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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당시의 꿈을 위해 노력하는 법왕사 현일스님
크리슈나무르티를 성자의 반열에 이르게 한 것도, 카필라 왕국의 왕자 싯다르타를 인류의 스승 붓다로 만든 것도, 그 시작은 사색이다. 그리고 사색은 해맑은 얼굴의 까까머리 고등학생이었던 현일스님(64, 법왕사 주지)을 출가케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교육도시인 경남 거창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현일스님은 매일 매일 일기를 썼다. 일기를 쓰다 보면 책상 머리에 앉아 하루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돌이켜보게 되는 법.
고등학교 다닐 때니 뭐 그리 뾰족하게 별다른 일이 있었겠는가. 아침에 일어나 학교 가고 공부하고 친구들과 놀다가 집에 와 공부하고 자는 것의 반복이 계속될 뿐. 그 되풀이가 어제에 이어 오늘 그리고 또 내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는 이내 알아차렸다. 그렇게 한주일이 지나고 1년이 흐르고 10년이 훌쩍 흐르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 아니던가.
“물론 중간 중간 약간의 희비, 그리고 작은 성취감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대동소이한 것이 우리 인생이잖아요.”
국을 다 마셔봐야 국맛을 아는 건 아니고, 바닷물을 다 마셔보지 않더라도 바닷물이 짜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우리들의 삶 역시 다 살아보지 않더라도 그저 그런 반복이 계속되고 있음을 그는 오래잖아 내다볼 수 있었다. 사색은 그로 하여금 또래 아이들과는 달리 거리를 두고 삶을 바라볼 수 있는 혜안을 갖게 했다. 살 날이 구만리 같은 고등학생에게 있어 사색으로 얻은 삶의 깊이는 다소 버겁기까지 했다. 20대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그는 과연 이렇게 계속해서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하는 삶의 중대한 귀로에 서게 된다.
“우리들에게는 그저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사과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잖아요?”
반복되는 삶의 체바퀴를 당연시 하며 살아가는 우리 범인들과는 달리 훗날 수도자가 될 싹을 안고 있던 현일스님은 삶의 모습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세상 만물과 모든 현상에는 다 원인과 결과가 있더란다. 벽이 가려져 있을 때 우리는 벽 너머 것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젖게 마련. 하지만 벽 너머 우리가 모르고 있는 세계를 포함한 일체의 문제들은 우리들이 뭔가 한 가지 근본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수수께끼로 다가오는 게 아닐까. 붓다가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은 연기법을 그는 일기를 쓰고 사색을 하며 서서히 알아갔다. 그런 내면적 문제를 푸는 것이야말로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숙제라는 생각으로 그는 점점 더 말수 없고 생각 깊은 고등학생이 되어 갔다.
이처럼 삶에 대한 의문과 생각이 많던 청년은 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이던 1965년, 잡지 ‘농원’에 실린 효봉스님의 기사를 보고서 드디어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최근 입적하신 법정스님의 스승이기도 한 효봉스님은 현일스님의 노스님(스승의 은사 스님). 잡지 ‘농원’의 기사에는 효봉스님이 판사복을 벗은 후 3년간 엿판을 들고 전국방방곡곡을 다니다가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 1년 반 동안 토굴에서 입구를 봉해 놓고 정진, 결국 득도에 이르게 된 일대기가 “생사를 자유자재 하는 효봉 대종정”이라는 제목 하에 실려 있었다. 효봉스님이 공부해서 깨친 기사를 본 현일스님은 노스님을 찾아가 인생의 숙제를 풀고 마음 공부를 해야 되겠다는 결심 하에 길을 나선다.
당시 스무 살 싱그런 청년 현일스님과 달리 그때 효봉스님은 세수 79세로 그 다음 해에 입적하셨으니 어디, 피 뜨거운 제자를 받을 만한 나이인가. 그리하여 현일스님은 노스님의 상수제자이자 법통을 이어받은 구산스님(당시 50대 후반)을 은사로 출가하게 된다. 고등학교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 중 절을 찾아갔으니 웬만한 스승 같으면 졸업을 하고 다시 찾아오라는 말을 했을 법도 하다. 하지만 청년 현일스님의 출가하겠다는 확고한 의지에 압도당한 구산스님은 감히 졸업장 문제 따위로 출가를 늦추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겠다고 찾아온 현일스님에게 구산스님은 “만법기일 일기하처(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화두를 던져주셨다. 아무 생각 없이 입산했더라면 이게 웬 자다 봉창 두드리는 질문인가 하고 뜨악해질 수도 있었겠지만 현일스님이야 학교 다니면서 내내 가졌던 의문이 바로 그 문제였는지라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고. 스승이 던져준 화두는 모든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질문이요, 진리와 불보살의 세계에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화두를 잡고 씨름하던 그는 어느 날 문득, 세상이 있는 그대로 여여함을 잔잔히 바라봄에 이르게 된다.
스님이 처음 노스님과 스승 구산스님을 모시고 정진했던 도량은 밀양의 표층사. 스님이 수행하시던 때는 성철, 해암, 일타 스님 등 이 시대의 선지식들이 모두 한 차례 그곳을 거쳐갔다. 그후 스님은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조계사 등 전국 선방을 전전하며 만행에 들어갔다.
참선의 열매는 맑고 아름다웠지만 스님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성직자란 수행 이전에 모든 지식과 교양을 갖춰야 하는 게 아닐까. 선방에서 큰 스님네의 지도를 받으며 수행하던 그는 내적으로 보다 넓고 깊은 불교의 학문적 기반을 확립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간절한 바램은 세상의 흐름을 바꾸어 바램을 현실로 바꾸는 법. 고등학교 마지막 학기를 마친 그에게 배움에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들었다. 동국대학교에 승가학과가 설립된 것이다. 그는 승가학과 1기 과정을 이수, 1976년도에 학사모를 쓰게 된다.
“종교란 행함이요, 실제예요. 백날 밥 이야기를 한다고 내 배가 불러지는 건 아니잖아요? 불가의 수행을 통해 깨달음이 실제의 삶에 녹아나 자기 완성을 이루게 되는 것이지요.”
졸업 후 30대에 들어선 스님은 송광사에서 재무와 총무를 지낸 뒤 광주 원각사에서 4년간 주지를 지낸다. 하지만 또 다른 발원은 스님을 다른 하늘, 다른 땅으로 이끌어낸다. 당시 불교의 학문적 체계가 탄탄한 일본에 동기들이 유학중이라는 소식을 접한 스님은 더 깊은 공부에의 꿈을 키우게 되었다. 아직 여행 자유화가 되기 이전의 일본입국은 초청장을 받아야만 가능했었다. 그런데 일본 유학 중인 범어사 문중의 동료 스님들이 같은 종단의 승려만을 초청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스님은 배움을 향한 꿈을 접어야만 하는가, 싶었단다. 그런데 마침 그때 미국 LA에 송광사의 미주 분원 고려사가 문을 열었다.
스님은 신도들의 지도, 포교와 함께 공부를 계속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1980년,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개원식 날에 맞춰 미국 땅을 밟았다. 하지만 절 집 살림살이를 하면서 공부를 한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 고려사와의 인연은 공부로부터 스님의 발목을 2년 동안 붙잡았고 그 후에는 오렌지카운티 정혜사에서 또 다른 4년의 세월을 보내느라 학구열을 접게 되었다.
1986년 10월 5일, 현일스님은 뜻을 같이 하는 신도들과 함께 오렌지카운티에 법왕사를 창건했다. 초기에는 아파트에 법당을 마련하고 예불을 드렸었다. 개원식 때는 법정스님이 방문해 법회를 주관하고 설법을 해주시기도 했다. 지금의 법왕사 건물은 6개월간 아파트에서 법회를 하던 시절에 모금된 사찰건립기금으로 마련했다. 대지 1만 평방피트, 건평 2천 평방피트의 법왕사 법당 내부는 한국의 불교예술장인이 제작한 목탱화가 아름답게 장식돼 있다.
올해로 창립 24주년을 넘긴 법왕사는 세월의 깊이만큼 이 지역 불자들의 흔들리지 않는 도량으로 존재하고 있다. 법왕사는 정혜사, 보광원과 함께 미 서부지역의 한국불교 경계선을 남쪽으로 확장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 사찰이다.
현재 절에서 우편물을 보내는 가정의 숫자는 약 230세대 정도. 이 가운데 어떤 가정은 1년에 한 번 절에 오고, 또 어떤 집은 더 이상 나오지 않으니 한 가족 평균 3명으로 치더라도 700여 명에 이르는 신도 수를 확보한 셈. 매주 일요일 11시에 마련되는 법회 때는 평균 60~70명이 참여하고 특별 행사가 있을 때면 150명 정도가 법당을 가득 메운다. 가족단위의 신앙생활을 강조하는 주지스님의 가르침에 영향받은 법왕사 신도들은 대체적으로 가족단위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부동산 시장이 비교적 안정적이던 시절, 건물을 구입한 덕에 매달 갚아야 하는 건물 모기지는 2천여 달러 선. 천문학적 숫자의 건물 모게지에 절 살림이 좌지우지 되는 미주지역 내의 다른 사찰과 달리, 법왕사는 비교적 안정된 재정구조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법왕사 너머로의 포교를 꿈꾸는 스님은 1994~1995년과 2003~2004년 두 차례, 남가주 사원연합회 회장직을 맡아 봉사하기도 했고 승가회부회장과 미주불교신문 나성 지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남가주 불자들과 인연의 골이 깊어갈수록 공부를 향한 스님의 소망은 갈수록 그 날개가 무거워졌다. “나무도 뿌리 내리면 그냥 그 자리에 사는 법이잖아요. 그게 다 인연이라는 것이겠지만요.”
이제 어언 4반세기 동안 미국 땅에서 포교를 계속해왔던 스님. 그가 볼 때 미국 땅에서 한국불교의 포교는 결코 녹록치 않았다. 무엇보다 동포들의 신앙생활이 지나치게 기독교 판이라는 것이 문제다.
“미국에 사는 한국 동포들은 현실적인 면이 지나치게 강한 경향이 있어요. 중국 일본 베트남 태국 스리랑카 등 동남아인들은 어디를 가더라도 민족의 전통신앙을 함부로 바꾸지 않는데 말예요.”
법왕사를 비롯한 미국 내 절들은 한국 종단의 지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스님들이 이곳의 불자들과 함께 자생적으로 이뤄낸 곳이 다수. 그렇다보니 사찰들이 하루 아침에 포교활동을 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을 갖추기는 힘든 일이다.
“기독교는 사막의 신을 믿는 종교라 절박감을 안고 무조건 살려달라 메달리며 십일조라는 의무조항을 두어 적잖은 헌금이 들어옵니다. 하지만 푸르른 숲에서 생겨난 사색의 종교, 불교는 급할 것이 없잖아요. 그렇다 보니 근본문제를 생각하고 깊은 사색을 하고, 논리적 철학적인 특성을 갖게 된 거죠. 그리고 우리끼리 얘기지만 불교인들은 다른 종교인들에 비해 나서는 것을 싫어하다 보니 종교활동 역시 소극적인 면이 있잖아요. 보시 또한 각자의 정성에 맡겨 놓기 때문에 사찰의 재정능력이 교회에 비해 덜할 수밖에요.”
사찰재정이 확보되어야 장소도 마련하고 일꾼들도 쓸 수가 있다. 이에 대해 스님이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은 종교기관이 현실에 있어 수행해야 할, 다시말해 사람들이 종교기관에 기대하는 역할의 수행이다.
“종교란 본래 내세를 염두에 둔 것이지만 오지 않은 앞날에만 치중해서는 현실에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현실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역할을 담당할 때 비로소 종교가 성장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현일스님은 종교기관이 현실생활에서 떠맡아야 할 역할을 어린이 케어, 노인 케어, 이민자 정신상담 등으로 요약한다. 날로 높아져만 가는 이혼률은 결국 ‘마음이 안 맞는다.’는 한 마디 핑계로 모아지는 이 시대. 불자들과 동포들 모두가 남에 대한 배려, 그리고 자비라는 인본교육을 받는다면 더 많은 가정들이 지켜질 수 있지 않을까. 절에서 어릴 때부터 사회성을 기르는 교육을 받는다면 우리 모두가 사회생활, 결혼생활, 가족생활을 좀 더 잘 할 수 있을 터인데, 현일스님은 인격완성의 인본교육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있기에 종교기관이 앞장선 사회복지사업이야말로 우리 사회에 참된 윤리기범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다.
포교에 있어 또 하나 근본적인 문제는 종교지도자의 재생산이 쉽잖다는 것이다. 웬만큼의 수입이 보장돼 있는 데다 후진양성기관도 많고, 그도 없다면 하다 못해 자신의 2세라도 있는 타 종교의 지도자들에 비해볼 때 불교의 입지는 거의 설 땅이 없을 정도다. 이미 언급한 대로 미국 내 많은 사찰들은 절살림을 제대로 꾸려가기도 어려운 재정형태를 갖고 있는 데다가 신도 수도 적고 결과적으로 종교지도자의 양성도 쉽잖다. 게다가 평생 독신으로 살아가는 승려들에게 대업을 이을 2세가 생길 턱도 만무하다. 거기에다 불교란 것이 본래 석가의 가르침대로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것이니 스님네들도 근본적으로는 자기수양이 우선일 터.
이런 열악한 현실 앞에서도 그는 포교에의 꿈을 잃지 않는다. 미주 지역에서 한국불교의 중흥을 위해 그가 내놓은 카드는 무엇일까. “사찰은 낯선 미국 땅에서 정신적 갈등를 안고 사는 한인 동포들에게 영혼을 재충전할 수 있는 쉼터가 되주어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붓다의 가르침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행복한 이민생활로 향할 수 있는 도량을 현일스님은 꿈꾼다. 이 비전을 이루기 위해 계획하고 있는 것은 복지시설을 갖춘 불교 복지원의 운영이다.
“삶의 질과 동떨어져 외로움을 안고 살아가는 노인들을 위해 기도처, 참선방, 휴게실 등을 갖춘 복지 아파트를 설립 운영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지 않겠어요?”
이러한 복지시설이 제대로 운영되려면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재정조달이 될 수 있는 제도적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사찰, 불자, 사회사업가들이 함께 이뤄낼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꿈이 있어 현일스님은 오늘도 몸과 마음을 부지런히 움직일 수 있다.
현재 법왕사 규모로는 법회와 어린이 교실, 청년회 활동을 모두 수용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무리. 이를 위해 현일스님을 중심으로 한 법왕사 신도들은 이미 세리토스의 연화사 건물부지를 구입해놓고 2세 포교를 위한 사찰 내 어린이학교를 건립 중이다.
그 무엇보다 우선 되는 스님의 꿈은 처음 출가했던 큰 뜻을 이루는 것. 매일 계속되는 사색이 가꾸어 놓은 현일스님의 얼굴에는 깨달음에 이른 자비심이 가득했다. 마음 잔에 넘쳐 나는 자비심이 법왕사를 채우고 남가주와 미주 전역에까지 이르기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 2010.10
▶ 12921 Adelle St. Garden Grove, CA 92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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