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 롬 1:14-15절, 창세기 3:15절
제목 : 전도(선교)의 성경적인 동기
롬1: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창3: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설교 작성노트
“전도합시다, 전도합시다”하고 강조한다. 또는 바울처럼 선교사역에 부름을 받았노라고 말한다. 그러면 전도(선교)의 성경적인 참된 동기가 무엇인가고 묻지 않을 수 없다. ㉠ 주님의 지상명령이라고 말한다. ㉡ 영혼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는 실천신학적인 접근이다.
선교(전도)에는 현대교회가 망각하고 있는 성경신학(구속사)적인 중대한 동기가 있다는 점이다. 이를 모르거나 외면한 전도자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바른 전도, 바른 선교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나는 이 설교를 작성하면서 마음이 무겁다. 왜냐하면 너무나 시대에 동떨어진 설교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공감하고 도전할 분이 몇 분이나 될 것인가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전도의 구속사적인 동기가 무엇인가?
강론
질문을 함으로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왜 “전도”를 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지 아십니까? 그 동안 전도를 하지 않았다면 왜 하지 않았을까요? 왜 “전도”를 해야 하는지, 어찌하여 복음을 전해주어야 하는지 성경적인 동기를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요? 열심히 전도를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면 열심히 전도하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교회부흥을 위해서입니까? 상 받기를 위해서입니까? 그것도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전도”하는 동기에는 우리가 망각하고 있는 중대한 동기가 있다는 점입니다.
① “전도”하면 우선적으로 생각나는 말씀은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이를 지상명령(至上命令)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마 28:19)고 명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 그런데 잊어서는 아니 될 점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시기 전에 주님께서 온 천하 만민을 위해서 무엇을 행해주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마태복음 20:28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자신의 목숨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대신 죽으심으로 만민을 위한 복음을 이루어 놓으셨다는 점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죽으시고 다시 사심을 통해서 복음을 이루어놓으신 후에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사건이 임기응변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 22:18)하신 언약의 성취라는 점입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하신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서 대신 죽으심으로 이루신 진실하고 확실한 것입니다.
㉡ 고린도후서 5:14-21절 안에는 “대신”이라는 말이 6번 등장합니다. 그런데 4번은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행해주신 일인데 무엇일까요? 5:14절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즉 잡아당긴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랑이 잡아당깁니까?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하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주신 사랑이 바울을 잡아당긴다는 것입니다.
5:15절입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한 절 안에 대신 죽어주셨다는 점을 두 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5:21절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합니다. 만민에게 전파하라 명하신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주심으로 가능해진 것입니다. 이점이 4번이나 강조되어 있습니다.
② 그런 후에 2번은 우리가 주님을 “대신”해서 행할 일인데 무엇일까요? 5:20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 5:18절에서는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5:19절에서는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화목제물로 대신 죽어주셨는데 그래도 “나는 주님을 대신해서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할 것입니까?
㉡ 에스겔 3:17-18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하십니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복음을 모르는 자들은 “꼭 죽을” 멸망을 당할 자들입니다. 그런데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하십니다. 그리고 2:7절에 보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별설교에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행 20:26-27)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해주는 것이 전도인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전도 못합니다”할 것입니까?
㉢ 첫째 본문인 로마서 1:14절을 보겠습니다. 복음 전도자 바울은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말합니다. 만민에게 빚을 진 자라는 뜻입니다. 무슨 빚을 졌다는 말입니까? 우리에게 측량 못할 은혜를 값없이 거저주신 것은 자신만 구원을 얻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꼭꼭 싸서 땅에 묻어두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주기 전에는 마치 빚을 갚지 못한 자의 심정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옆집에 불이 났는데도 보고만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기차는 달려오는데 어린이들이 정신없이 선로 위에서 놀고 있는 것을 보고도 침묵할 것입니까? 그래서 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고 말씀한 것입니다.
③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을 반드시 전해야만 되는 데는 우리가 망각하고 있는 더욱 중대한 본질적인 동기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두 번째 본문인 창세기 3:15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담 하와를 유혹한 “뱀” 곧 사탄에게 하신 선고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죄, 사망, 저주”를 발생하게 한 사탄에게 하신 사형선고와 같은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15절을 “원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이 어떻게 해서 원복음이 되는가? 이 말씀 속에 양면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사형선고는, 우리에게는 구원의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 복음”(原 福音) 안에는 복음을 증언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원 동기”(原 動機)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전도자들이 “원 복음” 안에 “원 동기”가 있다는 점을 모르거나 망각하고 있다는 것은 중대한 결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원 동기”가 무엇일까요?
㉠ 원 복음은 세 마디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즉 하나님께서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하십니다. 여기서 “너”는 “뱀”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구속사라는 맥락으로 보면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계 20:2)한 사탄을 가리킵니다. 문제는 사탄으로 하여금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겠다”하신 “여자”가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를 구속사라는 맥락으로 보면 이에 대한 해답이 계시록 12장에 있습니다.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1)하고 “여자”가 등장합니다.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2)합니다. 그런데 4절에서는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아이”가 누구인지 아시겠지요?
5절에서는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고 여자가 낳은 “아이”가 그리스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하는 것이 아닌가? 무슨 뜻입니까? 사탄은 여자가 낳은 “아이” 곧 그리스도를 “삼키고자”, 즉 잡아먹으려하였으나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즉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여자”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는 돌발적으로 탄생하신 것이 아니라 구약교회에 세워주신 “메시아언약”의 성취로 오셨기 때문에 “여자(교회)가 아들을 낳으니”하는 것입니다.
㉡ 그러면 둘째로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하십니다. 여기 “네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등장하는데 무슨 뜻인가? “네 후손”은 문자적으로 하면 “뱀”의 후손이 되지만 사탄을 추종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여자의 후손”도 분명해지는데 교회에 소속된 자, 즉 하나님 편에 속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죄가 들어오자 마귀를 따르는 자와 하나님을 믿는 자, 두 편으로 갈라지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 그런데 셋째로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은 사탄을 정복한다는 뜻인데 “여자의 후손”이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자의 후손”, 즉 교회 중에서 한 “아이”가 탄생하여 “네 머리” 곧 사탄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점을 모세는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신 18:15)라고 말씀하고 이사야는,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사 9:6)라고 예언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을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하심은 주님을 죽이려고 십자가에 못을 박을 것이나 그것은 “발꿈치를 상한”것에 불과하고 실패할 것을 가리킵니다. 또한 계시록 12:13절에서는 사탄이 “남자를 낳은 여자를 박해하는지라”, 즉 교회를 진멸하려 하나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하십니다.
④ 그러면 “원 복음” 안에 들어 있는 복음전도의 본질이 되는 “원동기”(原動機)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원 복음 안에는 “원수”라는 말이 두 번이나 강조되어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누구와 누구 사이를 원수가 되게 하겠다 하시는가? “교회와, 사탄” 간에 원수가 되게 하시겠다 하십니다. 왜냐하면 아담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고 사탄의 유혹을 따름으로 하나님은 배신하고 사탄과 “친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야고보서 4:4절에서는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들의 마음을 찌르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교회도 세상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을 숭배함으로 하나님과는 원수가 되고 사탄과 친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점을 예레미야 3:20절에서는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아 마치 아내가 그의 남편을 속이고 떠나감 같이 너희가 확실히 나를 속였느니라”하십니다.
㉠ 그러니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하신 뜻은 “교회와 사탄, 성도와 사탄” 사이에 원수, 즉 적대감을 주시겠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전도를 “영적 전쟁”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교회는, 그리고 우리는 이 “원동기”를 명심하고 있는가 하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나사로의 무덤에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다”(요 11:33)합니다. 11:38절에서도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합니다. 그런데 개역본은 “비통을, 통분이 여기셨다”로 되어 있습니다. “비통”(悲痛)의 사전적 의미는 “몹시 슬퍼서 마음이 아픔”이고, “통분”(痛憤)은 “원통하고 분함”으로 의미가 전연 다른 것입니다. 원어의 뜻은 “분해서 씩씩거림”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통분은 누구에게 대한 “통분”인지 아시겠지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을 이처럼 비참하게 만든 사탄에 대한 “통분”이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통분히 여기셨으면 주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35)했겠습니까? 이것이 “원수 되게 하리니”의 뜻입니다. 주님은 사탄에 대해서는 “통분이 여기시고” 죽기를 무서워 한 평생 종노릇하는 자들은 “불쌍히 여기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의 “원 동기”인 것입니다.
㉡ 복음 전도의 “원 동기”가 또 있습니다. 이사야 48:11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하십니다. 복음전도에는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걸려 있다는 점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하려는 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1차적인 목적도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 12:28)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 시편 139:21-22절에 나타난 다윗의 영성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오며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 하나이까 내가 그들을 심히 미워하니 그들은 나의 원수들이니이다”합니다. 하나님의 원수는 곧 나의 원수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두려운 줄 모르고 골리앗을 물리칠 수 있었던 원동력도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다”(삼상 17:46)한 “하나님의 원수”에 대한 적개심이었던 것입니다.
바울도 복음전도의 1차적인 동기를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한다”(롬 1:5)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서, 다시 말하면 “그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문화유산이라는 고대 유적들은 대부분이 우상을 숭배하던 신전들입니다. 오늘날 이를 관광하면서 그 거대함에 감탄을 합니다. 그러나 복음전도자 바울은 달랐습니다. 아테네에 갔을 때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행 17:16), 즉 바울은 파르테논 신전, 포세이돈 신전 등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분이 여겼다”합니다. 왜 분했을까요?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기”(롬 1:23) 때문입니다. 이것이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하신 복음전도의 성경적인 동기입니다.
제가 섬기던 교회에 중증 소아마비 아들을 둔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일어서기는커녕 앉지도 못합니다. 그런 중에 덩치는 점점 커졌습니다. 엄마 집사님은 무거운 아이를 업고 매일 재활치료를 받으러 갑니다. 심방을 가면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눈물을 흘리면서 마음으로 “통분”이 여길 뿐입니다. 언제까지입니까?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하실 때까지입니다.
묻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을 이처럼 비참하게 만든 사탄에 대한 통분히 여기는 마음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여우가 여러분의 자식을 물어갔는데도 통분히 여기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이름을 모욕하는 자에 대해 통분히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육적 아버지의 이름을 모욕을 해도 분해하지 않을 것입니까? 그런데 현대교회의 실상은 어떠합니까? 마귀에 대해 통분히 여기기는커녕 존재조차 인정하려 하지를 않습니다. “마귀”라는 말을 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설교자로 취급을 합니다.
그런데 복음 전도자 바울은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 2:11)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보다도 사탄에게 속았던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복음의 뿌리인 “원 복음”을 아셨습니까? 그러면 묻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전도의 “원 동기”도 분명합니까? 이것이 “전도(선교)의 성경적인 동기”입니다.
나는 예수 따라가는 십자가 군사라
주 이름 증언하기를 왜 주저하리요
다른 군사 피 흘리며 나가 싸울 때
나 혼자 편히 앉아서 바라만 보리오
다른 사람 어찌든지 나 주님의 용사되리
나는 주의 군사되어 충성을 맹세하여
내가 승리하기까지 주 은혜로 싸우리
주님의 용사된 내게 주의 일 맡기소서 (349장)
첫댓글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월욜에 뵙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