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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上章閹茂譜(상장 엄무보:경술보)
解釋 金 順 大 2004. 12. 30.
金海金氏世譜序(김해김씨세보서)
余嘗讀宋子大全有金海氏舊譜序文於金海氏之世叙之明矣 已知其爲東韓大族也 窃有厠名之願而不可得矣
나는 일찍이 송자대전[1]에 있는 김해씨의 구보서문을 읽어보고 김해씨의 세대의 순서가 분명하고, 이는 동한(우리나라)의 대족임을 알았다. 간절하게 이름을 올리기를 원하기도 하나 불가할 것이다.
[1]宋子大全; 조선 후기의 학자이며,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의 문집
一日耽羅金君榮裕伻其弟榮鍊謁余文弁其譜誠禮甚勤余辭不獲曰金海氏舊譜有尤庵宋先生序文先生一言可以永垂窮宙而又何必徵文於道淳爲
하루는 제주의 김영유가 그 동생 영련을 시켜, 나에게 그 보첩의 서문을 정성스럽게 예의를 갖춰 아주 부지런히 부탁하나, 나는 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그는>김해씨의 구보에 우암 송선생의 서문이 있으니 선생의 한마디가 가히 영원히 드리워져 하늘에 까지 닿을 정도라고 하고, <나는>또 어찌 보잘 것 없는 글이 도리를 도탑게 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니
榮鍊卽愀然起而拜曰我金肇自駕洛享祚綿歷至於興武功盖三韓民到于今受其賜若濯纓之史筆鶴城之樹勳甲峰相公之秉執昭載國乘蔚爲世範
영련이 근심하는 빛으로 절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김씨는 가락에서 시작하여 제사와 복록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흥무(김유신)에 이르러 그의 공로가 삼한의 백성을 뒤덮었고, 지금에 와서도 그 은덕을 받고 있습니다. 탁영(일손)의 사필(史筆)과 학성(완)의 수훈과 갑봉(우항)재상의 나랏일 처리능력이 소상히 기록되어, 나라에 아름답게 전해져 세상 사람의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又有麗季佐議政諱景興耻事二姓抗議蹈海阨窮而不悶隱然有西山遺風而子孫流落海島編民數百載無有聞達未嘗以祖之烈顯之世 又考之史多闕文也吾甚恨焉
또 고려말에 좌의정 휘경흥이 두개의 성(고려왕씨와 조선이씨)을 섬기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바다를 건너가서 고생을 했으나 번민하지 않았고 은연중에 서산(개성의 서산?)에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자손이 바다의 섬으로 흘러 들어가 그곳 백성으로 된 사람이 수 백명이 기록되어 있으나,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없어, 조상처럼 세상에 드러나지 못했습니다. 또 역사를 살펴보건대 빠져있는 문장이나 글귀가 많아 저는 아주 한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余聞其言悲其意謹復曰然記曰先祖有善不知不明也 知而不傳不仁也 以子之祖之烈烏得沬沬而已乎
나는 그 말을 듣고 그 뜻이 비통하여 삼가 다시 말하기를 “적혀 있기를 선조가 훌륭해도 알지 못하면 숭상할 수 없고, 알고는 있더라도 전하지 않으면 인(도리)이 아니다. 자손으로서 조상의 행적을 어찌 희미하게 내버려 둘 것인가.
讀挐山何似古西山孤竹淸風遠莫攀之句足令人興起而今因子之譜而始顯于世豈非祖之烈因孫之賢而著者乎然凡譜者非徒顯祖烈而已亦所以承祖烈也
한라산을 이해하는 것이 어찌 옛날의 서산과 비슷하겠는가. 고죽(孤竹)과 청풍(淸風)이 멀어지니, 글귀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이, 착하고 어진사람들(令人)을 부흥시켜 일으키는 데에 충분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자손들의 보첩으로 인하여 <선조들이> 세상에 나타나기 시작하니 어찌 조상들의 행적이 자손들의 현명함으로 인하여 드러나지 않겠는가. 자연히 무릇 보첩이라는 것은 이름이 높이 드러난 선조의 행적을 헛되게 하지 않고 조상의 행적을 받들기 위함이다.” 라고 하였다.
今子之宗因子之譜而承祖烈以耻事二姓之心爲心則濯纓之直鶴城之勳甲峰之正大不待求諸他而在乎我已譜之有關於世敎顧不重歟
지금 자손들이 만든 보첩으로 인하여 자손들의 종족이 조상의 행적을 계승하고, 두개의 성(왕씨와 이씨)을 섬기는데 대한 수치스러운 마음은 탁영(일손)의 솔직성, 학성(완)의 공훈, 갑봉(우항)의 공명정대한 마음으로 이어 받았고, 여러 다른 것들을 구하기 위해 기다리지 않았다(의역; 다른 목적은 없다). 우리의 이 보첩은 세상을 사는 교훈에 관계가 있고, 옛일을 되돌아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鳴呼 今世何世新聞異說愈出愈奇國史野乘混其爲硎禍矣不有譜以藏之其何以徵於後哉
오호라. 지금의 세대에서 어찌 세인들이 새롭게 듣는 것에 이상한 말들이 점점 더 생겨나고, 기이한 국사와 야사들이 뒤섞여 불행의 구덩이에 빠지고, 가지고 있는 보첩이 보관되지 못하면 어떻게 후세에 전해지겠는가.
今子於子之譜上以承祖之烈下以胎孫之謨雖百世之遠普而合之俾知百世之爲一祖后而孝悌之心油然自生則金海氏之門安得不昌大乎
지금 자손들이 만든 보첩에서, 자손들은 위로는 조상의 덕업을 계승하고, 아래로는 후손들에게 전하여, 비록 백세(百世)가 되어 멀어지더라도 널리 합치고 더하여, 백세가 한사람의 조상의 후예라는 것을 알면 효도와 공경의 마음이 자연히 발생할 것인 즉 김해의 문중이 어찌 창대해지지 않겠는가.
吾於金海諸賢已有所慕而且有感於尤翁之文敢爲之叙爲金海氏者庶因斯譜而其勉矣夫
나는 김해의 제현들에게 이미 바라는 바가 있었고 또 느끼는 바가 있어, 괴짜스러운 늙은이의 글로서 감히 서문에 대하니, 김해의 모든 분들은 모두 이 보첩으로 인하여 권면해 주길 바란다.
上章閹茂之暮春者資憲大夫吏曹判書兼成均館大司成 侍講院輔德德殷宋道淳序
상장엄무(경술년, 1910) 모춘(3월) 자헌대부 이조판서겸 성균관대사성
시강원보덕 덕은 송도순 서
跋(발문)
族之有譜所以明其倫而叙其親也 盖人之倫始於父子父子而爲兄弟兄弟而爲期功(工+刀)緦免遂爲無服則十世百世之後漸至有系緖難尋昭穆失序懼夫路人之無別也
종족에 보첩이 있는 까닭은 그 윤리를 분명히 하고, 친족의 차례를 세우기 위함이다. 대개 사람의 윤리는 부자(父子)에서 시작하고, 부자에서 다시 형제로, 형제는 그 공로를 정하게 된다. 상복을 벗어버리고 상제(喪制)를 지키지 않으면 10세나 100세후에 계통의 실마리를 찾기 어렵게 되고 소목의 순서를 잃어버리고 근심하여, 대체로 길가는 사람과 구별할 수 없게 된다.
於是乎有譜以之尊祖而收族此周官譜義之所由興而程子所謂收宗族叙人紀而厚風俗者其不在譜矣 乎
이래서 보첩이 있음으로 조상을 존귀하게 하고, 종족을 모으게 되니, 이는 주나라 관리의 보첩의 도리에서 유래하였으니, 정자가 말했듯이 종족을 모으고 사람의 차례를 세우는 실마리로서, 풍속을 도탑게 하는 가 그렇지 못하는 가는 보첩의 존재에 달려있다.
鳴呼 吾金肇基駕洛享祚久長世傳忠孝冠冕蟬赫實爲東韓巨族矣 至於中祖麗季佐議政公諱景興耻事二姓潔身南渡子孫仍居焉
아! 우리 김씨는 가락에서 시작하여 제사와 복록이 오랫동안 세대에 전하여져, 충효와 벼슬이 이어지고 빛나는 실로 우리나라의 거족이다. 중조에 이르러 고려말의 의정공 휘경흥이 두성(왕씨와 이씨)를 섬기는 것을 수치로 여겨, 처신을 깨끗이 하여 남쪽(제주도)로 건너가니 자손이 여기서 살게 되었다.
至于今十數世其麗不些而宗(示+旁)零替家聲寂寥散處之族不辨昭穆遂至路人相視余是庸爲懼有意於修述先系者已有年所矣
현재에 이르러 수십세가 지나 그 수효는 작아지고, 종족은 줄어들어 가문이 쇠퇴하고 목소리도 적적하고 고요하며, 이리저리 흩어진 종족이 되니 소목도 분간 못하고 길가는 사람처럼 서로 처다만 보기에 이르렀다. 나는 이것이 걱정이 되어 선조의 계통을 다시 기록하는데 뜻이 있었으나 이미 여러 해가 지났다.
客歲春族譜榮裕氏枉余留數日語及先系遂發歎而曰三十年一譜自是通世之規而吾宗自落南以後五百年來未有譜以正之故 不知祖先之爲何如而後承疎遠同祖一人而孝友之心罔施子姓蕃衍而敦睦之義(茂?)如甚所慨歎者而
지난해 봄 족보<를 해보자고> 영유씨가 나에게 들러 수일동안 머물면서 이야기를 하다가 선조의 계통에 까지 거론되어 한탄을 하게 되었다. 말하기를 “30년에 한번씩 보첩을 하는 것이 보통 세상의 규칙이나 우리 종족이 남쪽으로 온 이후로 500년이 지나갔으나 아직도 보첩이 없다고 하는 것이 맞다. 그래서 선조도 알지 못하고 그 후도 이와 같이 되어, 소원한 것이 계속되고 조상은 한사람이라는 효우지심이 없으니 널리 자손은 번창하여 넘치나 돈목의 도리가 없으니 아주 개탄스럽다.
且今世道寢微杞宋之文未久其無徵矣 不修譜以正之後之視今亦猶今之視昔矣 寧不寒心乎哉
또 지금의 세상의 도리가 잠자고 미미해지고, 송시열 선생의 글이 오래되지는 않았으나 그 증거가 없다. 수보를 하지 않는 것이 맞다면, 후세가 지금을 보는 것이 또한 마치 지금 옛날을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니 정녕 한심하지 않은가.”
余聽之竦然曰不肖之有此心久矣誠與一二人同何患乎事之不成遂以書通告于諸宗
나는 듣고 있다가 놀라서 말하기를 “불초도 그런 마음을 가진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진심으로 한 두 사람이 같이 한다고 해서 근심이 없어지겠습니까.” 일이 이루어 질 것 같지 않아 글로서 제종들에게 통고하였다.
於是濯纓公後孫錫周雲松四君派宗丈斗煌致五氏安敬公後孫基旭氏曁我傍親之族炳胤氏及文湜甫皆並心協贊助成世譜自始事之日年再周而功告訖
이에 탁영공 후손 석주와 운송, 사군파의 종장인 두황과 치오씨, 안경공 후손 기욱씨 및 나의 먼 친척인 병윤씨와 문식가 모두 마음을 합하여 찬조하여 세보를 만드니 일을 시작한 날짜로부터 1년이 지나 일이 끝났음을 알렸다.
雖其經始之甚艱及其成功則不少豈致曰自多於前烈盖先祖之遺蔭擬有待於今日而亦所以賴僉宗君子承先裕後之深謨也
비록 그 일을 시작하는 것이 아주 어려웠으나, 성공에 이른 것이 적지 않으니 어찌 치하하지 않겠는가. 말하되 선조가 세운 업적(前烈)이 많으니 선조가 남기신 음덕이 헤아려 오늘에 까지 기다려 주었다. 또한 여러 종친께 힘입은 까닭으로 군자가 선조의 너그러움을 계승하여 후세에 깊이 전하게 되었다.
以之尊祖而益尊以之收族而族益著族益著則譜益傳譜之所傳則族之所保也於是乎
조상을 존귀하게 하면 더욱더 존귀해지고, 종족을 모으면 더욱더 종족이 모이니, 종족이 드러나면 더욱더 드러나고 보첩이 더욱더 전해져, 보첩이 전해지면 종족이 보전될 것이니 바로 이것이다.
前日之疎者矣可以親矣遠者今可以邇矣而倫序以明昭穆以叙則賮斯譜之有賴也豈非吾宗之一盛事也哉
이전에 소원했든 것은 친해 질 것이고, 멀었던 것은 가까워 질 것이다. 윤리의 질서를 밝힘으로서 소목의 차례가 서니, 이 것이 이 보첩이 바라는 보배이다. 어찌 우리 종족의 하나의 성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凡爲吾宗之後孫者實體此意繼承無贊則庶吾門之昌大矣鳴呼豈不伏哉顧余無似猥0?(忝?)典貨之名而惟族祖榮璨氏及我再從祖宗煥氏0000?其000?是役者族叔亨錫族兄淳裕及我再從叔0000000?其名云爾
무릇 우리 종족의 후손을 위한 실체인 이 뜻이 계승되어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도 모든 우리 문중이 창대해 질 것이다. 아! 어찌 엎드려 절하지 않겠는가. 되돌아 생각하면 나는 함부로 전화[1]의 명예를 걸고 첨가한 것이 없다. 생각하면 족조(族祖)영찬씨와 나의 재종조(再從祖)종환씨와 0000, 0000 등 이 일에 힘쓴 족숙(族叔)형석씨와 족형(族兄)순유와 나의 재종숙(再從叔) 0000 등의 이름을 밝혀 둔다.
[1]典貨; 조선 시대에, 내수사에 속한 종구품 벼슬. 궁중에서 쓰는 미곡, 포목, 잡화(雜貨) 및 왕실 소속 노비 따위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000 ; 복사농도 불량으로 판독불가
歲庚戌端陽日左議政公二十世孫淳培謹跋
경술(1910년) 단양일(5월5일) 좌의정공 20세손 순배 삼가 후기를 쓰다.
*左議政公(좌의정공) 諱景興派(휘경흥파)는 현재의 左政丞公(좌정승공) 휘만희파(諱萬希派)임.
凡例(범례)
一, 人之異於物者以其知本也 知本之道莫如尊祖尊祖之道莫如重譜故必以修譜爲重焉
사람이 사물과 서로 다른 점은 그 근본을 아는 데 있다. 근본을 안다는 도리는 조상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과 같음이 없고(조상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이 더 중요하고), 조상을 존귀하게 여기는 도리는 보첩을 소중히 여기는 것만 못하니 반드시 수보를 <가장> 중히 해야 한다.
一, 惟我金海世代寢遠系緖難尋故舊譜自鼻祖至長淸凡十六世而止各立中祖以修正矣自年前五派合譜時 皇明正德遺譜始現十王以下中祖以上派系頗有明證然不敢率爾故 一依舊譜例別錄中絶世系以備參考諸派各立中祖修正焉
생각해 보면 우리 김해는 세대가 멀어지고 계통의 실마리를 찾기 어려워, 구보에서 시조로부터 장청까지 16세로 끝나고, 각각 중조를 세워 수정하였다. 몇 년 전에 5개 파가 합보할 때, 황명 정덕유보에서 10왕 이하 중조이상의 파의 계통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매우 분명한 증거가 있다고 하나 감히 이를 따르지 않았다. 따라서 하나같이 구보의 예에 따라 중간에 끊어진 세대의 계통을 별도로 기재하여, 여러 파가 중조를 세워 수정할 때, 참고하도록 구비하였다.
一, 前輩有曰輿地勝覽三國史記及駕洛國記似涉荒誕云而旣是久遠文字故收錄以弁卷焉
이전의 선배들이 말하기를 <동국>여지승람과 삼국사기 및 가락국기가 비슷하게 황당무계한 내용을 답습하고 있다고 하였으나, 이미 이는 오래전의 문자이므로 수권에 수록하였다.
一, 修譜之法務在敬信故輿地勝覽所載本貫沿革及先祖諸賢行狀墓文之可以垂後者一一收錄焉
수보를 하는 법도에는 공경과 신의로 임해야 하므로, 여지승람에 기록된 본관연혁과 선조제현의 행장과 묘문 등 후세에 전해지는 것은 일일이 수록하였다.
一, 本宗中祖諱字上不敢加姓者尊始祖之義也 外孫則特書姓字者所以別異姓也
본 종족의 중조의 휘자위에는 감히 성을 쓰지 않은 것은 시조를 존귀하게 여기는 도리이다. 외손은 특별히 성을 쓰고 성이 다르다는 것을 구별하였다.
一, 本宗不限代數書錄而表德古名職號郎𡏨生卒年月配位四祖墓所坐向該備收錄焉
본종은 대수를 한정하지 않고 기록하고, 행적을 표시하고, 옛이름과 직호, 낭계(품계) 생졸년월과 배위의 4조묘소의 좌향을 갗추어 준비하여 수록하였다.
一, 異姓只書二世而間有節孝科宦顯著者不拘代數懸註焉
성이 다른 사람은 다만 2세만 기록하고 절의, 효도, 높은 벼슬을 한 사람,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있으면 대수에 구애받지 않고 주석을 달았다.
一, 王后嬪宮則雖外外源裔必爲載錄而只作空圈于本行特書于紙頭以致尊敬之義
왕후와 빈궁은 비록 외외의 먼 후손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기록하되 다만 본행에는 빈 공란을 만들고 특별히 종이의 첫머리에 기록한 것은 존경을 나타내는 도리이다.
一, 男女以長幼次第書之則雖云倫序之明白而先男後女自是譜家之常規且重其宗也 故女婿必書至於男子之後
남녀는 장유의 순서로 기록하는 것이 비록 윤리적인 순서로 명백하다고 말하나, 남자를 먼저 쓰고, 여자를 나중에 쓰는 것이 보가의 상례이고 또 종을 중히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사위는 필히 남자를 다 쓰고 난 후에 기재하였다.
一, 女婿名下書姓貫科宦及父名其先世如有達官聞人則亦書某之某幾代孫使知某閥焉
사위의 이름 밑에는 성의 본관과 문/무과 및 벼슬과 부친의 이름을 썼다. 그 선조에 뛰어난 관리나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있으면 역시 누구의 몇 대손이라고 써서 그 문벌을 알도록 하였다.
一, 爲人後者本生下書出系某親某之後於所後下直書子字以重繼體而傍註生父某使開卷瞭然易知焉
다름 사람의 양자로 들어간 사람은 본가의 이름 밑에 출계 친부는 누구고 누구의 후로 갔다(出系某親某之後)고 쓰고, 양부쪽의 이름 밑에는 자라고 써서 가문을 잇는 것을 중히 하였다. 방주에는 생부는 누구라고 써서 책을 열어보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였다.
一, 配位則生曰室死曰配以別修譜時存沒而封爵姓貫昭詳懸錄焉
배위는 살아있으면 실(室)이라 하고, 죽었으면 배(配)라 하여 수보시 존몰(생졸)을 구별하였다. 봉작과 성관을 소상히 기록하였다.
一, 生卒則生於某年卒於年月日書於傍註而或用中國年號或用本國廟號或有並不書者皆依其本單修牒焉
생졸, 즉 몇 년에 태어나고 몇 년 월 일에 죽었는지를 방주에 쓰되, 간혹 중국연호 또는 우리나라 왕조의 연호 또는 이 들을 병기하였다. 쓰지 못한 것은 모두 그 원래의 단자나 수첩에만 의존했기 때문이다.
一, 墓所則在某郡某山某坐之原有碑碣誌石則詳細書之俾無失傳之患焉
묘소는 모군 모산 모좌 모 언덕에 있다는 것을 쓰고, 비갈이나 지석이 있으면 상세히 이를 더하여 써서 실전되는 근심을 없앴다.
一, 金海之金又有金與時興派新羅敬順王之裔而麗朝封金寧君移籍金海者者而非駕洛之金明矣勿許同譜識別他姓也
김해의 김에는 또 김시흥파가 있으니 신라 경순왕의 후예로서 고려조때 금녕군으로 봉작되어 김해로 적을 옮긴 사람이다, 이는 가락의 김씨가 아닌 것이 분명하니 동보를 허락하지 말고 타성으로 구별하라.
一, 每張頭以千字文隨次塡書便考閱而重見於他張者皆書見某字
매 장의 첫머리에 천자문을 순서대로 채워 써서 상고하고 열람하기 편리하게 하였다. 다른 장에서 다시 보게 되면 모두 어떤 자를 보라고 썼다.
一, 諸派名字本無定行行于世不無暗昧之歎然今此始設之譜難於歸一姑從其本各而更定行列字載刊于左惟我近祖之孫以此遵行焉
여러 파의 이름자는 원래 항렬이 정해지지 않아, 세를 거듭할수록 어두운 한탄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이 보첩에서 정하여 시작함에 있어 하나로 통일하는 것은 어려우나, 그 근본에 따라 각각 다시 항렬자를 정하고 아래와 같이 실어 놓으니, 오로지 우리의 가까운 조상의 후손들은 이를 준수하여 행할 것이라.
榮○ ○謙 載○ ○鎭 泰○ ○模 炳○ ○壽
樂○ ○熙 埈○ ○錫 淳○ ○根 炅○ ○基
鎔○ ○源 東○ ○燦 致○ ○鎰 淵○
鋌○ ○澤 柱○ ○燮 重○ ○善 漢○
辨疑(의심스러운 점을 분명히 함)
謹按金寧君諱牧卿仕于麗忠惠朝而我十六世祖左議政公諱景興亦仕于麗季以不服于 本朝流于濟州則便與金寧君同時立朝而今我島中諸金家乘皆以左議政公爲金寧君之十六世孫則這間相左殆將四百年餘矣
삼가 생각하면 금녕군 휘목경은 고려 충혜왕때 벼슬을 하였고, 나의 16세조 좌의정공 휘경흥 역시 고려말에 벼슬을 하고 본조(조선)에 굴복하지 않고 제주로 갔으니, 편의상 금녕군과 동시에 입조하였으나, 지금 우리 섬 중의 여러 김씨의 가승에서 모두 좌의정공을 금녕군의 16세손이라 한 즉, 요즈음의 것이 서로 틀리는 것이(相左) 거의 400여년이니,
左議政公之不爲金寧君十六世孫一明證也 且今金寧君子孫之現存者才爲十九二十世餘而我左議政公派子孫亦僅爲十九二十世餘則左議政公之不爲金寧君十六世孫二明證也
좌의정공이 금녕군의 16세손이 되지 못하는 하나의 명백한 증거이다. 또 지금 금녕군의 자손중에 현존하는 사람이 겨우 19, 20세 쯤이다. 우리의 좌의정공파 자손 역시 거의 19, 20세 쯤이니 좌의정공은 금녕군의 16세손이 아닌 2번째 증거이다.
又按忠淸道鎭岑族人世譜則乃金寧君後而至十五世孫彦儒生三男長景宅次景興次景斗而距今世不過爲百年矣
또 생각해 보면 충청도의 진잠(대전 유성 옆)족의 세보에 금녕군 후 15세손에 이르러 언유가 3남을 낳으니, 장남이 경택, 차남이 경흥, 그 다음이 경두이다. 이는 지금과의 사이가 100년에 불과하다.
今我諸派家乘以金寧君爲中祖聯世相承歷諱景興至于今合爲三十有餘世矣 以國紀歷年與家乘代數考之則不待辨而明甚矣
지금 우리의 여러 파의 가승보에 금녕군을 중조로 하여 세대를 서로 이어서, 휘 경흥을 거쳐 지금에 이르러 도합 30여세로 되어 있으니, 우리나라의 역년으로서 가승의 대수를 생각하면 판단을 기대할 수 없으니 이를 명심하라.
此左議政公諱字偶得與鎭岑家乘同名而島中諸金誤認以爲冒錄者也 此左議政公之不爲金寧君孫三明證也
이 좌의정공의 휘자는 우득(뜻하지 않게 얻은 것)이나 진잠의 가승에 동명이 있어, 섬(제주도) 중의 여러 김씨가 오인하여 거짓으로 기록한 것이다. 이것이 좌의정공이 금녕군의 후손이 되지 못하는 3번째 증거이다.
博考諸家無可聯系故依前輩修譜之例以左議政公別立爲中祖列錄後孫以修正焉惟我諸族其諒此而恕乎否
여러 가문을 넓게 고려하면, 연계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이전 선배들의 수보의 예에 따라서, 좌의정공을 별도로 중조로 세워 널려서 기록하였으니, 후손들은 수정하라. 오로지 우리의 여러 종족은 이를 믿고 깨닫기 바란다.
左議政公十六世孫榮裕謹識
좌의정공 16세손 영유 삼가 표하다.
金海金氏大譜舊序(김해김씨대보 구서)
傳記有之王者稱予一人一人至寡也 黎庶曰億兆億兆至夥也
전해지는 기록에 자기를 왕이라고 칭하는 사람이 있으나, 한사람 한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적다는 뜻이다. 새까맣게 많은 여러 사람을 두고 억조 억조 라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많다는 뜻이다.
少焉天星族轉九六乘除爲億兆之後者 漸次剝落或十不一傳螽斯椒聊充溢區埏者太半一人餘裔 其故司知也
적지는 하지만 하늘의 별과 같이 종족이 변하여 96번 곱해지고 나눠지면 억조의 후가 된다. 점차 돌에 새긴 글자가 깎이고 떨어져 간혹 열개가 하나도 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나, 자손이 번창하여(螽斯) 향기롭고 힘이 되어, 땅의 끝까지 충만하고 넘쳐나 태반이 한사람의 후예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神明首出稟生固己絶異於恒人利澤大庇生民又從以培壅根基鳴呼休哉 竊嘗異夫駕洛首露海堧偏據威靈不出數百里之外尊非一人也澤不大庇也
신은 분명히 시초에 살아있는 것을 내어 주니, 진실로 보통사람에게는 매우 기이하나, 이익과 혜택이 살아있는 백성을 크게 뒤덮고 있고, 또 따라서 뿌리를 내린 터전을 배양하고 북돋우고 있다. 슬며시 일찍이 기이한 것으로서, 무릇 가락의 수로가 김해의 빈터의 한쪽 편에 근거지를 잡고, 위엄을 나타내지 않아 수백리 바깥에서 존귀한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었고, 은혜가 크게 펼치지 않았다.
同時彌鄒忽甘文萇山之比固嘗接壤稱尊彼勝我薜二千年間烟消雲空苖裔無聞無匹庶家戶同其湮沒獨駕洛一姓久益蕃衍殆與中州先聖王之裔垀上焉者積功累仁爲簪纓顯閥次
동시에 미추홀[1]의 감문의 장산이 이를 모방하여, 진실로 일찍이 기름진 땅과 접하게 되니, 그가 우리보다 뛰어나 존귀하다 칭하였으나, 깨어지고 찢어져, 2000년간 연기가 사라지고, 조상을 잃어버리고 후예가 서로 듣지 못하고, 상대가 없어지고 모든 집들이 다같이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홀로 가락의 하나의 성씨가 오래되고 더욱 번성하고 넘쳐 거의 중주(지금의 충주, 또는 중앙의 여러 주?)까지 퍼졌으니 선조인 성왕의 후예로서 최고라 할 것이다. 공적이 쌓이고 어짐이 누적되어 잠영(높은 벼슬)과 드러난 문벌이 계속되고,
[1]彌鄒忽; 백제가 처음 도읍한 현재의 인천을 말하나 필자는 신라로 잘못보고 있는 것 같다.
亦爲庶爲淸散處坊曲乃至胥從于各司皂<=皁>隷于列邑讀者耕者負者乘者凡山海田野之出鱗介莩甲珠璣之實金銀銅鐵竹木指器用入金海氏之家奉金海氏之身者不可數計而周之易曰碩果不食 又曰食舊德是豈無自而然哉
또 모두가 방방곡곡에 조용히 흩어져 살고 있고, 대부분이 각 관아의 하인(皁隷)이 되거나, 여러 읍에 예속된 사람, 읍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거나, 읍에 빚을 지거나, 읍의 것을 이용하는 사람으로 되었다. 무릇 산과 바다, 들과 밭에서 나는 물고기나 갑옷, 갈대삼, 조개, 진주, 구슬 등의 재물(?實)과, 금, 은, 동, 철, 대나무, 나무 등의 보석(?指器)용 물품이 김해씨의 가문으로 들어와 김해씨의 신분을 받드는[1]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아졌다. 주역(周易)에서 말하되 ‘큰 과일은 먹을 수 없다’ 고 하였고, 또 오래전에 베푼 덕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어찌 자연히 그렇게 되지 않겠는가.
[1] ‘자신이 김해씨라고 말하는’의 의미도 될 수 있음.
尤有當誦言者金海氏有無作作必樹立特達軒輊世運新羅角干範圍三韓民到于今受其賜尙乎無以議爲我朝濯纓之筆三足之經行副帥鶴城之武近時甲峰相國之秉執皆是也
특히 당시에 유행하던 말이 있었는데 “김해씨는 적당한 것이(作作) 있든 없든 반드시 특별히 재주가 뛰어난 것을 만들고, 세상의 운수를 수레의 균형 맞추듯이 할 수 있다.” 고 하였다. 신라 각간(유신)이 삼한의백성을 통일하여, 지금에 이르러서도 숭상함을 받고 있다. 논의해볼 필요도 없이 우리 조선의 탁영(일손)의 지조있는 글과 삼족당(대유)의 경서에 밝고 행실이 바른(經明行修) 것과, 부장군 학성(완)의 무예와, 근대의 갑봉(우항) 재상의 나랏일의 처리 능력이 모두 이것이다.
若其名德可紀指不勝縷眇眇以此像想首露之神明歎息乎 史文之多闕也 中州人言禮失求諸野 東國史失往往求諸譜今日金海氏之譜其駕洛國之汗靑歟
그 명성과 덕을 손꼽아 다 셀 수도 없고, 넓고 멀게 이어진 이것을 상상하면 수로왕의 신명이 탄복할 것이다. 역사의 글은 빠진 것이 많다. 충주(중앙의?)사람의 말이 예의를 잊어버리고(?) 일반인들에게서 잃어버린 동국(우리나라)의 역사자료를 구하고자 하여 가끔 보첩에서 이런 자료를 얻고 있다. 금일의 김해씨의 보첩은 가락국의 역사기록(汗靑)이다.
吾聞譜之所收僅五派此盖鄧林中數?株挺然者耳若曰神明祿蔭盡載是編則用錐指地哉
나는 이 보첩이 겨우 5개 파만을 모은 것이라고 들었다. 이것은 대개 여러 수풀(派) 중에서 핵심이 되는 몇 파만 뽑아서 그런 것이다. 듣자니 신명의 복록과 음덕이 이 책에 전부 실려 있다고 하니, 이는 땅을 가리키는 추(의역; 기준이 되는 지표)로 사용될 것이다.
相國玄孫濟運氏伻其宗人洛鎭謁文於正鎭正鎭曰譜之有文一則稱述一則勸勉吾於子之譜稱述有所不盡勸勉有所不敢雖欲自竭昏耋將何藉手是以屢辭而後爲之說如右云
상국(갑봉.우항)의 현손 제운[1]씨가 그의 친척인 낙진에게 시켜서 글을 청하며 바르고 진솔되게 말하기를 “보첩에 글이 하나 필요하니 한 가지만 말씀해 주십시오. 즉 우리들을 자손들의 보첩에 권면토록 하라고.” <그러나> 권면을 다하지 못한 점이 있고, 감히 무례함이 있다. 비록 욕심은 있으나, 나 자신이 황혼의 늙은이이고 어찌 손이 <떨리는 것을> 핑계삼아 여러 번 되풀이 하여 사양하다가 이후에 위와 같이 서술하게 되었다.
[1]宇杭-彦熙-翼祚-文鉉-濟運(字衡伯.1793~1866)
顓蒙赤奮若陽後翌日幸州奇正鎭謹序
전몽(을)적분약(축), 1865년 양후(端陽=端午) 다음날 행주 기정진[1] 삼가 쓰다.
[1]기정진; 1798~1879(정조 22~고종 16)
첫댓글 위 본문의 붉은 글을 다음과 같이 수정합니다.
1) 서문에서
남몰래 기울어가는 이름에 대한 소원(?)이 있으나 얻을 수 없다.
-> 간절하게 이름을 올리기를 원하기도 하나 불가할 것이다.
2)발문에서
상복입는 것을 면하게 되고 옷이 없어지면(?)
->상복을 벗어버리고 상제(喪制)를 지키지 않으면
본문 수정하였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제주도의 우리문중(안경공파)만이 아니고 좌정승공파등에게도 이 사실을 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