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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 일상
손 월빈
예나 지금이나 산, 들, 강, 삶이라는 것은 모두 자연 생태계의 리듬에 맞춰 탄력 그래프를 그리기 마련이었다. 내가 유년시절을 거쳐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살았던 곳도 그 그래프 하나는 확연하게 그려냈다. 집 앞을 가로지르는 한강줄기에는 해마다 피서객과 철엽 나온 인파들로 북적였고 자질구레한 사고들 또한 끈이질 않았다. 그들 속에서 내 생활도 성수기를 맞이해 오빠가 붙여준 별명 심부름센터 사장으로 거듭 변신을 했었다.
나는 일찍이 일어나 개들의 잔여물들을 처리하고 숟가락을 놓자마자 시커먼 폐타이어 튜브를 들고 개울로 향했다. 복장은 언제나 짧은 반바지나 팬티를 걸친 채였고, 몸도 풀 겸 얕은 곳을 슬슬 돌아다니며 다슬기 잡는 것부터 시작해서 조개도 몇 마리 잡아넣었다. 그렇게 잡은 것들을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물가에 담가놓고, 그 주위에서 물장구를 치고 놀았다. 그러다 다슬기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물어오면 저가의 가격으로 흥정을 시도하곤 했다. 성사가 되든 말든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집에 들고 들어가 저녁국거리로 쓰면 그만이었기 때문이었다.
여름만 되면 매일 물가에 나가 살다보니 내 몸은 온통 햇빛에 타버려 아이들 사이에는 아프리카 시껌둥이나 연탄장수로 놀림을 받았다. 나는 그 당시 해맑은 물에 동동 떠있는 한 마리 천둥오리 갔다고나 할까? 피서를 왔던 사람들은 확연히 구분되는 피부색을 하고 비썩 마른 몸에 유난히 큰 눈을 번들거리는 나에게 항상 호기심을 품었다.
“여기 사느냐?”
“ 몇 학년이냐?”
“이 부근에 가게는 어디냐?”
등등 그런 질문 중 나는 유난히 가게에 대한 물음에 대답의 공을 들였다.
“왜요? 뭐 필요한 거 있어요? 가게 여기서 엄청 멀어요. 저기 개울가 길로 쭉 내려가면 되는데 왔다 갔다 한 오십분은 걸릴걸요.”
내 말에 그들은 백이면 백, 한숨부터 내쉬었다. 나는 이때다 싶어 뭐가 필요한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대게는 김치, 파, 마늘, 고추, 고추장, 상추, 소주, 라면 뭐 그런 것들을 하소연하므로, 대부분이 집에서 퍼 나르면 되는 것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내가 갔다 오면 집에 다 있어서 소주만 사오면 되는데.”
내가 이렇게 들리겠금 의도하며 혼잣말처럼 지껄이면 십중팔구 그들은 넘어왔다. 그렇게 흥정을 시작해서 부모 허락 하에 조금씩 퍼다 나르고 뜯어다 나른 것이 일 년이면 십여 차례나 되었다. 물론 심부름 값은 군것질거리로 전락하지만 그밖에 부대비용은 부모의 몫으로 돌렸다.
한 번은 아버지 심부름으로 옥수수를 따서 팔았다. 옥수수 열 통에 달랑 쥐어진 천원짜리지폐 한 장을 쥐고, 밭을 매는 엄마에게로 신들린 듯 달려갔다. 대뜸 내미는 돈에 화들짝 놀란 엄마는 그 돈의 출처부터 물었다. 몇 번의 고약했던 손버릇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응, 엄마 옥수수 따서 팔았어!”
대답을 들은 엄마의 입가엔 이내 안도와 사랑의 미소가 희미하게 피어올랐다.
“아직 덜 여물었을 텐데 그걸 따서 팔았어?”
엄마는 다시 물어왔다.
“수염 끝이 마르고 통통한 것만 골라서 몇 개 땄어요.”
내 대답은 한동안 엄마 주위를 따뜻한 기운을 안고 맴돌았지만, 나는 벌써 까불거리며 또 다른 건수를 올리기 위해 개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심부름센터 사장이란 별명을 10살이나 많은 큰 오빠로부터 사사 받던 날은 확실치는 않지만 내가 오학년 때였던 것 같다. 그날은 재수가 없으려고 했는지 심부름에 한 번도 들먹여지지 않던 선택조건이 걸렸었다. 피서객들 중 고단수의 젊은이들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술이 얼근히 오른 이들이 날도 더운데 가게까지 가기는 귀찮고 술은 더 마셔야겠으니 잔뜩 찌푸린 얼굴로 주위에서 놀고 있는 나와 동생을 불렀다.
“야, 꼬마야”
나는 그때 그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조차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기서 가게까지 갔다 오려면 얼마나 걸리냐?”
“걸어갔다 오면 한 오십분은 걸릴걸요.”
내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들은 마치 내가 심부름을 해줘야 된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럼, 뛰어갔다 오면?”
나는 한 삼십분 쯤 걸릴 거라고 했다. 그러자 그들 중 한명이 소주병과 빵 봉지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럼, 이거 사오고 뛰는 걸로 삼십 분!”
나는 술을 먹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그들과 같이 술이 취해 있는 것 같았다. 꼭 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에 눌려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고 서있었다.
“걸어가면 삼백 원이고 뛰어가면 오백 원인데......”
“알았어, 임마. 자, 여기!”
인상을 잔뜩 찌푸렸던 아저씨가 돈을 건넸다. 물건 값과 심부름 값을 받아든 나는 골치 덩어리 남동생을 두고 가려고 했다. 그러자 큰 눈을 떼굴떼굴 불안스럽게 굴리며 자기 스스로 말 잘 듣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내손을 붙들고 뛰기 시작했다. 그러던 녀석이 중간 지점에 이르자 좀 걸어가자고 떼를 쓰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생각하면 다섯 살 차이를 넘어선다는 건 너무 힘겨웠을 것이다. 걷다보니 이번엔 심부름 값 다 내놓으면 뛰어간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럼, 넌 천천히 걸어오고 있어. 누나 혼자 뛰어갈게!”
마지못해 동생을 뒷전에 두고 나는 서둘러 뛰었다. 거리가 벌어지면서 뒤에서는 고래고래 고함소리가 들려오면서 난리가 났다.
“무서워, 같이 가! 기다려! 엉엉! 너 혼자 다 사먹을라 그러지!”
동생의 울음보에 걸음을 늦추고 어쩔 수 없이 기다리자니 느릿느릿 느림보가 따로 없었다. 나는 그날 동생의 떼란 떼는 다 받아주고 쭈쭈바 하나 입에 물려서 기진맥진 텐트가 있는 곳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도착해 보니 시간은 벌써 한 시간 반이 지나있었다. 뙤약볕 아래 설치된 그늘도 없는 텐트 안에서 이제나저제나 오매불망 기다리던 그들은 땀범벅에 축 늘어진 몰골로 게거품을 물기 직전의 상태에 처해있었다. 그러나 오로지 내게로 향하는 눈빛만은 지글지글 증오로 타들어갔다. 그 눈빛에 기가 질려버린 나는 동생의 옆구리를 찔러 뛰는 이십 분 값인 이백 원을 슬그머니 그들 앞에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왜 찌르고 지랄이야!”
물론 눈치 없는 동생은 그 앞에서 눈을 희번덕거렸다. 얼마나 분통이 터지던지 그날은 저녁때까지 동생의 머리통이 내 눈에 띄기만 하면 쥐어박았다.
“으이구 꼴통새끼!”
그 자초지종을 묻는 오빠에게 동생은 눈물을 글썽이며 미주알고주알 잘도 일러바쳤다.
잠시 후 오빠는 내게 손짓을 하며 다가왔다.
(어휴! 이젠 내 차례다.)
“야! 망신대표! 일루와, 일루와!”
“오빠가 개울에다 천막 쳐주고 심부름센터 사장 손월빈, 이렇게 명판 달아 줄까?”
예상외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어깨동무까지 하며 말했다. 나는 바보스럽게도 그게 오빠의 진심인줄 알고 빙긋 웃었다. 그러자
“이게, 지금 웃음이나와 웃음이?”
“꽁! 빡!”
꿀밤에 이어 뒤통수를 급습당한 나는 눈물이 질금 났다. 그리고도 이어지는 체벌이 있었으니, 일주일 동안은 개울에 접근을 금지함과 동시에 아침마다 그물로 잡아온 물고기 배따기 명령이 내려졌다. 다음날 일찍이 일어나 죽어 자빠진 고기를 골라 아가미 밑으로 엄지손가락을 밀어 넣어 배를 땄다. 열심히 하다가도 오빠가 집만 비웠다하면, 말이 일주일이지 슬슬 옮겨지는 못 말리는 발걸음을 자제할 길이 없었다.
하루를 채 넘기지 못하고 슬며시 빠져나와 다리 위에서 내려다본 강물은 영롱한 빛을 발하며 하늘하늘 나를 유혹해내기에 충분했다. 물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듯 이미터 높이의 두려움을 넘어 물속으로 뛰어내렸다.
“풍덩!”
“푸아!”
역시 짜릿하고 충격적인 맛이었다. 유유히 개헤엄을 치고나와 다시 다리발로 걸음을 옮겨 서너 번 반복했다. 그때 네다섯 명의 사람들이 짐을 꾸려서 나타났다. 이제들 서울로 올라가려는 모양이었다. 유심히 보니 땀에 절어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찌그러져 있던 어제의 그 증오의 눈빛들이였다.
“봐라, 봐라! 나도 할 수 있다. 우리 내기 할까?”
(치! 보긴 뭘 봐, 넌 이제 죽었다!)
내가 미쳐 말릴 새도 없이 그들 중 한 명이 다리가의 물이 얕고 예리하게 쪼게 진 암석덩어리들 위로 비아냥거리며 뛰어내렸다.
(안 돼요!)라고 하는 가슴속의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니나 다를까,
“철퍽!”
소리와 함께
“악!”
하는 비명소리가 울렸다. 그는 그대로 발을 움켜진 채 물속으로 주저앉았다. 모두들 그의 머리 위의 다리 날개로 웅성거리며 모였다. 결과는 안 봐도 훤했다. 그들의 걱정 섞인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빠른 걸음으로 물을 가르며 다가갔다. 상처로 인해 흘러나온 피가 벌써 주변을 벌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빨리들 안 내려오고 뭐해요? 옷 젖을까봐 구경만 해요?”
내가 그들을 보고 소리쳤다. 외침에 남자 둘이 서둘러 바지를 걷어 올렸다. 다친 사람은 그래도 자존심이 있어서
“아냐, 괜찮아! 혼자 갈수 있어!”
라는 말을 연신 해댔다. 두 사람의 부축을 받아 겨우 밖으로 향하는 그의 몸통 말단부분은 붉은 방울이 뚝! 뚝! 뚝! 뚝! 빠른 속도로 물속에 떨어져 흔들리듯 떨리는 듯 그들만의 춤판을 벌리고 있었다. 나는 따라 올라와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는 그에게 핀잔을 주었다.
“아니, 그렇게 아무데나 뛰어내리면 어떻게 해요?”
“잘 될 줄 알았지, 뭐!”
그가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얼굴은 이미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자신의 두 손으로 꽉 눌러 간신히 지혈된 발바닥은 칼날이 지나간 듯 앞쪽이 대각선으로 정갈하게 그어져 자주 빛 속살을 들어내고 있었다. 나는 그의 패거리들에게 손수건을 각출해 상처 부위에 두텁게 덮고, 그들이 입고 있던 흰 런닝구 한 장을 찢어서 칭칭 감아 매듭을 지었다. 구경하던 도시 청년들은 촌뜨기의 임기응변에 감탄했지만 그것은 붕대나 소독약을 대한 적이 없는 내 실생활의 일면에 불과했다.
그들이 절룩거리는 패잔병을 이끌고 내 시야에서 멀찍이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그들을 지켜보다가 왠지 모를 섬뜩함이 주위를 감돌고 있음을 느꼈다. 그 섬뜩한 기운이 온몸에 파고들어 소름이 끼치더니 슬며시 고개가 돌아가 물가의 떨어진 핏빛과 눈을 맞추고야 말았다. (엄마야!) 나는 그만 공포에 휩싸여 집으로 줄행랑을 칠 수밖에 없었다.
내가 6학년 무렵 젊은 시나리오작가 부부가 옆집으로 이사 온지도 두어 달이 되어갈 쯤에 일은 일어났다. 그 집안의 풍경은 아랫목을 제외한 곳곳이 책이었다. 책장이 벽을 기대고 마주보며 평행으로 서있고 앉은뱅이책상 하나가 윗목에 놓여있었다. 처음 아버지와 인사를 나눌 때 조용한 곳을 찾아 이사를 왔다는 그들의 말에 나는 냉소를 금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곳은 절대 조용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영화 한편은 능히 건지고도 남을 환경임엔 틀림이 없었다. 그맘때는 아버지의 술 탓으로 우리 집에선 오밤중에 한 달에 두어 번은 큰소리가 났다. 나는 그럴 때마다 그 집 문을 두드려야 하는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였다.
“아저씨, 우리 엄마 아빠 싸움 좀 말려주세요.”
젊은 부부가 무슨 푸닥거리 중이였건 그건 나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거기다가 낮에는 방목형의 땅강아지 같은 것들이(나와 동생) 쫒아 다니며 놀아달라고 보챘다. 눈에 띄지 않는 날엔 아무 때나 벌컥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과연 글을 쓸 수 있었을까?
그렇게 두어 달을 살아낸 그들 부부가 고장 난 티브이를 고치러간다고 했다. 아줌마가 같이 가자고 하는 말에 나는 좋다고 따라나섰다. 그런데 언덕길을 내려가자마자 작가선생은 벌치는 아저씨에게 붙들려 소주와 순대의 기막힌 조화에 빠져들고 말았다.
“티브이는 나중에 고치자. 정 시내에 가고 싶으면 너 혼자 좀 다녀와라.”
작가선생은 늘어나는 입담과 술병에 그만 엉겨 붙어버렸다. 이에 한 시간을 옆에서 기다리다 속이 상한 아줌마가 울면서 난간이 없는 다리위로 걸음을 옮겼다.
(이 다리는 잦은 홍수를 대비하여 난간을 전혀 만들지 않은 2미터 높이의 다리다.)
나는 분위기가 서먹하여 좀 거리를 두고 아줌마의 뒤를 따랐다. 뒤에서 보니 우는 아줌마의 어깨가 심하게 들썩거렸다. 한 손은 빨간 장지갑을 쥔 채 축 늘어트리고 다른 한 손은 눈물을 닦는지 얼굴로 올라가 붙어있었다. 나는 아줌마가 앞은 보고 걷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아줌마의 걸음걸이가 자꾸 가장자리로 향해 삐딱 선을 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속으로 이 같은 말을 되새김질 하고 있었다. (저러다 떨어진다. 떨어진다. 떨어진다.) 세 번만에 아줌마는 떨어졌다.
“으아!”
“풍덩!”
놀람과 다급함으로 허우적거리는 아줌마에게서 내가 그리도 부러워하던 굽 높은 슬리퍼와 빨간 지갑이 분리되 나왔다. 그것은 다리 밑을 지나쳐 너울너울 유유히 물결 따라내려 가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물속에 뛰어들어 지갑과 신발을 건져가지고 올라왔다. 아저씨도 깜짝 놀라 소주잔을 팽개치고 물속으로 뛰어 들어와 아줌마를 부축해 데리고나갔다. 아줌마는 아저씨에게 구박에 구박을 받으며 집으로 되돌아왔다. 각자의 집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차비를 하여 아줌마와 같이 길을 나섰다. 마침 양평 시내까지 나가는 차가 있어서 편히 갈 수 있었다. 아줌마는 시내에서도 먹고 싶은 게 없냐고 자꾸 묻더니, 집으로 오는 길엔 지갑에서 이천 원을 꺼내 손에 쥐어주었다. 그녀는 립스틱을 발라 어여쁜 입술로 지갑을 건저주어 고맙다고 말하고 있었다. 작정을 하고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오! 나는 왜 속으로만 ‘떨어진다’를 읊조렸던가? 후회가 됐다.
이보다 훨씬 전 겨울에도 할머니 한 분이 다리에서 떨어진 적이 있었다. 개울전체에 얼음이 덮일 정도로 급속도로 기온이 내려가고 바람이 불어대던 날이었다. 어두워질 무렵 외출에서 돌아오던 아버지 등에 초라한 몰골의 할머니가 물을 뚝뚝 흘리며 업혀 들어왔다. 정신을 잃은 할머니를 윗목에 내려놓을 때 버석버석 얼어붙은 옷이 꺾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우르르 몰려든 가족들에게 할머니의 옷을 팬티만 남기고 모두 벗기라고 했다. 옷이 모두 벗겨지자 깡마른 몸이 드러났다. 온몸을 주무르고 비비라는 지시에 따라 한참을 주무른 뒤에야 할머니가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자 아버지는 화로 위에서 데워지는 막걸리를 몇 술 떠서 할머니의 입에 흘려 넣었다. 그리곤 좀 안심이 되는지 아직까지도 젖은 옷을 갈아입지 못한 모습이었지만, 한기를 달래려는 듯 남아 있는 따끈한 막걸리를 꿀꺽꿀꺽 삼켰다. 그런 다음 머리맡에서 침통을 꺼내와 할머니의 사지를 땄다. 손끝에 맺히는 핏방울을 확인하며
“피가 도는 것을 보니 이제는 살겠군!”
하고 아버지는 장담을 하면서 돌아앉아 엄마가 건네준 마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엄마는 혈색이 돌아온 할머니를 따뜻한 아랫목으로 옮겨 눕혔다. 아버지는 내게 자꾸만 옆에서 말을 시켜보라고 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식으로 물었다.
“할머니 옷이 왜 다 젖었어?”
“몰라! 물에 빠졌능갑다.”
사실 그 한마디를 알아듣는데도 나 혼자 생쇼를 하면서 이미 삼십 분이나 지나가 버린 뒤였다. 그러는 동안 할머니가 뭐라 중얼거리기는 했으나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다시 물었다.
“왜 빠졌는데?”
“몰라! 머리가 기양 피앙 돌더니 그 짝으로 자빠전는 갑지?”
대답하는 할머니의 사투리가 너무 웃겨서 나는 고개를 돌려 낄낄거리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물에 퐁당 빠진 거야?”
내가 재차 물었을 때 할머니는 동문서답을 했다.
“그란데 누가 나를 이리 데려 왔노?”
“우리 아빠가 할머니랑 옷이 다 젖은 채 업고 왔어. 할머니, 그거 알아?”
“그랴!”
할머니는 알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인지 그렇게 아리송한 대답을 했다. 꼬치꼬치 캐물은 바에 의하면 할머니의 집은 비래라고 했다. 비래면 우리 집과는 걸어서 50분 거리에 있는 윗마을이었다. 할머니로 인해 늦은 저녁을 먹은 우리는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밤공기를 뚫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목소리가 도란도란 들려왔다. 아버지 왈,
“바람이 너무 불어 눈도 뜨기 힘든데 다리 밑에 뭔 시커먼 짐승 같은 게 얼핏 뵈니, 뭔가 싶어 드려다 봤지! 근데 사람이잖아! 어찌해? 얼음 깨고 들어가 보니 정신이 없 길래 하는 수 없이 들쳐 업고 올라왔지 뭐!”
이어, 어머니,
“어휴! 당신 눈에 띄길 다행이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네요.”
다음날 아침 오빠들이 학교 가는 길에 앞마을 이장 댁에 연락을 넣었는지, 이장부부가 경운기에 모포를 싣고 흰죽 한 그릇을 쑤어가지고 우리 집으로 왔다. 전화가 없던 시절이여서 그렇게 할머니는 딸딸거리는 경운기 위에서 온몸에 담요를 감은 채 본인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삼 일 후 학교에서 교실에 앉아있자니 친구들의 이야기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야! 야! 누구네 집에서 물에 빠진 할머니를 구해서 죽을 쒀 먹이고 경운기에 모시고 왔데!” 그러자
“야- 그게 진짜야?”
그 말에 나도 한마디 끼어들었다.
“그 할머니, 우리 아빠가 구하신 거야!”
“야야! 거짓말 하지 마!, 너네 집에 경운기도 없잖아!”
그런데 내가 아무리 설명해도 친구들이 믿어 주질 않았다.
(아휴! 진짠데.)
나는 그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일부러 비래에 사는 단짝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 친구에게 그 할머니 집을 묻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다. 단짝친구를 대동해 개선장군처럼 대문을 들어선 나는 마치 내 할머니를 부르듯이 할머니부터 찾았다.
“할머니! 할머니!”
그러자 안방 문이 벌컥 열리며,
“이게 누꼬, 아이고, 여 웬일이가?”
하며 단박에 나를 알아보고 반가워하는 것이었다. 그 집 아줌마 아저씨도 따라 나오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할머니와 나는 가운데 놓인 홍시를 쪽쪽 빨며 많은 증인들 앞에서 그날의 일을 현장감 있게 털어 놓았다. 아줌마와 아저씨도 의외라는 듯 더 자세히 물어왔다. 속을 시원히 비우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다음날 아침 그 효과를 여실히 확인했다. 아침 일찍 보자기에 무언가를 싸가지고 오는 부부를 뒤로 하고 나는 신바람이 나서 학교로 향했다. 꽁꽁 언 사람을 바로 따듯한 곳에 누이면 안 된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초등학교 육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타지에서 여름방학을 맞아 놀러온 사촌 언니가 군것질거리를 사러 가게에 가자고 했다. 그러나 가게에 가려면 해마다 사람을 너 댓씩 잡아먹는 용녀부리를 지나쳐야만 했다. 용녀부리의 맞은편에는 3년 전에 튼실한 집 한 채가 지어졌는데 그곳은 별장이라 불리어지고 있었다. 그곳을 지나는데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었다. 산기슭의 수심이 깊은 쪽에선 잠수부들이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나는 마침 그곳에 팔짱을 끼고 서있는 별장아저씨를 발견하곤 물었다.
“아저씨 지금 저기서 뭐 찾아요?”
“시체! 어제 빠져 죽었거든, 근데 아직 못 찾았어!”
아저씨는 걱정이 돼 죽겠다는 목소리였다. 나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옆에 있는 사촌을 바라보았다, 마치 내게 동의라도 구하듯이 좀 더 보고가자고 속삭이며 충동질을 해왔다. 우리는 그렇게 어른들 뒤에서 숨어서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후 잠수부들이 허옇게 부풀은 무언가를 끌고 나왔다.
“깍!”
그것이 무엇인지 채 확인되기도 전에 난데없는 비명소리에 모두들 화들짝 놀랐다. 들썩거리는 분위기를 뒤로하고 비명소리의 주인공이었던 사촌언니가 방향을 잃고 뛰기 시작했다. 얼결에 따라 뛰기 시작한 나는 못내 아쉬웠다. 시체도 제대로 못 봤는데 갑자기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 달아나버린 사촌 언니의 본능 때문이었다. 가게는 구경도 못하고 강가 쪽으로는 도저히 못가겠다는 언니를 달래서 먼 길을 돌아 다시 집으로 왔다. 나 또한 그 뒤부터 밤에 보내지는 술심부름의 공포는 더해만 갔다. 혼자 가는 날이면 돌아보는 것은 엄두도 못 내고 가게가 눈에 보일 때까지 뒤 꼭지가 서늘해지는 공포감에 시달리며 전속력으로 달려야만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턴가 방과 후의 내 책가방엔 책 대신에 막걸리 두 통이 차지해 버렸다. 그로부터 1년 뒤 아버지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첫댓글 개울을 끼고 일어난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잘 꾸몄네. 앞 이야기에는 가볍고 설명 많은데 비해 용녀부리 이야기는 설명이 조금 부족한 듯 하네. 비중은 거기에 있는 것 같은데.....단문장에 언어구사가 잘 되어서 읽기가 좋고 능력이 숨어 있음이 보이는 글이네.... 건필을...
땡큐~ ^ 붐바땅에 수록된 글 인데요. 처음 책을 내고나서 그 감흥을 잊을 수가 없어요. 지금은 완전히 중독상태에 빠져 글 세계를 점점 음미해 나가고 있다고 봐야겠죠. 딱 제 체질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깊은 안식처에 접어든 느낌이랄까, 글을 쓰면서 그 글에 위로도 받고, 영혼적 교류도 하고, 아주 마음에 드는 세계예요. 거기에 박옥태래진님 같은 따뜻한 분이 함께해 주시니 더욱 감사하고요. ^^ 처음 수필집은 딱히 어디에 비중을 두고 쓰지 않은, ㅎㅎㅎ 사실 둘 줄도 몰랐을 때 썼던 글이예요.그래서 그런가 가장 신선한 맛이 살아있는 글이죠. 이건 순전히 제 생각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