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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정 시집 『숲속의 하모니카』
사유의 꿈, 그 자유로운 은유
김 창 희
1. ‘見’
한자어 ‘見’을 자전에서 찾아보면 그 형상이 사람 위에 큰 눈을 얹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명확히 본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데 보는 작용과 보이는 결과를 아울러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見’은 또한 형체로 드러나는 사물의 모습뿐 아니라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생각과 마음의 행로까지 확장시킨 의미로도 쓰이고 있다. 이를 ‘의식으로 안다’고 할 수가 있는데 눈에 있을 때는 ‘본다’고 하고, 귀에 있을 때는 ‘듣는다’라고 하며, 코에 있을 때는 ‘맡는다’라 하며, 혀에 있을 때에는 ‘맛본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체에 있을 때는 ‘접촉한다’고 하고, 뜻에 있을 때는 ‘생각한다’는 표현이 되는 것이다. 몸으로는 ‘가고· 오고· 머물고· 앉고· 눕는다’는 경로를 포함하며, 마음으로는 ‘믿고· 지키고· 따르고· 깨닫는다’는 절실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1990년 현『불교문예』의 전신인 ‘삼오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온 이석정 시인이 20여년 만에야 그의 첫시집『숲속의 하모니카』를 상재하였다. 그의 시집 속 시행들을 읽어가노라면 느리지만 섬세한 ‘눈 밝힘’이 그의 고단한 시업의 행로를 하나의 깨달음처럼 보여주고 있다. ‘見’의 의미를 되짚어보게 하는 明鏡같다고나 할까. 꽃이되 화려한 색감을 입히지 않고 빛이되 너무 강열하지 않아 따스하기만 한 파스텔 톤의 삽화들은, 그러나 그 존재감이 어떤 경우에도 명징함을 잃지 않는 이미지를 완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등단지로 유추해 볼 수 있듯이 일찍이 불교적 명상을 통해 시인은 만물과 소통하는 깊은 통찰력을 키워올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시인의 시에 나타난 서두름이 없는 시어의 행보는 그대로 그의 사유가 되고 꿈이 되어 자유로움과 자연스러움의 시적 아우라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를 박제천 시인은 시집 해설에서 ‘시의 자장적 매력’ 이라고 표현하였다. 이석정 시인의 시집『숲속의 하모니카』에 실린 59편의 시속에서 이제 그 자장적 매력을 찾아보도록 하자.
액자 속에서 오래된 그림을 찾았다/ 먼지를 털어내자/ 액자 속에서 풋사과가 익고 있다/
사과가 담긴 그릇은 투명해서/ 새콤한 향이 살아 불빛을 받고 있다/ 사과에 불을 붙인 것 은 곁에 코리 등잔이었다/ 불을 켜자 아홉 개 사과가 발갛게 점등되었다/ 칠보산을 장식 했다/ 오래된 그림 속에 켜 놓은 불을 보다가/ 나도/ 점등되었다/ 연꽃등도 하나 밝혔다/
주름등도 하나 켰다/ 어둡던 내 안의 골방이 환한/ 빛 법당이 되었다
-「액자 속의 봄」전문
위의 시「액자 속의 봄」에서 시적 화자는 잊고 지내던 것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그것으로 인해 다시금 관계를 회복하게 되는 과정을 섬세한 터치로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액자 속에서 오래된 그림을 찾았다/ 먼지를 털어 내자/ 액자 속에서 풋사과가 익고 있다/ 사과가 담긴 그릇은 투명해서/ 새콤한 향이 살아 불빛을 받고 있다/ 사과에 불을 붙인 것은 곁에 코리 등잔이었다/ 불을 켜자 아홉 개 사과가 발갛게 점등되었다/” 에서와 같이 시행을 끌고 가는 속도와 이미지의 정황이 너무도 분명해서 독자는 그 움직임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덕분에 시적화자와 마치 한 몸을 이루듯이 코리 등잔의 불빛 속에서 함께 익어가고 함께 점등이 되어 “연꽃등도 하나 밝혔다/ 주름등도 하나 켰다/ 어둡던 내 안의 골방이 환한/ 빛 법당이 되었다”고 하는 완곡한 결말의 감동을 제 것 인양 체험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독자에게 감동을 준다는 것은 시의 행간에 내포된 울림이 크다는 의미로도 읽혀질 수가 있다. 시인의 끊임없는 내면 성찰이 액자 속의 사과가 익어가는 모습으로 승화되고 환한 빛 법당이 봄으로의 생명력을 얻어내고 있는 시편이다.
여름 한밤중 어둠 속 창을 열고 앉으면/ 마당이 별채다/ 별채가 안채다/ 한 꺼풀 미닫이 문을 밀고 들어오는/ 베고니아다 난초다/ 따로 이름 붙일 일도 없다/ 모두 밤옷을 입으면
색동과 흑백이 따로 있지도 않다/ 검은 이불을 덮고 세계는/ 꽃이불로 잠이 든다/ 마음이 라는 꽃 이파리는/ 꿈꿀 때만은 복잡해도/ 감감 밤중에 일어나 감감히 앉으면/ 하늘은 검고/ 별과 달빛은 각각 옥양목 두루마기처럼/ 희다. -「달빛 밤옷」 전문
한 밤중 시인은 깨어있고 어둠 속에서 창을 열고 앉아있다. 위의 시「달빛 밤옷」에서 시적화자는 어둠을 통하여 또 하나의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불교 경전 중의 하나인『능가경』에 있는 ‘몸으로 짓지 않더라도 마음대로 이룬다(種種非身作 得力自在成) ’라는 말이 생각나는 부분이다. 어둠이 어둠을 벗어나는 심연의 세계를 펼치면서 그 심연의 세계를 한 폭의 세필화로 구체화 시키고 있는 것이다. “마당이 별채다/ 별채가 안채다/ 한 꺼풀 미닫이문을 밀고 들어오는/ 베고니아다 난초다/...중략 / 모두 밤옷을 입으면/ 색동과 흑백이 따로 있지도 않다/ 검은 이불을 덮고 세계는/ 꽃이불로 잠이 든다/ 마음이라는 꽃 이파리는/ 꿈꿀 때만은 복잡해도/ 감감 밤중에 감감 일어나 앉으면/”에서 보여주듯이 시인은 미궁과 같은 어둠 속에서 마음결의 무늬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달관한 듯 바라보는 어둠 속 세상은 높고 낮음도 크고 작음도 또 색동과 흑백의 논리도 필요치 않는 평면적 고요 속에 잠겨있다. 마음 속 꽃 이파리가 그려내는 사유의 시간들은 시인이 마음의 눈으로 그려내는 풍경들이다. 마음이 짚어가던 끝자락에 옥양목 두루마기 같은 하얀 달빛이 걸려있는 것이다.
세탁소에서 한 벌뿐인 한복을 찾아 벽에/ 걸었다 벽이 곱다/ 어둡던 벽이 환한 벽이 되 었다/ 옥색치마폭이며 목련빛 흰 저고리,/ 자주색 긴 고름이 나의 벽 하나를 장식했다/ 벽 이 벽이 아닌 벽을 보았다/ 고운 옷을 치어다보며 잔칫날을 생각했다// 입고 싶은 나의 날개옷/ 벽에 건 옷을 보며 나는 날고 싶었다/ 날개옷을 입고 나비처럼/ 꽃들의 집을 찾 아다니고 싶었다/ 걸어놓은 옷에 꿈이 있었다/ 고운 한복에서 꿈을 찾아 날개를 폈다// 벽 장 속이 답답해 들어가지 못한/ 내 날개를 다시 찾았다/ 한복을 벽에 걸어놓자/ 둥둥 북소리가 가벼이 온방을 돌아다녔다.
-「단벌 날개옷」전문
예전엔 우리의 평상복이었던 한복이 이제는 특별한 날 특별하게 입는 옷이 되었다. 그래서 그 의미 또한 특별하게 다가온다. 시적 화자가 한복을 벽에 걸어놓자 새삼 벽이 환해지는 느낌을 받은 것은 특별한 시인의 소망이 날개를 달았기 때문일 터이다. “어둡던 벽이 환한 벽이 되었다/ 옥색치마폭이며 목련빛 흰 저고리,/ 자주색 긴 고름이 나의 벽 하나를 장식했다/ 벽이 벽이 아닌 벽을 보았다/..중략 / 입고 싶은 나의 날개옷/ 벽에 건 옷을 보며 나는 날고 싶었다/ 날개옷을 입고 나비처럼/ 꽃들의 집을 찾아다니고 싶었다/ 걸어놓은 옷에 꿈이 있었다/ ” 한복의 고운 이미지는 시인의 꿈으로 살아나서 날개옷이 되었다. 마음속으로 기다리기만 하던 날들이 벽이라는 공간을 통해 시인에게 꿈꾸어야 할 미래지향적 성격을 부여하고 있다. 그것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든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든, 시인에겐 꿈꿀 수 있는 필연적 의미가 생긴 것이다. 이 시에서 보여주는 미학적 의미는 보여짐으로서 그 존재적 가치를 규명하게 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단벌 날개옷이기에 더 절실 할 수밖에 없는 꿈꾸기이다.
2. 牧牛
이석정 시인의 시집 속에는 같은 제목의「평리 목우일기」7편 외에도「나는 목동입니다」,「천산구곡 우도를 가다 」등 ‘소’를 주제로 한 시가 여러 편 있다. 농촌에서 나고 자란 시인에게 있어 소는 친구 같고 가족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소를 몰던 기억과 소꼴을 먹이던 언덕이나 강가에서의 추억이, 유년시절을 훌쩍 넘긴 지금의 시인에게 있어서는 아름답고 귀한 시간들로 기억될 것이다. 더구나 불교에 관심이 많은 시인에게 ‘심우도’ 의 다섯 번째인 ‘소를 기르다’라는 牧牛의 의미는 수행의 마음가짐에서 남다른 깨우침이 되었을 터였다.
나는 본시 목동입니다/ 풀밭은 나의 학교, 꿈속에서도/ 나는 낫을 갑니다/ 나는 이꼴저 꼴 가리지 않고/ 독살이든 억새든 언제 어디서나/ 날을 세웁니다/ 어젯밤에는 풀밭에 누 워 있는 도둑을/ 쫓아내려 애를 쓰다/ 여의봉을 주어도 여의치 않아/ 고사리 한 짐 꺾어 돌려 보냈습니다/ 나는 가끔 꿈을 꾸지만/ 꿈속에 만난 사람을 마지막/ 내 사람으로 해야 합니다/ 나는 본시 목동입니다/ 세상 잡초가/ 나를 키웁니다. -「 나는 목동입니다」전문
위의 시에서 시적화자는 “나는 본시 목동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목동은 소를 기르는 존재이고 그 소를 기르기 위해서는 소를 잘 다룰 줄 알아야함은 자명한 일이다. 소 먹이인 소꼴을 부지런히 베어야 하며, 소꼴을 잘 베기 위해서는 낫날이 무디어 지지 않도록 자주 낫을 갈아 주어야한다. 이는 ‘심우도’에서 자아인 ‘소’를 길들이는 과정과 같이 시인이 자신에 대해 끊임없는 성찰하고 수행하는 여러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때문에 시적화자는 소를 키운 세상 잡초가 결국 자신을 키우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새끼도/ 남/ 주고/ 평리 소/ 제/ 울음만/ 가지고/ 간다.
-「평리 목우일기」3 전문
늙은 어미소/ 어미 부르며/ 운다/ 큰 몸/ 매이어/ 어떻게 우는지/ 어떻게 보여주 며/ 사는지/ 우는/ 큰 어미소/ 쳐다본다.
- 「평리 목우일기」4 전문
사람도 한번 태어나/ 소처럼 살면/ 자기 사람은 산다 한다// 한가한 날은 돌아보 고/ 두 귀 열어/ 세상소리 새김하고/ 그 길 죽는 날까지/ 바꾸지 않고// 뼈, 살, 가죽,/ 남 아니 주더라도/ 사람도/ 소처럼 살면/ 자기 사람은 산다 한다.
- 「평리 목우일기」7 전문
위의 시들은 아주 짧은 행으로 이루어진 시편이다. 그러나 절제된 시어 속에 내재된 의미망은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는 것들이다. 「평리 목우일기」3에서 새끼마저도 제 품에서 기르지 못하고 보내야 하는 어미 소의 슬픔을 “제/ 울음만/ 가지고/ 간다”라는 짧은 시행 속에 담았다. 이는 오히려 시의 긴장감을 높이고 그 슬픔의 정조를 깊이 느끼게 하는 효과를 얻고 있다. 「평리 목우일기」4는 한 생을 다 산 것 같은 늙은 소도 제 어미가 그리워 운다고 하였다. 여기서 시적화자는 소의 희노애락을 통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익힌다고 할 수 있겠다.「평리 목우일기」7에서는 소의 박애주의적 삶을 본받아 사는 것이 곧 사람답게 사는 것임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또한 깨달음의 길이라는 것도 암시해 주고 있다.
내 포켓 속은 흰 소 한 마리가 누워/ 억조만년 바다를 이룬다/ 몸은 산호초 모래밭 되고/ 파도에 닳아 패이고 깨진 내 귀들은/ 천산 구곡이다/ 누군가 내 뼈를 보고 조각품이라고 말한다/ 생긴 건 멋대로이나/ 마음 이루고 사는 모양은 한마리 소나 다름없다/ 적적할 때 파도는 나를 깨워 놓고/ 뼈가 보이도록 절한다/ 돌맹이도 깨끗하면 그리워지는 법/ 목동의 바다피리가 어느 때는 간절하게 그립다/ 내 사는 풀냄새가 그리울 때도 있다/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만져지는 잉크빛/ 바다가 하나 있어/ 손바닥에 올려 놓고/ 만리를 떠나지 않고 쳐다보는/ 섬을 하나 안고 산다 - 「천산구곡 우도를 가다」전문
이제 시적 화자는 더 이상 목동이 아니다. “파도에 닳고 깨진 내 귀들은/ 천산 구곡이다/ 누군가 내 뼈를 보고 조각품이라고 말한다 ”에서 보듯이 수많은 시· 공간의 변화를 겪어낸 풍화의 흔적을 보이고 있다, 소 또한 목동에 이끌려 풀이나 뜯던 그 소가 아니라 “억조만년 바다를 이”루어 모든 것을 품어내고 모든 것을 이루어 낸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흰소다. 이제는 네가 나이고 내가 너일 수 있는 합일의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적적할 때 파도는 나를 깨워 놓고/ 뼈가 보이도록 절한다/ 돌맹이도 깨끗하면 그리워지는 법/ 목동의 바다피리가 어느 때는 간절하게 그립다/ 내 사는 풀냄새가 그리울 때도 있다” 에서는 어떠한 법계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움을 보여주고 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 본성을 사랑하는 모습이다.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만져지는 잉크빛/ 바다가 하나 있어/ 손바닥에 올려 놓고/ 만리를 떠나지 않고 쳐다보는/ 섬을 하나 안고 산다”에 오면 바다가 된 흰소는 소가 된 화자, 즉 섬 우도를 안고 산다고 말한다. 이는 다시 확장된 화자가 주머니 속에서 바다(흰소)를 손바닥으로 올려놓는다. 텅빈 원상속에 확장과 축소를 반복하며 자유로이 변신하는 모습은, 만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참 지혜의 상징으로 반본환원 返本還元의 본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3. 꽃의 사유
이석정 시인의 시는 음미해볼수록 그 언어의 깊이를 덜어내기가 어렵다. 이는 삼라만상 모든 사물과 교감하고자 하는 시인의 사유가 그 만큼 오랜 시간 정제되어 온 결과물이라 해야 할 것이다.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참으로 다양한 꽃들을 만나게 된다. 꽃이란 색감의 대명사다. 우리가 꽃에 열광하는 것은 모습도 모습이려니와 그 꽃에서 배어나오는 화려한 색감 때문일 때가 더 많은 것이다. 그런데도 이석정 시인이 꽃의 색감을 부각시키려 애쓰지 않는 것은 보다 더 강열한 꽃의 사유가 이미지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태여 색깔을 입혀 볼 의사가 없음을 시편을 감상하다보면 절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차꽃에서 살 냄새가 났다/ 해지는 영암 차밭에서 내 통증같은 차꽃/ 한 송이 땄다/ 아픈 만큼 손에 차꽃 향이 짙다 -「별꽃 차나무」 부분
꽃을 보자 버릇처럼/ 산수유 가지를 하나 휘어 꺾고 말았다/ 꽃을 꺾고 뒤가 좀 캥겼다/ 꽃을 꺾고 후회 할 것을 알면서 꽃을 꺾고/ 아직 그 버릇을 못 버렸다 생각했었다 -「꽃을 보자 버릇처럼」 부분
한 밤중 한 생 살아보고 있을 법한 이 모양은/ 처음 잠에서 깬 나팔꽃 같다/ 봄이면 봄 여름이면 여름 가을 겨울/ 밤마다 반복되는 일이/ 따로 연습 없이 깨다가 죽고/ 죽었다 산/ 얘기들로 날마다 순간 순간 피고 지는 일이/ 한 여름 나팔꽃 같기도 하고 해서 -「 나팔꽃 필 때」 부분
꽃이 참 이쁘다고 다 말할 수 없는/ 베네치아 공원의 붓꽃들/ 노랑으로 물가에 떼로 몰려와/ 바위 틈에도/ 몰래 들어가 혼자 숨어 숨결같이 피어/ 꽃동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꽃을 찾아내는 일이/ 꽃은 누구에게나 가서 피어/ 기쁜 일 슬픈 일/ 여기 저기서 쳐다보는 일들이 그랬다 -「 붓꽃처럼 있다는 것」 부분
키가 납작한 호접란/ 작달막한 나비풀이 겨울 산을 탄다/ 한밤중에 일어나 불을 켜면/ 가르쳐 주지 않아도 파랗게 설악을 쳐다본다/ 언제 보는 법을 배웠는지 먼 산을 쳐다보고 힘을 모은다 -「 난초, 설산을 간다」 부분
용담꽃은 밤이 되면 죽는다/ 밤에는 없다가 한낮이면 살아 웃는다/ 바람부는 산 정상에서 용담을 만날 때/ 정상에 정상이 없다는 걸 알았다/ 정상에 지고 정상에 피는 용담이/ 정상에 정상이 없다고 몸으로 가르쳐 주었다
-「용담꽃이 피었다」 부분
위의 시편에 등장하는 꽃들은 차꽃, 산수유꽃, 나팔꽃, 붓꽃, 호접란, 용담꽃 등이다. 이름을 나열하고 보니 어딘가 소박하고 정감이 드는 파스텔 톤 계열의 색깔이 대부분이다. 이는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의 따스한 심성을 닮은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 모양새들 또한 크고 화려한 꽃들이 아닌 작고 섬세한 것들로서 세상의 상처를 이기고 먼저 세상과 화해하는 지순함을 지니고 있다.
살 냄새가 나는 차꽃을 따자 그 떼어지는 꽃의 아픔만큼 손에 차꽃향이 짙게 배었다는 시적화자의 고백으로, 아픔을 어떻게 승화하며 사는가 하는 문제에 답을 가져오고 있는「별꽃 차나무」라던가, 흐드러진 산수유꽃을 보고 습관적으로 그 꽃가지를 꺾어 든 시적화자가, 꽃을 범하였다는 죄책감에 꽃의 아름다움을 찬양 할 여유를 잃어버리고 전전긍긍하는 물아적 양심선언의 작품「꽃을 보자 버릇처럼」, 생의 고단한 외줄을 타며 혼신의 힘으로 위로 오르려는 나팔꽃이, 생태적 삶의 비의 속에서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것 같은 시적화자의 일상과 맞물려 지는「 나팔꽃 필 때」, 그리고 무리져 피는 노랑 붓꽃의 모습을 보면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한결 같은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 평범하지만 비범한 것임을 일깨워주는「 붓꽃처럼 있다는 것」의 시편들은, 시적화자가 꽃과의 거리 속에서 자신이 극복해야할 삶의 난제들을 투영해내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 난초, 설산을 간다」나「 용담꽃이 피었다」의 시편에서는 번민과 회한을 벗어나 자연의 일부가 된 초연한 꽃의 본성을 만날 수 있다. 언제 산을 오르는 법을 배웠는지 알 수 없지만 자연스레 호접란은 산을 오르려 힘을 모으고, 정상에 오르기 위해 산을 오른 용담꽃은 정상에 오르자 그곳이 정상이 아님을 깨닫는다. 자연이 자연으로 존재할 때에 스스로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지혜를 이석정 시인은 시행 속에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석정 시인의 시집『숲속의 하모니카』에는 시편마다 범상치 않은 사유의 샘이 고여 있어 그 곁을 지나는 일조차 조심스럽게 느껴진다. 네팔의 고산을 걸어 들어가듯, 소가 여물을 되새김질 하듯이 천천히 세심하게 짚어간 시의 행간을 돌아보는 동안 어디선가 강물소리 같은 운율이 들려온다.
내 하모니카, 내 하모니카는/ 내 입술에 맴돈다// 하모니카를 보면 나도 하모니카에 맴돈다/ 서랍 속에 있을 때는 나도/ 하모니카와 서랍 속에 있다 내 노래도/ 내 시간도 내가 읽던 시집도 그리운 사람도/ 서랍 속 하모니 속에 있다/ 내 삶의 고저장단을 언제나 이끌어 내는/ 내 하모니 속의 하모니카/ 오늘 아침 고요해서 온갖 내 숲속의 하모니카를/ 꺼내 불었다/ 빛 바다에 출렁거리는 붉은 아침/ 어린 나를 힘껏 불러내었다/ 저 하모니카, 내 입가에/ 맴돌면서 내가 좋아하는 동요들을/ 언제까지 불러낼지,/ 하모니카는 알고 있을 것이다.
- 「숲속의 하모니카」 전문
소를 몰고 들로 나갔다 소를 몰고 집으로 가는 동안 시인의 입술에서 익어간 노랫가락은 하모니카 소리였다.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시「숲속의 하모니카」는 시인이 하모니카와 동고동락하는 관계임을 보여준다. 지난여름 ‘숲속시인학교’에서 멋진 연주를 해 주었던 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삶의 고저장단을 언제나 이끌어 내는” 하모니카는 시인의 또 다른 이름이 되었다. 이제 시인은 어느 자리에서건 하모니카 시인으로 불린다. “내 하모니카는/ 내 입술에 맴돈다// 하모니카를 보면 나도 하모니카에 맴돈다”에서처럼 하모니카가 이석정 시인이고 이석정 시인이 하모니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는 서두에 한자어 ‘見’이 형체로 드러나는 사물에서 눈으로 보이지 않는 마음의 행로까지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것이라는 것과, 목우의 자아찾기나 꽃을 향한 사유도 결국에는 만물을 자연 그대로 바라보는 반본환원返本還元의 본성을 찾아가는 길이란 걸 깨닫게 하는 것이다.
시집 전편에 흐르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시행의 전개는 시인이 많은 어려움과 고행에도 불구하고 고단한 일상을 실상의 그것으로 감내하고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여 승화시키는 정신의 깊이를 가지고 있다. 이는 ‘見性’을 찾아가는 시인의 눈 밝은 길이 깊이를 더한 시심으로 계속 성장해 나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하는 이유이다. 이제 첫시집의 물꼬를 튼 이석정 시인의 다음 시집을 발 빠르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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