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서정주, 체 게바라
시점(Point of View)은 어떤 스토리가 이야기되는 방식입니다. 누구에 의해서 이야기가 전개되느냐는 겁니다. 그러므로 시점은 현대 소설교론자들의 지대한 관심사가 되어왔습니다.²²⁾ 문법은 화자, 청자, 화제 등 세 가지 유형의 인물을 구별합니다. 이중에서 말하는 시점에 따라 일인칭(화자), 이인칭(청자), 삼인칭 또는 탈인칭(話題)이 결정됩니다. 다시 말하면, 말하는 시점에 따라 일인칭은 화자중심의 말하기, 이인칭은 청자중심의 말하기, 삼인칭 및 탈인칭은 화제중심의 말하기 입니다.
인칭대명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대명사입니다. 그 가운데 나(우리), 저(저희), 짐, 과인, 본인, 소생 등이 화자에 대용되는 1인칭입니다. 이 가운데 '나'는 청자의 지위가 화자와 비슷하다든가 화자보다 낮다고 생각될 때 쓰입니다. 청자가 화자의 의견을 청취하는 공개석상에서도 자주 쓰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지위가 높아서 ‘합쇼’로 대우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낮춤말 '저'를 쓰는 것이 예의바른 말씨입니다.²³⁾
문단에 발표되고 있는 시 가운데 아마 일인칭 시점의 시가 가장 많을 겁니다. 그렇다고 일인칭 시점으로 말하기가 가장 우수한 방법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일인칭 시점은 화자가 겪은 체험을 창작자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말합니다. 소설에서 주인공 시점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주로 영탄이나 감탄의 어조도 있지만 독백적 서정을 주조로 한 서정시에 알맞은 시점입니다. 고백적 술회에 설득력이 있습니다.²⁴⁾
자신의 과거를 ‘나’인 일인칭 화자시점으로 쓴 서정주의 시를 볼까요? 친일행적으로 비난을 받았던 서정주는 한때 한국시단의 정부로 표현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를 불교적 시인으로 알고 있습니다마는, 보들레르에게서 영향을 받은 그의 초기 시들은 젊음의 방황과 열정이 더 강하게 드러납니다. 서정주의 「자화상」은 시인의 예민한 자의식을 표현한 대표적인 자전적 자기고백의 시입니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메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아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아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찬란히 틔어오는 어느 아침에도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서성주, 「자화상」, 전문
이 작품은 서정주가 23세 되던 해인 1937년 중추에 지은 것입니다 이 시는 매우 솔직한 자전적 자기고백의 시입니다. 어떤 이는 이 시가 민족적인 현실을 반영하였다고 하지만 동의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좋의 자식으로 단정하는 자괴감, 스물세 해 동안 자신을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라는 명구, 스물세 살이라는 청춘의 절정기에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살아왔다고 고백하는 철저한 자기비하는 당시 시인이 처한 심적 상황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정주의 시에서 인간의 본원적인 삶과 생명에 대한 뜨거운 희구와 애정이 깔린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915년 전북 고창 출생인 서정주는 어려서 한학을 배웠으며 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방랑생활을 하게 되고 박한영 스님 문하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가 동국대 전신인 중앙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여 수학한 후 이곳저곳을 방랑하였습니다. 이러한 전기적 사실은 서정주의 초기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서정주는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를 보편적인 것으로 환치시키는 어려운 작업을 예술적 차원에서 성공시키고 있으며, 그의 신분 문제 역시 일본 강점기에 일본이라는 대지주 밑에서 종살이 하는 한국민 전체의 것으로 폭넓게 일반화시켜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다른 자전적 시를 보겠습니다.
열여덟 살 때 가을에 나는 한 넝마주이가 되어
무거운 구덕을 등에 메고
서울의 쓰레기통을 뒤지고 다녔네.
이것 한 가지나 마지막 할 일인가 싶어
이 구석 저 골목 두루 뒤져 다녔네.
하루 종일 주은 걸 팔아도
이십 전밖에 안 되는 날은
아침은 오전짜리 시래기 국밥,
점심도 오전짜리 호떡 한 개,
저녁만 제일 싼 십전짜리 밥을 사먹었네.
정동의 영국공관 뒤 풀밭에서 쉬노라니,
분홍빛 장미 같은 앵키 소녀가 지나가며
유심히 보고는 얕잡아 외면하는 눈초리.
그것에는 부끄럼도 화끈히 솟으며……
그래도 일본인집 쓰레기통에서는
쓰다버린 그 <유담뿌>라는 것도 하나 주워서
범부 선생에게 선사도 했었지.
범부는 그걸 받고 시를 하나 썼는데,
<……쓰레기통 기대여 앓는 잠꼬대를
피리 소리는 갈수록 자지라져……>
그런 구절도 끼어 있었네.
-서정주, 「넝마주이가 되어」 전문
유담뿌는 일본인들이 냉방에서 잘 때 더운 물을 담아서 안고 자는 용기입니다. 범부는 소설가 김동리의 큰형님이었고, 서정주의 아버지 뻘이 되는데, 『화랑외사』를 쓴 동양사상에 정통한 철인이었습니다. 서정주는 실제로 넝마주이 행각을 사흘 만에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좀 낯설지만, 그러나 국내에 책과 영화로 잘 알려진 아르헨티나 출신인 체 게바라(1928~1967)의 시를 보겠습니다. 그는 혁명가이면서 가슴속에 인간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서정을 품고 살았던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프랑스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소포클레스, 랭보, 셰익스피어에 심취하였고 잭 런던과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암송하면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는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라틴 아메리카를 여행하며 나환자들의 삶과 궁핍한 농민들의 현실을 목격하고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그들을 위한 헌신의 삶을 살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쿠바로 건너가서 카스트로와 만나 게릴라 혁명에 참가를 하게 됩니다.
그는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항상 괴테, 보들레르, 도스토예프스키, 네루다, 마르크스, 프로이트, 레닌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일기를 썼다고 합니다. 그는 쿠바 혁명에 성공한 뒤에도, 볼리비아 밀림으로 돌아가서 혁명운동을 하다가 전사한 진정한 혁명가였습니다.
내 나이 15살 때
나는
무엇을 위해 죽어야 하는가를 놓고 깊이 고민했다
그리고 그 죽음조차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이상을 찾게 된다면,
나는 비로소 기끼이 목숨을 바칠 것을 결심했다
먼저 나는
가장 품위 있게 죽을 수 있는 방법부터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문득,
잭 런던이 쓴 옛날이야기가 떠올랐다
죽음에 임박한 주인공이
마음속으로
차가운 알래스카의 황야 같은 곳에서
혼자 나무에 기댄 채
외로이 죽어가기로 결심한다는 이야기였다
그것이 내가 생각한 유일한 죽음의 모습이었다.
-체 게바라, 「나의 삶」 전문
화자는 15살 때 “무엇을 위해 죽어야 하는가.”를 고민했다고 합니다. 청소년기에는 대부분 감상적이면서도 다소 존재론적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는 “품위 있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는데, 성숙한 관념이 돋보입니다. 그리고 잭 런던의 글 가운데 하나를 생각하고, 자신도 그런 죽음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15살 무렵 삶의 내력을 시로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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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이명섭, 279~284쪽 참조. 소설에서 시점의 전통적 유형은 삼인칭과 일인칭 시점이다. 삼인칭 설화에서 서술자는 본 스토리에 등장하는 인물을 이름으로, 또는 ‘그’, ‘그녀’, ‘그들’로 가리키는 스토리 밖에 있는 인물이다. 일인칭 설화에서는 서술자가 ‘나’로 말하며, 또한 자기 자신이 스토리의 인물이다.
23)남기심, 『표준국어문법론』, 탑출판사, 1985, 77~78쪽.
24) 이지엽, 376-386쪽 참조.
공광규 『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
2025. 1. 28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