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랑시인 김삿갓 2부-(25) ●
☆ 돌팔이 의원 집에서 보내는
기막힌 하룻밤 (상) ☆
다음날 조반(朝飯)을 얻어먹은
김삿갓은 곽호산 훈장(訓長)에게 금천(金川)의
산천(山川)을 두루 돌아보겠다고 말을 하고
떠났지만,
마음은 이미, 자신(自身)이 어린 시절(時節)을
보낸 곡산(谷山)에 가 있었다.
그의 발길은
곡산(谷山)을 향해 더욱 빨라지기 시작했다.
곡산(谷山)을 가기 위해서는 신계(新溪)를
거쳐야 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산길을 걷던
김삿갓의 눈에,
신계(新溪)를 앞둔 저 멀리 보이는 마을 입구에
"제생당약국(臍生堂藥局)“이라고
쓴 커다란 간판(看板)이 희미하게 보였다.
김삿갓은 그 간판(看板)을 잘못 보았나 싶어
가까이 다가가 다시 보니,
틀림없는 "제생당약국(臍生堂藥局)"이었다.
김삿갓은 빙그레 웃음을 웃었다.
간판(看板) 글자가 터무니없는 글자로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약국(藥局)은 생명(生命)을 다루는 곳이다.
따라서 약국(藥局)은 ”생명을 건져“준다는
뜻에서 흔히 "제생당(濟生堂)"이라고 써 왔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간판(看板)은
”건널 제(濟)“가 아닌 ”배꼽 제(臍)“字를
藥局 이름으로 쓰지 않았나?
(저 약국(藥局) 주인(主人)은
한문(漢文)에 어지간히 무식(無識)한 모양이군.)
빈 수레 소리가 사뭇 요란(搖亂)하고.
못생긴 여자가 짙은 화장(化粧)을 하는 법이다.
그러니 돌팔이 의원이라고 별다른 일이 있으랴
생각된 김삿갓이 의원 앞으로 가보니,
의원(醫員) 집은 별로 크지도 않았는데
지붕 위를 가로질러 올려놓은 간판(看板)은
지붕보다 더 커 보였다.
김삿갓은 간판(看板) 글자가
잘못된 것을 그냥 보아 넘길 수 없었다.
(간판(看板)이 잘못된 것도 알려 줄 겸,
오늘 저녁은 저 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하자!)
김삿갓은
약국(藥局) 문(門)을 열고 주인(主人)을 찾았다.
약국(藥局) 주인(主人)은
나이가 60가량 되었을까,
구레나룻을 허옇고 탐스럽게 기른 것이
풍채(風采)가 그럴듯한 사람이었다.
"어서 들어오시오. 무슨 병(病)으로 왔는고?“
그는 김삿갓을
환자(患者)로 알고 반가운 어조(語調)로 맞았다.
"저는 환자(患者)는 아니옵고
지나가던 과객(過客)입니다.“
"과객(過客)이 무슨 일로
약국(藥局)에 들렀는가?"
"이 댁(宅) 간판(看板) 글씨가
잘못되었기에 그것을 알려 드리려고 왔습니다."
"간판(看板) 글씨가 잘못되었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제생당의 ‘제’자는, 건널 제(濟)자를
써야 할 것을 배꼽 제(臍)자로 잘못 씌었기에
아시고 계시는가 하여 여쭤봅니다."
약국(藥局) 주인(主人)은
그 말을 듣는 순간(瞬間),
크게 당황(唐慌)하는 빛을 보였다.
김삿갓의 예상(豫想)대로 간판(看板) 글자가
잘못된 것을 주인(主人)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瞬間),
약국(藥局) 주인(主人)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말을 했다.
"내가 워낙 눈이 어두워 간판(看板)을
친구(親舊)에게 써달라고 했더니,
그 친구(親舊)가 글자를 잘못 쓴 모양이구먼.
그러나 어찌 되었든 간에,
"제생당"이라고 읽히기만 하면 될 게 아닌가?"
약국(藥局) 주인(主人)은 되지도 않은
억지 변명(辨明)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일장(一場)
훈계(訓戒)조의 말을 늘어놓았다.
"무슨 일이나 귀공(貴公)처럼 꼬치꼬치
따지기 시작(始作)하면 한이 없다네.
그러니 귀공(貴公)도 오래 살고 싶으면
매사(每事)를 둥글둥글하게 보아 넘기게."
김삿갓은 하도 어이가 없어 입이 딱 벌어졌다.
그런 김삿갓의 모습을 본
약국(藥局) 주인(主人)은 구차(苟且)한
변명(辨明)까지 늘어놓는 통에 더욱 기가 막혔다.
"귀공(貴公)은 의원(醫員)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죽고 사는 데는
배꼽처럼 중요(重要)한 것이 없네.
어린아이가 태어났을 때도 배꼽 줄을
잘라 줘야지 살게 되거든! 어찌 그뿐인가?
‘배꼽에 어루쇠 붙인 것 같다‘는
속담(俗談)도 있잖은가?
명의(名醫)는 환자(患者)의 배꼽만 보아도
그 사람의 뱃속에 어떤 병(病)이 들었는지
환히 안다는 소릴세.
그런 뜻에서 본다면 ”제생당“의 제 자는
건널 제(濟)보다, 배꼽 제(臍)를 써야
하는 것이 옳은 일이 될 것이야!"
상사마(相思馬) 궁둥이 둘러대듯,
능구렁이 같은 약국(藥局) 주인(主人)의
변명(辨明)이 보통(普通)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간판(看板) 글자가
잘못된 것은 사실(事實)이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판이기에 그런 승강이는 이제는 그만 접기로
했다.
"제가 몰라서 부질없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건 그렇고 날이 저물어 하룻밤 신세(身世)를
졌으면 싶은데" 하고
화제(話題)를 얼른 바꿔 버렸다.
주인(主人) 늙은이는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김삿갓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렇게 말을 하였다.
"귀공(貴公)은 학식(學識)이 많은 모양(模樣)이니
오늘 밤은 예서 쉬어 가시게나. 그 대신 내가
눈이 어두워 읽지 못하는 의서(醫書)가 있으니
그 책(冊)이나 좀 읽어 주게."
주인(主人) 늙은이는 안으로 들인 김삿갓에게
'동의보감(東醫寶鑑)' 한 권(卷)을 내놓으며
첫 장부터 자세(仔細)히 읽어 달라고 한다.
김삿갓이 생각하기에 주인(主人) 늙은이는
눈이 어둡다는 것은 핑계고,
워낙 까막눈이어서 의원(醫員)이라면
통달(通達)했어야 할 '동의보감(東醫寶鑑)'조차
읽어 본 일이 없었을 것처럼 보였다.
김삿갓이 정자세(正姿勢)로 앉아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읽자,
마주 앉아 이를 듣던 주인(主人) 늙은이는
점점 자세(姿勢)가 꼬부라지더니
이내, 비스듬히 다리를 뻗고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옆으로 누워서 듣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듣다 말고 한마디 하는데,
"자고로
명의(名醫)가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세.
명의(名醫)를 들라치면 중국에는 화타(華陀)와
편작(扁鵲)이 있었고 우리나라에는 허준(許浚)과
안찬(安瓚), 양예춘(楊禮春) 정도 있었을 뿐이지.
그러나 그들도 명의(名醫)로 이름을 날리기
전에는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나서야 명의(名醫)가 되었거든,
그러니 명의(名醫)란 칭호(稱號)는
치료과정(治療過程)에서 실수(失手)로
'많은 사람을 죽였다' 는
칭호(稱號)밖에 안 되는 걸세."
자기도 명의(名醫)라는 것을 은연중(隱然中)에
과시(誇示)하려고 한 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주인(主人) 늙은이도 어쩐지 사람을 많이
죽였을 거라 싶었다.
그때 마침, 문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환자(患者) 한 사람이 찾아 왔다.
나이는 사 십 정도 되었을까?
얼굴에 살이 붙어 두 볼이 볼기짝처럼
생겨 먹은 장년(長年)이었다.
"어디가 아파서 왔는고?“
제생당 주인(主人)은 부랴부랴 책상(冊床)
다리로 꼬고 앉으며 턱을 들어 새삼스럽게
위엄(威嚴)을 떨쳐 보였다.
그러자 환는 머리를 수그려 보이며 말했다.
"제가 요새 몸이 몹시 불편(不便)합니다.
진맥(診脈)을 받고 싶어 왔습니다."
"몸이 몹시 불편(不便)하다고?
어디, 팔을 내밀어 보게."
제생당 의원(醫員)은 환자(患者)의
팔을 잡아당겨 맥(脈)을 짚어 보았다.
김삿갓은 옆에서 그 광경(光景)을 지켜보며,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맥(脈)을 짚어 볼 것이 아니라
차라리 배꼽을 들여다보시죠!)
속으론 그리 말하고 싶지만
차마 입 밖으로는 꺼낼 수는 없었다.
제생당 의원(醫員)은
진맥(診脈)하고서 뒤로 물러앉으며 말했다.
"맥(脈)으로 보아서는 별 이상이 없군그래."
"아니옵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 사람아! 자네가 나를 어떻게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가? 그럼, 자네는 어떻게
괴로운지 증상(症狀)을 자세(仔細)히 말해 보게."
"웬일인지 밥을 먹으면 뱃속이 까닭 없이
평소(平素)보다 불룩해 오고,
잠시(暫時) 뒤에는 달걀 크기의 덩어리가
뱃속의 위아래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합니다."
"뱃속에서 달걀 크기의 덩어리가
아래로 내려갔다가 위로 올라왔다 하면서,
자네를 괴롭힌단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놈의 달걀 덩어리가 위로 올라왔을 때,
혹시나 입을 크게 벌리면 나와 줄까 싶어서
입을 크게 벌려 보기도 했지요.
그러나 이내 아래로
다시 내려가 버려 사람을 괴롭히니,
아마도 병중에서도 보통 병이 아닌가 봅니다."
"음!"
제생당 주인(主人)은 눈을 지그시 감고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별안간(瞥眼間) 눈을 번쩍 뜨며 말을 했다.
"이제야 알았네. 그것은 병이 아니라
방귀가 탈출구(脫出口)를 찾지 못해
뱃속에서 방황(彷徨)하는 현상(現狀)일세.
자네 얼굴이 볼기짝처럼 생겼기 때문에,
방귀조차 어디가 위인지 아래인지 찾지 못해
아래로 내려갔다, 위로 올라왔다 하며
헤매고 있는 것이야.
내가 조위승기탕(調胃承氣湯)을
세 첩(貼) 지어 줄 테니,
그것을 달여 먹도록 하게.
그러면 방귀가 제 갈 길을 알아차려서,
병(病)이 깨끗이 나을 걸세."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북받쳐 오르는
웃음을 참느라고 배꼽을 움켜잡았다.
얼굴조차 빨개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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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부 26회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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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방랑기(돌파리 의원 편)
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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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28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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