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각사 수도원 법안스님 인터뷰
이윤홍
오전 8시, 미주불교 편집실을 떠나 업스테이트 뉴욕 〈Salisbury Mills(N.Y. upstate)〉에 있는 원각사에 도착하기까지는 약 2시간이 소요되는 길이었다. 조오지 워싱턴 브릿지(George Washington Bridge)를 건너 파라사이드 파크웨이(PaliSade Parkway)에 접어들자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접어드는 계절의 변화를 완연히 느낄 수 있었다. 맑디맑은 푸른 하늘, 도로 양옆으로 붉게 타오르는 단풍, 오른쪽 벼랑 밑의 Hudson 강줄기를 드문드문 볼 수 있는 파라사이드 파크웨의 늦가을 drive course는 자동차 여행객들에게는 잘 알려진 풍경이다. 유감스럽게도 11월 중순을 넘긴 이번 취재여행길에는 이미 단풍이 막바지에 이른 무렵이라서 화려하고 풍요로운 색의 향연보다는, 무채색으로 물기가 촉촉히 밴 수채화 같은 풍경이 도로 양켠으로 단조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두 시간 여의 길지 않은 여정동안 동행한 편집장과 함께 인터뷰 내용과 지난 창간호의 아쉬웠던 미비점, 건강이 좋지 않으신 법안스님의 근황에 대한 두서없는 대화로 무료를 달랬다.
투병과 정진으로 하루의 일과를 다 보내시면서도 법회와 절 살림의 잔일까지 신경을 쓰시는 분망한 생활이 곧 법안스님의 변함없는 근황이리라. 와병 중에도 New York Univ.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신 스님의 용맹정진과 정열에 탄복하면서 운신(運身)이 자유롭지 못한 투병 생활이니 만큼 장시간의 인터뷰로 불편을 끼치기 않기로 합의(?)를 보았다. 딱딱하고 지루한 질의보다는 미주 한국 불교의 산 역사라 할 수 있는 스님과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직도 투병 중이신 스님께 면담자가 갖추어야 할 예의리라. ---편집자주-
[인터뷰] 법안스님
·면담자 :이 윤 홍 (편집위원)
·일 시 :1989.11.10.
·장 소 :원각사 산장 (New York Salisbury Mills.)
---이: 스님, 다시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건강은 어떠신지요?
---법 : 지난번 한국에 가서 요양하고 온 뒤 상당히 차도가 있는 것 같소. 「미주현대불교」에서 인터뷰하러 온다 해서 아침부터 기다리고 있던 참이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불교잡지를 만드느라 수고들 많소. 뭘 알고 싶은지 얼른 물어 보시오.
---이: 예, 우선 무슨 동기로 언제 미국에 오시게 되었는지 말씀해 주십시요.
---법 : 1974년에 도미했지요. 하버드대학 연경학회(Harvard Enching Institute), 세계종교연구소(Center for study of World Religion)의 초청으로 오게 되었어요. 일종의 교환교수(Visiting Scholar)격인데, 한 일년정도 연구할 목적으로 왔던게, 주저앉게 되고 말았지.
*****법안스님은 1972년 초에 미국에 입국하였습니다. 1972년 가을에 프로비덴스에 숭산스님이 홍법원을 개원하엿을때 현재 뉴욕에 살고있는 이 계향 보살님도 이곳에서 법안스님을 만나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원각사라면 전 미주 60여 개의 사찰 중 가장 크고, 개원시기에 있어서 L.A의 삼보사를 제외하고는 가장 오래된 미국 동부 최대의 도량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각사를 오늘날까지 성장시켜 온 주지스님으로써 그 연혁과 역사를 알려주십시요.
---법 : 공식적인 개원일시라면 뉴욕지방법원에 등기한 75년 8월로 잡을 수 있지요. 처음 자리잡은 곳은 맨해튼 42가 타임스퀘어에 있는 체이스 맨하탄뱅크 2층이었어요. 74년도에 하버드에 온 이래 기숙사에 기거하며 연구만 하고 있었는데 당시 뉴욕의 동국대학 동창회가 개최했던 환영회와 몇 번의 초청모임에 참석하다 보니 그 무렵 뉴욕의 불교신자들과 접촉하게 되었어요. 그 무렵 뉴욕에는 약 2030명 가량의 보살님들이 주축이 되는 300여명의 불교신자가 있었지만 신앙생활의 구심점이 될 사찰이나 승려는 없었거든요. 75년도만 해도 뉴욕일원에 교회가 50여 개가되는 등 여타종교의 목회활동은 왕성한데 동부지역에 절은 전무하고 단지 「불교부흥회」라는 모임이 한 달에 한번정도 신도중심으로 열리고 있었던게 당시의 실정이었어요. 그런 판국에 신도들이 이 중을 보니까 반가운가 봐(웃음). 가뭄에 비나 만난 듯이 좋아하더니만 부처님오신날 기념행사도 주관해 달라고 부탁하고 개인전도 열자고 하고, 후에 보스톤까지 나를 찾아온 신도분들의 요청을 받아 한 달에 두 번씩 법문을 하게 되었고 이 불교부흥회를 모태로 원각사를 세우게 되었지요. 참 그때 행원 스님과 구윤각스님은 법문을 하시기도 하고 원각사 창립에 많은 도움을 주셨지.
---이 : 몇 번인가 자주 이전하셨지요. 하지만 맨해튼을 떠나 멀리 이곳 업스테이트(upstate)로 옮기게 된 데에는 상당한 고려와 그만한 목적이 있으리라 믿어지는데요.
---법 : 맨해튼에 있을 때에도 신도수가 늘면서 커지는 절의 규모에 따라 23가, 17가 등지로 옮기게 되었던 거고, 이곳 세리스버리밀즈〈Salisbury Mills〉로 옮기게 된 동기라면 첫째 1,400세대 5,000여명으로 늘어난 신도들의 편의를 위하고자 함이었지요. 일례를 들어 대도시 뉴욕이라지만 역시 좁은 맨해튼인지라 자동차 주차만 하더라도 상당한 불편을 겪어야 했고, 둘째 이유는 이제 2,000년대를 바라보면서 우리 미주한국불교도 정착과 포교의 시기를 지나서 자체의 내실과 한국불교의 국제화를 위한 기초를 닦아야 할 시기라고 믿기 때문이었어요. 나 개인의 소망일 뿐만 아니라 많은 미국의 불자들의 염원이기도 한데 국제규모의 불교대학과 자질 있는 불교인들을 양성할 수 있는 본격적인 수도장을 건립하여 한국불교를 세계화 할 수 있는 토대를 닦고자 230에이커에 이르는 이곳으로 사찰을 옮기게 된 것이지. 이는 참 원대한 불사가 될 터인데 원각사 주지인 나 자신의 일대에서 성취될 일만은 아니고 세대를 계속하여 추진되어야 할 모든 미주불자들의 종교적 과업이라 믿고 싶소.
---이: 미주의 불자라면 누구나 공명할 수 있는 절실한 불사라고 믿어집니다. 한편 원각사의 역사라면 곧 미주한국불교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간 사찰을 성장시켜 오면서 많은 포교의 어려움을 느끼셨으리라 생각되는데요. 문화배경과 언어가 다른 이곳에서 겪었던 포교의 어려움을 말씀해 주시지요.
---법 : 우선 사찰이 위치하게 되는 지리적 여건만 보더라도 대다수의 한국사찰은 이미 오랜 역사를 통해서 수도와 신앙생활에 적합한 명산명소를 찾아 자리잡게 되었지만 포교와 개척을 동시적 과제로 안고 있는 이민사회의 사찰은 대부분 대도시의 문명과 문화의 충격을 또한 극복해야 하는 법이거든. 즉 언어의 문제가 가장 큰 것이고 의식주 중 식주(食住)의 문제를 다른 생활관습에 맞추어야 하는 것도 문제일 테고 또 가장 깊고 큰 문제로서는 전혀 이질적인 종교적 전통과 정신문화 속에서 생활하는 서양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東西의 간극을 뛰어넘어 보편적 진리를 그들이 실감할 수 있는 언어로 전해 줄 수 있느냐 하는 종교적 의사소통이겠지요. 참된 포교를 위해서는 저들을 알아야 해요 서양인들의 종교와 그 전통·전승구조와 문화를 열심히 공부하여 그들이 추구하고 있는 종교적 보편성을 철저히 이해하고 그 이해를 토대로 우리가 간직하게 된 진리의 보편성을 확인시켜야지..... N.Y.U.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원효의 화쟁사상으로 취득했지만 실상 그 연구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얻게 된 지식은 기독교에 관한 이해의 확충이었지요. 기독교국가 미국에 와서 기독교 공부 많이 했어요. 그것이 포교와 사찰의 운영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요.
---이 : 뒤에 여쭈어 보려 했는데요, 학위 논문의 주제가 된 원효의 화쟁사상을 소개해 주십시오. 또 주제로 채택하게 된 계기도 좀 알려주시고요.
---법 :N.Y.U.의 철학과 지도교수로 성공회 신부인 「벨포트리」라는 분이 계신데 서구 종교인으로써 「교회 일치화운동」(Christian Ecumenical Movement)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과 애착을 가지고 있는 분으로 하도 자주 그 운동에 대해 언급하길래 하루는 내가 물었지요. 나도 교회 일치화 운동을 알고 있는데 그 운동이 성공적이었는가 하고 말이지. 그 양반 대답이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는 거야. 그래 말했지. 그렇다면 말할 필요 없다. 우리 한국불교사에는 유사한 종교운동의 성공적 사례와 그 운동의 사상적 거인이 있다 하고 말이요. 그랬더니 벨포트리 교수가 그렇다면 그 사상을 학문적으로 소개하는게 어떻겠느냐고 제의해서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로 다루기로 작정했지요.
원효는 뛰어난 고승이라거나 탁월한 학승이라고 단순하게 이해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리 만치 사상가, 학자로서도 굉장히 거대한 인물이었어요. 일생을 통해 300여 편의 저술을 남긴 엄청난 정열과 지성만 해도 그렇고, 그 사상적 깊이와 학구의 목적이 또한 비범한 것이었거든. 간략히 말하자면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하신 이래 인도의 원시불교는 20부파 불교로 분열되었고 중국에 전래된 이래 13종 58파로 분열되어서 각기 다른 종파들이 신라에 전교 되고 있었어요. 이에 원효스님이 의구심을 가지고 열렬한 종교적 열정으로 연구하기 시작했지요. 왜 하나의 법이 파쟁을 일으켜 혼란에 빠지는가 하고. 각 종파의 다른 관점과 경전을 그 전거에서부터 논파하여 일치화를 시도했어요. 그 해석론이 바로 화쟁론이라. 한국, 중국, 일본의 불교사를 연구하는데 원효에게서 배울 점이 무척 많지요. 단지 통일신라시대의 한 저명한 학승이라고만 볼 수 없고 동북아시아 사상계의 한 거장으로 보아야 바르게 이해하는 걸 거요.
---이 : 원효스님의 화쟁사상은 현시점의 이곳 미국에서도 다시 음미해 볼 만한 큰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현재 미국은 어떻게 보면 불교의 가장 큰 포교대상 국가가 되고 있는 듯 합니다. 일본의 일련종, 티벳불교, 남방불교, 그리고 우리 한국의 조계종, 천태종 등 각기 다른 종파의 불교가 유입되어 와 활발한 종교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모두가 같은 한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타민족이나 타지역의 불교와는 어떤 교류나 접촉을 갖고 있는지요?
---법 : 미국불교인협의회 (America Buddhist Congress)라는 각국 불교인의 모임이 있지요.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구체적인 공동사업이라든지 빈번한 접촉을 해야 할만큼 서로 밀접하게 만날 일은 없었습니다. 허나 같은 불교인으로서 자주 만나고 대화해야 하리라 봅니다. 일단은 불교하면 자연 아시아인들이 그 신앙의 주체가 되어 왔고 불교가 발전해 온 토대도 아시아의 문화권 안에서가 아닙니까? 특히 이민의 국가인 미국에서 아시아의 문화전파나 교류도 미주불교의 부수적인 소임이라 볼 수 있지요. 아마 공통의 신앙과 종교, 유사한 문화전통, 이민 등 서로가 공유하고 있는 여러 가지 특성 때문에 곧 구체적이고 활발한 불사가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소.
---이 : 미주의 한국불교 사찰들은 한국교단 즉 본 국종단과는 공식적이고 교계질서에 입각한 어떤 관계를 갖고 있습니까?
---법 : 글쎄, 이렇다 할 형식은 갖추고 있지 못하지. 통합적으로 본사(本孝)제도에 속해 있는 것도 아니고, 종단의 지원을 받아서 포교사 소명으로 먼 미국까지 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재정적인 지원을 받는 것도 아니고 미국에 계신 스님 모두가 출가인연이나 문중인연을 따라 본국 교단과 관련되고 있지요. 각인 각자의 깨달음과 소명의식에 따라 불법을 전하러 나온 걸 거요.
---이 : 하지만 보다 효율적이고 성공적인 불교의 전파와 정착을 위해서 교단 전체 차원의 협의와 공식적인 지원, 지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미국에서 출가하는 승려의 수계문제나 승려의 수계문제나 승적 문제도 그렇고 미주불교가 본국의 종단과는 한시바삐 일률적이고 체계적인 관련을 가져야 된다고 봅니다.
---법 : 종교가 무슨 사업이나 공공기업 같은 것은 아니지. 여러 스님들이 이곳에까지 와서 잘들 했고 또 열심히 하시고 계시니까 크게 걱정하는 것은 없어요. 수계나 승적문제 같은 것도 출가인연을 따라 같은 문중으로 입적되면 될 터이고, 허나 세계의 대종교인 불교가 명실상부하게 국제화되고 보다 많은 중생들이 -희건, 검건, 노랗건 인종을 가릴 것 없이- 불법에 귀의할 수 있게끔 본국교단의 큰 관심과 지원은 목 있어야 할거요. 그렇다 하더라도 자율적인 포교활동을 불필요하게 형식으로 묶어서는 안되지. 모두가 세속사(世倚事)와는 다른 종교의 일이니 단순하게 재단 할 수만은 없는거요.
---이 : 화제를 돌려보겠습니다. 미국에 있는 사찰의 신도층은 고령화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연로하신 보살님 중심 사찰운영이나 젊은 신도층을 확충시키지 못하고 있는 점이나, 타종교에 기존신도를 빼앗기는 등, 전국의 사찰수는 늘고 있지만 실질적인 불자의 수는 감소되고 있는 것이 아닐런지요?
---법 : 부인할 수 없는 현상이오. 한 세대의 이민 가족을 보더라도, 연로하시고 한국의 전통적인 문화와 교육을 받은 세대는 아무래도 불가와 깊은 인연을 갖게 되고 절을 찾기 마련인데 신교육을 받았다거나 서구문화, 교육에 익숙히 젖은 젊은 세대는 이민생활의 편의나 이곳 종교문화에 따라 교회를 찾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바쁜 생활 속에서 한 집안에 절, 교회 따로 따로 다니게 되나요? 더구나 절에 가시는 늙은 부모님들이 계시면 강권해서라도 교회로 모시고 가려 하지 그저 신도숫자나 절의 크기로 불교를 재어 보려는 것은 안되지요. 불교신도의 노령화 문제는 불교의 위축이나 종교적 위세의 감축이라고 볼 수만은 없고 한국문화의 전승과 세대간의 격절에서도 원인을 찾아 볼 수 있는 한국민족의 큰 문제입니다.
---이 : 혹 자는 미주한국불교를 웰페어(Welfear)불교라고도 합니다. 상당한 악평입니다만 그만큼 연로하신 신도 층에 많은 재정적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 아닐까요?
---법 : 웰페어(Welfear)불교라, 재미있는 말이군. 악의적으로 바라본다면 무슨 말을 못하나요. 먼저 신심을 살펴보아야지 꼭 나이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하면 되겠소? 우리 스님네들도 젊고 자라는 세대들에게 불교의 존귀함을 전하려고 무척 애쓰고 있어요. 20세기말에 자라나는 새로운 세대들, 특히 이민 1.5세나 2세들에게 불법뿐만 아니라 불교로서 대변되는 한국고유 문화를 전승시켜 주려고 힘쓰고 있죠. 이곳에 큰 부지를 마련해서 교육원을 세우고 기숙사도 세운 까닭이 거기에 있지요. 세상을 살아가자면 각자가 처해 있어야 하고 마땅히 돌보아야 할 격이 있는 법이오. 각별히 이민 온 우리교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것, 자기가 태어난 바탕, 한국 역사와 문화를 몰라서는 이 바쁘고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천애 고아가 되! 고 만다는 말이오.
---이 : 한인 이민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은 어떠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법 : 종교의 역할이라. 어느 사회에서나 어느 시대에서나 종교가 하고자 하는 일이나 전하고자 하는 말은 항시 같아 왔지. 이민 사회라면 우리 한국사람들이 제가 나서 살던 곳을 떠나 새로 삶을 개척하는 생활들은 말하는 거 아니요? 이질적인 문화와 관습, 치열한 생존경쟁, 고된 노동, 가정불화, 자녀교육 등 한국인들이 겪어야 할 생활문제는 산적해 있지요. 거기에다 분단국가민족이라는 민족적 난제도 있고, 어느 종교이든 이곳 이민사회에선 보다 현실에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신도들의 실생활에 가까이 가야 한다고 보겠소.
---이 : 요는 「동참하는, 같이 나누는 종교」이어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그 문제는 비단 이곳 이민사회에 있는 교회나 사찰에서만 아니라 금세기 말 한민족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라도 모든 종교인들이 염두에 두어야 하리라 믿고 있습니다. 역시 우리가 마땅히 책임과 소임을 다해야 할 민족적 대과제로 통일과 평화운동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스님의 견해를 들려주십시요.
---법 : 한국인 모두가 해야 할 일입니다. 바로 우리가 아니고서는 해결될 일이 아니지요. 스스로 깨달아야 하듯이 스스로 깨쳐 나가야 하고 극복해야 합니다. 누가 도와줄 일도, 기대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신앙과도 같이 항시 지켜 나가며 실천해야 할 일이지요. 승려로서 어디까지나 종교인의 입장에서 문제의 극복을 보고자 하는 것이지요, 이미 호국불교, 위민불교의 자랑스런 전통을 가진 우리의 불교아닙니까? 대대적인 불사를 통해 신앙으로써 민족적 과업의 해결에 도움이 되었으면 싶소.
---이: 조금은 소극적인 생각이신 것 같은데요. 보다 우리의 현실을 냉철히 바라보고 실제적으로 대처해야 하지 않을까요? 종교인도 같은 민족 구성원이니까요.
---법 : 종교라는 점을 넓은 시야로 보았으면 해요. 또 중은 현실을 너무 많이 알아도 안돼, 무슨 말인지 알아요. 출가의 의미를 잃어서도 안 된다는 말이지요.
---이: 통일에 대해서만큼은 스님께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저희 「미주현대불교」도 복잡다기한 미국 속의 이민생활 속에서 불법의 전파와 한국불교인들이 바른 삶을 위해 노력하고자 합니다. 본지에 대해 바라고 싶은 점은 없으신지요?
---법 : 「미주현대불교」가 문서포교를 훌륭히 해내고 있어요. 넓은 미국에서 산재해 있는 사찰간에 서로 소통할 수 있고 하나의 불교로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아주 기쁘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전에 한국에 있을 때나 역시 불교신문사를 운영한 적이 있어서 문서포교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때 신문에 표제로 붙인 구호가 「한 장의 불교신문은 한사람의 포교사」라는 말이었지요. 「미주한국불교」가 전국지로서 창간된 만큼 전 지역을 포괄할 수 있는 알찬 내용과 균등한 편집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봐요.
---이 : 스님과의 오랜만의 해후, 매우 뜻깊게 생각합니다. 모쪼록 조속히 건강을 회복하셔서 미주한국불교의 중흥에 힘 찬 박차를 가해 주시길 기원합니다.
1989년 12월 제2호
첫댓글 원각사는 뉴욕동부에서 가장 넓은대지를 가지고 있는 절입니다. 산속에서 아기 사슴이 내려오기도 하지요. 법안스님의 쾌차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