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지주조검간(與地主趙黔澗)
山庵賞雪 之遊溪堂 詠月之樂 實窮鄕 第一勝會 亦浮生 難再盛事 然잔地一別 奉承末易 向逞之心 未嘗暫弛 伏惟春和 視篆道體 起居對序益福 閤下以德爲政 以學爲課 公退之暇 輒與諸生 詠詩讀書 稽疑問難 從此吾州 彬彬爲文學之鄕 而如琡者 亦在風下 愛戴艶服之心 曷可勝已 弊郡古有 三足堂金先生 乃濯纓翁之猶子一 自史禍 後本孫奔竄圖生久 而不振墳墓 之在境內者埋沒於 荒烟宿莽之中 行路爲之指點 而流涕 嘗聞賢者之墓 古有封之者 伏願閤下 使山下閑民 一二戶除役 而禁其樵牧 則玆豈非崇賢重道 之一盛事乎 無任懇祝之至
지주 조검간에게
산중의 암자에서 설경(雪景)을 감상하는 놀이와 개울 가 초당에서 월광(月光)을 읊조리는 즐거움은 참으로 산중의 더없는 놀이이자 이속세에서는 두번 다시 얻기 어려운 즐거운 일이옵니다.
그러나, 무단히 한번 작별한 뒤로 쉽사리 뵙지 못하니, 뵙고 싶은 마음 잠시도 수그러지지 않습니다. 화창한 봄철에 공무 중 (視篆: 전(篆)은 관인(官印)인데 공무(公務)를 상징함) 도체(道體)의 기거(起居)가 계절 따라 더욱 복되신지요? 합하께서는 덕으로써 정사를 보시고 학문으로써 일과를 삼으십니다. 공사에서 물러나신(公退:퇴근) 시간이면, 제생들과 더불어 시를 읊조리고 글을 읽으시며 의심나는 곳은 상고하고 어려운 글은 질문해 주신 덕으로 우리 고을은 그 뒤로부터 찬란한 문학의 고을이 되었으니, 저와 같은 자도 합하의 교화 밑에서 사랑하고 떠받들며 심복하는 마음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희 군에 옛날에 삼족당(三足堂) 김선생이란 분이 있었는, 곧 탁영 옹(濯纓翁)의 조카가 되는 분입니다. 사화(史禍:연산군4년(1489)에 있은 무오사화를 말함)가 있은 이후로 그 본손(本孫)들이 도망쳐 숨어 살아오기 때문에 오래도록 보잘것이 없습니다. 경내(境內)에 있는 분묘가 풀섶 속에 묵어 있으니, 길가는 행인들이 가리키면서 눈물짓는 형편입니다. 일찍이 들으니, 현자의 묘를 옛적에 봉한 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엎드려 빌건대, 합하께서는 산 밑에 사는 한민(閑民) 한두 집으로 하여금 부역을 면제해 주셔서 그 나무하고 소먹이는 사람 출입(出入)을 금(禁)하게 하심다면, 이는 어찌 어진이를 존숭하고 도를 존중하는 일대 성사가 아니겠습니까? 간절하게 바라옵니다.
여조검간(與趙黔澗)
再昨有自 城邸還者 傳言閤下 遞任將歸 固知枳棘 非鸞鳳之 所久棲者 但多士依庇之道 群黎구哺之勞 屬之何人 而遽有此 決然捨去也 固창缺之不已 伏惟此時 政體起居萬重 許多公簿 亦已了勘 而以何間裝發邪 蓋琡之於 閤下均被之化 衆所同之 而薰濡餘實 有所感發者多 古所謂上 有易事之長者 今之謂也 將與재齊民 圖所以爲 攀轅臥轍之計 貳竊恐閤下 不爲我淹留矣 玆修尺書略伸 寸침伏冀鑑亮
조검간에게
엊그저께 현감에서 돌아오는 자의 말을 들으니 합하께서 체임(遞任)되어 장차 돌아가실 것이라는 말을 전해듣고, 이 작은 고을이 합하께서 오래 머무실 곳이 못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오나, 많은 선비들을 보살펴주는 일과 백성들을 따스하게 길러주는 일을 누구에게 맡기시고 갑자기 이렇게 떠나가신단 말입니까. 참으로 허전하고 섭섭한 마음 그지없습니다. 요즘 정체(政體)의 기거(起居)만중(萬重)하오신지 허고많은 공부(公簿:공문서)를 이미 다 처리하시고 또 어느 사이에 떠나실 행장을 차리셨나이까. 저는합하(閤下)에게서 크나큰 교화를 받았는데,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교화를 받을 때에 감동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옛말에, 위로 섬기기 쉬운 어른을 두었다고 한 말이 있는데, 그것은지금의 저를 이르는 말입니다.생각 같아서는 고을 백성들과 함께 떠나는 수레바퀴를 잡고 그 앞에 누워서 만류하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아마도 합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머물지 않을 듯하기에 이에 서신을 올려서 저의 충심을 전하오니살펴주시기를 바란다.
위글의 저자 용암공은 휘(諱)는 숙(琡)이요 자(字)는 이헌(而獻)이며 호(號)는 용암(龍巖)이니 성(姓)은 박(朴)이요 본관(本貫)은 밀성(密城)이다. 서기1578년1월29일 父 慶延, 母 晋州姜氏의 四男
으로 청도군 이서면 수야리에서 출생.
1592년 4월 13일 倭賊이 동래성을 침범하고, 4월20일 淸道 地境에 왜적이 침입하니국난에 大義를 앞세워 從淑父 慶傳(悌友堂)이 喪身을 불구하고 형제,숙질을 동원하고 백성을 규합하여 倡義의 깃발을 높이들고 起兵하니 그때 龍巖公은 十五세로 근근히 부형의 허락을 받아 兄 璨, 瑀를 따라 從軍하다.
1605년 선조三十八, 二十八세 壬辰亂의 功을 褒賞하여 宣武原從功臣錄券이 頒布되니 중부 三友亭公(慶新)이 一等으로 외 十一義士가 각각 錄功되니 公은 三等에 되다. 당년에 軍資監奉事를 除拜하다.
1612年 광해4년 三十五세 薪旨 玉兎峰下에 새로이 基地를 마련하여 家宅을 築造하여 龍巖精舍라 扁을 달고 自號를 龍巖이라하다. 趙黔澗公(靖)이 本粹(군수)로 到任하여 交友하고 李蒼石(埈), 金東籬(允安), 孫오漢(起陽), 李松塢(洵)등 諸賢과 道義교하다.
1639年 인조17 一月十五日 龍巖精舍에서 終하다.
1835年 헌종一年 公歿後 197년후 淸道郡 伊西面 鶴山里 龍岡에 忠烈祠를 築하고, 十四義士를 享祀하다. 公은十一位에 奉安하다.
위의 글은 6월1일부터4일까지 전남 해남군에 검간 선조의 현감시절의 기록과 유애비를 찾으려고 해남문화원을 방문하고 향토사학자 임상영선생을 만나서 기록이나 비에 대한 문의를 하였으나 찾을수 없어 검간선생문집을 기증하고 앞으로 기록이나 비석이 발견되면 연락을 하기로 약속하고 천일한정식집에서 저녁을 대접하고 여관에서 자고 아침을 먹고난뒤 직접확인해 보려고,옛날의 비석이 있다는 해남군 일원 네곳을 답사 하였으나 어느곳에서도 유애비는 찾을수 없었다. 허탈한 마음을 뒤로하고 고산 윤선도 선생의 보길도 녹우당을 답사하고 나와서 오후6시가 넘어서 남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진주로 와 국도를 달려서 청도에 도착하니 새벽1시30분이 지나서 여관에서 자고 아침을 먹고난뒤 청도읍사무소에 들어가니 일요일인데 세분의 당직자 권미정씨의 안내로 향토사학자 박윤제선생의 댁을 방문하여 차를 마시며 환담하니 박선생은 검간선조에 대해 잘알고 있으며 용권이가 하고 있는 경상북도문화관광해설사협회장을 맡아 하며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는 분인데
이곳 청도에도 문서로된 기록은 찾을 수 없다는 말에 허탈한 마음을 금할수 없었으나 6년동안이나
군수를 하시는 이 지방의 사족들과의 괸계가 분명히 있을것이라는 생각에 평소에 알고 있는 박동기씨를 만나려고 전화를 해도 통화는 되지 않아 물어물어서 금천면에 집을 찾아가니 반갑게 맞아
주며 다과을 하면서 이야기 도중에 용암유집을 꺼내서 이책에 검간선생의 기록이 있다는 이야기에 몇일동안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하다가 두 문장의 글을 보니 기쁜 마음 한량이 없었다.
이책이 나온지 오래되었으나 구해줄것을 부탁하니 용암유집을 주면서 가져가라하니 얼마나 감사한지 눈물이 핑 돌았다. 작별하고 삼족당 김대유 선생의 삼족대를 구경하고 괸리인에게 삼족당선생의 산소를 물어서 유현재 재실과 산소를 참배하고 선생의 묘소뒤에 호랑이 무덤이 있는데 선생께서 축지법을 하면서 호랑이를 타고 다녔는데 그 호랑이 무덤이란다.
김천을 향해 고속도로달려서 호산이 잘아는 강용규씨를 만나니 나도 두번만나서 인사한 사람이라
저녁을 먹으면서 환담한뒤 찜질방에 올라가니 넓고 시설이 참 잘되어 있어서 편안한 시간을 보냈는데 잘자고 아침에 뼈다귀해장국 한그릇씩하고 상주로 향해 독골 입재공 산소와 일대을 구경하고 오작당에 들리니 공사가 한창이라, 마침 성학씨도 와 있어 같이 인사하고 선세장갈집 이야기도 하고 양진당에 가서 검간선생문집을 8권을 더 얻어서서울로 올라오니 1500키로미터의 장정이었데 도 허리가 아픈데도 강행군을 하면서 고속도로에 가면 잠이 와 중간에 잠시 자다가 와야 했는데 이번에는 한번도 잠이와서 고생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며 4일간 동행 해준 호산 장동수 친구에게 감사하고 또 해남의 문화원 박태정 사무총장과 향토사학자 임상영 선생, 청도의 박윤제선생과 박선생댁을 안내해주신 청도읍사무소 권미정씨,여러분께 감사하며, 특히 박동기씨는 귀한문집 주시어 더욱 감사합니다.
海南, 淸道 에 先祖의 遺跡踏査를 마치고 나서
悟逸齋에서 萸堂 趙완熙 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