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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버스터미널~염전저수지~환성 3리 마을회관~진충사~도성 3리 마을회관 13k, 4h
대산버스터미널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정자동4로 8(대산리 1644) 일원에 건축면적 507㎡ 규모로 조성된 시내버스 전용 터미널
당시 전형적인 어촌 지역이었던 충청남도 서산군 대산면 일원에 1990년대 대산항 개항과 대산석유화학산업단지의 조성에 따른 서산군(현 서산시) 북부의 인구 증가에 따라 급증했던 대중교통 수요 및 시내버스 노선체계 개편을 대비하기 위해 1990년에 버스터미널을 건설했으며, 2019년 1월 1일 대산지역에 간선/지선 버스 도입으로 리모델링하여 터미널을 재개장하게 되었다. 원래는 시외버스도 운행되었으나 당시에 모종의 사유로 인하여 운행중인 시외버스가 완전히 폐지되어 결국 시내버스 전용 터미널로 대체되었다. 원래 대산읍의 시외버스 노선은 천안, 서울남부, 대전, 송탄 등지에서 당진·삼길포 경유 (일부 독곶리 종착), 홍성이나 예산에서 한서대학교·해미·서산 경유 2가지 이상의 계통으로 다원적으로 존재하였으나, 2010년 말 수요 저조로 인해 모두 운행이 중단되어 이후 대산-서산 구간의 충의로(29번 국도) 라인은 시내버스가 유일하게 되었다.
단, 자가용이 널리 보급되고 서산공용버스터미널에서 삼길포행 좌석버스가 운행하고 있어 생각보다 불편함이 그다지 큰 편은 아니다. 후자의 경우 2010년 서산-대산 시외버스 운행 중단 당시 내포신도시 조성 이전으로 홍성•예산발 대산행 노선과 관계가 전무했으나, 폐지 이후 내포신도시가 조성되고 2013년에 내포신도시고속시외버스정류소가 신설되었으나 대산터미널에서는 이미 신도시 조성 전인 2011년에 시외버스가 단항되었기 때문에 내포신도시-한서대-해미-서산-대산 시외버스 운행은 아예 불가능하다.] 이후 시외 노선 운행을 재개하여 2020년 1월 당시 대산-서울남부행 시외버스 노선 신설을 추진하려고 했으나 얼마 후 코로나19로 인하여 이마저도 중단된 상태이다.
환성리[環城里]마을회관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환성리(環城里) 지역은 마을 모습이 문고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골환이[谷環里]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시 문곶리(門串里)와 지곡면 대요리(大要里) 사이에 동서로 쌓은 토성(土城)인 나성(羅城)이 있었으므로 골환이의 ‘환’자와 토성의 ‘성’자를 따서 환성리가 되었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 서산군 대산면(大山面)에 탑골[塔洞] 등 관련 지명이 보인다.
형성 및 변천
환성리는 조선 시대에 대산면의 문곶리와 탑동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문곶리와 탑동의 일부분을 합쳐 환성리라 하고 서산군 지곡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서산군과 서산시의 통합에 따라 서산시 지곡면 환성리가 되었다.
자연 환경
대호지만과 가로림만은 리아스식 해안이 발달했던 지역이지만, 대호지만은 간척이 완료된 이후 농지로 이용되고 있으며, 서부의 가로림만은 소규모로 간척되었다. 차별 침식을 받아 광범위하게 낮은 구릉지를 형성하고 있다.
현황
2010년 12월 기준으로 면적은 6.8㎢ 이며, 2014년 12월 31일 현재 인구는 총 233세대에 550명(남자 269명, 여자 281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3개의 행정리, 9개의 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밤골·절골·목재·토성골·문꼬지·헌터울 등의 자연 마을이 있다. 헌터울 동북쪽에 물새들이 많이 살았던 새 섬이 있다. 특산물로는 간척지와 구릉지에서 재배하는 쌀, 생강, 고추 등이 있다. 환성리에는 2003년 행정안전부가 정보화 마을로 선정한 금박골마을이 있다. 금박골마을은 2011년 현재 갯벌 생태 체험, 바다 스포츠 대회, 담력 기르기, 충·효·예 교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여름 피서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환성리의 동쪽은 대호지 호수를 경계로 당진군 대호지면 출포리, 서쪽은 가로림만에 접하고 남쪽과 북쪽은 국도 29호선을 통해 서산시 대산읍과 지곡면 대요리로 연결된다.
참고문헌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
『서산시지』(서산시지 편찬위원회, 1998)
이은우, 『서산의 지명사』(서산시, 2008)
『2011 통계로 보는 서산시 모습』(서산시, 2011)
『대전일보』(2011. 7. 13)서산시청(http://www.seosan.go.kr/)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정충신사당(진충사) [鄭忠信祠堂-振忠祠-]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에 있는 조선 후기 사당.
개설
정충신(鄭忠信)[1576~1636]은 원래 전라남도 광주 일대에 세거하고 있었는데, 1633년(인조 11) 당진에 유배된 이후 서산 대산에서 은거하다가 지곡면 대요리의 지세를 살펴보고 자신의 묘소를 정하였다고 한다. 또한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 일대는 인조반정의 논공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킨 이괄(李适)[1587~1624] 가문의 땅이었다고 하는데, 정충신이 이괄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운 후 대요리 일대를 사패지로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금성 정씨(錦城鄭氏)들이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 일대에 정착하여 거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충신은 사후 29년 만인 1685년(숙종 11)에 충무공(忠武公) 시호를 받았으며, 영정과 위패는 종손이 보관하면서 제향을 하였다.
위치
서산시 지곡면 소재지에서 국도 29호선을 따라 북쪽으로 약 3.5㎞ 가다 보면 서쪽으로 소로가 나 있다. 소로를 따라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 방면으로 약 1㎞ 정도 들어가면 북동향 사면에 정충신사당(鄭忠信祠堂)(진충사(振忠祠))이 위치하고 있다.
변천
정충신사당은 정충신을 제향하고 있는 사우로 1636년(인조 14) 왕명에 의해 건립되었다. 위패를 도난당하는 등 어려움이 있자 후손 정세오(鄭世奧)가 사당을 지었다가 1897년(고종 34) 9세손 정세칠(鄭世七)이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구 사당은 현재 정충신사당으로부터 북쪽 300m 지점에 있었다. 1968년 사우를 복원한 후 진충사로 개칭하였다. 최근에도 몇 차례의 중수와 개축이 이루어졌다.
형태
홍살문과 삼문, 사우, 동서 양재로 구성되어 있다. 삼문은 솟을대문이고,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로 팔작지붕, 겹처마의 양식이다. 전면 1칸을 개방하였고, 그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깐 후 뒷면에 영정을 봉안하였다. 둥근 주춧돌 위에 둥근기둥을 세웠으며, 공포(栱包)는 전형적인 무출목 익공집 형태이다. 기둥의 주춧돌·기둥·창방·대들보의 부재는 시멘트이고, 주심도리·장혀와 익공(翼工)은 목재를 사용하였다. 창방과 주심도리 사이에는 접시받침이 중앙 칸에 4개, 양 협간에 2개 끼워져 있다. 1969년의 상량문이 있으며, 건물의 정면에는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의 친필 ‘진충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현황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06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진충사에는 정충신의 유품이 여러 점 소장되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1975년 도난 사건으로 인해 유물이 유실되었다. 다행히 대부분의 유물은 2달 만에 찾았지만, 투구 1점은 끝내 사라지고 사진만이 전한다. 2011년 현재 중요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유품은 모두 5점으로, 1994년부터 동재를 전시관으로 조성하여 전시하고 있다. 제향은 매년 양력 4월 25일 유림들과 후손들이 모여 지낸다.
의의와 평가
정충신사당은 조선 후기 서산 지역 무인 가문의 사우 건립과 인물의 추숭 활동의 사례를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이다. 특히 정충신의 증시교지(贈諡敎旨)를 비롯한 다양한 유물들이 전하고 있어 당시의 국가적인 사건과 지역의 실정을 파악하는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참고문헌
『문화유적분포지도』-서산시(충청남도·충남발전연구원, 1998)
『서산시지』(서산시지편찬위원회, 1998)
『충남의 서원·사우』(충청남도, 1999)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도성3리(마을회관)
지곡면 도성3리(이장 이상무) 주민들이 ‘마을 경관 가꾸기’사업에 참여해 마을 곳곳에 꽃 심기를 하느라 분주한 하루를 보냈다.지난 27일 주민 50여 명은 마을회관 옆 도로에 패튜니아 1,000주를 식재하고, 집집마다 해바라기 씨앗을 심어 지역 경관을 개선하고 새로운 지역 명소를 만들기 위해 구슬땀을 흘렸다. 이상무 이장은 “우리 마을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다는 마음으로 주민들 모두가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며 “매년 쾌적한 마을 환경 조성을 위해 튤립, 수선화, 아이리스 등을 심고 가꾸고 있으며 앞으로도 깨끗하고 단장된 마을로 발돋움하여 지역 관광지화와 소득 창출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허현 기자
2023-06-04 작성자 명사십리
안견기념관[安堅記念館]
충청남도 서산 출신의 조선 전기 화원인 안견(安堅)을 기리는 기념관.
개설
현동자 안견은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유일한 진작으로서 전해졌을 뿐 생몰 연대나 활동 시기 등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었으나 1986년 『호산록(湖山錄)』[1619]이 발견되면서 출신지가 서산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안견기념관은 「몽유도원도」를 비롯하여 안견의 전칭 작품이라 일컫는 「적벽도(赤壁圖)」,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를 전시하여 안견의 작품 활동을 살펴볼 수 있게 하고 있다.
또한 안견과 관련된 문헌을 전시하여 단편적이나마 그 삶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안견기념관에 전시된 「몽유도원도」는 한국에 있는 모사본 중 가장 뛰어난 것이다. 1991년 서산시가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소장하고 있는 일본 천리시(天理市)와 자매결연을 하면서 기념으로 받은 모사본이다.
건립 경위
『호산록』을 통해 안견의 출신지가 서산임이 밝혀지면서 지역에서 안견을 현창하기 위한 기념관 건립 운동이 전개되었다. 서산시는 1989년 12월 30일 안견의 출신지인 서산시 지곡면에 「몽유도원도」를 실측 크기로 조각한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이후 1990년 10월 22일 서산시 지곡면 화천리에서 안견기념관 건립 공사를 시작하였다. 1991년 8월 4일 완공하여, 1991년 12월 2일 개관하였다. 사업비는 2억 2000여 만 원이 투입되었다.
구성
전시관인 안견기념관은 대지 면적 1,322.31㎡에 건물 면적 264.46㎡ 규모의 한·양식 절충형의 콘크리트 라멘조 건물로 되어 있다. 전시장에는 「몽유도원도」 1점, 「적벽도」 1점, 「사시팔경도」 8폭, 「소상팔경도」 8폭을 복제하여 전시하고 있다. 야외에는 기념비가 건립되어 있는데, 1989년에 후면 8폭의 병풍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현황
안견기념관의 운영 시간은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까지이며 매주 월요일 휴관하고 있다. 서울 방면에서는 서해안고속국도 서산IC로 진출하여 운산에서 국도 32호선을 타고 서산으로 진입하여 지곡면사무소 방면으로 가다보면 우측에 안견기념관이 보인다.참고
참고문헌
안견기념사업회(http://www.angyeon.com)
서산시청 문화관광과(http://www.seosantour.net)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모송사[慕松祠]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화천리에 있는 고려 후기 문신인 최청(崔淸)의 사당.
개설
모송사(慕松祠)는 경주 최씨(慶州崔氏) 관가정파(觀稼亭派)의 파조인 최청[1344~1414]을 제향하는 사우이다. 최청은 고려 말의 문신이자 충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직재(直哉), 호는 관가정(觀稼亭)·송음거사(松蔭居士)이다.
위치
국도 29호선 구 도로변에 있는 지곡고등학교에서 서쪽 방향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500m 정도 가면 신장골에서 서산시 지곡면 장현1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다. 모송사는 이 고개 근처에 위치한다.
변천
최청의 영정은 원래 경기도 용인에서 최치원(崔致遠)의 영정과 함께 경주 최씨 후손들에 의해 모셔지고 있었다. 이후 1918년 서산 지역 문중의 주도로 2명의 영정을 서산시 지곡면 장현리 최정열(崔貞烈)의 집에 옮겨 봉안하였고, 1921년에는 부성사(富城祠)에 이안하여 지방 유림들의 주도하에 춘추로 제향을 지냈다. 그러던 중 유림들이 두문동 72현에 최청의 기록이 누락된 것을 문제 삼아, 최청의 영정을 부성사의 본전(本殿)이 아닌 동·서재로 분리하도록 하였다. 이에 서산과 당진·태안·홍성 등지의 경주 최씨 후손들이 1978년 모송사를 건립하여 최청의 영정을 별도로 제향하게 되었다.
형태
외삼문(外三門)과 사우(祠宇)로 구성되어 있다.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건물로 팔작지붕을 올렸다.
현황
2011년 현재 모송사는 서산 지역 경주 최씨 관가정파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경주 최씨 관가정공파 후손들이 매년 음력 3월 5일에 춘향제를 봉행하고 있다.
참고문헌
『문화유적분포지도』-서산시(충청남도·충남발전연구원, 1998)
『서산시지』(서산시지편찬위원회, 1998)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경주최씨[慶州崔氏]
최치원(崔致遠)을 시조로 하고 최사(崔泗)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서산시 세거 성씨.
개설
경주 최씨는 고운(孤雲) 최치원[857~?]을 시조로, 최사를 입향조로 하는 서산시 지곡면 일대의 세거 성씨이다. 서산의 경주 최씨는 고려~조선 전기까지의 기록은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경주 최씨의 서산 입향조는 최사인데 바로 최몽량(崔夢亮)[1579~1627]의 아들이다. 그는 양주에서 살다가 지곡으로 옮겨와 살았으며, 고려 후기 절의계 인물 최정의 후손이다.
연원
경주 최씨는 신라 6촌의 하나인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소벌도리(蘇伐都利)를 원조로 하고, 최치원을 시조로 하고 있다. 최치원은 12살의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태산(太山), 함양(咸陽), 부성(富城) 등지의 태수(太守)를 지냈으며, 시무 10조를 올렸으나 시행되지 않자 난세를 비관하며 전국을 유랑하다가 해인사로 들어가 은거하다 생을 마쳤다. 경주 최씨는 신라 6두품 집안으로서 이후 고려 건국에 적극 참여하여 유력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대표적 인물로는 재상까지 오른 최승로(崔承老)[927~989] 등을 들 수 있다.
입향 경위
조선 후기에 서산에 정착한 경주 최씨는 지곡면 일대에 세거하게 되었다. 경주 최씨의 서산 입향조는 최사인데, 그는 경기도 양주에서 살다가 지곡으로 옮겨와 살았다. 그가 어떠한 연유로 서산 지역에 입향하게 되었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다.
현황
현재 지곡면 산성리 일대에는 경주 최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대표적인 성씨이다.
관련 유적
경주 최씨와 관련된 유적은 대부분 지곡면 일대에 자리하고 있다. 먼저 최치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부성사(富城祠)와 그 아래 솔대배기에 있는 최몽량·최호주·나주 정씨 삼강 정려가 대표적이다. 부성사는 대원군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07년 후손들에 의해서 다시 재건되었으며, 최몽량의 정려는 아들 최사가 경기도 양주에서 서산으로 이거하면서 함께 이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인근 지곡면 화천리에는 고려 시대 두문동 72인 중의 한 명인 최청(崔淸)[1344~1414]을 제향하는 모송사(慕松祠)가 있다.
참고문헌
『문화유적분포지도』-서산시(충청남도·충남발전연구원, 1998)
『서산시지』(서산시지편찬위원회, 1998)
『충남의 서원·사우』(충청남도, 1999)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6-11 작성자 명사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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