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주가 48년간 살아 온 이야기
-.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되돌아봅니다.
저는 우리 민족의 최대 비극인 6.25. 전쟁의 얼마후 1958년 2월 8일에 태어났습니다.
제 선친께서는 논 500평과 밭 800평을 소유한 가난한 농부이셨지만, 4남 3녀를 키우기 위해 고생만 하시다가 벌써 11년 전에 작고하셨고, 노모께서는 고향(전남 영암군)에서 지금도 혼자 자식들을 위해 농사를 짓고 계십니다.
저의 학력은 미암초등학교 32회, 영암낭주중학교 20회, 광주고등학교 26회, 전남대학교 철학과 77학번, 성균관대학교 법학과 84학번입니다.
군대는 육군병장(논산 26연대 군번 13050775, 주특기 130, 포병 105미리 곡사포부대)으로 제대하였습니다.
-. 소년
어릴적 가뭄이 들면, 겨울 내내 고구마와 노란 수수밥을 부모님과 7형제가 초가 두칸 방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얘기 나누면서 한숟갈이라도 더먹으려고 아웅다웅하던 것도 이젠 추억입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거의 빈도시락을 학교에 가지고 갔고, 점심때 줄을 서서 밀가루죽(미국 지원물품)을 배식받아 먹었지요. 고학년에 올라가면서 조금 형편이 좋아졌는지 밀가루죽 대신 옥수수와 밀가루로 만든 빵을 하나씩 받아들고는 친구들과 어찌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먹고 싶은 빵이지만, 반을 남겨서 하교길에 외할머니댁에 들러 전해드리면 기특해 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중학교는 십오리길을 걸어다녔습니다. 어려운 가정형편이지만, 모친은 기어이 중고자전거를 사주셔서 비포장도로를 등교하다가 힘차게 페달을 밟다보면 체인(당시 구사리라 칭함)이 벗겨져서 고치다보면 손이 온통 시커먼 기름이 묻어 지워지지 않았고, 그 결과 지각을 해서 선생님께 꾸중듣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는 전남 광주로 유학올라와서 친구하고 둘이 자취를 하였는데, 가장 어려운 것은 추울때 한밤중에 연탄갈기와 도시락 반찬 만들기였습니다.
광주 계림동, 풍향동, 산수동에서 자취생활을 하면서 고등학교 3년을 다녔습니다.
어느날 서울대학교 다니는 선배님들이 오셔서 오리엔테이션하면서 일류대학 합격하려면 엉덩이에 못이 박히도록 공부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저는 아침에 학교에 오면 점심시간에 딱한번 화장실 가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 결과 성적은 조금 올랐지만 2학년 2학기에 정말 엉덩이에 이상이 생겨 병원에 갔더니 염증이 생겨 수술을 해야 한다더군요. 그러나 당시의 병원이 비위생적이었는지 수술후 치루로 더 악화되었습니다. 방학때 전신마취 수술을 두번했지만 의자에 제대로 앉지못해 맨뒷자리에서 무릎꿇고 수업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기어이 3년 개근상을 받았습니다.
저는 치루병이 그렇게 무서운 병인지 몰랐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부터 대학 3학년까지 5년동안 아팠으니까요.
사춘기 어린 나이에 오랫동안 병마와 싸우다보니 세상이 희망이 없어 어둡게만 보였습니다. 전신마취 수술을 한 후부터 저는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저서를 탐독하기 시작하여 니힐리즘(허무주의)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 청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응시원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빈농인 선친의 바램(법과대학)을 외면하고 전남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를 택했습니다.
치루병과 고전하면서 대학2년을 마치고 다시 수술을 하기 위해 한학기를 휴학하였지요. 우연히 목포에서 신비한 의술을 지닌 분을 만나 치료한 결과 천신만고 끝에 거의 호전되었습니다.
마침 입영통지서가 와서 신체검사를 받으러 갔더니 담당군의관이 “너는 아직 완쾌가 안되어 군대갈 수 없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때 군의관에게 지겨운 투병생활을 벗어나고자 “군대에 꼭 가게 해달라”고 간청했지요. 그랬더니 고맙게도 마지막으로 현역에 갈 수 있는 2을종 판정을 하더군요.
대학 3학년때 저는 자취방에서 중학생들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옆방에 여고생이 살았는데, 그녀의 친구가 바로 지금의 제 아내입니다. 당시 고3이었던 그녀의 고교졸업식에 가서 꽃다발을 전해준 이후 석달간 사귀다가 논산훈련소에 입대했지요.
기차역에 마중나온 아내에게 고향집에 모친과 함께가서 선친께 인사드리라 부탁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정말 그렇게 했더군요. 군대 3년간 고무신 거꾸로 신지않고 꾸준히 면회를 와 주었습니다.
-. 결혼과 법원입사
군대 3년동안 규칙적으로 생활하다보니 점점 몸이 건강해지더군요. 그래서 점차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어 선친께 효도 한번 해봐야겠다고 마음먹고 다시 대학시험을 준비했습니다. 군전역후 라디오 방송학습을 통해 독서실에서 혼자 약 1년간 공부를 하여 예비고사를 치러 성균관대학교 법학과에 합격했습니다.
그때 직업은 없었지만 나를 기다려눈 아내와 결혼식을 올렸던 저는 자식이 한명 태어나자 정신이 번쩍들어서 사법시험을 합격하기 위해 고시반(사마헌)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다행히 장학혜택은 받았지만, 생활비를 벌기 위해 산업전선에도 나가야하는 이중고를 겪다보니 휴학과 복학을 여러번 했었지요. 휴학기간에도 리걸마인드를 위해 법서를 여러번 회독하였습니다.
그런데 계획도 없이 둘째가 또 태어났습니다.
결국 저는 꿈에 그리던 사법시험을 포기하고,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법원서기보시험 석달을 남겨두고 죽기를 각오하고 밤낮을 바꿔서 자신과 혈투를 벌였습니다. 비몽사몽간에 인창고등학교에서 시험을 치렀으나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천지신명께서 도우셨는지 열흘 후에 합격통지서가 왔습니다.
그때서야 저는 애들 분유대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떳떳한 아빠가 되었답니다. 농촌에서 고생하시는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1986년 10월에 법원에 입사하여 4년 6개월만에 서기 승진하고 9년만에 계장으로 승진했습니다.
-. 직장협의회와 마지막 사명
1999년 1월 후반에 이중한님을 만난것이 인연이 되어 직장협의회법률을 접한 후 당시 서울지방법원에서 여러 뜻있는 직원들과 수차례 논의 끝에 1999년 6월 15일 서울지법직장협의회를 설립하여 초대회장에 취임했습니다.
2000년 7월 임기 2년 중 1년을 남겨두고 서울서부지법으로 전격 발령나는 바람에 회장직을 박탈당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에 굴하지 않고 진정한 민초는 밟으면 밟을수록 얼어나야 한다는 신념으로 서부지법에서도 부대표로 꾸준히 활동했습니다. 그러자 법원 측은 갑자기 2시간 이상 걸리는 사법연수원으로 발령을 냈습니다.
정말 그때 저는 회사를 그만 둘까도 생각했습니다. 법원측의 일방적인 전보 조치로 직장협의회 활동을 하기도 곤란한 상황이었으니까요. 사법연수원에 근무한 1년 후에 직원들을 설득하여 그곳에서 직장협의회를 창립하였습니다.
다시 고양지원으로 발령받으니, 거주지(서울 종로구 명륜동)와 멀어서 퇴직금 담보대출 5천만원과 마이너스대출 5천만원을 받아 고양시 덕양구 화정동에 아파트를 구입하여 입사 18년만에 내집에 입주하였습니다. 고양지원에 근무한지 석달만에 박주경 지부장 등 뜻있는 직원들과 의논끝에 직장협의회 를 설립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제 별명이 하나 생기더군요. 직장협의회 제조기라고 말입니다.
저는 지난 1999년부터 2005년까지 직장협의회 활동을 한지 가 7년이 되었군요. 벌써 제 나이도 오십이 다되어 갑니다.
저는 노동운동 전문가도 아니요, 학생운동한 경력도 없습니다. 다만 제가 변치 않고 직협활동을 계속해온 이유는 "힘없는 하위직들의 권익 개선" 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지난 시간 근무평정에서 많은 불이익을 입었고, 원치않는 곳으로 보내져 유배같은 근무생활을 하면서 혼자 눈물흘리는 외로운 세월을 많이 보내야 했었습니다. 가정에서 칭찬받지 못하고, 직장에서도 감시대상이 되어 무척이나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법원의 울타리안에서 생애 마지막 사명으로 생각하는 것은 진정으로 살맛나는 법원을 만드는 것입니다. 지난 7년 동안 90만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 공동대표, 각급 법원직장협의회 대표직을 역임하는 등 대내외 활동을 통한 많은 경력을 바탕으로 법원행정처 및 대정부 단체교섭에서도 만족할만할 성과를 거둘 자신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 옆에는 오랜 세월동안 함께한 훌륭한 인재들이 전국 법원에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후배들이 올바른 뜻을 펼칠수 있는 통합노조를 만들어 물려주고 싶은 간절한 소망으로 오늘도 기도합니다.
법원내 갈라진 두 조직의 상처를 봉합할 기회를 저에게 주신다면 분골쇄신하여 인간다운 평등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살맛나는 법원을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정말 감동적입니다. 선배님을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