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를 뜨는 시간
야구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종종 이런 질문이 돌아온다.
“직접 하기도 하세요?”
그럴 때마다 ‘스포츠’ 라는 단어의 의미를 다시 더듬어보게 된다. 누군가 영화광이라고 해도, 그가 직접 영화를 찍는지
묻는 사람은 드물다. 연극을 좋아한다고 해서 무대에 서느냐고 묻지도 않는다. 하지만 스포츠는 유독, 몸으로 뛰어들어야만
진짜로 좋아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영역인 듯하다. 경기장이라는 물리적 공간, 그 안에서 몸을 움직이는 경험이 곧 ‘참여’ 의
조건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관람은 늘 그 세계의 가장자리, 경계 밖에 선 태도로 간주되곤 한다.
나는 야구를 하지 않는다. 언젠가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생활체육인으로서 야구를 즐기지는 않는다.
내가 야구를 대하는 마음은 운동의 영역이라기보다는 감상의 영역에 있다. 음악을 듣는 마음, 영화를 보는 마음, 책을 읽는
마음, 라디오를 청취하는 마음에 가깝다.
나는 야구를 본다. 가끔 야구장에 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집 안에서 담요를 무릎에 덮고 중계를 본다. 손에 가벼운
소일거리를 쥐고 있을 때도 있다.
이따금 바느질을 하며 야구를 본다. 특별한 목적이 있는 건 아니다. 작은 코스터나 주머니 같은 소품을 만들 때도 있지만,
실용적인 결과물을 염두에 두기보다는 그저 손을 움직이기 위해 바늘을 든다. 자투리 천을 이어 퀼트 조각을 만들고,
무엇이 될지 모른 채 바구니에 차곡차곡 쌓아두기도 한다.
겨울이 깊어지면 뜨개질을 한다. 마음에 드는 빛깔의 실을 골라, 길이도 정하지 않은 채 하염없이 목도리를 뜬다. 뜨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도로 푼다. 같은 실로 같은 무늬를 떠도 편물의 표면에는 바늘을 쥔 사람의 호흡이 남는다. 어떤 땀은
촘촘하고 어떤 땀은 느슨하다.
외부 환경도 영향을 미친다. 느린 음악을 들으며 바늘을 움직이면 손도 자연스레 느려지고, 빠른 비트의 음악을 틀면
손놀림에도 박자가 붙는다.
야구 중계를 틀어놓고 바느질이나 뜨개질을 할 때면, 내 손은 천 위를 산책하듯 움직인다. 전개가 급박해져 주자가
그라운드를 반원으로 가르며 달리기 시작하면, 바늘을 실뭉치에 꽂아두고 화면으로 시선을 옮긴다. 공의 궤적을 잠시
따라가다 숨을 고르고 다시 바늘을 든다. 방 안에서 이어지는 고요한 손의 리듬은 야구의 역동성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화면만 바라보고 있으면 허전할 때가 있다. 손을 움직이며 보는 행위는 그저 눈으로만 볼 때와는
또 다른 집중을 만들어준다. 책을 읽으며 한 손으로 고양이의 등을 쓰다듬거나 전화 통화를 하면서 무심코 볼펜을 돌리는
순간처럼. 손과 눈이 동시에 움직이는 그 시간, 나는 경기를 뛰는 것도, 현장에 있는 것도 아니면서, 분명히 무언가에
가담하고 있다.
손이 반복하는 동작은 언제나 어떤 물성을 향한다. 천과 실처럼 부드럽고 연약한 것 위를 거닐던 손끝의 감각이 어느 순간
화면 속 빠르게 회전하는 공에 닿는다. 그때 문득 생각난다. 저 공 또한 세심하게 만들어진 하나의 사물이며, 누군가의
손끝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나는 야구공을 두 개 가지고 있다. 하나는 인터넷으로 주문한 KBO 공인구, 다른 하나는 얼마 전 대전 신구장* 에서 사 온
한화 이글스 기념구다. 8자 모양으로 재단된 하얀 가죽 위에 붉은 실밥이 또렷하게 이어져 있다. 언뜻 보면 단순한 봉제선
같지만 야구의 거의 모든 것은 이 실밥에서 시작된다.
* 공식 명칭은 ‘대전한화생명볼파크’ 다.
투수가 공을 쥘 때, 실밥은 손가락의 위치를 고정하고 마찰을 일으키는 기준점이 된다. 이 미세한 울퉁불퉁함이 구종을
가른다. 이를테면 실밥을 가로질러 잡아 회전 중 네 줄의 실밥이 보이게 던지는 공이 포심 패스트볼이고, 실밥의 능선을 따라
세로로 손가락을 놓아 두 줄만 보이게 던지는 공이 투심이다. 잡는 방식에 따라 공의 궤적이 바뀌고, 공기의 흐름과 회전수도
달라진다. 던지고, 치고, 달리고, 점프하고, 슬라이딩하는 격렬한 장면들이, 이렇게 촘촘하고 다소곳한 바느질땀 하나에
좌우된다는 사실은 나에게 늘 모종의 신비다.
야구공을 만드는 해외 공장의 제작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모든 공정이 놀라울 만큼 섬세하고 정교해서 나도 모르게 한참을
넋 놓고 바라봤다.
야구공은 코르크나 고무로 된 코어에 양모 실을 수천 번 감아 올린 뒤, 8자 모양으로 재단한 가죽 두 조각을 덧대고, 붉은 실로
108번 바느질해 완성된다. 대부분의 공정은 자동화되었지만, 마지막 바느질만큼은 여전히 사람의 손이 맡는다. 실의 장력과
바늘땀의 간격, 좌우 대칭을 오차 없이 맞추는 일은 기계보다 손이 더 믿을 만하기 때문이다.
현재 KBO 공인구의 경우 이 마지막 공정은 스리랑카의 공장에서 이루어진다. 바느질 작업은 대개 저임금 노동자들의 몫이다.
긴 호흡과 집중을 요하는 이 일은, 그들의 하루 대부분을 반복되는 바늘과의 싸움으로 채운다. 공 하나를 꿰매는 데 15분 남짓
걸리지만, 작업 강도와 까다로운 검수 과정을 감안하면 숙련된 기술자라도 하루에 스무 개를 넘기기 어렵다고 한다.
108개라는 실밥의 개수가 하필이면 불교에서 말하는 번뇌의 수와 같다. 물론 종교적 상징과는 관계가 없다. 구면 위에서 가장
안정된 균형을 이루도록 계산된 기술적 수치일 뿐.
그렇게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공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나는 종종 오래 바라본다. 공 너머의 손들이 떠오른다. 천을 깁는 손.
실을 감는 손. 공을 꿰매는 손.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는 손. 미트*를 받치는 손. 사인볼을 받아 드는 아이의 손. 그리고 그것들에
관해 쓰는 손. 잠시 후, 시선은 다시 내 앞에 놓인 실과 바늘로 돌아온다.
* mitt. 포수가 끼는 글러브로, 공을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도록 둥글고 두꺼우며 포켓이 길고 손가락 구분이 없다.
요즘은 은회색 면사로 작은 가방을 뜨고 있다. 손잡이 부분을 한참 이어가던 중, 중계 화면 속에 만루 상황이 찾아온다. 사슬
모양의 고랑 사이에서 코바늘이 숨을 멈춘다. 나는 실뭉치를 두 손에 꼭 쥔 채 벌떡 일어나 화면을 응시한다. 마무리 투수가
던진 변화구가 스트라이크존 모서리를 스치며 위기를 모면한다. 투수의 손이 승리를 자축하며 하늘로 번쩍 들리는 순간,
내 손끝의 긴장도 스르르 풀린다.
바닥으로 굴러간 실뭉치를 주워 들고, 풀린 실을 가만히 되감는다. 실을 감는다는 뜻의 영어 단어 ‘와인드(wind)’ 에는 원래
곡선의 궤적으로 무기를 휘두른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투수가 공을 던지기 전 양팔을 뒤로 넘기며
준비하는 동작 역시 ‘와인드업(wind-up)’ 이라 부른다.
* 팀 잉골드, 『조응』, 김현우 옮김, 가망서사, 2024, 290쪽.
세상을 그저 ‘있는 것’ 이 아니라 ‘되어가는 것’ 으로 바라본 인류학자 팀 잉골드는, 실을 ‘직물이 되어가는 중인 뭉치’* 라고
불렀다. 그의 말을 흉내내 보자면, 야구공이란 ‘포물선이 되어 가는 중인 실밥’ 일지도 모른다. 공이 어떤 경이로운 궤적을
그릴지는 그것을 꿰맨 이도, 던지는 이도 알 수 없다. 그리고 나는 나대로 손을 움직이며 그 과정에 동행한다. 감는 손.
뜨는 손. 멈추는 손. 푸는 손. 실의 길을 따라 포물선을 그려보는 손. 종종 그 손들이 이어놓은 투명한 길이, 나를 뜻밖의
어딘가로 데려다놓는다.
* 같은 책, 2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