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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5월’, 저항의 아이콘을 둘러싼 연대와 적대: 1968년 다니엘 콘-벤디트의 추방과 프랑스 공화주의의 모순적 메커니즘
정대성(鄭大星, 1969), 신동규(申東奎, 1976), 서양사론, 서양사학회, 2020. pp. 189-217
이 글은 다니엘 콘-벤디트를 중심으로 한다고 했다. 프랑스에서 태어났는데 콘-벤디트는 국적 선택권을 가질 나이가 되었을 때 독일 국적을 선택했다. 그가 독일에서 유명세를 얻은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 유명세가 프랑크푸르트 학생들에게 지지를 받는다.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전후에 맑스레닌주의를 전폭적으로 연구할 수 없었던 것은 그 학자들이 미국 망명 후에 돌아온 학적 경향이기도 하지만, 사고에서 미국에 포섭되었거나 포획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독일은 패전국으로서 미국의 점령군이 지배하고 사상을 통제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미국은 맑스레닌이도 소비에트주의도 아나키스트도, 공산당이든 사회당이든 자본주의의 대척점에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과 사상투쟁을 벌이는 젊은 세대의 트로츠키주의를 수수방관하는 것같이 보인다. 미국은 전후에 소련관련자들을 솎아내는 위해 매카시선풍을 일으킨바 있다.
콘-벤디트가 군대 입대 문제로 독일 국적을 선택했지만, 즉 알제리에 동원될 우려가 있다는 생각도 있었겠지만, 그 점에서 프랑스 우파에서도 좋은 인상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아나키스트인 것은 프랑스 좌파의 동의를 얻을 수 있지만, 그가 트로츠키주의자라는 것은 공산당에서는 거리감이 있었을 것이다. 트로츠키주의자들 중에는 소비에트에 반대하지 않지만, 스탈린주의에는 심하게 반대한다. 프랑스 좌파들이 맑스레닌을 수용하는 데 비해,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일부는 맑스-레닌도 소련연방의 옹호를 한다는 점에서 스탈린주의에 합류하는 것으로 보고 이들과는 분파를 달리 한다.
다른 하나는 그가 아세키나제 유대인이라는 점이다. 이점은 철학적으로도 미묘한데 세파라드 유대인과 달리 국가주의 또는 시오니즘을 드러내놓고 지지하지 않더라도 지지하는 쪽들이다. 프랑스 아나키스트들은 이런 국가주의적 경향으로 하는 아세키나제 유대인과는 거리를 둔다. 프랑스의 세파라드 유대인들이 아나키스트나 인민전선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것은 세계시민적 자유를 주장하고자 하며, 이런 의미에서 세파라드는 자본주의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공동체를 바란다는 점에서 공산주의와 가깝다. 현재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몰아내고 국가를 세우자는 쪽은 아세키나제 유대인들이며, 미국의 자본에 연관있는 유대인들이 주축이다. 시오니즘과 문제는 프랑스 카톨릭 우파에서는 드레퓌스 사건에서도 또한 독일치하에서도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낸 바 있다. 그 카톨릭 우파에 드골주의가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콘-벤디트를 독일로 추방하는 것은 우파들이었지만, 공산사회 건설의 방식에서 소비에트를 부정하는 흑색 트로츠키주의자에 대해 공산당도 거리를 둔다.
또 하나 조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프랑스인들이 말하듯이 친-중국파들이 누구냐는 것이다. 68년 5월에 친중국파 또는 청년마오주의자들은 세계 혁명으로 카스트로, 게바라, 마오, 호치민 등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 마오의 문혁 후반기에 대해 언급이 없다. 68년에 3M(맑스, 마오, 마르쿠제)이 등장했다는 것은 마틴제이의 글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프랑스 연구가들은 프랑스 대학생들이 프랑크푸르트의 마르쿠제를 읽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 프랑스 마오주의자들은 마오 또는 붉은 중국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마오의 문화혁명이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같은 기세였지만, 마오가 상하이 학생조직을 만난(67년 7월) 이후로 문화혁명의 성격은 달라지고 있었다고 후세에 평가한다. 그리고 68년 8월 이후는 중국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고 한다. 그럼에도 프랑스에서 마오주의자들이란 무엇을 지향하는 것인가. 중국 인민이 스스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인간이 평등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까?
프랑스는 프루동전통의 아나키스트들, 대혁명의 자꼬방파의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공상적 사회주의자라 불리는 공동체주의와 더불어 맑스-레닌을 수용하는 공산주의자들, 이들은 여러 실험과 실천적 과정을 거쳐 오면서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인간이 자유와 평등의 새로운 세상을 현실적으로(상상적으로가 아니라) 만들 수 있다고 하고 노력한다. 아마도 이런 낙관과 정열은 루소의 전통에서 온 자연권에서 나올 것이다.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자연권을 인간 본성(la nature humaine)을 잘 닦으면 인간이 스스로 만들 수 있고 실행(자치)할 수 있다고 한다. 크게는 자연을 잘 닦으면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보게 되면, 생태론(에콜로지)자가 될 것이다. 이런 사유의 흐름에서, 세계의 어느 곳에서든지, 소비에트 연방, 쿠바, 볼리비아, 중국, 베트남 등에서 자주성과 자치로서 자유에 대해 좌파들을 지지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미묘하게 프랑스 좌파는 자신들의 역사와 사상 속에서 공산사회와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보이지 않는 민족적 자부심 같은 것이 들어있다. 이런 민족주의가 또한 좌파들 사이에서도 계열들을 갈라놓는 것으로 보인다. - 풀어야 할 방식은 인간이 자연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 방어하는 사회를 혼성(composition, 조화)하였듯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인성은 인간 스스로 함양할 수 있을까? 이 둘째 이야기에서 주체의 완전성과 그 주체를 성립을 주장하는 종교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프랑스 이 종교에서 벗어나는 중이라 하지만, 여전히 그 종교 속에 있다. 20세기말에 프랑스에 카톨릭 신앙자는 8할 정도라고 하지만, 실제로 매주 교회를 가는 이는 15%정도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벗어나는 중이라 하지만, 21세기의 프랑스 선거를 보면, 여전히 형이상학적으로 상층을 착각으로 여기고 있기에 아직은 4할이 넘는 인구가 상층의 신앙에 들어있다. (55TLH)
서독에서는 미국의 지배하에 맑스를 제대로 읽지 않지만, 프랑스의 공산당, 특히 좌파 철학자들은 맑스를 제대로 읽자고 한다. 이 차이가 프랑스 5월과 독일 5월의 차이를 보여줄 것이고, 영미계통의 5월과 다른 점이기도 하다. - 독일-미국식으로 비판적 읽기와 새로운 사회 건설을 필요로해서 읽은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미국이 붉은 사상을 지금도 악으로보는 이유에는 유대-크리스트 사상이 들어있다. 이들은 크리스토스가 선이고 이를 거부하는 이들이 악이기 때문이다. - 이런 사고는 탐만치(貪慢癡)에 빠진 공상 또는 망상이다. 흄을 제대로 읽지 않은 칸트에서 오는지도 모른다(55TMB)]
**구호에 대하여 – 참조1에 여러 구호들이 있다.
- 68년 5월의 슬로건과 벽문구들이 많다. - [영어판 위키와 한글판 위키를 조심하자.]
- 프랑스판 여러 곳에서 등장하는 공통적인 문구와 근거는 아래와 같다.
(“사실적이어라. 불가능을 요구해라”)
« Soyez réalistes, demandez l'impossible » (après ‘les accords de Grenelle’)
(족쇄 없이 즐겨라 “방해 없이 즐기자”)
« Vivre sans temps mort et jouir sans entrave », conclusion du célèbre pamphlet De la misère en milieu étudiant rédigé en novembre 1966 à Strasbourg, par le situationniste et syndicaliste étudiant Mustapha Khayati, abusivement modifié plus tard comme « Jouissez sans entraves »; [카야티(Khayati,s.d.) 튀니지출신 프랑스정치학자. 맑스주의자]
(“선거는 바보들의 함정이다”)
« Élections, piège à cons »;
(차도를 들쳐라 해변이다. "자갈 아래는 바다이다")
« Sous les pavés, la plage ! », apparu dès mars 1968 dans l'une des répliques, lors de la première représentation de la pièce d'Armand Gatti, Les Treize Soleils de la rue Saint-Blaise, selon le témoignage oculaire de Marc Kravetz, qui rencontre Gatti ce soir là117. Daniel Cohn-Bendit en fait en 1976 le titre de son journal culturel local, Pflasterstrand.
(공화국 보안 기동대가 나찌 친위대이다)
« CRS = SS » (Slogan inventé lors des grèves des mineurs du nord de 1948120 et repris en 1968) et popularisé lors de la grève des dockers de 1949-1950.
[공화국 보안 기동대(les compagnies républicaines de sécurité (CRS)]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 Il est interdit d'interdire ! » 121), une boutade lancée sur RTL par le fantaisiste Jean Yanne, puis repris également comme une boutade le 22 mai par Alain Geismar en réponse à une question d'un journaliste de l'ORTF sur l'éventuelle interdiction d'une manifestation protestant contre l'interdiction de territoire de Daniel Cohn-Bendit et les risques de violences.
* 영어 위키에서 구호라고 나온 것 중에 두 가지만 .. 이런 문구는 없다.
- Marx, Mao, Marcuse! Also known as "3M".
- "I love you!!! Oh, say it with paving stones!!!" (55TLB)
Ⅰ. 머리말
Ⅱ. 반파시스트 망명자의 아들에서 아나키스트로: ‘3월 22일 운동’의 조직과 ‘직접행동’의 실천
Ⅲ. 독일 아나키스트에서 저항의 아이콘으로: ‘권력에 상상력을’, ‘상상력에 권력을’
Ⅳ. 연대에서 적대의 동원으로: ‘우리는 모두 독일 유대인이다’ vs. ‘콘-벤디트는 독일로’
Ⅴ. 맺음말
# 내용 중에서 * ‘파리의 5월’, 저항의 아이콘을 둘러싼 연대와 적대:.... *
Ⅰ. 머리말 190
특히 자연권으로 규정된 ‘자유’와 ‘압제에 저항할 권리’가 모든 인간이 누려야 할 근본적이며 소멸하지 않는 권리가 아닌, 자의적으로 규정되는 원칙임을 드러낸다. 즉 1789년 인권선언에서 자연권을 가지는 ‘인간과 시민’이라는 거창한 대상은 실상 인간과 시민의 교집합으로 제한되며, 그 공통분모가 법으로 인정된 ‘시민’임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시민이 아니라면 그 권리가 언제든지 정치적으로 제한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셈이다. (191)
이러한 배제와 통합의 논리, 즉 배제를 통한 통합의 논리가 확인되는 장이 1968년 5월 30일 ‘침묵하는 다수(Majorité silencieuse)’가 주도한 드골지지 집회였다. 또한 이 집회는 드골주의자와 극우 민족혁명론자들[왕당파와 카톨릭]의 연대의 장이기도 했다. (191) [극우 민족혁명론자들이란 표현은 이상하다. 왕당파와 카톨릭세력으로 국가주의자들이며 자본주의 옹호파들이다.]
반이민 담론을 중심으로 부상하게 되는 민족전선(Front National)이 자라나는 토대이자 씨앗이었다.4) (192) - [알제리를 폭압 진압에 참여했던 르펜의 딸인 마린 르펜("Marine" Le Pen, 1968-)이 이끌고 있는 극우파 ‘국민전선’이라 부른다.]
Ⅱ. 반파시스트 망명자의 아들에서 아나키스트로: ‘3월 22일 운동’의 조직과 ‘직접행동’의 실천 192
‘붉은 다니(Dany Le Rouge)’로 유명한 다니엘 콘-벤디트는 1968년 세계적 차원으로 확산된 저항의 중심에 자리한 프랑스 학생운동을 이끌던 주요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192) [부친은 아세키나제 유대인, 트로츠키주의자.]
나치 정적 박해의 신호탄인 베를린 국회의사당 방화사건 이후 탄압을 피해 파리로 건너온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한나 아렌트, 막스 오퓔스(Max Ophüls) 등 다른 망명 지식인들과 교류하였던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193)
특히 1967년 6월 2일 베를린에서 베노 오네조르크(Benno Ohnesorg)가 시위도중 경찰의 총에 살해당한 사건에 큰 영향을 받고 서독을 자주 오갔다. (195)
콘-벤디트는 1968년 1월 8일 낭테르대학의 수영장 개관식에 참석한 프랑수아 미소프(François Missoffe) 체육청소년부 장관과의 논쟁으로 유명세를 탄다. 콘-벤디트가 지난해 출간된 미소프의 청년백서(Livre blanc sur la jeunesse)에 청년의 성문제가 단 한 줄도 언급되지 않은 이유를 물으며 벌어지는, 훗날 68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으로 기억되는 이 대화는 짧지만 민감한 설전이었다.17) (195)
3월 21일 파리에서 열린 베트남전 반대 시위에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사무실 유리창이 박살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낭테르대학 학생도 체포된다. 학생 연행에 항의하기 위한
낭테르대학 행정건물 점거에 콘-벤디트도 함께 한다. (196) [68, 5월의 발단은 여기서부터 이다. 좌파학생들이 베트남에서 미군의 잔인한 인민학살의 필름을 본 날이다.]
콘-벤디트는 3월 22일 운동의 “힘은 바로 ‘통제 불가능한 즉흥성(spontanéité incontrôlable, 자발성)’에 의거한다는 점”을 강조하며,24) 혁명적인 투쟁 조직은 이데올로기적인 정치노선이 아니라 다름 아닌 직접행동에서 나온다고 밝혔다. 그런데 3월 27일, ‘프랑스전국학생연합(UNEF)’에서 분리된 우파 학생조직인 ‘프랑스전국학생연맹(FNEF)’ 학생들에 대한 불법 폭력행위 가담 혐의와, 자기 이름을 딴 ‘(가짜) 화염병’ 제조법 설명 혐의로 콘-벤디트가 체포된다. (197)
4월 11일, 미국에서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암살당한 1주일 뒤 베를린 백주대로에서 독일 68의 아이콘 루디 두치케(Rudi Dutschke, 1940-1979)가 극우 성향 청년 노동자의 총에 맞은 것이다. (197)
Ⅲ. 독일 아나키스트에서 저항의 아이콘으로: ‘권력에 상상력을’, ‘상상력에 권력을’ 198
이날(5월 3일) 정오에 학생 수백 명이 소르본 교정에서, 낭테르 학우가 소르본 징계위원회로 소환당한 사실을 알리고 항의 시위를 벌이는 도중 한 학생이 공산당(PCF)[사회당] 기관지 뤼마니떼(L’Humanité)에 실린 조르주 마르셰(Georges Marchais)의 글을 낭독한다. “독일 아나키스트 다니엘 콘-벤디트”가 이끄는 ‘3월 22일 운동’의 “사이비 혁명가들”을 폭로하자고 호소하는 글이었다. (198)
이미 5월 2일에 중도 우파 성향의 신문 미뉘뜨(Minute)도 “다니엘 콘-벤디트라는 혼돈”과 결별해야 한다며 그의 추방을 위협적으로 요구했다. (200)
같은 날(5월6일) 콘-벤디트는 소르본 연좌시위에서 초현실주의 시인이자 공산당원인 루이 아라공(Louis Aragon)에게 1930년대에 소련을 무비판적으로 찬양한 것을 해명하라고 요구했다. 아라공은 연좌시위장을 떠났고 저녁에 콘-벤디트는 TV에서 자신이 ‘스탈린주의적인 악당’과 함께 시위를 벌였다고 밝힌다. 뒤이어 공산당 기관지 뤼마니떼는 콘-벤디트를
‘사이비 혁명가’로, ‘독일 아나키스트’로 공격했다.33) (200)
[5월 10일] 약 25개의 바리케이드가 세워지고 상황이 고조되자 낭테르대학 교수이자 지식인 신좌파의 선구자에 속하는 알랭 투랜(Alain Touraine)이 중재에 나서 자정 무렵 소르본의 로슈 총장과 만난다. 콘-벤디트도 동행한다. (201)
난폭한 경찰력 투입은 격렬한 분노와 저항을 낳고 노동조합이 학생운동과 연대하게 만든다. 노동총연맹(CGT)를 비롯한 주요 노동조합은 5월 13일에 전국적인 24시간 총파업과 연대시위를 조직했다. (202)
5월 20일 누벨 옵세르바퇴르(Le Nouvel Observateur)가 콘-벤디트와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대담 인터뷰를 실었다. 당대의 가장 저명한 철학자이자 프랑스를 대표
하는 지식인 사르트르가 이제까지 해왔던 비판적이고 단호한 논객의 역할을 버리고 콘-벤디트의 주장을 듣는 위치가 되어 대담을 이끌어간다는 설정 자체가 ‘3월 22일 운동’과 그 중심에 있는 콘-벤디트의 위상을 방증해주는 일이었다.42)
“당신들의 행동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 행동이 권력에 상상력을 부여한다는 것입니다. 당신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상상력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 선배들보다는 훨씬 풍부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능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명확한 생각을 가지도록 키워졌습니다... 나는 그것을 가능한 것들의 장(champs des possibles)의 확장 부르고 싶습니다. 포기하지 마세요.43)” / 대담 중 사르트르가 언급한 “권력에 상상력을(l’imagination au pouvoir)”이라는 표현은 곧 이 인터뷰 제목으로 소개되었으며 68운동을 상징하는 구호로 확산했다.44) (203)
.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는 구호와도 연결되는 이 ‘새로운 상상력’은 68운동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특히 68운동의 많은 슬로건들이 그 의미가 확장되고 재전유되는 과정을 겪듯이 이 표현도 예외가 아니다. (204)
또한 콘-벤디트는 프랑스의 상황전개를 보면 노동자계급의 동원 가능성이 있다고 결론짓는다. 이는 일차원적 인간에서 노동자가 후기자본주의사회라는 체제에 완전히 편입되었다고 단언한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를 반박하는 것이었다. (205) [파리의 학생들은 당시 마르쿠제를 읽지 않았다고 증언한다]
Ⅳ. 연대에서 적대의 동원으로: ‘우리는 모두 독일 유대인이다’ vs. ‘콘-벤디트는 독일로’ 205
“콘-벤디트, 그것은 바로 우리다!”라고 일갈했다.50) 이런 슬로건은 “우리는 모두 독일 유대인이다”라는 가사가 담긴 도미니크 그랑주(Dominique Grange 1940-)의 「하류인생(La pègre, 1968)」이라는 노래를 통해 널리 퍼져나갔다. (206) [그녀는 1968년에 앨범을 내고, 여러 곡들을 발표했다.]
한편 드골은 5월 29일 돌연 자취를 감춘다. 위기 상황에서 대통령의 비밀스러운 부재는 많은 의혹을 자아냈다. 나중에 바덴바덴에 주둔하고 있는 독일주둔프랑스군(Force Française en Allemagne, FFA) 사령관 자크 마쉬(Jacques Massu, 1908-2002)를 만났다고 .. 이튿날 30일 다시 돌아온 드골은 전격적인 의회해산 선언으로 국면 전환을 시도한다. (207)
당시 78세인 노쇠한 대통령의 그 호소에, ‘침묵하는 다수’로 표현되는 드골주의자를 비롯한 우파는 전폭적이고 열광적인 지지로 응답했다. 5월 30일 드골파 정치인들이 조직한 대규모 집회에서 시위대는 민족주의적, 반독일적, 반유대적인 목소리를 담아 외쳤다. (207)
장-프랑수아 시리넬리(Jean-François Sirinelli)에 따르면, 이 시위는 1968년 5월을 수놓은 가장 중요한 집회였다.54)그만큼 1968년의 정치적인 국면을 전환시킨 중요한 집회였다는 의미이다. (207) .. 우파의 5월 30일 집회를 통해 일차적인 성공을 알렸으며, 6월에 열린 총선에서 드골파의 압도적인 승리로 연결됐다. (208)
급진 좌파가 머리 위로 치켜 올린 주먹을 통해 파리코뮌, 러시아 혁명, 인민전선과의 연대를 표했다면, 우파는 레지스탕스와 파리 해방의 기억을 소환했다.56) (208)
“콘-벤디트의 붉은 파시즘[공산주의적 파시즘]과 검은 나치즘[아나키즘적 나치즘]에 대한 반대”를 토해냈다.58)아나키스트를 상징하는 흑기와 노동자 국제주의를 의미하는 「인터내셔널가」에 특히 반감을 가졌던 드골 지지자들에게 콘-벤디트는 프랑스를 분열시키는 악의 상징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5월 30일 집회에 참가한 극우 조직 ‘옥시당(Occident)’의 활동가들도 이러한 시각에 동의하고 있었다.59) (210)
드골의 지지자들은 “공화국이 위험에 처했다”는 슬로건으로 결집해, 공화국의 상징인 삼색기와 라마르세예즈」를 배경으로 무명용사 추모 의식을 거행했으며, 1794년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가 극찬했던 혁명가인 “출정가(Chant de départ)”를 부르면서 행진을 이어나갔다. 이는 공화국을 만든 프랑스혁명의 전통을 계승하는 행위로 인식되었다.63) (211)
당초 드골주의자들과 극우의 결합을 우려했던 프랑스 공산당은 극우파를 포괄하는 우파의 결집을 실제로 목도하며 1934년 2월 6일에 일어난 극우주의자들의 반의회주의 폭동을 떠올렸다.64) 그러나 프랑스 공산당 진영도 사회 혼란을 조장한다고 간주된 무정부주의에 대한 반감과 애국주의에 입각한 공화국 수호의 감정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이미 공산당의 마르셰가 아나키스트 학생운동 세력을 ‘사이비 혁명가’라고 비판한데 이어, 6월에 총선 국면이 닻을 올리며 당 서기장 발덱 로셰(Waldeck Rochet, 1905-1983)는 오히려 ‘공산주의자들의 애국심’을 공개적으로 강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국제주의를 금과옥조로 삼는 공산당의 ‘애국주의로의 투항’이라는 역설적인 장면도 그렇게 완성을 향해 나아갔다. (211)
Ⅴ. 맺음말 212
1968년 5월 콘-벤디트가 프랑스 정부와 국가수반 드골에게 선언한, “자기가 태어나고 지금 살고자 결정한 곳에서 계속 활동하기 위해 프랑스에 돌아가고 싶다”는 외침의 묵살은, 자연권을 향유할 수 있는 조건이 다름 아닌 국적을 통한 ‘국민됨’이라는 점을 잘 보여주었다. 콘-벤디트의 추방 논리에서 드러나는 것은, 자연권을 지키기 위한 1789년 국민주권(souveraineté nationale)의 원칙이 1968년에는 자연권을 억압하도록 작용한다는 점이다. (212) - [I. 머리말에서 자연권을 언급하고 본문에 다루지 않고 있다가, V. 맺음말에서 다시 ‘자연권’울 언급한다. 68 대사건이 인민주권에서 자연권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혁명적이다. 그러나 68과정에서 현상적으로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사실상 철학에서, 53년 스탈린 사후 인성문제를 깊이 고민하고 68년에 이르기 전에 이미 스피노자 연구와 니체연구에서 자연권의 의미를 그리스 철학으로 돌아가자는 의미로 제기한다. 이런 과거에 대한 재인식이 구조주의의 착각에서 벗어나 후기구조주의로 향하는 것이다. 독일이 인성과 기원을 다루지 않은 현상학에 머물면서 프랑크푸르트학파 이래로 아직도 근대성과 후기근대성을 다루는 것은 독일의 학문이, 마치 크리스트교의 사고대상을 실재로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스콜라주의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현상적 모습은 21세기 국제정치에서도 드러난다. 앵글로색슨의 원자론적 관념연합과 논리실증주의 통일론을 바탕으로 제국을 형성하였는데 그 제국의 두 마름을 두고 있다. 유럽에서는 독일이며 동양에서는 일본이다. 미국(영국), 독일, 일본 등이 앵글로색슨 학문에 젖어서, 논리의 절대적 통일성하에 접근하는 형이상학적 입장을 고수한다. 일본은 흥미롭다. 크리스트교가 아님에도 관념의 절대성을 바탕으로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은 천황제가 현실정치의 상부와 암묵적 결탁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제국은 천국(본질)의 실재성, 논리구조의 완전성과 부동성, 국가 권력의 모오류성이 함께 결탁하여 명령체계를 만드는 것이다. 이 결탁에서 미국의 군사력 그늘에 있는 몇몇 국가들은 제국의 포로가 되어, 그들의 정치가와 장치들이 매판세력이며 종속일 수 밖에 없다. (55TKC)
다니엘은 “콘벤디트를 다하우로!”라는 끔찍한 구호의 표적이 되어야 했다. ... 이러한 ‘배제의 논리’는, 나치가 펼쳐낸 ‘절멸의 논리’와 반유대주의라는 공통분모를 가진다. 참혹한 대학살의 실행으로 종지부를 찍은 나치 역사도 결국은 그 ‘배제의 논리’에서 시작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213) - [배제의 논리 사용이 우파의 것들이 아닌가? - 68의 대사건은 우파 드골의 몰락이지 프랑스 지성인의 몰락이 아니다. 논자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독일의 우파가 유대인 박해하듯이, 프랑스 드골 우파는 극좌인 아나키스트인 벤디트를 박해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아나키스트를 배제에 올릴 수 없다. 아마도 프랑스 공산당이 그를 트로츠키주의자로 몰았던 것을 우파가 공산당에게 배제된 벤디트를 희생 제물로 드골 우파가 절대권(무오류권)을 만들려고 했으나, 다음해 프랑스 인민은 드골정권을 불신임하고, 드골이 정치에서 물러나게 된다. (55TKC)]
(8:07, 55TKC: 수정 55TL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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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8 시에예스(Emmanuel Joseph Sieyès, 1748-1836) 프랑스 정치가. 그는 프랑스 혁명과 통령정부의 중요인물,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1859 조레스(Jean Jaurès, 1859-1914) 프랑스 철학자, 정치가. 벩송과 동기동창.
1890 드골(Charles de Gaulle, 1890–1970) 카톨릭, 프랑스 군인, 대독 자유프랑스 힘(Forces françaises libres, FFL) 지도자, 5공화국 건설(1958)과 5공화국 대통령(1959–1969). 임기가 72년까지 인데도, 국민투표 결과로 1969년 4월 27일에 스스로 사임했다. 1969년 4월 27일 지방자치제와 상원의 개혁안에 대한 국민투표는 52.4%의 반대에 부닥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결됐다.
1897 아라공(Louis Aragon, 1897-1982) 프랑스 소설가, 기자. 1930년대 소비에트 옹호자.
1901 로쉬(Jean Roche, 1901-1992) 의사. 생화학과 생리학 전문, 1961-1969년 파리 대학 총장, 68년 5월 2일 핵심이었다.
- 로쉬는 68년 5월 2일 사건들의 핵심에 있었다. 그때 300여명의 학생이 베트남에 관한 필름의 상연을 위해 대형 강의실을 접수했었다. 15시에 도착한 역사교수 르네 레몽(René Rémond)은 장소를 양보할 것을 거절했다. 문교부 장관 알래 뻬이르피뜨(Alain Peyrefitte)의 긴급 위임을 받아 총장 로쉬가 소르본으로부터 갔다. 학장 그라뺑(Pierre Grappin)은 3월 29일과 30일처럼 낭떼르 대학을 폐쇄했다. 다음날 한 번 더 소동이 일어날 것이다.
1905 로셰(Waldeck Rochet, 1905-1983) 프랑스 정치가, 프랑스 공산당 서기장, 공산당 지도를 인민전선에서부터 또레즈(Maurice Thorez, 1900-1964)를 계승했다.
1908 마쉬(Jacques Massu, 1908-2002) 프랑스 군인, 2차대전시 드골부대 소속(compagnon de la Libération), 전후 독일 주둔 프랑스 사령관.
1919 미소프(François Missoffe, 1919-2003) 프랑스 정치가, 장관, 외교관.
1920 조르주 마르셰(Georges Marchais, 1920-1997) 프랑스 정치가, 1972년 공산당(PCF) 서기장으로 취임(1972-1994).
1925 뚜렌(Alain Touraine, 1925-) 프랑스 사회학자. 5월에 학생편에서 총장로쉬 사이에 중재자.
1929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년 4월 4일) 미국 침례교 목사, 인권 운동가, 흑인 해방 운동가, 권리 신장 운동가, 196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1940 오네조르크(Benno Ohnesorg, 1940-1967) 서베를린 독일학생, 67년 6월 이란 팔레비왕의 공식방문에 항의하는 데모에서, 경찰의 총에 머리를 맞고 사망. 1968년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1940 그량쥬(Dominique Grange, 1940-) 프랑스 여배우, 작곡가, 정치 운동가. 앨범으로 : Chansons de Mai 68, 1968(Expression spontanée) 곡으로 Chacun de vous est concerné / À bas l’État policier / ‘La Pègre(하류인생)’ / Grève illimitée
1940 루디 두치케(Rudi Dutschke, 1940-1979) 독일 정치가 활동가(un activiste). 독일 서독에서 68년 학생운동으로 잘 알려졌다. Jeder hat sein Leben ganz zu leben, 2005
1945 콘 벤디트(Daniel Cohn-Bendit, 1945-), 독일부모로 프랑스 태생, 독일과 프랑스에서 정치활동, 성년시 독일국적 선택, 2015년 프랑스 국적. 아나키스트, 반나찌. 인성자유운동가(Militant libertaire), 낭떼르에 대학을 다니다가 68년 5월의 대변인 중의 하나였다. 마오주의자.
1949 시리넬리(Jean-François Sirinelli, 1949-) 프랑스 역사가, 파리정치연구소 교수. 학위 논문 20년간 재수반과 사법학생들: 지식인세대 정치적 역사(Khâgneux et normaliens des années vingt : histoire politique d’une génération d’intellectuels (1919-1945) (XXI + 2117 p. dacty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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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박단(朴檀, 1960-) 서강대, <Les pratiques unitaires entre les syndicats, les fédérations et les unions départementales : C.G.T.-C.G.T.U. de 1929 à la réunification syndicale de 1936, Paris 1, 1995, Jean-Louis Robert.> “68혁명과 ‘새로운 파리 대학’의 출현(2014)”(서강인문논총), “‘68혁명’과 극우학생운동-옥시당(L’Occident)의 활동을 중심으로-, (2018)”(Homo Migrans)
1969 정대성(鄭大星, 1969), 부산대 역사교육학과, <Die 68er-Bewegung und die Anti-Springer-Kampagne in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2014, Univ. Bielefeld, Ingrid Gilcher-Holtey.> “독일과 프랑스 68혁명의 결정적 사건과 5월의 폭발(2018)”(역사학보) “‘파리의 5월’, 저항의 아이콘을 둘러싼 연대와 적대-1968년 다니엘 콘-벤디트의 추방과 프랑스 공화주의의 모순적 메커니즘-(2020)”(서양사론)
저서 철학, 혁명을 말하다 : 68혁명 50주년(이학사, 2018)
번역: 길혀홀타이(Ingrid Gilcher-Holtey, 1952-), 68혁명, 세계를 뒤흔든 상상력: 1968 시간여행(1968. Eine Zeitreise, 2008)(창비, 2009), 68운동: 독일, 서유럽, 미국(Die 68er Bewegung: Deutschland, Westeuropa, USA, 2001(2006, 들녘)
1976 신동규(申東奎, 1976) 창원대 <[미기록], 2009, Paris I Pantheon-Sorbonne, Michel Dreyfus.> “1968년 저항 확산의 논리와 총파업-정치적 측면의 복원과 ‘영광의 30년’의 위기-(2018)”(프랑스사 연구), “1968년의 결정적 사건과 위기 요소의 초국적 순환, 2019,”(인문연구, 인문과학연구소), “‘68운동’과 횡대서양(transatlantic) 저항 네트워크: 세계혁명론 비판과 트랜스내셔널 전망, 2019)”(코기토, 인문학연구소), “68운동의 동원 메커니즘과 노스탤지어―인민전선과 연대의 기억, 2020)”(역사비평, 역사문제연구소), “‘파리의 5월’, 저항의 아이콘을 둘러싼 연대와 적대-1968년 다니엘 콘-벤디트의 추방과 프랑스 공화주의의 모순적 메커니즘-(2020)”(서양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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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전선: 1935년 제7회 코민테른(Komintern, 1919-1943) 세계 대회에서 불가리아 공산당의 지도자이자 공산주의 혁명가인 게오르기 디미트로프(Georgi Dimitrov, 1882-1949)에 의한 제창 후 유래, 확립되었으며, 프랑스, 스페인, 칠레에서 집권하여 노동 개혁, 사회 개혁 등을 실현했다.
스페인 내전(1936-1939) - 공화국 건설파(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자유민주주의)와 반란파/프랑코(왕당파, 카를리스타, 자본가, 팔랑헤, 공화주의) 사이의 내전인데, 전자에 주도인물이 없었고, 후자에는 프랑코가 운좋게 지도위치에 있었다. 이미 계열들의 연결, 순접, 이접, 역접이 있었다. 알제리 전쟁(Guerre d'Algérie)은 1954년부터 1962년까지 프랑스와 알제리 독립 운동 세력이 벌인 독립 전쟁으로, 결국 알제리는 프랑스에서 독립을 얻었다.
장 조레스 재단(La Fondation Jean-Jaurès) 1992년 사회주의자로 총리를 지낸 모르와(Pierre Mauroy, 1928-2013) 창설하였다. 이 재단은 조레스 가족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현재로 활발한 활동을 하는 이 재단을 2013년 이래로 사회당 소속으로 법무부 장관을 지낸 날레(Henri Nallet, 1939-)가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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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슬로건
« Il est interdit d'interdire ! »
« Nous sommes tous des étrangers ! »18;
« Nous sommes tous des juifs allemands ! »18;
« De Gaulle interdit de séjour ! »18;
« Ce n'est qu'un début. Continuons la lutte ! »18;
« La censure est dans la rue ! »18;
« À l'Assemblée ! »18;
« Révolution ! »18
«Chacun est libre d’être libre» ;
«Un homme n'est pas stupide ou intelligent : il est libre ou il n'est pas» ;
«La liberté d’autrui étend la mienne à l’infini» (citation attribuée à l'anarchiste Bakounine);
Slogans en lien avec l'actualité immédiate
« Prenez vos désirs pour des réalités » (après les accords de Grenelle)
« Soyez réalistes, demandez l'impossible » (après les accords de Grenelle)
« Retour à la normale… » (après les accords de Grenelle)
« Nous sommes tous des Juifs allemands »
(À l'occasion de l'interdiction à de Daniel Cohn-Bendit de rentrer en France)107,108, après débat et vote, l'affiche est en fait rebaptisée, « Nous sommes tous indésirables »109) puis n'est pas affichée.
« La chienlit, c'est lui ! » (en réponse aux propos du Général de Gaulle, avec son ombre en fond d'affiche).
« Sois jeune et tais-toi ! » (en réponse aux propos du Général de Gaulle, avec son ombre en fond d'affiche).
« Tout, tout de suite » exprimant le présentisme110.
Slogans situationnistes contre le temps perdu par l'aliénation, le travail et les bureaucraties
« Vivre sans temps mort et jouir sans entrave », conclusion du célèbre pamphlet De la misère en milieu étudiant rédigé en novembre 1966 à Strasbourg, par le situationniste et syndicaliste étudiant Mustapha Khayati, abusivement modifié plus tard comme « Jouissez sans entraves » ;
« L'ennui est contre-révolutionnaire » écrit par le situationniste René Riesel le 22 mars à Nanterre puis par Mustapha Khayati et lui, militants de l'Internationale situationniste, pour le comité des occupations de La Sorbonne111,112;
« Nous ne voulons pas d'un monde où la certitude de ne pas mourir de faim s'échange contre le risque de mourir d'ennui », sur les murs selon le Figaro du 18 mai 1968113 et cité dans "Le Monde" le 31 mai 1968, évoquant par ailleurs Daniel Cohn-Bendit le disant dix jours plus tôt, sans en citer l'auteur114,115;
« Ne travaillez jamais » , slogan écrit dès 1963 par Guy Debord, cofondateur de l'Internationale situationniste;
« Une société qui abolit toute aventure, fait de l'abolition de cette société la seule aventure possible », du membre de l'Internationale situationniste Raoul Vaneigem116;
« Ceux qui font les révolutions à moitié ne font que se creuser un tombeau », (Citation de Louis Antoine de Saint-Just);
« Élections, piège à cons »;
« Sous les pavés, la plage ! », apparu dès mars 1968 dans l'une des répliques, lors de la première représentation de la pièce d'Armand Gatti, Les Treize Soleils de la rue Saint-Blaise, selon le témoignage oculaire de Marc Kravetz, qui rencontre Gatti ce soir là117. Daniel Cohn-Bendit en fait en 1976 le titre de son journal culturel local, Pflasterstrand.
그래피티
[Soyez réalistes, demandez l'impossible ]
[La liberté est le crime qui contient tous les crimes. C'est notre arme absolue !,]
# 우리나라에 알려진: 슬로건과 그래피티 – 영어판 위키를 조심하라!
Il est interdit d'interdire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Jouissez sans entraves (“방해[족쇄] 없이 즐기자”)
Élections, piège à con (“선거는 바보들의 함정이다”)
Je suis Marxiste—tendance Groucho. (“나는 Groucho 경향의 마르크스주의자이다”)
[이것 영미판이 쏟아낸 이야기다.]
Cela nous concerne tous. (“이건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Soyez réalistes, demandez l'impossible. (“사실적이어라. 불가능을 요구해라”)
When the National Assembly becomes a bourgeois theater, all the bourgeois theaters should be turned into national assemblies. (점령당한 Odéon 극장 위에 쓰여진 말이라는데, 원어는 불어겠지, 찾을 수 없었다.)
Sous les pavés, la plage! ("자갈빠베 아래는 바다이다")
대표적인 거짓말: 프랑스 학생들이 3M을 외쳤다고 하지만 그 글은 마틴 제이의 “프랑크푸르트 학파” 속에서 썼다고 영어 위키에 주석이 달려있다.
(55TK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