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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화성 88코스 제2부
한맥중공업 입구-백사포 삼거리-공생염전-
서신염전-화남일반산업단지-살곶이마을-
초정들-살곶이 해안길-중안들-계방죽들-
새섬 앞-제부도제빵소 앞-바다모텔 앞
20240612
1.코스 소개(두루누비)
1)코스개요
- 하루 두 번 열리는 제부도로 향하는 바닷길을 마주할 수 있는 코스
- 서해 바다와 갯벌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낙조를 감상할 수 있는 코스
2)관광포인트
- 궁평낙조로 불릴 만큼 노을이 아름다운 항구 '궁평항'
- 풍성한 해산물이 나는 곳으로 조개잡기, 망둥어낚시, 씨카약을 즐길 수 있는 '백미리어촌체험마을'
- 컨테이너로 지은 간이 미술관 '제부도아트파크'
3)여행자 정보
- 시점 : 화성시 서신면 궁평리 666-83(궁평항광장 공중화장실 앞), 수원역에서 400번 버스 이용, 궁평항 하차
- 종점 :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 1066(전곡항교차로 탄도방보제 동단), 수원역에서 좌석 1004-1번 버스 이용, 전곡항 하차
- 관광지로 유명한 제부도 옆을 지나므로 일정에 포함시키는 것을 추천
-거리 17.6km, 소요시간 6시간, 난도 쉬움
-주요 경로 : 궁평항정류장- 4.0Km- 백미항- 3.8Km- 공생염전- 5.3Km- 제부교차로- 4.5Km- 전곡항
2.서해랑길 88코스 개관
서해랑길 88코스는 화성시 서신면 궁평리 궁평항 입구에서 출발하여 화성시 서신면 지역의 남양만 해안길을 돌아서,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와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을 잇는 탄도방조제 앞 전곡항 입구에서 끝난다. 88코스가 통과하는 화성시 서신면 지역은 궁평리, 백미리, 매화리, 장외리, 송교리, 장외리, 전곡리 등 서신면 12개 리(里) 중에서 7개 리(里) 지역이다. 88코스에서 장외리 지역은 한 번은 해안으로, 한 번은 내륙으로, 두 번을 통과한다.
서해랑길 88코스는 화성시 서신면 지역의 아름다운 남양만 해안과 발전하는 산업단지 지역을 통과한다. 철골 구조 건축 사업영역이 으뜸인 백미리 한맥중공업 화성공장, 매화리 공업단지, 장외리 장외산업단지, 송교리 화남일반산업단지, 전곡리의 해양산업단지와 해양일반산업단지 등을 거친다. 이들 산업단지를 통과하면서 화성의 눈부신 발전을 확인하게 되고, 화성의 경제 수준의 위치를 깨닫게 된다.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산업단지에서 조성한 휴식공간인 근린공원과 체육시설도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西新面)은 화성시의 서쪽 끝에 위치한다. 서신면은 화성시의 동북쪽으로 송산면, 동쪽으로 마도면, 남쪽으로 화성호, 서쪽으로 서해와 접하고 있으며, 북쪽으로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과 시계(市界)를 이룬다. 서신면은 고구려 시대에 당성군, 통일신라 시대에 당은군, 고려 시대에 당성군에 속하였으며, 조선 시대에는 남양부 서여제면과 신리면 일대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남양군이 해체되고 서여제면(西如堤面)과 신리면(新里面)을 합쳐 수원군 서신면(西新面)으로 개편되었다. 1949년 수원군 수원읍이 수원시로 승격되고 수원군의 일부 지역이 화성군으로 신설되면서 화성군 서신면이 되었다. 2001년 화성군이 화성시로 승격되면서 화성시 서신면이 되었다고 한다.(디지털화성문화대전 참조)
서해랑길 88코스 탐방 체험을, 제1부 궁평리 궁평항~백미리 한맥중공업 입구, 제2부 백미리 한맥중공업 입구~송교리 제부도 입구, 제3부 제부도 입구~제부도~서해랑케이블카~탄도방조제 입구, 제4부 제부도 입구~전곡리해양일반산업단지~탄도방조제 입구 등 4부로 나누어 기록한다. 제3부는 서해랑길 88코스에서 벗어나 있지만 바다갈라지는 바닷길을 따라 제부도로 들어가 서신면 제부리 서해랑(嶼海浪) 제부정류장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서신면 장외리 전곡정류장으로 넘어왔다.
3.공생염전의 역사, 살곶이와 제부도 매바위의 절경
제2부 : 한맥중공업 화성공장 입구에서 서해랑길 88코스를 이어간다. 백사포 삼거리에서 서해랑길은 왼쪽로 매화리 지역으로 넘어간다. 백사포 지명은 지도에 나오지 않고 백석포 지명이 나온다. 그렇다면 백사포는 백석포가 와전된 말일 것이다. 백석포(百石浦)는 서신면 매화리 간척사업으로 현재는 없어진 포구라고 하며, 백사포 삼거리 남동쪽 서신면 용두리에 백석포 지명이 지금도 남아 있다. 용두리 백석포(百石浦)는 이곳에서 생산되는 천일염의 하루 생산량이 백 가마를 웃돌 만큼 많이 생산된다고 하여 백석포라 불렸다고 한다. 백사포 삼거리는 서신면 백미리, 용두리, 매화리 3개 리(里)가 만나는 꼭지점이다. 삼거리 동남쪽 지역은 용두리, 동북쪽 지역은 매화리, 서쪽 지역은 백미리 지역이다.
서해랑길 88코스 제2부 탐방길은 서신면 매화리, 장외리, 송교리 해안 지역을 통과하지만, 매화리와 이웃한 내륙의 용두리와 광평리 지역을 조망할 수 있고, 특히 화성 당항성이 있는 서신면 상안리 구봉산을 가늠하는 탐방길이어서 서신면 지역 전체를 관망하게 된다. 매화리 염전해안로를 따라가면 동쪽에는 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있고, 서쪽에는 광활한 남양만 갯벌이 펼쳐진다. 갯벌에는 염생식물인 붉은 칠면초가 군락을 이루는 풍경을 이루고, 갯벌 바깥 바다에는 백미리의 감투섬과 굴통뿌리 바위, 그 북쪽에는 송교리 살곶이 앞의 윤돌과 도리도가 서로 호응하는 풍경을 연출한다. 이 풍경은 매화리와 송교리 해안에서 조망하는 남양만 풍경의 고요한 아름다움의 명품처럼 느껴진다.
염전해안로 광평교 입구에서 동쪽을 살피면 매화리 시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매화리는 원래 양을 기르던 곳이어서 목양동(牧羊洞)으로 불리다가 마을의 지형이 매화꽃처럼 생겼다고 하여 매화리(梅花里)로 부르게 되었는데, 서신면의 중심지가 매화리요, 매화리의 중심 시가지가 광평교 동쪽에 보인다. 매화리는 서신면 면소재지 지역으로 서신면 행정복지센터, 서신초등학교, 서신중학교가 있다. 그 동쪽은 서신면 상안리 지역으로 당항성이 있는 구봉산이 가늠되며, 그 북쪽은 서신면 광평리 지역이다. 다리 이름이 광평교인 것은 소하천의 발원지가 서신면 광평리 지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소하천은 남양만으로 유입되고 하구에 배수문이 설치되어 있다.
도로명 염전해안로는 어디서 온 것일까? 공생염전을 지나는 도로이기에 염전해안로라는 도로명이 붙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화성실크로드 제2코스는 '황금해안길'이다. 황금해안길 안내도 주요 경로에 공생염전이 있다. 그런데 공생염전을 서신면 송교리 해안의 염전으로 소개하고 있어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생염전은 남양만 해안 매화리 해안 제방 안쪽 즉 염전해안로 광평교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공생염전을 살피려면 염전해안로를 따라가야 하지만 서해랑길과 황금해안길은 염전해안로에서 매화리 해안 제방길을 따라간다. 이 제방은 공생염전을 조성하기 위해 축조하였다고 한다.
6·25전쟁으로 피난 온 강원도 철원, 평강 등지의 피난민들이, 1953년 7월부터 약 2년 동안 덕적도에서 돌을 날라 남양만 매화리 앞 바다를 가로지르는 길이 약 880m 높이 2~3m의 제방을 쌓았다. 그 뒤 제방 안쪽 간척지에 1956년부터 4년에 걸쳐 소금판 12만평, 저수지 9만평, 유휴지 6만평을 확보하여 공생염전(共生鹽田)을 조성하였다. '공생염전' 지명은 공평하게 소금판을 분배하고 함께 살아가자는 의미였다고 한다. 화성시 염전의 새로운 지평을 연 공생염전은 현재 쇠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공생염전의 대역사(大役事)는 이 지역 생활의 초석이다. 이를 기리는 도로명이 염전해안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공생염전을 화성실크로드 안내도에 잘못 소개하고 있으니, 어처구니가 없다. 화성실크로드 개척자나 안내도를 작성한 사람이 공생염전의 정확한 위치를 몰랐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서해랑길 탐방객들 거의 모두는 송교리 서신염전 앞을 지나가며 이 염전을 공생염전이라고 생각하며 표지판이 없음을 불평한다. 차라리 서해랑길 88코스를 매화리 공생염전을 돌아서 해안으로 나오는 탐방길로 하는 게 좋을 듯하다.
서해랑길은 매화리 제방길을 따라 장외리 해안으로 넘어가서 염전해안로로 나간다. 그곳에서 뒤돌아보면, 염전저수지와 그 뒤의 공생염전, 매화리 마을이 더 확실하게 보인다. 동쪽에서는 당성(당항성)이 있는 구봉산이 여전히 손짓하며 탐방객을 부른다. "화성 지역은 고대부터 남양만을 통해 중국 산둥반도의 등주(登州)나 청도(靑島) 등으로 오갈 수 있는 서해의 관문이었다. 서해안 간척 사업으로 구봉산 당성(唐城) 앞이 많이 육지화되었지만, 고대에는 해안선이 훨씬 안쪽으로 들어와 있었다. 서신면 상안리 구봉산의 '화성 당성'은 남양만을 통제하고, 수원과 용인, 이천 지역으로 통하는 육상 교통로를 함께 관할하던 거점 성이었으며, 특히 남양만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어 해안을 오가는 배들을 감시하기에 유리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원효가 해골 바가지의 물을 마시고 깨달은 곳을 평택 지역에서는 괴태곶봉수대 아래의 수도사 근처로 추정한다. 그러나 화성 지역에서는 당나라로 가는 길목인 당항진이 당항성 아래였을 것이라고 추정하여 원효가 해골 바가지 물을 마신 곳을 화성 당항성(唐項城) 신흥사 일대로 본다. 서해랑길 86코스에서는 수도사를 거쳐왔지만 서해랑길 88코스는 구봉산 당성과 멀리 떨어져 남양만 해안길로 이어간다. 그런데 길손의 생각에 원효의 일체유심조 깨달음 지역은 평택 수도사보다는 화성의 구봉산 신흥사 일대에 믿음이 더 간다. 언제 저 구봉산의 화성 당성을 올라볼 수 있을까? 뜻이 있으면 곧 이루어지리라.
염전해안로를 벗어나 서쪽의 송교리 해안 제방길을 따라 남양만을 돌아간다. 굽이도는 남양만 해안과 드넓은 바다,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마음은 풍선처럼 하늘로 떠간다. 공생염전이라고 생각한 송교리 서신염전, 화성시의 발전하는 현장인 화남일반산업단지를 거쳐오면, 제방 안쪽에는 대규모 왕새우 양식장과 이곳에 염수를 공급하는 염수저수지가 펼쳐져 있다. 정면에 살곶이가 바다로 벋어 있다. 살고지, 살곶이 지명이 관심을 끈다. 살고지가 무슨 뜻일까? '살곶(箭串)·살고지'의 지명 유래는, 마을 앞 바다는 살(箭)을 많이 단 그물을 드리워 고기를 잡던 곳으로, 화살을 뜻하는 '살(箭)'+'곶(串)'이 붙어 살곶이(살고지)라고 되었다고 한다. 또 난이 났을 때 이곳으로 피난을 오면 목숨을 구할 수 있어 '살 곳'이라고 부르다가 살고지가 되었다는 전승설화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길손이 보기에는 화살이 길게 바다를 향하여 날아가는 형상의 곶(串)이어서 살곶이라고 했을 것 같다. 살곶이 풍경은 멀리서 바라볼 때 살곶이의 진면목을 드러내 보인다.
송교리 해안 제방길이 끝나면 해안길과 마을길이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에는 금계국 노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짙은 노란 빛이 갯벌 넘어 남양만 바다를 물들이는 것 같다. 살곶이 해안길은 통행이 금지되어 있는 것으로 길손은 잘못 알고 살곶이 마을길로 진입하였다. 그런데 살곶이 해안길은 물이 빠져 있을 때 통행할 수 있는 길이다. 그날 해안길은 물이 빠져 있었는데, 멍청하게도 살곶이 해안길로 나가지 못하고 살곶이마을을 돌아 살곶이 언덕을 넘어 살곶이 북쪽 해안 글로리아 펜션&카페 앞으로 내려왔다. 이곳에서 살곶이 해안을 돌아오는 길과 만난다. 이제는 남양만 서신면 송교리 북쪽 해안이 북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해안길을 따라서 제부도 바다갈라짐길 입구까지 이어간다.
해안의 초정들을 지나 중안들 아래 작은 나무 그늘 아래서 길동무들과 셋이서 점심을 먹었다. 나무 이름이 무얼까? 가죽나무라고 하는데 분명하지는 않다. 막걸리를 마시며 담소를 나눈 흥겨운 점심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다시 출발이다. 아담한 가죽나무와 아쉬운 작별을 나누며 중안들에서 계방죽들을 거쳐 새섬 앞으로 이어간다. 눈은 끊임없이 남양만 바다와 제부도에 머문다. 살곶이, 윤돌, 까치섬, 도리도, 매바위, 제부도, 누에섬, 제부도 바다갈라짐길, 제부도 해상케이블카, 누에섬과 탄도항 사이의 하얀 풍력발전기, 이 풍경은 아직도 눈 앞에서 삼삼하다. 이 풍경은 남양만 바다의 명품 절경으로 길손에게 새겨져 있다. 이 풍경을 다독이며 살포시 보듬는 곳은 살곶이 같다.
살곶이와 제부도 사이에서 까치섬과 매바위는 견우와 직녀처럼, 또 망부석 설화처럼 애타는 그리움으로 서로에게 다가가려고 몸부림하는 것 같다. 그 공간 서쪽에 입파도와 국화도 섬들, 그 뒤 왼쪽에 당진화력발전소와 왜목마을이 흐릿하게 가늠된다. 그리움이 솟아오른다. 서해랑길 80코스 탐방길에서 당진화력발전소를 거쳐 왜목마을 해변에서 국화도와 입파도를 조망하던 그때는 3월의 봄날이었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나 남양만 화성에서 아산만 당진 지역을 조망하는 기쁨이 솟아오르다가 세월의 흐름에 슬픔이 밀려온다. 세월은 그렇게 빠르게 지나고 몸은 자꾸 쇠퇴한다.
개망초 하얗게 피어있는 군락지를 지나 제부도 제빵소와 바다좌대 낚시터를 지난다. 동북쪽으로 바라보면 지방도 제301호선 제부도교차로 파란색 도로표지판이 보인다. 서해랑길은 저 교차로에서 북쪽으로 도로를 따라갈 것이다. 바다모텔 앞에서 북쪽을 보면 제방 끝에 제부도 바다갈라짐길의 바닷길통제소가 어림된다. 6월 오후의 땡볕은 뜨겁지만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살랑살랑 뜨거운 몸을 식혀준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5km가 넘게 남아 있다. 그렇지만 몸과 마음은 모두 가볍고 상쾌하다. 고통은 환희를 주며 새로움은 언제나 사물의 배후를 손가락으로 후벼 파듯이 대상에 다가가야 한다. 달관도, 도통도, 필요 없다. 아이처럼 울며 새로운 것을 배우며 아이처럼 환하게 웃으며 미지의 길을 가야 한다.
그러므로, 썩지 않으려면/ 다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다르게 사랑하는 법/ 감추는 법 건너뛰는 법 부정하는 법./ 그러면서 모든 사물의 배후를/ 손가락으로 후벼 팔 것/ 절대로 달관하지 말 것/ 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 아이처럼 배고파 울 것/ 그리고 가능한 한 아이처럼 웃을 것/ 한 아이와 재미있게 노는 다른 한 아이처럼 웃을 것. - 최승자(1952~)의 '올 여름의 인생 공부' 중에서
3.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20.31km 중 12.5km
전체 소요 시간 : 5시간 11분 중 3시간 46분
화성시 서신면 백미리 북동쪽 해안 제방길을 따라 한맥중공업 화성공장을 돌아서 백미길로 나왔다.
서해랑길은 백미길을 따라 백사포 삼거리로 이어간다. 백사포는 백석포(百石浦)가 와전된 말 같으며, 서신면 매화리 간척사업으로 현재는 없어진 포구라고 한다. 오른쪽 뒤 서신면 용두리에 백석포 지명이 지금도 남아 있다.
왼쪽 서신면 백미리 해안의 제방을 따라와 건너편 동쪽의 매화리 해안의 제방으로 이어간다.
서해랑길은 백미길을 따라 한맥중공업 입구로 이어오는데, 길손은 해안의 제방길을 따라 한맥중공업을 돌아 한맥중공업 입구 백미길로 나와 서해랑길과 재회했다. 서신면 백미리~궁평리를 잇는 궁평관광지 연결도로 확포장 공사가 진행 중에 있으며, 중앙 뒤쪽에 함박산이 솟아 있다.
백사포 삼거리에서 서해랑길은 왼쪽으로 꺾어 매화리로 넘어간다. 백사포 삼거리는 서신면 백미리, 용두리, 매화리 3개 리(里)가 만나는 꼭지점이다. 도로 오른쪽 위는 용두리, 도로 왼쪽 위는 매화리, 현재 있는 아래쪽은 백미리 지역이다. 백사포는 현재는 사라진 포구인 백석포(百石浦)가 와전된 것 같으며, 용두리 백석포(百石浦)는 이곳에서 생산되는 천일염의 하루 생산량이 백 가마를 웃돌 만큼 많이 생산된다고 하여 백석포라 불렸다고 한다.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용두리(龍頭里)는 서신면의 남부에 위치한다. 북쪽으로 매화리와 홍법리, 동쪽으로 사곳리, 남쪽으로 궁평리와 화성호, 서쪽으로 백미리에 접하고 있다. 용두리는 『지명유래집』에 따르면 지형이 용의 머리를 닮아서 용머리 또는 용두로 불렀다고 한다. 한편 용두리의 포구를 통해 중국 사신이 왕래하면서 중국 땅에 있는 용두리라는 지명을 따서 붙여준 이름이라고도 한다. 용두리는 남양만 하구의 서쪽에 위치한다. 해운산[142.6m]·왕모대[58.2m]가 있는 남서부 지역과, 저산성 구릉지가 분포하는 북부 지역을 제외하고 대부분 평야지대가 나타난다. 용두리의 중심부에는 방죽들이 펼쳐져 있다. 남쪽 화성호 주변으로 저습지가 나타난다. 용두리 중앙부로 해운로가 동서로 지나가고, 서쪽 경계를 따라 궁평항로가 지나간다. 용두리 남쪽 화성호 주변은 화옹지구 간척지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백사포 삼거리에서 왼쪽 서북쪽으로 꺾어 이어간다. 건너편 백미리 해안에 한맥중공업이 있고, 보도 옆에 서신면 송교리~백미리 일원의 이 도로를 2010년 4월 30일~2018년 9월 25일에 걸쳐 확포장공사를 완공하였다는 도로 확포장공사비가 서 있다.
매화리 왕새우양식장 뒤쪽에 공업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중앙 맨 뒤쪽의 산은 당항성이 있는 구봉산일 것이다.
건너편 백미리 해안에 한맥중공업 화성공장이 자리하고있으며, 중앙 뒤에 함박산이 둥두렷하다.
오른쪽 한맥중공업 화성공장 입구에서 맨 왼쪽 백사포 삼거리를 거쳐 매화리로 넘어왔다. 중앙 뒤에 해운산이 솟아 있다.
염전해안로 서쪽 보도를 따라 서신면 매화리 해안을 통과한다. 중앙의 건너편은 서신면 송교리 해안이다.
산업용품 업체인 (주)금동산업이 백미길 입구에, 중앙에 금속처리업체 E.Y 기공이 보인다. 왼쪽 전신주 오른쪽 뒤의 산이 당항성이 있는 구봉산일 것이라 가늠한다.
화성시 서신면 매화리(梅花里)는 서신면의 중서부에 위치한다. 북쪽으로 광평리와 상안리, 동쪽으로 홍법리, 남쪽으로 용두리, 서쪽으로 장외리와 서해에 접한다. 매화리는 『지명유래집』에 따르면 원래 양을 기르던 곳이어서 목양동(牧羊洞)으로 불렀다고 한다. 이후 마을에 거주하던 학자 한유여근(韓兪汝根)이 마을의 지형이 매화꽃처럼 생겼다고 하여 매화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매화리는 조선 시대 남양부 신리면(新里面)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남양군 신리면 매화동에서 수원군 서신면 매화리로 개편되었다. 1949년 화성군이 신설되면서 화성군 서신면 매화리가 되었다. 2001년 화성군이 화성시로 승격되어 화성시 서신면 매화리가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은 걸어온 백미리 해안으로, 맨 위쪽은 백미힐링마당의 반려가족놀이터, 그 오른쪽뒤에 도리도가 떠 있다. 오른쪽 뽕나무 뒤는 걸어갈 송교리 해안의 살곶이이다. 갯벌에는 붉은 칠면초들이 펼쳐져 있다.
서해랑길은 해안을 벗어나 한맥중공업 남쪽으로 돌아 맨 왼쪽의 한맥중공업 입구로 이어지는데, 길손은 해안 제방길을 따라 한맥중공업 북동쪽으로 돌아 한맥중공업 입구에서 서해랑길과 재회하였다. 왼쪽 뒤에 함박산, 갯벌에 붉은 칠면초가 그득하다.
오른쪽 백미리 해안 제방길을 따라 한맥중공업 입구 백미길로 나가서 백사포 삼거리를 거쳐 이곳으로 왔다. 중앙 뒤에 해운산(海雲山)이 우뚝하다.
남양만 백미리 북동쪽에 한맥중공업 화성공장이 자리하고 오른쪽에 함박산이 우뚝하다.
왼쪽에 함박산이 솟아 있고, 중앙 뒤에 백미항&백미리어촌체험마을, 그 앞에 감투섬, 오른쪽 뒤에 도리도가 보인다. 붉은 칠면초들이 갯벌에 그득하게 자라고 있다.
왼쪽에 백미리 백미항&백미리어촌체험마을, 그 앞에 감투섬, 중앙 왼쪽에 도리도, 오른쪽에 송교리 살곶이가 확인된다.
오른쪽은 서신면 매화리 해안, 중앙의 구릉지와 군 초소가 있는 곳은 장교리 해안, 그 왼쪽부터 송교리 해안이며 맨 끝에 살곶이가 바다로 벋어 있다.
서해랑길은 염전해안로 서쪽 보도를 따라가다가 광평교 입구에서 해안 제방길로 이어간다.
오른쪽 2/3 지점까지 매화리 해안, 곡각 지점은 장외리 해안, 그 왼쪽은 송교리 해안이며, 오른쪽 뒤에 장외산업단지가 있다.
중앙은 서신면 면소재지 매화리 지역으로 서신면 행정복지센터, 서신초등학교, 서신중학교가 있다. 그 뒤쪽은 서신면 상안리 지역으로 중앙 왼쪽 맨 뒤의 산은 당항성이 있는 구봉산일 것이며, 매화리 왼쪽 뒤는 서신면 광평리 지역이다.
화성시 서신면 매화리(梅花里)는 동북쪽의 청명산에서 이어지는 산지를 제외하면 대부분 저평지가 나타난다. 동북쪽 산지에서 바닥천이 발원해 매화리 중앙부를 흐른다. 매화리의 염전 난치[바닷물을 잡아 두고 졸이는 못]에 염생식물들이 서식하고 있으며 다양한 종류의 철새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하고 있다. 매화리에는 화성시에서 2012년 지정한 염전보전구역이 있다. 매화리는 서신면의 중심지로 북쪽의 서신사거리 주변에 서신면행정복지센터, 서신초등학교, 서신파출소와 우체국 등이 모여있다. 매화리 서쪽에 공생염전이 있다. 공생염전은 우리나라 천일염의 주산지로, 염전이 위치한 경기만은 바닷물의 염도가 다른 지역보다 낮아 생산량은 적지만 소금의 뒷맛이 달달하다고 한다. 2021년도 기준으로 7곳 정도 남은 염전에서는 옹기판염으로 만든 천일염을 생산한다. 염전 갯벌에서 소금 생성 과정을 체험 및 관찰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매화리 북동쪽 산지에 해바라기 군락지가 있다. 해바라기 군락지는 화성시의 ‘지역주민 자율형 농촌경관 조성사업’으로 선정되고, 농업기술센터의 지원을 받아 약 20,000㎡에 6만여 해바라기 모종을 심어 군락지를 조성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염전해안로가 광평교를 건너며 광평교 건너에 매화리 공생염전이 있다. 왼쪽 뒤에 장외리 장외산업단지, 중앙에 함경산, 그 오른쪽은 광평리 지역, 오른쪽은 매화리 지역이다. 오른쪽에 봉화산, 그 오른쪽 맨 뒤는 구봉산일 것이라 가늠한다.
화성시 서신면 광평리(廣坪里)는 서신면의 중앙부에 위치한다. 동쪽으로 상안리, 서쪽으로 장외리, 남쪽으로 매화리, 북쪽으로 전곡리와 접하고 있다. 행정리는 1개이다. 광평리는 『지명유래집』에 따르면 천일염을 생산하던 마을 앞의 넓은 벌을 막아 넓은 들[坪]을 형성한 것에서 너분들, 광평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광평리는 조선 시대 남양부 서여제면(西如堤面),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남양군 서여제면 광평동에서 수원군 서신면 광평리로 편입되었다. 1949년 화성군이 신설되면서 화성군 서신면 광평리가 되었다. 2001년 화성군이 화성시로 승격되어 화성시 서신면 광평리가 되었다. 광평리의 북쪽은 낮은 산지가 위치하며 중앙부로 산줄기가 이어진다. 동쪽과 서쪽 경계로 서해로 유입되는 소하천이 흐르고, 남쪽은 서해에 이어져 저평지가 발달한다. 『조선지지자료』에 의하면 광평리는 남양군의 포구 중 하나인 임포로 배가 드나든 지역이다.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배터 앞바다에 공생조합 제방을 쌓으면서 포구의 기능을 잃었다. 과거 남양반도 일대에서 바닷물을 졸여 소금을 생산하는 화염의 규모가 가장 컸다.
주요 도로로 제부로가 중앙부를 동서로 지나고, 당성로가 서부 지역을 남북으로 지난다. 남쪽의 장외리 경계부로 소규모 산업단지가 있으며, 매화리와 이어지는 해안가에 염전이 형성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염전해안로에서 벗어나 군 초소가 입구에 있는 매화리 해안 제방길을 따라간다. 중앙 맨 뒤에 송교리 살곶이까지 이어간다.
맨 왼쪽 백미항&백미리어촌체험마을, 그 앞에 감투섬, 중앙에 도리도, 오른쪽에 송교리의 살곶이가 한눈에 들어온다.
매화리 해안 제방길을 따라 장외리 지역으로 넘어간 뒤 곡각지에서 송교리 지역으로 넘어가 건너편의 송교리 해안으로 이어간다. 송교리 해안의 맨 끝에 살곶이가 바다로 벋어 있다.
매화리 해안 제방길에 화성시 도시브랜드(BI)와 화성시 상징로고(CI)가 설치되어 있다.
*화성시의 도시브랜드(BI) The Way to Better Living 길이 열리는 화성시 : 성장과 발전가능성을 지닌 기회의 땅임을 의미하며,무한한 가능성과 성장잠재력이 내재되어 있음을 나타내었다. - 나무위키
*화성시 상징 로고(CI) : 사방으로 뻗어져 나가는 형상을 통해 화성시가 커지고 성장함을 나타내며 사통발달의 도시로서, 서해안 시대의 핵심 거점으로서, 화성시가 사방으로 활발한 교역을 이루는 모습을 표현하였고, 활짝 펼쳐지고 열려있는 창을 통해 미래가 열려 있는 곳, 기회가 열려 있는 곳, 가능성이 열려 있는 곳으로서의 화성을 상징화하였고, 퍼져나가고 커져가는 움직임의 잔상을 통해 화성시가 정체되어 있지 않는 경제 활성의 도시(booming city)임을 나타내며 세계의 변화에 능동적이고 빠르게 대처하는 화성의 다변성을 상징하였다. 시각 프레임은 창이면서 화성의 행정구역을 상징하기도 한다. 참고로 2023년 하반기에 화성시 인구가 100만을 달성함과 함께 현 상징을 변경할 예정이다. - 나무위키
매화리에서 장외리로 넘어왔다. 왼쪽에 장외리 장외산업단지, 앞에는 염전저수지, 그 오른쪽에 매화리 공생염전이 있다.
화성시 서신면 매화리에 있는 공생염전(共生鹽田)은 남양만 바다에 880m의 제방을 쌓아 간척하여 만들어진 염전으로, 6·25전쟁으로 피난 온 강원도 철원, 평강 등지의 피난민들이 조성하였다. 초기 피난민들은 자치 조합인 공생 조합을 결성하여 염전을 운영하였는데, 6명이 소금 창고 1동을 공동 소유하여 작업하는 방식이었다. 염전에는 '공생염전'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는 공평하게 소금판을 분배하고 함께 살아가자는 의미였다. 공생염전 및 공생조합 제방은 국가에서 피난민들의 정착사업으로 실시한 것으로, 피난민들이 당국의 염전 허가를 얻어 1953년 7월부터 약 7년간 조성하였다. 조성 초기 약 2년 동안 덕적도에서 돌을 날라 매화리 앞을 가로지르는 길이 약 880m 높이 2~3m의 제방 둑 및 저수지 둑을 완성하였고, 1956년부터 4년에 걸쳐 소금판 12만평, 저수지 9만평, 유휴지 6만평을 확보하였다. 1962년에는 염전 바로 뒤 언덕 위에 4동의 흙벽돌 연립가옥을 세워 피난민들의 생활 터전을 조성하였는데, 153가구 600명이 염전에서 일하면서 살았다. 이렇게 염전과 생활 터전을 조성하는 데는 유엔민사원조처의 협조와 각 종교 단체의 양곡 원조가 큰 역할을 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매화리 해안 제방길을 따라 장외리 해안 제방길로 넘어와 해안에서 염전해안로로 나왔다. 왼쪽 뒤에 매화리 마을이 보인다.
서신면 장외리에서 해안의 군 초소 철조망 옆 길을 지나 송교리로 넘어가 해안 제방길을 따라간다.
해안의 군 초소 옆에서 뒤돌아본다. 왼쪽은 장외리의 염전저수지, 그 뒤는 매화리의 공생염전, 그 뒤에 매화리 마을이 있다.
공생염전(共生鹽田)은 공생조합의 1세대들이 조성한 이후, 현재는 2세대들이 염전을 소유하거나 생산에 참여하고 있지만, 현재 염전 상당수는 외지인에게 팔려 염전 생산이 임대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과거 소금 일은 보통 남성들이 했지만, 소금 생산이 가족 중심으로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일꾼 고용의 어려움과 비싼 인건비 때문에 2000년부터는 여성이 소금 생산에 참여하여 지금은 부부가 같이 일을 많이 하고 있다. 공생염전의 바닥은 전라도와 달리 장판을 사용하지 않고 타일을 사용하는데, 과거에는 옹기판인 '깸파리'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공생염전에서 생산되는 소금은 '소금꽃 피는 마을'이라는 상품명으로 판매되고 있으며, 염밭에서 서식하는 자연산 함초도 식품으로 판매한다. 최근에는 체험장으로 조성되면서 초등학생들의 사전 예약을 받아, 소금 채취 과정과 염생식물에 대한 이해로 나누어 체험을 진행하기도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매화리 해안 제방과 장외리 해안 제방이 길게 이어진다. 이 제방은 매화리 공생염전을 조성하기 위해 1953년 7월부터 약 2년 동안 덕적도에서 돌을 날라 매화리 앞을 가로지르는 길이 약 880m 높이 2~3m의 제방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남양만 해안이 서신면 백미리에서 매화리와 장외리를 굽이돈다. 중앙 뒤에 해운산, 오른쪽에 함박산이 솟아 있다.
서신면 백미리 해안이 이어지고 오른쪽에 백미항&백미리어촌체험마을, 그 앞에 감투섬, 그 뒤에 굴통뿌리 바위가 서 있다.
서신면 송교리 해안 제방길을 따라간다. 중앙 뒤 바다에 송교리 소속의 도리도가 떠 있다.
오른쪽에 서신 바다좌대 낚시터가 있고, 맨 왼쪽 뒤에 노인요양원 살롬하우스와 장외감리교회가 보인다.
이 염전이 공생염전인 줄 알았는데 이 염전은 송교리 서신염전이다.
송교리 해안 제방길을 따라 서신염전을 지나 뒤에 보이는 화남일반산업단지로 이어간다. 바다에는 도리도가 떠 있다.
군 초소가 있는 장외리 해안의 곡각지점에서 송교리 해안 제방길을 따라 서신 바다좌대 낚시터와 서신염전을 지나왔다. 중앙의 제방 뒤에 매화리 공생염전과 매화리 마을이 보이며, 중앙 맨 뒤에 당항성이 있는 구봉산이 어림된다.
송교리 해안 제방길을 계속 따라서 화남일반산업단지 해안으로 이어간다. 중앙 뒤에 송교리의 도리도가 보인다.
왼쪽 뒤에 함경산, 중앙 뒤에 장외리와 매화리 해안 제방, 그 뒤에 매화리 마을, 맨 뒤에 당항성이 있는 구봉산이 가늠된다.
서신면 백미리와 매화리의 남양만 해안이 동그랗게 돌고 있다. 중앙 뒤에 해운산, 오른쪽에 함박산이 솟아 있다.
왼쪽에 백미리어촌체험마을과 백미항, 그 앞에 감투섬, 그 오른쪽 뒤 곶(串) 앞에 굴통뿌리 바위가 서 있다.
오른쪽에 화성 화남일반산업단지가 자리하고 서해랑길은 송교리 해안 제방길을 계속 따라간다. 왼쪽 뒤에 도리도가 보인다.
화남일반산업단지를 통과하면 오른쪽에 드넓은 왕새우양식장과 염수저수가 펼쳐지고 정면에 살곶이가 보인다.
송교리 해안 제방길을 따라 화성 화남일반산업단지를 거쳐왔다.
오른쪽 앞에 왕새우양식장, 그 뒤에 양식장에 염수를 제공하는 저수지가 있다. 뒤에는 살곶이가 바다로 벋어 있다. 서해랑길은 중앙의 살곶이마을을 거쳐 살곶이 언덕으로 올라간 뒤 해안으로 내려간다. 살곶이 해안을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다.
남양만 송교리 해안 제방 안쪽에 대규모 왕새우양식장이 설치되어 있다. 그 왼쪽에 염수저수지가 있다. 뒤쪽은 성지골인 듯.
화성시 서신면 송교리(松橋里)는 서신면의 서쪽 끝에 위치한다. 북쪽과 동쪽으로 장외리에 접하고, 남쪽과 서쪽은 서해에 접한다. 까치섬·새섬·도리도 등의 무인도를 포함한다. 송교리는 『지명유래집』에 따르면 바다에 인접한 지역으로 바닷물이 들어오면 마을이 섬처럼 고립되어 소나무로 다리를 놓아 왕래한 것에서 솔다리, 송교로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송교리는 조선시대 남양부 서여제면(西如堤面),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수원군 서신면 송교리가 되었다. 1949년 화성군이 신설되면서 화성군 서신면 송교리가 되었다. 2001년 화성군이 화성시로 승격되어 화성시 서신면 송교리가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정면에 살곶이가 바다로 벋어 있다. 서해랑길은 송교리 해안 제방길이 끝나는 곳에 오른쪽 마을길로 진입하여 돌아서 살고지 언덕으로 오른다. '살고지(箭串)·살곶'의 지명 유래는, 마을 앞 바다는 살(箭)을 많이 단 그물을 드리워 고기를 잡던 곳으로, 平島形으로 생긴 갑(岬)을 이루고 있어 '곶→고지'가 붙어 지명화한 것이라고 한다. 오른쪽은 염수저수지이다.
2013년 화성시와 화성문화원에서 발행한 『구비전승 및 민속자료 조사집 12권 서신면』 지명유래편에서는 "그물을 맬 때 쓰는 살이 많아서 '살고지'라고 부른다는 설과 난이 났을 때 이곳으로 피난을 오면 목숨을 구할 수 있어 '살 곳'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소개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남양만 해안에 살곶이가 벋어 있고, 바다에는 윤돌과 도리도가 떠 있다. 도리도는 백미리와 송교리 두 곳에 있다.
송교리 해안 제방길을 따라 군 초소를 지나왔다. 왼쪽에 염수저수지와 왕새우양식장, 그 뒤에 화남일반산업단지가 있다.
금계국 노란 꽃 왼쪽에 백미리 백미항과 감투섬, 중앙 맨 뒤에 궁평리 궁평항과 궁평항 북방파제가 가늠된다.
금계국 노란 꽃들이 흐드러진다. 왼쪽에 윤돌과 도리도가 보인다. 물이 차오르지 않아 해안길을 따라가도 되는데 진입 금지인 줄 알고 오른쪽 마을 안길로 진입하였다.
황금해안길 안내도에 바닷물이 찼을 때 마을 안길을 통하여 걸으라는 주의사항이 있다. 멍청하게 마을 안길로 진입하였다.
살곶이길45번길을 따라 서신면 송교리 살곶이마을을 통과한다.
살곶이길45번길을 따라와 송교농장 앞에서 걸어온 살곶이마을을 뒤돌아본다. 마을 집들이 단정하다.
걸어온 해안 제방길 안쪽에 송교리 벌밖들이 넓게 펼쳐지고, 그 뒤 염수수지와 왕새우양식장, 화남일반산업단지가 자리하고 있다. 오른쪽에 함박산, 왼쪽에 함경산이 가늠된다.
살곶이길45번길을 따라가 정면의 주택 앞에서 유턴하여 살곶이길을 따라 왼쪽의 무성한 플라타너츠 나무 아래로 이어간다.
살곶이길을 따라 무성한 잎의 플타너츠나무 아래를 지나간다.
살곶이길을 따라 언덕으로 오른다. 텃밭의 채소들과 주택의 사람들이 조화하는 평화로운 풍경이다.
살곶이길 북쪽 텃밭에 고구마와 고추를 재배하고 있다. 집들은 아담하고 단정하다.
살곶이길을 따라 언덕으로 오른다. 언덕의 풍경은 텃밭이 있는 평화로운 정경이다.
살곶이길에서 언덕의 텃밭 너머로 제부도를 조망한다.
살곶이길 산토리니 표석 앞에서 오른쪽 길로 진입해 해안으로 내려간다. 위쪽에는 살곶이초소가 있다.
바다에는 제부도가 보인다. 서해랑길은 해안 오른쪽으로 이어간다.
서해랑길은 송교리 초정들 아래 살곶이 해안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이어간다. 바다에 새섬이 떠 있다.
송교리는 북부 지역에 저산성 구릉지가 분포하고, 남부 지역은 저평지가 발달하며, 해안을 따라 갯벌이 형성되어 있다. 해안을 따라 넓게 형성된 갯벌은 서쪽으로는 제부리, 남동쪽으로는 백미리와 접해 있다. 송교리의 경계가 되는 두 개의 큰 갯골을 제외하고는 골이라고 부를 만한 지형이 없다. 번개골 쪽으로는 보세라는 지명이 있는데, 가무락이 많이 나온다. 송교리의 갯벌은 1980년대 후반부터 간척의 대상이 되었다. 최근 하천과 해수의 정화, 홍수 조절, 생태적 가치 등이 밝혀지면서 보전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북쪽으로 지방도 제301호가 지나가며, 중앙부로 제부로가 지난다. 송교리 북서쪽 해안에서 제부로를 통해 제부도를 출입할 수 있으며, 해상도로는 길이 2.3km, 폭 6m의 2차선 도로이다. 송교리는 바닷가에 접한 지역으로 2012년 6월 화성시에서 지정한 염전보전구역이 있다. 산업 시설로 동남쪽 해안가에 화남 일반산업단지가 들어서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글로리아 펜션&카페 앞에서 서해랑길은 해안길을 오른쪽으로 따라간다. 바다에 제부도가 편안히 누워 있다.
글로리아 펜션&카페 앞에서 살곶이 해안을 거쳐오는 서해랑길과 재회한다.
살곶이마을 입구에서 살곶이 해안을 따라오면 이곳에서 만난다. 앞에는 까치섬, 그 오른쪽 뒤에 제부도의 매바위가 보인다.
중앙에 제부도, 왼쪽에 까치섬, 그 오른쪽 뒤에 제부도의 매바위가 보인다.
왼쪽에 화성시 서신면 제부리 제부도, 오른쪽에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누에섬이 있다. 누에섬 앞에 제부도 바다갈라짐길, 공중에는 제부도 해상케이블카가 있다. 누에섬 오른쪽에는 풍력발전기가 보인다. 맨 오른쪽에 살짝 보이는 섬은 새섬이다.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제부리에 있는 제부도(濟扶島)는 ‘육지에서 멀리 보이는 섬’이란 뜻을 가진 저비섬, 접비섬으로 불렸다. 제부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조선시대 중기 이후부터이다. 『천자문(千字文)』의 제약부경(濟弱扶傾)에서 ‘제’ 자와 ‘부’ 자를 따와 ‘제부리(濟扶里)’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유래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선감미도(仙甘彌島) 남쪽에 제부도가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 『해동지도(海東地圖)』나 『광여도(廣輿圖)』에는 유도(乳島)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제부도의 모양이 젖가슴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젓부리, 젖비로 부르던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제부도는 조수간만의 차가 매우 커 간조일 때만 통행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제부도에 입도하기 위한 도로가 만조 때의 해면보다 간석지를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2021년 12월 23일에는 전곡항과 제부도를 잇는 2.12㎞의 해상케이블카가 개통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에 새섬, 서해랑길은 송교리 북쪽 해안을 동그랗게 돌아 제부도 출입구인 송교리 제부도유원지로 이어간다. 새섬 오른쪽 뒤에 제부도 유원지와 제부도 들어가는 바닷길통제소가 가늠된다.
살곶이 언덕에서 해안으로 내려와 초정들과 살곶이 언덕을 올려본다.
송교리 초정들 아래 살곶이 해안길을 따라 위쪽의 중안들로 이어간다. 중앙 뒤에 성지골, 그 왼쪽 언덕에 무량사가 보인다.
오른쪽 뒤에 제부도, 왼쪽에 까치섬, 그 오른쪽 뒤에 제부도의 매바위가 보인다.
제부도는 섬 중앙에 해발 62.4m의 당산, 북서쪽에 66.8m의 탑재산을 제외하곤 낮은 평지로 이루어진 섬이다. 제부도는 남북 길이 2.3㎞, 동서 길이 1㎞ 내외이다. 제부도는 조수간만의 차가 매우 커 간조일 때만 통행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제부도에 입도하기 위한 도로가 만조 때의 해면보다 간석지를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썰물 때만 드나들 수 있는 제부도의 특징으로 인해 이른바 ‘모세의 기적’을 보기 위해 찾는 관광객이 많다. 이는 ‘제부모세’라 하여 화성8경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2021년 12월 23일에는 전곡항과 제부도를 잇는 2.12㎞의 해상케이블카가 개통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살곶이 해안 중안들 가죽나무? 그늘에서 길동무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살곶이 언덕에서 글로리아 펜션&카페 앞으로 내려와 살곶이 해안을 따라 초정들을 거쳐 중안들로 걸어왔다.
왼쪽에 살곶이, 그 앞에 까치섬, 그 오른쪽에 제부도의 매바위, 오른쪽에 제부도가 있다. 까치섬 뒤의 섬은 입파도인 듯.
송교리 살곶이 해안에서 중안들 너머 언덕의 무량사, 그 오른쪽 동그란 산 아래의 성지골을 살핀다.
송교리 중안들에서 건너편 계방죽들로 넘어간다. 비닐하우스는 양식업체인 '새우마을'이다.
살곶이가 바다로 길게 벋어가고 그 북쪽의 남양만 살곶이 해안의 초정들을 지나왔다.
송교리 살곶이 해안 중안들 가죽나무 그늘 아래서 점심을 먹고 계방죽들로 넘어왔다. 중앙의 작은 나무가 가죽나무일까?
바로 앞에 양식업체 '새우마을'의 염수저수지가 있다. 왼쪽에 살곶이, 그 앞에 까치섬, 오른쪽에 제부도의 매바위가 멋지다. 까치섬 뒤쪽의 섬은 입파도와 국화도인 듯하고, 그 왼쪽 뒤에 당진화력발전소가 흐릿하게 가늠된다.
바로 앞은 염수저수지, 오른쪽에 새섬, 중앙에 제부도, 맨 왼쪽에 제부도의 매바위, 맨 오른쪽 뒤에 누에섬이 보인다.
오른쪽 비닐하우스는 양식업체 '새우마을', 왼쪽에 새섬, 그 오른쪽 뒤에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의 누에섬이 보인다.
해안에서 내륙 쪽을 바라보면 케렌시아 펜션과 풍천장어 음식점이 보인다. 그 앞쪽으로 지방도 301호선 제부로가 지난다.
송교리 살곶이가 길게 바다로 누워 있다. 살곶이 언덕에서 내려와 해안을 따라왔다. 왼쪽의 집은 천지수산인 듯.
왼쪽에 살곶이, 그 오른쪽 앞에 까치섬, 살곶이와 까치섬 사이에 윤돌과 도리도가 보인다. 맨 오른쪽에 제부도의 매바위가 보이며, 중앙 맨 뒤의 섬은 입파도와 국화도인 듯. 까치섬 뒤쪽에 당진화력발전소와 왜목마을이 흐릿하게 가늠된다.
새섬 앞 이 시설물 이름은 지도에 '옹기 빚는 여인'이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방치되어 있다. 폐업한 것일까?
새섬은 개인 소유의 섬이다. 새섬 왼쪽 뒤에 제부도의 매바위, 왼쪽 맨 뒤에 입파도와 국화도가 가늠된다.
송교리 북쪽 개망초꽃 흐드러진 해안 제방길을 따라 북진한다.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누에섬 앞에 제부도 바다갈라짐길이 있고, 공중에는 제부도 해상케이블카 케이블과 타워가 이어지고 있다. 누에섬과 탄도항 사이에는 풍력발전기가 설치되어 있다.
제방 안쪽에 제부도 제빵소가 있다. 왼쪽 뒤에 파란색 제부교차로 도로표지판이 보인다. 서해랑길은 제부교차로에서 위쪽으로 해양공단로를 따라 이어간다.
제방 안쪽 제부도 제빵소 북쪽에 바다좌대 낚시터가 있다. 서해랑길은 해안 제방길을 따라 제부도 출입구 앞으로 진행한 뒤 오른쪽으로 돌아 오른쪽 뒤에 보이는 제부교차로 파란색 도로표지판에서 지방도 301호선 해양공단로를 따라 위쪽으로 이어간다.
바다좌대 낚시터가 앞에 있으며, 서해랑길은 왼쪽 뒤의 제부교차로 도로표지판에서 해양공단로를 따라 위쪽으로 올라간다.
오른쪽 바다좌대낚시터를 지나 바다모텔 앞을 통과하여 제방길을 따라 제부도 출입구 앞으로 이어간다.
걸어온 송교리 해안을 뒤돌아본다. 살곶이가 길게 서쪽 바다로 벋어 있고, 오른쪽에 새섬, 그 왼쪽 뒤에 윤돌이 보인다.
왼쪽에 새섬, 그 왼쪽 뒤에 윤돌, 맨 오른쪽에 제부도, 중앙에 제부도의 매바위, 중앙 맨 뒤의 섬은 입파도와 국화도인 듯.
제부도 바다갈라짐길이 왼쪽 제부도로 이어지고, 공중에 제부도 해상케이블카, 중앙에 누에섬과 풍력발전기가 보인다.
송교리 바다모텔 앞 제방길을 따라 제부도 출입구로 들어간다. 제부도 바다갈라짐길 오른쪽에 바닷길통제소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