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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33:1-17
찬송가 370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모세의 일생은 세 시기로 구분이 가능합니다. 40세까지 애굽의 궁정에서 공주의 아들로 자라난 시기, 살인자와 도망자로 잊혀진 자가 되어 미디안 광야에서 목자의 삶을 살아간 시기, 8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120세가 되어 죽기 전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나안 목전까지 인도하여 나아간 시기입니다. 각각 40년씩 세 시기로 구분됩니다. 히브리서 11장 24절-26절은 이런 모세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합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오늘 그 모세의 삶의 마지막 끝자락을 바라보며 그의 마지막 40년을 함께 한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광야 2세대들에게 어떠한 축복을 하고 있는지를 본문을 통해 살펴보려 합니다.
하나님과 언약백성(1-5절)
(1-2)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함이 이러하니라 그가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추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에 강림하셨고 그의 오른손에는 그들을 위해 번쩍이는 불이 있도다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의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
오늘 모세의 축복에서 모세에 대하여 소개하기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삶에 많은 이력이 있지만 죽기 전 내가 가장 소중하게 불려지기 원하는 나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모세는 공주의 아들, 민족의 지도자로 자신을 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묘비를 보면 다양한 소개와 안내를 하지만 때론 ‘성도 아무개’로 기록한 그리스도인의 묘비가 있습니다. 그것을 볼 때 저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아름다운 모습을 봅니다. 세상적으로 아무리 화려한 이력과 자격을 가진 자라도 그런 것을 기록하기 보다 하나님 앞에 부름받은 거룩한 백성임을 가장 자랑스러워하고 감사해 하는 고인과 그 유가족들의 신앙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이라 고백하고, 사도 바울이 편지에서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도, 종’으로 소개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합니다. 먼저 자신이 복을 간구하는 대상이신 하나님에 대한 묘사를 합니다.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추셨다’고 합니다. 이 산들은 모두 시나이반도에 위치한 지역들이며 시내산은 호렙산이라고도 하며, 모세가 십계명 두 돌판을 받은 산이고, 세일 산은 에돔을 의미하며 아라바 지역에 위치해 있으며, 바란산은 바란 광야에 위치한 산입니다. 각 산들에서 ‘오시고, 일어나시고, 비추시고’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그 임재는 ‘일만 성도 가운데에 강림하셨고’라는 표현처럼 거룩한 백성들에게 임하셨다고 해석할 수도 있으며, 또한 ‘허다한 천사들과 함께 강림’하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임재하신 하나님의 오른손에는 그들을 위해 ‘번쩍이는 불’이 있다고 합니다. 이 번쩍이는 불은 ‘에쉬다트’ 곧 ‘불의 법, 불같은 법’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시내 산에 임하셔서 율법을 주실 때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고 말씀하신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2절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신적 능력과 임재를 나타내고 있으며, 3-5절은 그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맺은 언약관계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3-5)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의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 모세가 우리에게 율법을 명령하였으니 곧 야곱의 총회의 기업이로다 여수룬에 왕이 있었으니 곧 백성의 수령이 모이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함께 한 때에로다
그토록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모든 성도가 그의 수중에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수중’이라는 표현은 ‘야드’라는 단어로 ‘책임, 돌봄, 소유’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는 것은 세상적 방식의 통제와 억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울타리 곧 돌보심의 울타리 안쪽에 심긴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은 모세를 통해 율법을 받았고, 그 율법은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곧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깨닫고 행하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잃어버린 인간은 생을 허비하며 살아갑니다. 헛된 것에 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지만 결국 그것에서 영원한 관계와 기쁨을 발견할 수 없어 허무함에 빠집니다. 우리는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 안에서 우리 존재의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율법은 ‘야곱의 총회의 기업이로다’라고 합니다. 이는 그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큰 소유물, 보물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여수룬’은 ‘올바른 자’라는 의미를 가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상적 이스라엘을 향한 시적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울타리 안쪽에 심겨 아름답게 자라가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각 지파에 대한 축복의 내용이 이어집니다.
모세의 축복(6-17절)
먼저 6절에 르우벤에 대한 축복이 나옵니다.
(6) 르우벤은 죽지 아니하고 살기를 원하며 그 사람 수가 적지 아니하기를 원하나이다
르우벤은 야곱의 첫 아들 곧 장자였지만 그의 삶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큰 죄를 범하여 장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오늘 이 축복의 내용도 장자에게 어울릴만한 복이 아니라 생존과 번성에 대한 최소한의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태생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서도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에는 뒤로 밀려난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르우벤이 그러하며, 에서가 그러했습니다. 또한 성경 전체의 관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기업의 풍성함을 사모하거나 바라보지 않고 육신의 욕심과 정욕에 매몰된 사람들이 빠지는 함정입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도 보암직하고 우리 삶을 행복하게 할 만한 탐스러운 것들이 많은 시대에서 한 그릇 팥죽과 쾌락에 빠져 하나님의 기업을 바라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7) 유다에 대한 축복은 이러하니라 일렀으되 여호와여 유다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의 백성에게로 인도하시오며 그의 손으로 자기를 위하여 싸우게 하시고 주께서 도우사 그가 그 대적을 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유다에 대한 축복은 특별한 왕권이나 다스림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이제 곧 가나안 전투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남쪽 지방에서 다른 족속으로부터 고립되지 않고 전투에 승리하기를 기원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특히 전쟁터에 나갈 유다 족속에게 자신의 음성을 듣고 도우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큰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속에 살아가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합니다. 바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도우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8-11) 레위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 물 가에서 그와 다투셨도다 그는 그의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의 형제들을 인정하지 아니하며 그의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으로 말미암음이로다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제단 위에 드리리로다 여호와여 그의 재산을 풍족하게 하시고 그의 손의 일을 받으소서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
레위에 대한 축복은 길게 이어집니다. 먼저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다고 합니다. 둠밈과 우림은 대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사용했던 도구이며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의 뜻을 묻던 대제사장이 레위지파에게 속해 있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맛사, 므리바에서 물이 없음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며, 모세가 시내 산에 십계명을 받으러 올라갔을 때에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범죄하였을 때, 레위지파가 하나님의 편에 서서 같은 민족을 칼로 침으로 하나님과 함께 분노했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때 레위지파는 부모, 형제, 자녀보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을 더욱 소중히 생각하였고, 그런 레위지파에게 율법과 말씀을 가르치는 역할을 주시고, 또한 성막의 일들을 맡기셨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레위지파는 야곱의 축복에서는 시므온과 같이 ‘폭력의 도구’로 소개되어 있었지만 그 분노가 하나님의 도구로 쓰이자 ‘거룩한 분노’가 되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를 가리는데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의 실수에 그 지파를 버리지 않으셨고, 그가 다시금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해 돌이켰을 때, 그 지파를 귀하게 사용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때론 연약함으로 불순종하여 무너질 수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회복된다면 그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은혜와 긍휼을 부어주시고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레위 지파에게 재산이 풍족하게 하여 손의 일을 받으시며 대적하는 자가 일어나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며 바른 제사와 예물을 구별하여 드림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풍족함이 넘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레위지파의 풍성함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신앙을 소중히 지키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12) 베냐민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살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마치도록 보호하시고 그를 자기 어깨 사이에 있게 하시리로다
베냐민 지파는 민족의 막내로서 하나님의 보호와 돌보심의 대상이 되기를 축복하고 있습니다. 베냐민은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태어나면서 어머니 라헬이 죽으면서 ‘베노니’ 곧 고통의 아들, 슬픔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을 따라 지은 이름입니다. 태어나면서 자신을 낳다가 어머니를 잃은 베냐민은 어머니의 젖 한 번 먹지 못하고 컸을 것이며, 그나마 있던 어머니의 친 혈육인 요셉도 팔려가 베냐민은 형이 죽은 줄 알고 자랐을 것입니다. 그런 베냐민의 후손에게 ‘자기 어깨 사이에 있게 하시리로다’라는 말씀을 주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등에 업혀 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부모의 등에 업힌 아기가 안전하고 건강하게 자라듯 베냐민 지파가 가나안 땅에 안전히 거주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실 것임을 나타냅니다. 이 말씀은 자신의 조상이 겪었던 아픔과 슬픔을 기억하고 있던 후손들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13-17) 요셉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원하건대 그 땅이 여호와께 복을 받아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땅 아래에 저장한 물과 태양이 결실하게 하는 선물과 태음이 자라게 하는 선물과 옛 산의 좋은 산물과 영원한 작은 언덕의 선물과 땅의 선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에 계시던 이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의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 그는 첫 수송아지 같이 위엄이 있으니 그 뿔이 들소의 뿔 같도다 이것으로 민족들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리니 곧 에브라임의 자손은 만만이요 므낫세의 자손은 천천이리로다
요셉은 실제적 장자의 명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역대상 5장 1-2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그래서 요셉의 자녀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통해 두 배의 기업을 얻게 되며 하늘의 보물인 이슬, 땅 아래 저장한 물, 해와 달이 빛을 주어 풍성하고 기름진 열매를 얻는 복을 누릴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기세는 첫 수송아지처럼 위엄이 있고 들소의 뿔처럼 힘이 있어 이방민족들을 무찌를 것임을 말씀합니다.
오늘 이 모세의 축복이 야곱의 축복과 다른 중요한 한 가지는 야곱의 축복에는 개인의 허물과 행위에 대한 결과를 언급하고 있지만 모세의 축복에는 큰 허물이 있는 사람과 지파에도 그것을 지적함 없이 모세가 하나님께 구할 수 있는 최고의 복들을 간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부모의 마음’입니다.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은 때로는 아픔이요, 슬픔이요, 애증의 대상이었고, 뗄레야 뗄 수 없는 사랑과 고민과 주어진 사명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이 영적 부모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언과도 같은 축복의 말씀을 전하며, 과거의 잘못에 대한 정죄와 심판의 말씀이 아닌 그럼에도 주어진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며 복을 받고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광야 2세대처럼 우리도 주어진 세상을 말씀으로 변화시키며 나아갈 때 두려움과 떨림이 가득하며, 과거의 실수와 불신앙이 발목을 잡으려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과오와 실수를 잊어버리시고 새롭게 격려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다시금 주어진 사명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나타나사 양떼를 맡기신 주님의 은혜처럼 말입니다. 그 은혜와 사랑이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의 블라인드 사이드를 가득 채우고 넘쳐 감사함으로 우리 삶의 옥합을 주님께 깨드리는 예배로 이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한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며 인생의 끝자락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기억되길 소망했던 모세의 삶을 통해 우리의 인생 마지막 자락을 미리 떠올려봅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 주시고, 모세가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자신은 들어갈 수 없을지라도 후손들이 하나님께 복 받는 언약백성으로 그 땅에 들어가 살아가길 온 맘 다해 축복하고 격려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우리의 다음세대와 후손들이 하나님 앞에 나보다 더 큰 은혜를 누리는 믿음의 백성들이 될 수 있도록 밑가지가 되어 기도하고 축복하고 격려하는 신앙의 어른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우리가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묵상해봅시다.
2. 야곱의 축복에 나왔던 레위에 대한 기록과(창세기 49장) 모세의 축복에 나온 레위의 기록이 다른 부분들을 살펴보며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바르게 사랑하고 있는지 묵상해봅시다.
3. 어머니의 죽음과 형의 갑작스러운 부재에서 시작된 베냐민과 그 지파의 아픈 상처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어떻게 위로하고 격려해주시는지 살펴보며 묵상해봅시다.
4. 가나안 땅을 향해 들어가는 광야 2세대들에게 축복과 격려의 말을 전하고 있는 모세의 마음을 헤아려보며 나는 훗날 하나님 안에서 가족 혹은 지인에게 어떤 믿음의 축복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봅시다.
(작성: 강요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