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피나 바우쉬는 폐암으로 세상을 등졌다. 그리고 작년 3월에 LG 아트센터에서 피나 바우쉬 부퍼탈 탄츠테아터의 <카페 뮐러>와 <봄의 제전> 공연이 있었다. 원래는 피나가 직접 하기로 했다는 그 공연을 보러가는 길에 씨네21의 정한석 기자에게 전화를 받았다. <시리어스맨>의 영화읽기 원고 청탁이었다. 짧은 통화를 끝내고 극장 로비로 들어서는데, 묘한 긴장감이 그곳을 감싸는 게 느껴졌다.
발레나 뮤지컬 같은, 전문 분야가 아닌 공연을 갈 때 난 종종 이방인이 된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기대 속에 포함된 묘한 아쉬움, 그에 동참해야했다. 공연은 좋았다. 2부 <봄의 제전>에서 바닥에 깔린 것이 실제의 모래라는 걸 확인했으며, 그 먼지를 옷깃에 받으면서도 불쾌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느 노신사가 부인에게 나직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시대의 요정이 갔어요.” 나는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 요정은 항상 담배를 물고 살았다.
아주 많이 말랐고 팔다리가 길었으며, 납작한 가슴에서 시작된 근육이 어깨를 넘어 손목까지 이어졌다. 우리는 항상 그녀의 시선을 살폈다. 그녀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녀가 그 속에서 발견한 ‘감정’이 무엇인지가 중요했다. 그 내면의 시선은 항상 안무가 되어 다시 나왔고, 무용수를 통해 관객의 시선으로 돌아왔다.
피나 바우쉬 무용단에서 그녀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해 보인다. 그 이름이 가지는 상징적 힘, 관객들은 피나가 가진 육체적 뉘앙스를 무대에서 발견하길 기대하며 공연을 본다. <피나 바우쉬의 댄싱 드림즈>(이하 <댄싱 드림즈>) 속 연두색 옷 입은 소녀가 등장하자마자 그녀가 프리마돈나가 될 거라는 걸 직감하는 덴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피나 바우쉬의 복제를 기다렸으니까.
만일 무용에서 신체의 권력이란 것을 언급할 수 있다면, 이때 그 방식이 피나의 작품에서 전복되는 경험을 하는 건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 피나는 항상 권력의 우위에 있었다. 그녀의 작품에서 주인공은 오직 하나, 자신뿐이고 모든 인물은 주인공의 감정에 따라 주관적으로 움직인다.
그녀의 작품은 얼핏 보면 어렵고, 자세히 보면 무척 쉽다. 그 비밀은 반복된 행동과 색채 속에 있다. 무채색 속에서 유독 눈에 띠는 색을 찾거나 반복되는 동작 패턴을 찾는 건 관객의 몫이다. 굳이 미니멀리즘에 국한될 필요는 없다. 표현 방식에서 어떠한 좌표에 놓이든 간에 피나 바우쉬가 추구한 바는 항상 유니크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마스터로서의 문제가 아니다. 그녀는 테크니션을 넘어 일종의 브랜드가 되었고, 때문에 부퍼탈 무용단은 앞으로도 계속 이 권위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녀는 떠났지만 그녀가 만들어낸 감정의 덩어리는 여전히 우리를 감싼다.
알모도바르 <그 녀에게>의 오프닝은 카페 뮐러(클립) 공연이다.
여러 공연 예술 중, 특히 현대무용은 영상물과 만났을 때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다. 무용수가 행하는 움직임을 카메라의 프레임이 잘라내고 한정시킨다. 그런데 그 영역 규정이 묘하게 무용과 잘 어울린다. <댄싱 드림즈>가 훌륭한 영화란 이야길 하려는 건 아니다. 나무랄 데는 없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칭찬할 구석도 없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극장에서 보는 게 좋다.
유투브에서 검색되는 여타 댄싱 클립들도 좋은데 영화는 오죽 할 것인가가 첫째 이유고, 올해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되었다는 빔 벤더스의 <피나 Pina>가 곧 나올 것이기에 예습을 위해서라는 게 둘째 이유다. (벤더스의 작품은 3D다. 어쩌면 이 작품보다는 <댄싱 드림즈>가 더 좋을 거란 생각도 드는데, 물론 기우이길 바란다. 아직 <팔레르모 슈팅>의 기운이 가시질 않았나 보다.)
‘하이퍼텍 나다’라는 상영관이 주는 공간감 또한 좋다. 영화가 아니라 공연을 보러가는 기분이 든다. 27일부터는 ‘아트하우스 모모’에서도 상영된다. 멀티플렉스를 벗어난 영화들만의 쾌감은 분명히 존재한다.
2011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작, 빔 벤더스의 <피나> 예고편(클립)
안무가가 질문을 던진다. 무용수는 이에 답한다. 피나 바우쉬가 구축한 연기의 패턴이다. 정답은 존재하지 않지만 각자만의 확신은 있다. 그 확신이 흔들리지 않을 즈음 관객에게 감각이 전달된다. “여기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야.” 스크린 속의 소녀가 말한다. 상영시간 89분이 너무 짧단 생각이 든다.
<댄싱 드림즈>는 미약하지만 실제로 피나 바우쉬가 등장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 속엔 그녀의 연기 철학이 꽤 자세히 소개된다. 탄츠테아터 Tanztheater(dance theatre)라는 단어가 이르듯, 그녀의 댄스에는 일종의 연극 연기가 포함돼 있다. 대학 1학년 시절에 최형인 교수의 연기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당시 수업시간에 배웠던 연기 교수법이 영화 속에 등장해 개인적으론 좀 놀랐다.
깜깜한 소극장 관람석에서 지켜보던, 내 어린 친구들이 뿜던 내면의 에너지가 영화를 보던 중 갑자기 생각났다. 비단 연기를 위해서가 아니라도 누구나 한번쯤 시도해 볼만하다. 특정한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크게 웃거나, 내가 내는 웃음소리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 판단 받는 일들. 표현하고 싶은 욕구는 표현되는 것만으로 충족되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내가 하지 못했던 걸 발견하고, 해소하는 즐거움이란 따로 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은 그저 생기는 것만으로도 긍정적이다. 배우에게는 물론이고 모든 분야의 예술가들에게 긍정적 에너지가 돼준다.
롤랑 바르트는 충동이 오는 때를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다. “상처, 혹은 사랑.”
이 영화 속 갈망은 후자에 더 가깝다. 사랑 같은 것에 빗댈 수 있는 ‘융합’ 말이다. 그러니 그림이나 음악 같은 솔로 예술가들을 부러워하는 건 이젠 그만 둬도 될 것 같다. 공동 작업을 하는 예술가의 감흥을 <댄싱 드림즈>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