳에 미리 100여척의 선주들이 배를 가지고 대기하고 있었다. 충무공은 이 배를 나누어 해상에 배치하고 의병(疑兵 : 전쟁준비용배같이)으로 삼았다.충무공의 수군재건 사업을 뒷받침한 남해안 백성들은 정유재란으로 왜적들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한 뒤인데도 충무공을 믿고 적극 후원한 열정을 보였다.울돌목 대첩은 충청 경기도 지방을 침범한 왜육군 제1군 7만명과 제2군 중 일부 3만명 도합 10만명은 적수군이 충무공 수군을 물리치고 서해연안으로 한강에 도착을 기다려 군량과 무기를 공급받고 수륙 합동군으로 서울을 점령할 전략을 무산시킨 것이다.울돌목 대첩후 충무공은 보화도(寶花島: 목포)에 거점을 두
(1) 충무공의 3도수군 재건
충무공은 울돌목 해전에서 전멸당하고 패잔 도주하는 왜적을 해협 외양인 금갑포(金甲浦: 진도) 앞바다까지 내몰고 나서 다시 금갑포에 돌아와 결진한 후 울돌목의 해류가 서북류(西北流)로 바꾸어 흐르기를 기다려 오후 7시경 순류를 타고 함대를 당사도(무안)에 이동시켰다.충무공 함대는 서남해 및 서해를 자유로이 살피면서 10월29일 수군기지를 보화도에 설치할때까지 41일동안 경계경비를 실시하였다. 보화도는 강상(江上 : 영산강) 교통과 해상교통의 요충지임과 동시에 다도해 교통의 중심지로 나주까지 통하는 육로로도 중요한 거점기지라 하겠다. 충무공은 수군재건의 일념으로 여건을 확보하기 위하여 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여러 곳의 연고지를 감안하여 가능성을 검토한 것 같다. 충무공은 늘 결사의 각오로 앞장서 싸우고 전승한 후 장계를 낼때는 자신의 공은 일체 기입하지 않고 부하장병들의 전공만을 기록하였다. 전사자나 전상자 이름을 낱낱이 적어 그들이 나라를 위한 전공을 높이 찬양하였다.당시 사회신분 제도는 엄격하여 수군 병사들은 거의가 천민출신으로 성(姓)이 없는 사람이 태반이며 이름조차 개똥이 금동이 등으로 아무렇게나 지어 불렀다. 이러한 천민출신의 병졸이름을 군관과 서열의 차별을 두지 않고 승첩 장계에 그 이름과 신분을 기입하였으니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이와같아 따르는 사람이 부지 기수였던 것이다.…시석(矢石)을 무릅쓰고 결사전을 감행하다 전사한 병졸은 지휘관의 책임하에 운구하여 고향땅에 장사하게 하였으며 그 가족은 법에 따라 후원하게 하였고 부상자들은 약을 써서 치료해 주도록 특별히 엄하게 지시하였다. 당시의 관례는 전쟁에 이긴 공(功)이 단위 지휘관인 첨사, 만호, 부사, 군수, 현감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병졸들은 아무리 큰 공이 있어도 포상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에 충무공은 전쟁때마다 얻어지는 의류, 옷감, 식량등을 병졸들에게 상으로 주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피난민들에게도 사정에 따라 할 수 있는 한 사랑을 베풀어 주어 남다른 목민정신이 전라도 백성들을 감동케 하여 충무공이 3도수군 재건에 적극협조를 받은 것이다.충무공은 진중생활에도 구도자의 정신으로 자신을 검속하여 군졸들에게 수범을 보였으며 전쟁때마다 최전선에 나아가 진두지휘를 하므로 모든 군졸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충무공은 수군재건의 기쁨과 함께 군량확보의 일환으로 경계구역을 순회하였다.9월17일 어외도(무안, 진도)에 도착하니 피난선 300여척이 미리와서 맞아 주었다. 나주 진사 임훤, 임환, 임업 등이 와서 대첩치하를 하면서 쌀 한말 또는 한섬을 군량으로 내 놓았다. (난중일기 정유 9월17일) 이들이 자진하여 받친 군량을 여러함선에 나누어 실고 다른 배를 마련하여 실을 정도로 많았다. (난중일기 정유 10월11일) 때는 10월 중순으로 수군들은 겨울옷이 필요하였다. 피난민들이 제공하여 방한(防寒)준비도 마치게 되었고 자진하여 사격군이 되기도 하고 조선, 제포, 화약제조, 활, 화살, 대포등 무기제조에 참여하는 가 하면 무기제조에 필요한 쇠, 구리를 비롯하여 각종재료를 구해오는 역할도 하였다. 소금을 굽고 물고기를 잡아서 병사들의 급식에 보태주고 육지에 나가 판매하여 군수물자를 조달하기도 했다. 충무공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백성이 모여들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초토화된 수군을 재건할 수 있었다.울돌목 해전에서 왜의 정예 수군을 전멸시킨 충무공은 9월17일부터 10월28일까지 41일간 다도해 및 서해연안 지방의 초계경비를 실시키로 계획하고 9월19일 어외도를 출항하여 칠산 앞바다 건너 법성포에 도착 왜적이 민가와 창고를 불질러 태워진 참혹상을 지내는 길에 보고나서 홍농 앞바다에 정박 밤을 지냈다. 법성포는 조운창이 있어 저장된 관곡을 접수 군량으로 확보하고 상륙하여 휴식을 취하고자 하였으나 적이 우굴대고 있어 단념하고 고군산도(古群山島: 옥구)로 옮겨 13일후인 10월3일에 다시 돌아오니 적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적은 충무공 수군을 호랑이보다 더 무서워하여 줄행랑을 친 것이다. 10월3일 고군산도에서 변산반도 앞바다를 돌아 법성포에 정박하여 5일간 장병들을 휴식시켰다.
(2) 수군기지를 고금도로 이동
보화도에서 수군을 재건한 충무공은 함선 42척 수군요원 8천여명을 확보 하고 1598년 2월18일 수군기지를 고금도(古今島 : 완도)의 덕동(德洞)으로 전진설치하였다.수군기지를 고금도로 옮긴 장계내용을 보면 적장 소서행장이 주둔한 예교(曳橋 : 순천)에 평수가(平秀家)가 소속군대를 이끌고 2월13일 합진(合陳)했다. 이와같이 적세는 증강되는데 불구하고 우리 수군이 멀리 나주땅 보화도에 있으므로 적이 마음놓고 낙안, 흥양등지 바다를 침범하고 있으니 매우 통분하다 날씨가 이미 따뜻하였으니 날뛰는 적을 섬멸해 버려야 한다. (선조실록 선조31년 3월18일)고금도 수군기지에 대하여 "행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무술년(1598) 2월17일 고금도로 이진(移陳)하였다. 섬은 강진의 남쪽 30리에 위치하고 산이 겹쳐 있어서 지형이 군사적으로 유리하며 근방에는 농장이 있어 농사짓기에 편리한 곳이다. 충무공은 피난민을 시켜서 농사를 지어 군량을 자급하였다.수군세력은 막강하였으며 남도의 백성들이 장군을 의지하여 이곳에 모인자가 수만호에 이르렀다. 수군의 위세는 한산도의 10배에 이르렀다.(충무공전서 권9행록)1598년 7월16일 명나라 수군이 고금도에 도착하기까지 충무공 수군은 5개월동안 수군증강 기간이된다. 보화도에서 수군의 함대 수는 42척이었으나 다음 관음포해전에 참전한 함대 수는 85척이므로 고금도에서 만든 함선이 43척이 새로 건조된 것이다.당시 고금도에는 15만명 이상의 피난민이 모여 있었으므로 충무공의 수군 증강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고금도에서 3도수군의 형세는 다음과 같다.
함대전투요원 16,150명
협선보조요원 425명
기함탑승요원 290명 도합 16,865명이다.
예교에 적장 소서 행장의 병력은 15,000여명으로(선조실록 선조 31년 9월)충무공 수군과 대등한 수치가 되었다.
(3) 조·명연합수군의 공격
1598년 여름 연합군은 다음과 같이 편성한 후 남해안 지방의 적성채를 공격하였다.
육군 : 동로군(東路軍)
조선군 충청병사 이시연 5,514명
명나라 제독마귀 15,000명
대상왜적: 서생포 가등청정군
〃 : 중로군(中路軍)
조선군 경상우병사 성윤문 2,215명
명나라 제독 동일원 26,800명
대상왜적 : 사천 도진의흥군
〃 : 서로군(西路軍)
조선군 경상좌병사 정기룡 5,928명
명나라 제독 유정 15,000명
대상왜적 : 예교(순천) 소서행장군
수군 : 3도수군통제사 이
순신 16,865명
명나라수군도독 진린 5,000명
조선군 30,522명
명 군 61,800명
1598년 10월1일 중로군(中路軍) 명나라 제독 동일원은 사천왜적 도진의홍의 성채를 공격했으나 대패하여 명나라 군사는 전멸하였다. 서로군(西路軍) 명나라 제독 유정은 수군과 합동하여 동년 9월 20일 예교의 소서행장 성채를 합공했다. 충무공의 수군은 결사전을 전개하므로 왜적은 성채를 비운채 해안에서 싸웠다. 명나라 제독유정은 이때 왜성채를 점령할 수 있었으나 싸울 의사가 없어 왜성을 점령하지 못하였다. 1598년 8월16일 왜 추장 풍신수길이 죽자 왜적들은 전의를 상실한채 본토로 철군하려 하였다. 소서행장도 10월10일 본토로 도망 하려하자 길을 봉쇄하고 단 한척의 배도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충무공의 섬멸 태세에 두려워한 왜군은 성채 안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드디어 사천, 남해, 고성의 왜군이 소서행장을 구출하기 위하여 11월18일 300여척의 함선이 노량에 집결하였다. 이에 충무공은 적군을 요격하기 위하여 노량으로 진격하던 중 관음포 앞바다에서 일대 해상전을 전개 적군을 섬멸하여 버렸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을 승리로 결말을 낸 장엄한 순간 이었다.왜국 추장 풍신수길이 다량의 피를 토하고 죽자 그 추종자들은 일시에 전의를 상실하고 다투어 철군하기를 도모했다.예교(순천)의 왜장 소서행장, 사천의 도진의홍, 고성의 입화통호, 남해의 종의지 등은 11월10일을 기하여 남해의 창선도 적량에 모여 결의하고 본토 철군을 꾀하였다.이들 왜적들은 여건에 따라 예정 시일보다 늦은 11월12일∼13일경에 집결했으나 오직 예교(순천)의 소서행장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충무공이 11월11일부터 해상을 봉쇄하였기 때문이다. 충무공은 11월9일 수군기지 고금도의 덕동을 출항하여 백서량(여천)을 거쳐 11일 예교(순천) 앞바다 유도(柚島)에 도착 함대를 결진하여 해로(海路)를 차단한 것이다. 11월3일 왜선 10여척이 장도(獐島) 근처에 나타나 배회하다가 3도 수군이 추격하자 신성포 안으로 도주 잠적하였다. 충무공 함대는 예교 앞바다에서 함대시위를 하면서 왜적을 자극하여 출동을 유도하였으나 한척도 나타나지 않았다. 왜적의 도주로를 완전 차단하자 왜적은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에게 돼지 두 마리와 술 2통을 예물로 주고 도주로를 열어 줄 것을 애원하였다. 14일 낮에 왜군병선 2척이 명나라 도독 진린을 찾아가 무엇인가 밀약을 한듯싶어 충무공은 진린에게 어떠한 요청이 와도 들어주어서는 않된다고 하였으나 왜병선이 봉쇄망을 통과하여 남해로 빠져 나갔다. 왜장 소서행장은 애원문에서 천위(天威: 상국의 존칭)를 받들고자 유정도독에 수급(首級 : 군졸의 목을 벤 것) 2천級을 드리고 진린도독에는 1천級을 드릴터이니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길을 터 달라는 것이었다. 진도독은 이 말을 믿고 수급을 주면 허가 하겠다고 약속하여 왜장은 매일 술과 안주와 무기로 창·검을 보내면서 남해에 있는 내사위(종의지)가 수급을 관리하고 있으므로 수급중여를 협의차 남해로 보내 달라고 애원한 것이다.밀약 사실을 안 충무공은 속이기 위한 거짓말이니 믿지 말라고 주장하며 사위(종의지)를 청해 온다는 것은 구원병을 청한다는 말이니 왜병선 통과를 허가하여서는 않된다고 했으나 진도독은 끝내 말을 듣지 않고 왜병선을 나가도록 허가하였다.(선조실록 선조31년 12월을묘)11월15일 충무공이 진린을 만났다는 난중일기에 16일 진린은 자기 수하인 진문동을 왜군 진영으로 보냈다. 진문동은 진린의 뇌물 교섭이 성공되어 뇌물선 3척에 말과 창·검을 가득 실어왔다. 이후 왜적의 수하가 진린의 기함에 연락 부절하였다는 기록이다.진린 도독이 충무공에게 왜적과 강화하라고 통보했다. 이에 충무공은 진린에게 적과 강화한다는 말을 해서도 않되며 적을 놓아 보내도 않된다고 하자 진도독은 얼굴을 붉히며 왜사가 다시오자 말하기를 충무공에게 거절 당하였으니 너희를 위해 다시 말할 수 없다(충무공전서 권9행록)고 했다. 진린의 말을 왜사로부터 보고받은 소서행장은 충무공에게도 조총과 왜도(刀)를 바치고 사정했으나 충무공은 단호하게 물리치며 꾸짖었다.임진년이래 나는 너희 왜를 무수히 참수했다. 그리고 노획한 조총과 칼이 산더미같다. 너희들은 어찌 이다지도 뻔뻔스러우냐.
20. 충무공 최후의 관음포 대첩
진린에게 뇌물공세로 해상봉쇄망을 통과한 왜의 전령선이 남해읍의 종의지(宗義智)성채에 도착한 것은 11월14일이다. 소서행장의 구원요청을 받은 왜적진은 즉각 구원수군을 편성했다. 전함 300척과 수군요원 6만여명은 도진의홍의 살마군이 선봉군이 되었다. 이들은 지난해 10월1일 사천성에서 명나라 동일원의 군대를 전멸 시키고 1597년 외줄포 춘원포에서 원균의 3도수군 주력 함대를 섬멸한 자칭 천하무적의 강군이었다.충무공은 진린이 통과시킨 왜 전령선 사건을 뒤에 알고 적수군의 래습(來襲)을 예견하고 예교(순천)의 통과수로인 노량의 방어대책과 우회수로인 미조목(彌助項)을 생각하여 경상우수사 이순신(純信)을 노량에 전선 10척으로 급파하여 수비토록 하였다. (난중일기 권3선조무술 11월19일) 또한 미조목에는 발포만호 소계남과 당진만호 조효열을 편성 경계함대 5척을 파송 하였다.1598년 11월18일 밤 10시 노량의 유도에서 봉쇄작전을 펴고 있는 충무공은 쾌속전령선으로 급보하기를 李純信은 봉쇄를 풀고 즉시 노량으로 출진하라 하고 또한 충무공은 왜적의 지원군과 싸우기 위해 노량으로 출격하려 하자 명나라 도독 진린이 방해를 하였다. 그러나 충무공은 방해를 무시하고 나팔을 불게하여 함대에 출전명령을 내렸다. 유도의 李純信도 노량으로 출격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명군도독 진린도 충무공 함대의 뒤를 따랐다.충무공 함대가 관음포 앞바다에 도착한 것은 11월19일 새벽2시였다. 왜적이 노량에서 예교(순천)로 가는 수로가 두갈래인데 주로 관음포 앞바다를 통과하는 수로가 주가되고 다른 하나는 죽도 앞바다를 통과하는 수로이다. 후자는 대함대가 야간에 통과하는 수로로는 매우 위험하므로 적은 틀림없이 관음포 앞바다로 통과할 것으로 판단했다.명나라 수군을 죽도 수로에 대기시키고 충무공은 관음포 앞바다에 함대를 전개하여 진을 짜고 대기하였다.(난중잡록 권3 선조무술 11월19일) 오전 4시경에 왜수군의 대함대가 관음포 앞바다에 이르자 충무공함대는 일제히 요격전을 전개하였다. 관음포 해전에 참전한 적수군은 함선300여척 수군요원 6만여명 이었으며 충무공 함대는 83척으로 수군요원은 1만7천여명이며, 명나라 수군은 함선 63척에 수군요원 2천6백여명으로 죽도에 정박하여 비상 대기 시켰다.「선묘증흥지」기록에는 명나라 수군과 충무공 함대가 합동전을 전개한 것으로 되어 있다. 명나라 도독 진린(陳璘)과 충무공은 수군을 좌우협으로 나누어 항구와 섬 사이에서 복병(伏兵)하였다. 한밤중에 적수군 300여척이 노량 동쪽 앞바다에 이르자 합동군이 좌우에서 포격하니 왜적은 흩어졌다. 마른나무에 불을 붙여 어지럽게 적선에 던져 불태우자 지탱을 못하고 관음포 안으로 패주하였다가 앞이 막힌 것을 알고 다시 나와 격열하게 항전이 전개될 때 충무공은 북을 치면서 선두에서 독전 하였다.왜적이 충무공을 포위하면 진도독이 제어하고 진도독이 곤경에 빠지면 충무공이 구출하는 혈전을 반복하다가 명나라 부총병 등자룡의 배가 습격되어 자룡이 살해되고 배가 불탔다. 3도수군은 적선이 불타는 것으로 알고 함성을 지르며 기세를 더욱 높였다. 적장 3명이 3층 배에 앉아서 날카롭게 지휘할 때 한명의 적장을 충무공이 격살하니 적들은 명수군의 포위를 풀어 진도독을 구제할 수 있었다.
(1) 충무공의 전사와 관음포 해전
호준포(虎 砲)를 발사하여 연이어 적선을 분쇄하던 중 충무공은 적의 총탄이 가슴에 관통되어 측근들이 부축하여 장막속으로 옮겨지자 충무공은 당부하기를 지금 싸움이 한창 급하니 삼가 내죽음을 말하지 말라고 한후, 곧 운명하였다. 향년 53세로 서거한 것이다.(징비록 : 有飛丸中其胸出背後 左右扶入帳中 舜臣曰戰方急 愼勿言我死 言訖而絶)휘하의 군관들은 충무공의 유언에 따라 그의 죽음을 극비에 붙이고 곡성(哭聲)을 내지 않았으며 여전히 지휘기를 흔들며 독전하였다. 정오에 적은 소탕되었으며 적선 200여척이 불타 전소되였다. 적병은 불타죽거나 물에 빠져 죽고 포로로 잡히거나 포탄과 화살을 맞거나 칼에 베어 죽어서 전멸되었다.도진의홍이 수습하여 패주할 때 적선은 불과 50척이었으며 소서행장은 전투중에 묘도의 해협을 통하여 먼바다로 패주한 뒤였다. 승기를 잡은 충무공은 이미 투구와 갑옷을 벗고 융복을 입은채 뱃머리에 우뚝서서 친히 북채를 들고 북을 치면서 맹열히 추격전을 지휘하였다. 3도수군 통제사의 붉은 융복이 막 떠오르는 아침 햇살에 찬란하게 빛났다. 충무공 좌우에는 전속부관 송희립과 조카 이완이 지휘기를 흔들며 거듭 독전하였다.충무공기함은 쫓기는 적선과 불과 3∼4m 거리로 적선 갑판위에 엎드려 있던 조총 저격수가 융복을 입은 충무공을 3도 수군의 대장인 것을 인지하고 곧바로 조총을 발사 명중되었다. 전투는 아비규환 이었으며 바다는 시산혈해(屍山血海)로 물이 흐르지 못하고 핏빛으로 붉게 물드렀다 하였다. 3도수군 통제사의 전사와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덕장등 10여명의 장수가 적탄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이 역사적인 관음포 해전은 1598년 11월19일 새벽 4시에 개전하여 아침8시에 막을 내린 전쟁으로 임진왜란 7년 전쟁이 종식을 내린 것이다. 관음포 해전과 임진왜란 7년 전쟁의 결과로 3도수군과 왜적의 참상을 기록으로 비교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다 음
1.관음포해전 참화
왜수군 ① 전 함 : 불타거나 대파된 수 300척
② 전사자 : 200척×200명 = 40,000 4만명
③ 전상자 : 100척×200명×2/3=13,000 1만3천명
3도수군 ① 전 함 : (명군등자룡에 대여한 배) 1척
② 전사자 : 충무공을 비롯 단위지휘관 10명
③ 전상자 : 추산인원 300명
2.임진왜란 7년전쟁 참화
왜수군 ①전 함 : 불타거나 포획한 수 521척
전 함 : 대파한 수 414척
②병졸 살상한 수(약) 126,380명
3도수군 ① 전함(등자룡에 대여한 배) 1척
② 전사군관 10명
③군병 전사자(약) 1,022명
21.충무공의 위국충정과 살신성인
충무공은 임진왜란 7년 전쟁에서 신명을 받쳐 위국충정의 하는일에 최선을 다했고 자신의 능력을 남김없이 쏟아 국가와 민족앞에 산화한 분이다. 임진왜란을 위해 태어나서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평생을 받친 운명적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임진왜란은 일본이 온군력의 3분의 2 이상을 쏟아부으며 조선을 침략했던 전쟁으로 충무공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역사속에 묵묵히 희생당한 사람이다. 일개 국민으로서 한 개인으로서 그리고 국가수호의 책임을 지고 자기가 맡은 바 최선을 다한 3도수군 통제사로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애국충정은 겨레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남아 어떠한 국가적 위난이 닦쳐도 극복하는 승리의 정신으로 영원히 함께할 위대한 국가수호 정신이다. 조국의 수호를 자임하고 순간의 허점도 스스로 용납치 않았던 긴장속에서 대장의 권위보다는 병졸의 자세로 언제나 함대의 선두에 나서서 싸운 용감한 군인다운 충무공 그는 백전백승의 상승장군의 신화를 남긴 유일무이한 무성(武聖)으로까지 추앙 받아야 함이 당연하며 그 위대한 정신은 우리 전 민족의 혼으로 정립하여 자손 만대까지 계승 토록하고 그정신을 일께워서 발전 시키므로서 이나라가 그로 인하여 크게 융성(隆盛) 되게하는 초석으로 삼아야 할것이다. 왜적의 침략 야욕을 여지없이 말살시킨 3도수군이 제해권을 장악 토록하여서 적의 병참선을 차단함으로써 계사년(1593) 정초에 평양에서 패전한 후 서울에 집결한 적을 아사(餓死) 직전에 놓이게 하여 적으로 하여금 부득이 남해안으로 총 퇴각하게 만들었던 사실들 원균이 3도수군을 전멸시킨 후 패잔 전선 13척을 수습하고 3도수군을 재건하여 울돌목(명량) 대첩에서 왜적함선 133척을 섬멸한 신화적 전술의 지휘와 충파 격파로 도합 300척을 소탕하여 승기를 잡으면서 출전시 입었던 투구와 갑옷을 붉은 융복으로 갈아입고 친히 북을 치면서 추격전을 독려 하던중 쫓는 적전과의 불과 3∼4M 거리가 될 때 적의 조총 저격수 총격이 충무공의 가슴에 명중되어 실신될 때 유언으로 전쟁이 한참 급한때니 내 죽음을 알리는데삼가하라 말을 끝내고 절명한 장군의 살신성인의 애국심에 감동치 않을 수 없다. 이 대목에서 평상시 군인이 전쟁수행도중에 예복을 갈아입는 사례는 드문일이며 충무공이 3도수군 통제사 예복(융복)을 입고 적의 표적으로 내민 속마음을 두고 말이 많을 수 있다. 혹자는 재임중에 자심한 당쟁으로 국익에 반하는 분열과 반목으로 자신이 2회나 백의종군한 사실과 왜란 평정후 공과를 논할 때 다시 자신의 문제등으로 물의를 미연에 예방 또는 해소하고자 선택한 순국이 아니겠는가 싶기도 하다는 평이 있다.임진왜란 7년전쟁을 종식 시키는데 육전에서 충장공 권율 도원수와 함께 쌍벽을 이룬 3도수군 통제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위대한 위국충정을 영원히 우리전 민족은 본받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