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궂은 가을비다. 주말을 앞두고 내린 비가 휴일까지 이어진다. 점심을 먹고 비 갠 틈을 이용해 집을 나섰다. 담양으로 간다. 집에서 가깝기도 하거니와 부담 없이 돌아볼 곳이 많아서다. 조금 전까지 맑았던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우더니 또 비가 내린다. 비는 금세 멈추고 다시 먹구름이 걷힌다.
오늘 목적지는 산성길이다. 금성산성(金城山城)의 성곽을 따라 도는 길이다. 전남 담양과 전북 순창의 도계(道界)를 걷는 색다른 여정이다. 산세도 그리 험하지 않고 빼어난 경물과 역사의 흔적까지 더듬을 수 있다.
궂은 날씨에도 산성 주차장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단체로 찾은 산악회원들이 많다. 모두들 비옷을 걸치고 있다. 하늘을 보니 비는 내릴 것 같지 않다. 카메라와 물 한 병만 들고 산성길로 들어섰다. 숲길에 도토리를 맺는 굴참나무, 졸참나무, 떡갈나무 빼곡하다. 비를 맞은 나무가 물기를 잔뜩 머금었다. 숲길은 질컥거리지만 걷기에 불편할 정도는 아니다. 날씨도 선선해 해찰하며 솔방솔방 걷기 좋다. 길 위로 소나무의 뿌리가 드러난 길도 멋스럽다.
| 금성산성에서 본 담양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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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을 한 30분 걸었을까. 널따란 바위 위에 우뚝 솟은 성문이 나타난다. 성벽도 우람하다. 보국문이다. 산성의 바깥쪽에 있는 남문이다. 성 밖의 움직임을 살피는 망루인 셈이다. 보국문을 지나서 조금 더 가니 충용문에 닿는다. 산성 안의 남문이다.
금성산성은 고려 때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의 거점으로 쓰였다. 광해군 때 고쳐 쌓았다. 성 안에는 주민과 관군 2000여 명이 머물렀다. 동학농민혁명 땐 농민군과 관군의 혈전이 벌어졌다. 마을과 관아가 모두 불에 타 사라졌다. 한국전쟁 때는 보국사가 불에 탔다. 이것을 20여 년 전부터 복원했다. 동문과 서문, 남문, 북문을 세웠다. 성곽도 다시 쌓았다.
산성길은 충용문에서 세 갈래로 나뉜다. 곧장 가면 보국사 터를 거쳐 북문이다. 걷는데 부담 없는 평탄한 길이다. 오른쪽으로 가면 시루봉을 거쳐 동문으로 연결된다. 순창 강천사로 넘어가는 길도 여기서 만난다. 왼편은 철마봉을 거쳐 서문으로 가는 길이다.
| 보국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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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용문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발아래로 펼쳐지는 담양벌판이 시원하다. 누렇던 들녘은 가을걷이를 끝낸 탓에 스산해졌다. 그 너머로 광주의 도심이 아른거린다. 담양호의 물줄기도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선다. 골이 깊은 추월산도 눈앞이다. 기암절벽으로 이뤄져 풍광이 빼어나다. 동학농민군이 관군에 맞서 마지막까지 항거했던 산이다.
성곽길을 따라 노적봉을 향해 걷는데 하늘이 다시 어두워진다. 비도 내린다. 주변을 둘러봐도 비를 피할 마땅한 공간이 보이지 않는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모자를 쓰고 걷는데 비가 그친다. 담양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선선하다. 습기도 묻어있지 않다.
다소 가파른 성곽길을 오르니 노적봉이다. 서문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나는 첫 번째 봉우리다. 절벽 끄트머리에 소나무 한 그루가 걸려있다. 그 품새가 아찔하다. 소나무 뒤로 보이는 담양호 물줄기가 아련하다. 산봉우리 첩첩이 잇대있는 풍경이 한 폭의 수묵화다. 답답한 일상으로 자욱했던 마음속 안개까지 걷히는 기분이다.
노적봉에서 철마봉으로 가는 길도 순탄하다. 철마봉에서 내려다보는 담양호도 아름답다. 낙안읍성 같은 평지의 성곽에서 맛볼 수 없는 아찔함을 안겨준다. 적들이 성을 공격해 온다는 게 쉽지 않아 보인다.
철마봉에서 서문으로 가는 길은 내리막이다. 성곽도 넓어진다. 대여섯 명이 나란히 걸을 수 있을만한 폭이다. 성곽이 산의 능선을 따라 길게 둘러쳐져 있다. 장대한 산성이다. 성곽의 길이가 7㎞를 웃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언뜻 중국의 만리장성 같다.
| 관방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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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을 따라 타박타박 내려가는데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반가운 마음에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계곡물을 서문에서 만난다. 목을 축이던 다람쥐 한 마리가 움찔하며 놀란다. 물은 보국사 터 쪽에서 내려와 담양호로 흐르고 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물의 감촉이 서늘하다.
서문에서 북문으로 가는 길은 성곽을 따라 올라간다. 걷기에 조금 팍팍하지만 힘들지는 않다. 북문에 서니 산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산의 능선을 그대로 따라 성을 쌓았다. 적으로부터 성을 지키고 또 역습을 감행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 천혜의 요새다. 높이 오른 만큼 풍광도 거침이 없다. 산성을 내려다보는 내가 흡사 장군이라도 된 것 같다.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이 아려온다. 이렇게 장대한 성을 옛 사람들이 당시에 어떻게 쌓았을까. 쌓으면서 죽어간 사람도 부지기수였을 것이다. 일이 힘들어서, 배를 곯아서, 병에 걸려서…. 쌓던 돌에 깔려 죽은 사람도 헤아리기 어려울 게다. 한여름 무더위와 한겨울 추위는 또 얼마나 혹독했을까. 나도 모르게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시간을 보니 오후 4시가 진즉 넘었다. 성곽을 따라 산성을 한 바퀴 돌도록 해가 기다려줄 것 같지 않다. 방향을 보국사 터로 잡고 산길을 내려간다. 옛 성내를 가로질러 내려가는 길이다. 낙엽 쌓인 숲길도 가을색으로 물들었다. 팽나무와 물푸레나무가 어우러진 연리목도 애틋하다.
이돈삼 여행전문 시민기자ㆍ전남도 대변인실
여행정보
가는길
담양읍에서 순창 방면으로 24번국도를 타고 금성면 소재지를 지나서 좌회전, 담양호 쪽으로 간다. 담양리조트 앞에서 오른편으로 가면 금성산성 주차장이다. 산성길은 주차장에서 시작해 보국문(외남문)-충용문(내남문)-노적봉-철마봉-서문-북문-연대봉-운대봉-동문을 거쳐 충용문으로 되돌아온다. 7㎞에 네댓 시간 걸린다.
먹을곳
메기와 빙어는 초원의집(382-9729)과 양지회관(383-0552)이 맛있다. 대통밥과 떡갈비는 옥빈관(382-2584)과 호남회관(383-8338)을 추천한다. 숯불돼지갈비는 원조제일숯불갈비(381-1234)가, 퓨전한정식은 금송정(382-9009)과 들풀(381-7370), 담양愛꽃(381-5788)이 소문 나 있다. 미소댓잎국수(381-9789)의 댓잎국수도 별미다.
묵을곳
대솔뫼한옥민박(382-8804)과 쌍둥이관광펜션(383-0076)이 있다. 해오름펜션(383-0300)과 명아원(381-2079), 소듐(382-2422)도 깔끔하다. 금성산성 주차장 옆에 금성오토캠핑장(383-7272)도 있다.
가볼곳
절답지 않은 절집 연동사가 가깝다. 암벽 밑에 지장보살 입상과 삼층석탑이 서 있다. 자연석실 노천법당도 별나다. 영산강의 발원지 용소가 있는 용추산 가마골도 아름답다. 관방제림과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의 가을 풍경도 멋스럽다. 메타세쿼이아 길에서 만나는 '굴다리 갤러리'도 눈길을 끈다. 죽녹원과 대나무골테마공원의 대숲은 언제라도 지친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문의
담양군 관광레저과 (061)380-3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