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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신앙은 완전한 데 나가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선 믿음과 오래 참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현재이지만 오래 참음은 미래까지 계속 되어야 됩니다. 롬8:25에 보면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하십니다.
그러므로 학수고대하며 기다려야 됩니다. 신앙은 주님의 손길을 학수고대하며
오래 참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심령에 만져지는 것이 없다고 해서 이 일을
그만 두면 안 됩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하나님이 우리를 달래느라 표적과 기적 등의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데 나아가면 막막하게 아무것도
안 보일 때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기도를 해도 주님이 들으시는지
졸고 계시는지 텅 빈 허허벌판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부탁하는 겁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상속 받은 자는 기다리는 은혜도 받아야 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적효력이 매우 예민하고 빠르게 나타납니다.
그냥 하나님 앞에 뭐든지 투자를 하면 펑펑 쏟아지는 것 같습니다. 너무 재미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하나님 앞에 시간과 땀과 눈물을 투자 하기는 하는데 한 강에 돌 던지기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셨는지 안 받으셨는지 도무지 모릅니다.
내 기도를 들으셨는지 듣지 않으시는지 기도가 도무지 재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서서히 내 속에 분량이 꿈틀거리며 차올라 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 때부터 하나님은 내 마음과 내 생각 안에서 역사하시는구나 하는 느낌을 갖습니다.
속에서 나 아닌 다른 존재가 커져 가는 겁니다. 새로운 마음과 생각이 자꾸 차 올라오면서
믿음의 담력이 되고 이게 나의 귀중한 보배처럼 느껴지고 이것이 자랑이 되고 찬양이 되고
감사가 되는 겁니다. 저 같은 경우도 이런 상태로 2-3년은 심한 몸살을 한 것 같습니다.
아무 것도 안 보이는 것 같아요. 말씀은 깨달아지므로 길은 분명히 맞는데 그리고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은 받았지만 제 속에는 언제나 빈 주머니 같았습니다.
도대체 나는 뭐냐는 겁니다. 약속만 받고 마는 것이냐? 이거죠. 그래서 오래 참고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기다립니다.
그 만큼 하나님이 내 속에서 내부공사를 오랫동안 하셔야 됩니다. 땅을 평평하게
하고, 그리고 심고, 또 심은 것이 자라고... 그렇게 되는 긴 과정이 필요합니다.
적어도 히브리서를 듣는 사람은 다 그 믿음 속에 들어가 있는 분들입니다.
언제나 신바람(?)이 나서 방방 뛰어야 할 사람 같으면 히브리서는 재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초기에는 그런 것이 매우 좋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자신의 문제가
해결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심령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신은 수면 위에 운행하십니다. 왜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느냐 하면 내 심령이 아직 수면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더불어 화합한 수면이 아니기 때문에 성령이 암탉이 새끼를 모음같이
품어주지 못하니까 그저 원래 타고난 혼돈이 있는 겁니다. 이것이 맞는지
저것이 맞는지 아직 확실한 길이 없다는 겁니다. 광야입니다. 공허합니다.
속이 채워지지 않으니까 정과 욕심으로 채우는 것이 그만 신앙인 줄 압니다.
그저 끌어다가 집어넣기 위해 ‘다고 다고’하며 기도하는 겁니다. 그게 왜 그러냐?
내 속에 있는 흑암의 깊음 즉 무저갱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이 무저갱이 메워지지 않는 한 참 만족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 바로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는 말씀처럼(창1:2-3)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나타나셔야만 합니다.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고,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하십니다.
이 빛이 우리 속에 들어올 때에 무저갱이 막힙니다. 무저갱은 밑바닥이 없는
웅덩이입니다. 빛이 비치고 어둠이 거두어지므로 밑이 막히고 물이 차 올라오니까
여호와의 신이 수면에 운행해 주십니다. 성령이 나를 붙잡아 주십니다.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이런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이 수면이 차올라
올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 너무 어렵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우리는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13절은 ‘왜냐 하면’ 부터 시작합니다.
왜 우리가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냐 하면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왜냐하면... 하나님이 맹세한 일이기 때문에 참으라는 겁니다.
13절은 하나님이 스스로 맹세하고 약속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맹세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하나님의 맹세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사실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건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내가 너희에게 약속을 성취하겠다' 하시고 성령으로 보증을 하신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맹세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보증을 하시고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겁니다. 기어코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맹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기다려라 하시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우리를 기다려주겠습니까?
아무 희망이 없는 나에게 소망을 가지고 바라고 기다리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증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우리 자신을 기다려 주는 겁니다.
성경의 모든 약속은 거기에 성령의 감동으로 보증이 되시고, 또 이 말씀을 받은
우리가 이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하나님이 보증을 하십니다. 그 믿음 위에
보증을 섰다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과 계약한 우리의 심령에 성령이 보증을
하셨기 때문에 기어이 하나님이 이루실 줄 알고 기다려라 그래서 빌2:13 말씀하길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그러니 “원망과 시비가 없이하라”고 하십니다.
14절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너를 ‘복주고’... 우리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무슨 복입니까?
신령한 복입니다. 즉 영적인 복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또 ‘복주며’ 미래입니다.
복을 받았고 앞으로 이 복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 참으라는 겁니다.
그리고 ‘번성하게 하고’는 현재이고, ‘번성하게 하리라’는 미래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맹세와 약속이며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브라함다워지는 것은 아브라함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롬4:18절에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말씀에 인함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요셉이 요셉다워진 것도
요셉이 그렇게 경건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하고
맹세했기 때문에 그 열심이 그의 구원을 이루신 겁니다. 사9:7절에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심이라고 하신 그대로입니다. 아브라함의 약속은 이삭입니다.
75세 때 받은 약속을 100세 때에 드디어 받았습니다. 약속은 75세 때 받고
정작 이삭을 25년 후에 받았습니다. 75세 때는 아브라함이 생산이 가능했지만
100세 때는 죽은 자와 방불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그 약속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삭입니다.
왜냐하면 ‘네 후손으로 인하여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모래같이 번성하리라’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이삭으로부터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15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사실 믿음도 선물이고, 오래 참음도 선물입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오래 참게 합니다. 이삭은 믿음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얻은 자식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이 믿음이 이삭으로 연결됩니다. 아브라함은 처음에는 믿음이 없었지만 아브라함
속에 들어간 하나님의 말씀은 그를 떠나지 않고 그 약속을 기어코 이루셨습니다.
이것을 아브라함이 안 겁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제가 시계 하나를 어떤 분에게 주면
그 분은 그것을 사용하면서 제가 준 것이라고 늘 생각하게 될 겁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너에게 이삭을 주겠다 하시고 이삭을 주었습니다. 그러면 이삭은 누구 것인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것을 알고 있기에 이삭을
드릴 수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처음 믿음은 말씀을 그대로 수용하는
믿음이고, 그 다음에는 말씀을 수용하니까 이삭으로 그의 믿음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럼 ‘나는 죽은 자와 방불하고 내 아내 사래는 경수가 끊어졌는데 이 상태에서
이삭이 나왔으니까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주신다고
말씀한 그대로 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는 겁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이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다시 드릴 수 있는 믿음의 의가 생긴 겁니다. 처음에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의가 있고, 그 다음에 이삭을 드리는 의를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들어와서 만들어 냈습니다. 따라서 야고보서의 행함의 의란 바로 이런 겁니다.
말씀이 내 속에 들어와서 들어온 의에다가 이 말씀이 우리의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함께 지내다 보니까 우리 속에 믿음의 열매가 되더라는 겁니다. 이 열매를 가지고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에서 믿음으로, 의에서 의로’
이른다고 말씀하는 겁니다. 그래서 의는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의가 있고
믿음으로 받아들인 다음 그 열매를 만들어서 주님 앞에 드리는 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믿음이 행함으로 말미암아 완전하게 되었다고 말씀하는 겁니다.
믿음의 의인이 있고 행함의 의인이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의인이라는 자랑은
이제 그만들 하고 나도 이제 행함의 의인이라고 자랑을 할 수 있어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와 같은 일을 이루셨다는 간증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럴 때에 그 사람에게 기도하는 권세도 따르게 됩니다. 표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따라 말씀을 증거하면 표적이 따르게 됩니다.
바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있다는 말씀대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제사와 예물을 드려라’ 하면 먼저 자기의 것을 갖다 드린다고
마음이 바쁩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주께 드리네’하고 자기의 것을 교회에 갖다
두니까 항상 본전 생각이 나는 겁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하나님께 드린 것이
자꾸 기억이 나는 겁니다. 심지어 지금 어느 교회에는 목사가 사건이 생기니 헌금을
돌려 달라고 내용증명까지 보냈다는 기사가 나고 있습니다. 그거 자신의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이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하나님이 달라고 하니까 바로 드리는 겁니다. 이런 것이 바로 주님께 드리는
제사와 예물이 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생전에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고 죽은
다음에야 빼앗기듯 겨우 드려집니다. 그래서 우스운 말을 하자면 천국도 죽어서
겨우 가는 겁니다. 신앙이 어리니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만 너무 강조합니다.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셔서 완전한데
나아가서 밭가는 자들에게 채소를 주는 엘리야처럼 백성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할
때에 비가 와서 땅이 다시 열매를 맺도록 하는 의인, 다른 사람들에게 혜택이 되는
그런 의인의 삶을 아직 못사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져 아브라함에게 이삭과 같이 하나님의 것이 내 것이고
내 것이 또한 다 하나님의 것이 된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살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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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중에 인생의 제 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기뻐하며,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 하는것 입니다.
영생은 이것이니, 곧 유일한 참 하나님이신 아버지를 아는 것과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3)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그리고 지금, 나에게 부활과 생명되심을 고백합니다.
이 고백위에 성령 하나님께서 내 심령위에 운행하시고, 하나님 아버지를 즐거워함으로 삼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것이 오늘도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하나님 나라안에서 사는 비결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하나님을 영광 가운데서 크게 찬양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건강하십시요.
할렐루야! 감사드립니다
할렐루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