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조선의 수도였던 아사달은 지금의 파주시 백학산(229.5m)입니다..hwp
제목: 고조선의 두 번째 수도였던 아사달이란 땅이 요동에 있다는 요동설과 한반도 북부에 있다는 한반도 북부설을 주장하고 맹신하는 분들에게 경종을 울리고자 이글을 씁니다.
개요:
사실 오히려 고려사절요나 삼국유사에 나오는 고조선=단군조선의 수도 아사달산이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백학산(229.5m)이다라는 기록의 결과에 따라 경기도 파주시 백학산 부근을 파보거나 조사해서 그곳의 유물을 근거로 조심스럽게 고조선=단군조선의 문화나 유물을 짐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古記(고기)에 따르면 단군왕검은 (처음에) 平壤城(( 평양성 : 일연은 평양성을 삼국유사를 쓸 당시의 西京(서경:서경은 오늘날의 평안남도 평양입니다. 사서에 이미 밝혀진 사실:서경)이라 했음: 평양성 ))에 도읍하고 평양성을 처음으로 朝鮮(조선:朝鮮의 그 당시의 발음은 아직 필자는 모르겠음. 아마 낙랑과 비슷한 발음이 아닐까 필자는 생각함: 조선 )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또 이어서 白岳山 阿斯達(백악산 아사달)로 도읍을 옮겼다고 하고 있습니다. 백악산 아사달은 또 이름을 弓忽山 (( 궁홀산: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古記(고기)라는 책의 또 다른 복사본에서는 弓(궁)짜를 方(방)짜로도 썼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 弓(궁)짜를 잘못쓰면 모양이 비슷한 方(방)짜로 보일수 있다는게 필자(구종일: 필자 이하 동일)의 경험입니다: 궁홀산 )) 이라고도 부르며 弓忽山 (궁홀산)은 또 古記(고기)를 언제 썼는지는 모르지만 古記(고기)를 쓴 당시의 彌達(미달)과 한 지명이라고 적혀있습니다. 단군이 나라를 통치한지 1500년 周 虎王(주 호왕=주 武王: 무왕 )이 즉위한 기묘년에 箕子(기자)를 평양의 조선에 봉(封)하므로 단군은 곧이어 장당경으로 도읍을 옮겼다가 뒤에 다시 백악산 아사달산으로 돌아와 숨어 산신이 되었다고 했으니 수(壽)가 1908세였다 합니다.
주 호왕이 기자를 평양의 조선에 봉(封 )하므로 단군이 곧이어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다시 백악산 아사달로 돌아와 숨어 산신이 되었다고 했으니 이 말에서 단군은 기자를 피하려고 장당경으로 자신이 있는 도읍을 옮긴거 같고 따라서 기자가 있는 평양과 등지는 평양과는 먼 방향으로 백악산 아사달로부터 장당경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필자는 생각됩니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서 古記(고기)를 인용하여 삼국유사는 말하기를 단군왕검이 평양성에 도읍했다고 하는데 평양성이란 글 옆에 평양성은 지금의(일연이 삼국유사를 쓸 당시의) 西京(서경:서경은 지금의 평안남도 평양이라고 모든사서에서 증명됨:서경)이라는 글이 보입니다. 삼국유사에서 환웅이 내려온 산인 태백산을 묘향산이라 했으니 환웅의 아들인 단군왕검이 나라를 세운 수도인 평양은 환웅이 내려온 묘향산 근방의 고려의 서경이자 지금의 평양이라고 해도 크게 과언은 아니리라 생각됩니다.
고조선시대의 단군의 두 번째 도읍이자 네 번째 도읍인 아사달은 어디일까요?
사서<고려사>세가23/고종 21년(1234년) 7월 조와
사서<고려사절요>제 16권/고종 안효대왕 갑오 21년 조에 공통으로 다음과 같이 글이 적혀있습니다.
“甲子에 내시 李白全(리백전)을 보내어 御衣(어의)를 南京의 假闕(가궐)에 봉안하였는데 한 승려가 참언에 의하여 말하기를 “ 扶蘇山 ( 부소산 ) 으로부터 갈려 좌소(左蘇)가 된 것을 아사달(阿思達)이라 하니 이는 옛 양주(楊州)의 땅이다. 만약 이 땅에 궁궐을 짓고 거동하면 국조(國祚: 국가의 복: 국조)가 가히 800년은 연장될 것이다” 라고 하였으므로 이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개성 송악산의 고구려때 이름이 扶蘇岳(부소악)이었던 것을 볼때, 부소산은 고구려때 부소악이란 이름이었던 개성의 송악산인거 같고,
조선의 책인 <신증동국여지승람> 제 12권 장단도호부를 보면
“장단도호부(현재의 경기도 파주시 장단군)에 백악(白岳)이 있다. 백악은 임진현 북쪽 5리에 있는데, 고려에서 백악을 좌소(左蘇)로 삼고 고려에서 풍덕 백마산(白馬山)을 우소(右蘇)로 삼았다.”
이어서,
“고려 공민왕 9년에 도읍을 남경(南京)으로 옮기려고 태묘(太廟)에서 점쳐보니 불길하여 결국 옮기지 아니하였다. 그때에 공민왕이 친히 백악에 거동하여 땅을 살펴보고 백악산(白岳 山) 남쪽에 대궐을 지었는데 주위가 7백20보였다. 당시에 사람들이 백악산 남쪽의 대궐을 신궁(新宮)이라 불렀다.”
에서처럼 사서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 부소산에서 갈려 좌소(左蘇)가 된 것을 아사달(阿思達)이라 불렀고, 조선의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장단도호부에 있는 임진현 북쪽 5리에 있는 백악(白岳)을 고려에서 좌소(左蘇)라 불렀다 했으니, 고려에서 좌소라 불리운 곳이 역사서에서 여러 곳도 아니고 오직 하나이기 때문에, 그 장단도호부 임진현 북쪽 5리에 있다는 좌소인 백악 아사달은 오늘날의 경기도 파주시 관할 옛날의 경기도 장단군 백학산(白鶴山)이라는 229.5m의 작으마한 산이다라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참고로 삼소(三蘇)에 대한 기록입니다.
삼소(三蘇) : 고려시대 중기 이후에 사라져가는 개경의 지덕을 되살리기 위하여 새로 궁궐을 지었던 세 곳. 지금의 경기도 장단 백학산(白鶴山)인 좌소(左蘇), 경기도 개풍 백마산(白馬山)인 우소(右蘇), 황해도 신계 기달산(箕達山)인 북소(北蘇)의 세 곳을 이릅니다.
제가 조선시대의 지도를 여럿 보아보니 초기에는 장단도호부의 백악 아사달을 백악(白岳)이라 적다가 후기부터는 백악이란 이름이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이 없어져서 이름이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져와서인지 백학(白鶴)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적혀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단군조선=고조선의 평양 다음의 수도였던 아사달은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백학산(229.5m)임을 알수 있어 이 지역의 조사와 발굴이 이루어져서 우리의 잊혀졌던 역사를 밝힐 수 있어야겠습니다.
혹자는 역사서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나와있는 좌소(左蘇)인 阿思達(아사달)이 삼국유사에 나온 단군조선의 평양다음의 수도였던 아사달(阿斯達)과 발음은 같지만 “사“짜의 글자가 달라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나와있는 좌소인 아사달(阿思達)이 삼국유사에 나와있는 단군조선의 평양다음의 수도였던 아사달(阿斯達)과 이름만 같고 다른 지역이라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아(阿)와 달(達)은 발음이 같은 마당에 ”사”만 발음은 같으나 다른 자를 썼던 것은, 아사달이란 지명이 지명이기에 발음이 비슷한 다른 “사“짜로 썼을 거라 간단히 생각되기에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나와있는 좌소인 아사달(阿思達)이 삼국유사에 나와있는 단군조선의 수도였던 아사달(阿斯達)과 이름도 같고 한 지역을 부르는 같은 장소라는 생각입니다.
고구려때엔 達(달)을 山(산)과 높다는 뜻으로 썼습니다.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 지명조에 그리 나와 있습니다. 고구려의 말 達(달)은 현대로 와서 ㄹ이 ㄱ으로 교체되면서 한국말의 언덕의 덕이 되고 둑이나 뚝이 되고 현대의 일본말에서는 타까이(높다는 뜻)가 되고 현대의 터어키말에서는 탁(산(山)이란 뜻)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阿斯達(=阿思達:아사달)은 “아사“ 山(산)임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사달의 ”아사“가 무슨 뜻인지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지리지를 봐도 안나오니 필자도 아직은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삼국유사> 古朝鮮(고조선)조에 보면
“아사달(阿斯達)은 경(經)에 무엽산(無葉山)이라고 썼다”라고 했는데 아사달을 무엽산이라 쓴 이유를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기서 경(經)이라는 것은 스님이 쓴 역사서를 말한다고 생각되는데,
아사달의 “아“를 불교에서 많이 쓰이는 산쓰크리트어로 생각하여 한자로 없을 무(無)짜로 번역하여 놓고 아사달의 ”사“를 아마도 산쓰크리트어에 있는 지는 모르나 한자로 이파리 엽(葉)짜로 번역하여 놓고 아사달의 ”달“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많이 나온대로 산 산(山)짜로 번역하여 놓았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맞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불교용어 가운데는 산쓰크리트어가 많이 쓰이는데 산쓰크리트어에서는 없을
無(무)라는 뜻을 “아”라고 발음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예로써 아미타불은 無量光佛(무량광불) 또는 無量壽佛(무량수불)로 번역됩니다. 위에서도 아사달의 아사를 뜻을 몰라 불교식으로 無葉(무엽)으로 번역한 거라 필자는 생각하는데 맞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또한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아사달을 무엽산이라고 경(經)에서는 말한다고 적어놓고 이어서 말하기를
“아사달은 白岳(백악)이라 말한다. 아사달은 白州(백주)땅에 있다, 或(혹)은 이르기를 開城(개성:경기도 개성) 동쪽에 있다고 말한다. 지금의 (삼국유사를 쓸 고려당시의) 白岳宮(백악궁)이 이것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백악궁이란 좌소로 지목된 백악 아사달에 고려때 세워진 새로운 궁궐을 말합니다.
이렇게 삼국유사를 쓸 당시에는 모두 다는 아니지만 아는 분들은 아사달이 현재의 파주시 백학산인 옛 장단군 백학산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는 걸 알수 있습니다.
사실 아사달산이 황해도 안악군 구월산이라는 설은 <고려사>지 12/지리/서해도/豊州(풍주) 조에는 안악군에는 阿斯津( 아사진=아사나루 ) 省草串( 성초관=성초곶 )과 阿斯津( 아사진 ) 桃串( 도관=도곶 )이 있다고 말하고 있어 阿斯津(아사진)의 阿斯가 阿斯達山의 阿斯와 같은 글짜이기때문에 아사진이 있는 안악군의 구월산이 아사달이라는 아사달의 구월산설이 퍼졌고, 九月山(구월산)의 뜻풀이인 “아홉달산”이라는 발음이 “아사달산”과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아사달의 구월산설을 조선시대부터 말했던 것이고, <삼국유사> 古朝鮮(고조선)조에서 古記(고기)라는 옛기록을 인용하여 白岳山 阿斯達을 또 이름하여 弓忽山(궁홀산)이라고 부른다는 기록에서 弓忽山(궁홀산)이란 발음이 九月山(구월산)이라는 발음과 비슷하게 소리난다는 이유로 아사달의 구월산설이 나타난 것이며, <삼국유사> 古朝鮮(고조선)조에서 古記를 인용한 기록에 아사달산인 弓忽山(궁홀산)은 또한 지금의((古記(고기)를 쓴 당시의)) 彌達(미달)과 한 곳이다란 기록에서 彌達의 彌짜가 弓爾(궁이)의 잘못으로 붙여쓴 것으로 판단하여 弓爾(궁이)의 발음이 九月山(구월산)의 九月(구월)의 발음과 비슷하다고 잘못 판단하여 생긴 아사달이 구월산이다란 설이며, 황해도 九月山 부근에 莊莊坪(장장평)이 있다는 <고려사>지12/지리/서해도/豊州(풍주) 조의 기록을 보고서 장장평을 장당경으로 잘못 보는 주장이 아사달의 구월산설과 아울러 단군조선의 아사달 다음의 수도였던 장당경이 장장평이다라는 설이며, <삼국유사>에서 古記를 인용하여 말한 周 虎王((주 호왕=주 武王(무왕))이 箕子(기자)를 조선(옛 조선:고 조선)에 봉하자 단군이 곧 藏唐京(장당경)으로 옮겼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단군은 기자와 마찰을 피하려고 기자가 있는 평양과 멀리 떨어진 藏唐京(장당경)으로 옮겼을 테니 장당경이 장장평이라면 장장평이 황해도 안악군에 있다 했으니 이는 기자가 있는 평양과 너무나도 가까워 기자를 피할수 없는 잘못된 설이 단군조선의 아사달 다음의 세 번째 도읍이었던 장당경이 황해도 안악군 장장평이라는 장장평설이며, 황해도 구월산 부근에 단인, 단웅, 단군의 사당인 三聖祠가 있다는 <고려사>지12/지리/서해도/풍주 조의 기록에따라 구월산을 아사달로 잘못 보는 아사달의 구월산설입니다.
또한 조선시대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 강화도호부에
<塹城壇: 참성단은 마니산 꼭대기에 있는데 ~~~~내용중략~~~~ 세상에서 전하기를 단군이 하늘에 제사하던 곳이라 한다.
三郞城: 삼랑성은 전등산에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았다고 한다> 라고 적어놓고 있습니다. 위 이야기는 참성단을 조사한 현대의 학자들에 따르면 참성단은 후대의 산물이라하니 참성단을 단군과 연관시키는 것은 후대의 잘못된 설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다시 조사연구가 필요할 거 같습니다.
2012년 8월 31일 금요일
月泉(월천) 구종일이 이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