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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랬지
⎈ 용산에서 고속열차로 순천 도착. 보리밥과 신난다가 마중 나와 굴비정식으로 저녁식사 함께 하고 돌아오니 따스한 방이 기다리고 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기차에서 노리치 줄리안의 ‘Showings’ 읽다. 좋은 책이다. 허락하시면 번역 한번 해볼까? (2016. 12. 16)
⎈ 아이들이 그동안 집중적으로 연습해온 연극을 공연한다. 초등학생과 7, 8학년은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을, 9학년은 저희가 각본을 짠 ‘체인지’를, 열심히 보여준다. 감동이 컸다. 학부모들이 몰려와서 성황을 이룬다. 전교생이 참여한 연극제다. 학부모들과 교사들도 함께 출연한다. 연극인 이상직 선생이 수고가 많았다. 학부모인 바람개비와 소리샘도 수고가 많았다. 꼬맹이들이 고깔을 쓰고 나와서 춤출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무대장치나 소도구도 학부모들의 도움을 받아서 저희끼리 만들었다. 아버지들 몇이 근사한 조명등도 설치했다. 이런 학교가 또 있을까? ‘함께 어울려 놀면서 크는 집’이란 이름이 공허하거나 부끄럽지 않다. 바보 이반 역을 맡은 준서가 졸업하면 연극을 한번 제대로 해보고 싶단다. 고무적이다. 두더지가 함께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광주 화개가 와서 하는 말이 내년부터 광주와 전주 사람들이 한 달에 두 번 명상모임을 가질 계획인데 한 번은 나든지 두더지든지 함께 하고 싶단다. 우리가 그리로 갈 수도 있고 자기들이 이리로 올 수도 있단다. 하늘이 허락하시면 그러자고 했다.
(2016. 12. 17)
⎈ 서해가 새벽에 서울 집을 떠나 무사히 도착. 오는 길에 묵주기도를 바치며 졸지 않고 잘 왔단다. 고마운 일이다. 기도는 그걸 자기가 하는 게 아닌 줄 알 때까지 해야 하는 것.
와온 해변 용화사(龍華寺)에서 예배. 오늘은 여럿이 모여 재미있는 이야기꽃을 피웠다. 예승 군이 부모님 결혼기념일과 어머니 생일을 축하하여 비올라로 찬송가를 연주하는데 소리에서 품격이 느껴진다. 우리 모두의 주인님 고맙습니다.
(2016. 12. 18)
⎈ 서해는 고추장 담그러 익산에 가고 나는 종일 번역 작업. 이를테면 이런 대목을 옮길 때 신이 난다.
“지옥에 대해서 말해봅시다. 그런 게 실제로 있나요?”
“근원에 연결되지 않은 사람들 마음속에만 있어요. 짐승들은 그런 거 모릅니다. 자기를 명료함에서 격리시킨 사람들한테만 지옥은 있지요. 당신들은 혼란(昏亂)을 일종의 지옥이라고 부르지 않나요? 당신들은 혼수(昏睡)를 일종의 지옥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난폭하게 행동한 자들이 지구 행성을 떠날 때 받는 벌이 있어요?”
“그게 그렇지 않다고 우리가 말하면 사람들은 흔히 실망하지요. 당신들의 벌은 자기 자신을 당신들이 언제든지 쓸 수 있는 ‘근원 에너지’에서 떼어낼 때 스스로-주어지는 것이오. 지옥의 존재를 시인하지 않으면 당신들은 아주 불쾌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비-물질’로 돌아가 다시 태어날 때 당신들은 모든 의혹과 두려움, 모든 원한, 모든 증오, 모든 오해를 뒤에 남겨둘 거요. 그리고 이번 생과 이전 생들이 당신으로 하여금 그렇게 되도록 만든 바에 상응(相應)하는 진동으로 될 겁니다.”
이 세상엔 지옥이 있어야 마음이 편해지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 있어도 아주 많이 있다. 그만큼 누구를 향한 미움으로 사람들이 살아간다는 얘기겠다. (2016. 12. 19)
⎈ 유행성 독감으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고생들이다. 서해도 목이 붓고 어지럽단다. 내일 부산행은 버스로 혼자 가야겠다.
웨인 다이어 번역 계속. 얼마 안 남았다. 쉽지 않다. 그래도 재미있다. (2016. 12. 20)
⎈ 부산 지구촌고등학교 다녀옴. 질문을 받는데 한 학생이 “하느님을 왜 믿느냐?”고 묻는다. 처음 받아보는 질문이라 얼른 답이 나오지 않았다. 좀 생각해봤다. 뜸을 들이다가 내가 너무나 소중해서, 나를 너무나 사랑해서, 그래서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했다. 한 마디 더 해줬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다. “소중한 나, 사랑하는 나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하느님을 믿는 것이라서…” 오늘도 김정곤 씨가 버스터미널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버스터미널로 오가는 길에 차를 태워줬다. 저녁으로 부산 ‘공주’들이 사주는 동래파전을 난생 처음 먹어봤다. 역시 고마운 사람들이다. 감기 기운인가? 목이 뜨끔거린다. (2016. 12. 21)
⎈ 아침 먹고 바로 자리에 누워 오전 내내 정신없이 잠들었다. 노곤한 몸을 일으켜 웨인 다이어 번역 계속. 저녁으로 배움지기들과 어머니 교사들 함께 회식.
본인 부탁을 받아 서해에게, “누룩을 끌고 다니는 예쁜 여인”이라는 뜻으로 다른 이름 효선(酵嬋)을 선물하다. 좋단다. 이제 아버지가 주신 본명으로 살고 싶다고. (2016. 12. 22)
⎈ 방학식. 10년 넘도록 아이들을 태워준 스쿨버스 기사 두 분이 오늘로 일을 그만두게 됐다. 헤어지는 아픔에 어른과 아이들이 눈물을 훔친다. 언제고 올 날이 오늘 온 것뿐이라고 말은 했지만 내 마음도 허전하다. 방학식이라기보다 송별식이 되었다. 오늘 구례로 연극 보러 가겠다고 했는데 감기 때문에 아무래도 안 되겠다. 미안하다. (2016. 12. 23)
⎈ 9학년 여섯 명이 졸업하는 날. 어진이, 은새, 이령이, 은서, 시원이, 남현이. 차례로 나와서 자기 인생내력을 에세이로 발표한다. 어진이가 주제를 아토피로 할까 아빠로 할까 고민하다가 아토피를 버리고 아빠로 택했다는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박수했다. 그래, 바로 그거다. 그렇게 하는 거야. 아이들이 중학생처럼 보이지 않고 의젓한 어른으로 보인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감동이다. 너희들이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이 학교 출신이라는 걸 자랑할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해줬다. 두더지가 부재중이라 아쉽지만 민들레를 비롯하여 배움지기들과 부모들이 잘 해주고 있다. 모두 함께 벌이는 흥겨운 잔치판이 오후 늦게까지 이어진다.
아침에 갑작스러운 초대를 받아 졸업식 마치는 걸 보지 못하고 목포 한산촌에 왔다. 세는 나이로 백세(百歲)가 되셨다는 여성숙 선생이 저녁상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을 수발하는 현옥 자매와 우리 내외가 조용한 크리스마스이브를 함께 보냈다. 그동안 죽음이 많이 겁났는데 그에 대한 두려움이 차츰 줄어든다고 하신다. 선생은 귀가 어둡지만 입을 귀에 바짝 대고 말하니 잘 알아들으신다. 내가 왜 재혼했는지 그게 궁금하셨던 모양이다. 재혼한 게 아니라 재혼당한 거라고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아무리 작은 소리로 말해도 감기 기운 탓이겠지? 목이 아프다. 고단하다. 10시쯤 채플 아래 객사에 들었다. (2016. 12. 24)
⎈ 새벽에 잠이 깨었다. 이제는 예수 길벗 친구들한테 고맙다는 미안하다는 인사 한 마디 해도 될 때가 온 것일까? 며칠째 그들이 꿈에 나타난다. 그동안 토막 난 낙지발처럼 굼틀거리던 내 동작이 그마저 멈추는 것 같다. 모든 일이, 모든 사람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그렇다. 죽겠다는 생각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죽은 척하는 것으로도 안 된다. 진짜로 죽어야 한다. 아니다. 스스로 죽는 게 아니라 누가 죽여줘야 한다. 예수에게 그의 아버지가, 빌라도와 유대교 지도자들을 동원하여, 그러셨듯이. 그렇게 죽임을 당해서 의지와 함께 감정까지도 없어져야 한다. 아예 없으면 그 또한 아니다. 나를 당신 앞에 비우겠다는 의지는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분명해야 한다. 감정도 그렇다. 아프면 아파하고 슬프면 슬퍼해야 한다. 다만 그것들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굳이 말로 하자면 죽어서 살고 살아서 죽는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효선을 깨워 사우나에 가자고 했다. 사우나에 사람들이 새벽부터 만원이다. 차분하게 앉아 몸의 때를 벗긴다. 아침 식사 마치고 효선이 여(呂) 선생과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본다. 내가 왜 자기한테 재혼 당했는지를 설명하는데 어제보다 잘 알아듣겠다는 눈치시다. 잠시 이야기 나누다가 11시쯤 일어섰다. 보리밥 아이들과 함께 점심 먹고 관사로 돌아오니 목이 붓고 열도 좀 난다. 정신없이 자리에 누워 잠들었다. 내가 잠든 사이에 용화사 예배를 효선과 바람빛이 카페에서 드렸단다. 잘 했다고 말해주었다. 원래는 엄정 아이들이 오늘 온다고 했는데 김 목사가 감기로 컨디션이 좋지 않다기에 오지 말라고 했다. 텔레비전도 라디오도 없으니 크리스마스가 이렇게 고요할 수 있구나.
이번 가을에 인천에서 팽목항까지 ‘세월호 희망의 길 찾기 첫 순례길’을 걸은 7학년 아이들과 스페인 산티아고를 다녀온 8, 9학년 아이들, 함께 다녀온 교사들과 어머니 교사들의 순례보고서 ‘한걸음씩 걷는다, 사랑어린 사람들’을 읽는다. 적지 않은 분량(타블로이드판 250쪽)의 책이 단숨에 읽힌다. 이렇게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놀면서 크는구나. 대견스러운 사건이다. “…내가 발목이 아파서 못 걸을 때 구빈이와 인이가 괜찮다고 하면서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고(?) 가준 것. 나는 그때 진짜 나 때문에 늦게 가고 나를 부축하려면 힘드니까 짜증을 내거나 먼저 가버릴 수도 있을 텐데 끝까지 가주는 걸 보고 이게 함께 어울려 노는 법이구나를 느꼈고 그 소식을 들은 친구들도 한 마을 더 가지 않고 나를 기다려서 같이 그 마을에서 잔 것도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당사자가 되면 더 크게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다른 것도 있겠지만 이 공부하러 순례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박은서) “평소에 당연하다고 느끼는 것들, 그래서 고마움을 잊고 살아갈 때, 산티아고로 떠나보라. 모든 순간, 모든 시간이, 모든 일들이, 나에게 행복으로, 나에게 고마움으로 다가온다. 모든 이가 선물처럼 다가오는, 나의 산티아고.”(강시원) 그래, 나도 고맙다. (2016. 12. 25)
⎈ 아이들이 비우고 떠난 기숙사를 왕산과 함께 청소하며 한 가지 생각이 간절해진다. 언제고 나도 이 세상을 떠날 텐데 어떻게 하면 남은 이들이 따로 청소하지 않아도 될 만큼 깨끗하게 흔적 없이 가버릴 수 있을까? 그러고 보면 우리 선생님 참 대단한 분이시다. 어쩌면 팬티 한 장 걸치지 않고 벌거숭이 알몸으로 세상을 떠나신단 말인가? (2016. 12. 27)
⎈ 웨인 다이어 번역을 마치면서 내가 지금까지 잘못 살지 않았고 앞으로도 잘못 살지 않으리라는,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랬고 그러리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사랑의 하느님이 근원인 세상에 ‘잘못됨’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같은 소감이면 좋겠다.
시절의 가객(歌客) 장사익 씨 공연에 초대받아 광주 다녀오다. 혼신의 힘으로 쇼에 정성을 다하는 그를 보는 동안, 사십대 시절에 즐겨 듣던 임방울 명창이 자꾸 생각난다. 노래가 좋아 노래하다가 노래로 된 사람들, 그로써 충분히 행복한 인생이겠다. (2016. 12. 28)
⎈ 풍경소리 신년호 발송 돕기. 표지그림으로 붉은 수탉이 들판에 서서 “아프지 말고 행복합시다.”라고 말한다.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보다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 쪽으로 사람들 저울이 조금이나마 기울었으면 좋겠다. ‘아니다’ 없이는 ‘이다’가 있을 수 없지만, ‘이다’를 위해서 ‘아니다’가 있는 거지 그 반대는 아닌 것이다. 거리의 붉은 신호등은 본질상 파란 신호등을 위하여 파란 신호등에 종속된 것이다. 원치 않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하기보다 원하는 것을 원한다고 말하는 쪽에 건강하고 복된 삶의 길이 있다. 이번에 옮긴 웨인 다이어 책에서 배운 게 있냐고 묻는다면 이것 하나로 족하다고 답하겠다. (2016. 12. 29)
⎈ 점심에 여수 ‘준호네 수산’ 다녀옴. 방어, 돔으로 회를 떠줘서 잘 먹었다. 가슴에 착한 꿈 안고 살아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이순신광장에 조선(造船)되어 있는 거북선 안으로 들어가 봤다. 장비도 전기톱도 없이 도끼와 톱과 끌 또는 대패만으로 이 묵중한 나무를 다듬어 배를 급히 만들었을 선조들을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참 대단하신 분들이다. 하지만 독가스와 핵무기로 수많은 인명을 단숨에 도말시키는 현대전에 견주어 얼마나 차라리 낭만적인가? 내 머리는 또 왜 이럴 때 뜬금없이 슬프고 아픈 세월호를 떠올리는가?
리처드 로어 신부의 ‘벌거숭이 지금’ 부록을 번역하는데 가슴이 떨린다. ‘깨달음’으로 가는 영적 여정의 아홉 가지 수준(level) 가운데 6, 7, 8번째 수준이 다음과 같단다.
6. 나는 텅 비어있고 무능하다: ‘하느님의 대기실.’ 그 어떤 훌륭한 행동, 테크닉, 도덕성, 적극적 역할 또는 종교적 헌신으로 자기를 구원하려는 거의 모든 시도가 좌절로 귀결됨.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고 간청하고 신뢰하는 것이 전부다. 당신이 신앙을 배우고 어둠이 훨씬 더 좋은 교사임을 발견하는 장소. 바야흐로 하느님이 실재하려 하심.
7. 나는 내가 나라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한 존재다: 거짓 자아의 죽음, 참 자아의 출생. 하지만 당신은 아직 집에 와 있지 않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하나의 ‘공’(空)으로, 비록 경이로운 공이라 해도, 느껴질 것이다. 십자가의 요한이라면 그것을 ‘눈부신 어둠’이라고 불렀을 것임.
8.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 30): 이제부터는 오직 하느님이 있을 뿐. 또는 테레사가 말했듯이, 사람이 자기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 안에서 자기 자신을 안다. 다른 모든 것은 지나가는 에고의 소유물로 보이고 당신은 그것을 지키고 그것을 조장하고 아니면 그것을 입증할 필요가 없다, – 어느 누구한테도.
어쩌면 이것들 사이 어디쯤에서 오락가락하는 게 오늘의 나일까? (2016. 12. 30)
⎈ 점심을 소리샘 집에서 초대받다. 소박한 떡국. 맛있게 먹고 졸려서 집으로 돌아와 바로 잠들다. 누가 문을 두드려 보니 목포 창해다. 유치원에서 졸업하는 아이들에게 줄 글씨를 써달란다. ‘향기로운 풀 아름다운 꽃’이라, 풀은 어머니고 꽃은 아이들이라고 말해주었다.
두더지한테서 연락이 왔단다. ‘큰 공부’하고 있다고, 가파른 고개 하나 넘은 것 같다고, 며칠 뒤 네팔로 넘어가 설산기슭에 들면 당분간 통화가 어려울 거라고. 반가웠다. 소식을 전하는 신난다가 예뻐 보인다. 옛 시인이 노래했지, 복된 소식을 전하는 발의 아름다움이여… 세상이 내 입에서 기쁜 소식을 듣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욕설과 비난만큼은 들을 수 없게 되었으면 더없이 좋겠다. 어려울 것 없다. 내가 하지 않으면 된다. 오늘이 금년 마지막 날이라고 사람들이 차를 타고 길이 무겁게 다니는 모양이다. 허, 언제는 마지막 날 아니던가? 효선이 날마다 새롭게 그분 가까이로 이끌려가는 것이 보인다. 고마운 일이다. (2016. 12. 31)
⎈ 민들레 가족이 새벽부터 세배한다고 왔다. 앵무산 정상에서 해맞이하고 내려온 몇 식구들과 떡국으로 아침 먹고 잠시 도서관에 둘러앉아 덕담 나누다.
오후 용화사 예배. 구례에서 은영이 올까 말까 하다가 왔단다. 이태수 화백 내외와 함께 박소정 선생 저녁 초대를 받아 소문난 광양 한우불고기 맛보다.
감기기운이 아직 좀 미련이 남았나보다. 아니면 내 쪽에서 미련이 남은 걸까? 목이 속으로 껄끄럽다. 허, 여전히 나는 나와 내 몸의 감기를 별개로 보는 건가? (2017. 1. 1)
⎈ 이 화백 내외가 어렵게 섭외한 배로 순천만 철새들 취재하는 길에 동행하자는데 감기가 딴죽을 걸어서 아쉽지만 가지 못했다. 오전 내내 잠들다. 오후, 바오로딸에 보낼 로어 신부 글 번역 마치고, 다시 잠들다. 저녁식사 뒤에 이령이 가족 함께 세배. (2017. 1. 2)
⎈ 효선 감기가 도진 모양. 저녁나절 콧물에 기침이 심하다. 내일 모레 먼 길을 차로 이동해야 하는데 은근히 걱정이다. 아차, 또 쓸데없는 생각을 잠깐 하고 말았다.
타라 브라크의 글 옮김. 이런 문장이 있다. “고통은 우리를 정신 차리라고 부르는 초대장이다. 우리의 생각이 과연 진실인지 물어보라고 부르는 초대장이다. …극도의 위험에 처하거나 극도의 결핍을 느끼는 때야말로 우리 생각이 과연 진실인지 아닌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는 위기의 순간이다.” (2017. 1. 3)
⎈ 서울 이정현(삘기)한테서 사과와 책(영혼을 깨우는 시 읽기)과 편지, 7학년 예진이, 3학년 지영한테서 편지. 바오로딸에 로어 신부의 [벌거숭이 지금] 번역 원고 보냄.
“모든 ‘말’이 ‘말없음’으로 균형을 이루고, ‘앎’은 ‘모름’으로 겸손해져야 한다. 이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은 종교는 틀림없이 공격적이고 배타적이고 심지어 난폭하다.”
“모든 ‘밝음’이 ‘어둠’으로, 모든 ‘성공’이 ‘고통’으로 채워져야 한다. 그것을 십자가의 요한은 환한 어둠이라 하였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파스카 신비라 하였고, 가톨릭은 성체성사 때마다 ‘신앙의 신비’로 선포한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삶의 중심원리로 자리 잡는 일은 매우 드물다.” –[벌거숭이 지금] ‘머리말’에서. (2017. 1. 5)
⎈ 순천에서 광명까지 열차로 왔는데 역사(驛舍)가 하도 넓어 마중 나온 사람을 어디에서 만나야 할지 모르겠다. 적어온 번호로 장 목사에게 전화를 걸자 녹음된 여자 음성이 “고객님,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라고 친절하게 일러준다. 버튼을 잘못 눌렀나 싶어 다시 한 번 천천히 똑똑하게 눌렀지만 역시 대답하는 사람은 방금 그 여자다. 머리를 굴리다가 효선한테 전화를 거니 이번에도 같은 여자가 나와서 하는 말이 상대방 전원이 꺼져 있단다. 어디 다른 데 전화할 곳도 없고 기억나는 전화번호도 없는데 이 노릇을 어쩐담? 허허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그래도 가만있기가 좀 뭣해서 동편 대합실로 가보자 하여 공중다리를 건너는데 장 목사의 숨찬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린다. 어디선가 나를 발견하고 달려온 모양이다. 허허허… 하늘은 오늘도 어김없이 나를 보고 있는데. (2017. 1. 6)
⎈ 지금여기교회 청소년 성서여행. 오후 프로그램으로 퇴촌에 있는 습지생태공원을 걸었다. 눈에 띄는 것들이 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무상(無常)으로 흐른다. 붙잡을 것 없고 붙잡힐 것 없다. 그러니 기억하라,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이 아름답고 눈물겹다. 너도 그렇다. 일부러 자세히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답다. (2017. 1. 7)
⎈ 처음에는 사람을 바로 쳐다보지도 않고 입에 귀를 대어도 잘 들리지 않게 말을 웅얼거리던 친구들이 하룻밤 사이에 수 미터 떨어져서도 들릴 만큼 크고 똑똑하게 말한다. 고맙다. 그만하면 됐다. 우리가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는, 이에 견주어, 별로 중요한 것 아니다.
예배 마치고 점심 먹고 오후 2시 반 열차로 순천행. 열차에서 톨레의 책(고요가 말하다) 마저 읽다. 좋은 책이다. 오늘 내가 이 책을 몇 번째 먹은 건가? (2017. 1. 8)
⎈ 아침 먹고 자고 점심 먹고 자고 하루 종일 잔다. 그래도 틈틈이 로어 신부 글 번역한다. 번역작업은 내게 가벼운 피로를 풀어주는 괜찮은 청량제다.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우리에게 너희 영혼으로 다리를 놓으라고 명합니다. 하지만 다리 놓는 사람은 누구든지 양쪽으로부터 오해를 사고 짓밟힐 위험을 감수해야 해요. 예언자들처럼 우리는 정면으로 공격당하고 그들처럼 파멸당할 위험을 안고 있는 겁니다.
“나는 자기 자신을 교조적인 바탕에 뿌리박은 사람한테서 무슨 지혜가 흘러나오는 걸 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어렵고 복잡한 문제들의 대립하는 양쪽 긴장을 창조적으로 부여잡고 씨름하는 사람들한테서 놀라운 지혜가 솟아나는 것을 보았어요. 그들의 내뻗은 두 팔과 양쪽 진실에 못 박힌 두 손은 우리 모두의 두 부분인 인성(人性)과 신성(神性), 하늘과 땅, 남성적 육체와 여성적 영혼, 착한 강도와 그렇지 않은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린 살아있는 아이콘을 연상케 합니다.” (리처드 로어, ‘그리스도인의 정치행동)
이 나라 정치마당에서 기대를 거둔 지 오래 되었지만 자기만 옳고 상대는 틀렸다고 강변하는 철부지들을 마냥 지켜봐야 하는 건 아무래도 서글픈 노릇이다. (2017. 1. 9)
⎈ 달라이 라마와 그가 만난 사람들 번역. 잘 모르는 걸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달라이 라마의 당당함이 돋보인다. 그렇다, 알면 안다 모르면 모른다 하는 그게 앎이라 했지.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 어느 신문기자가 나에게 요즘 박 대통령과 그 주변 사람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다음 문장을 읽어주는 걸로 답을 대신하겠다. “당신은 혹시 본인과 남들을 비참하게 만들고 그래서 세상에 불행을 퍼뜨리는 것이 자기 인생의 목적인 양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알고 있는가? 그들을 용서하라. 그들도 시방 깨어나는 인류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맡은 역할은 에고 의식의 미망(迷妄)을 키우고 모든 변화에 무조건 저항하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어느 것도 개인의 사적인 역할이 아니다.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참 자아가 아니다.” (에크하르트 톨레, ‘고요가 말하다’ 6장)
효선이 삼겹살을 구워 신난다, 반디 함께 먹다. 나도 몇 조각 얻어먹다. (2017. 1. 10)
⎈ 아침, 효선과 함께 와온 해변 산책. 밀물이 충만한 바다의 가장자리가 하얗게 얼었다. 걷는 게 힘이 든다. 중간에 멈추어 쉬고 싶었지만 마땅히 쉴 자리가 없어서 비틀거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걸었다.
오후, 타라 브라크의 글 번역. “어린 시절에 받은 스트레스와 상처가 클수록 두려움에 뿌리내린 신념도 그만큼 깊어진다. 당신이 만일 전쟁터에서 자랐다면 당신의 생존본능은 자동으로 ‘우리’와 ‘그들’을 분별하여 ‘그들’을 나쁘고 위험한 자들로 여길 것이다. 당신이 만일 어려서 성폭행을 당했다면 친근하게 다가오는 사람마다 겁이 날 것이다. 반면에 당신은 사람들을 향해서 공격적이고 폭력적으로 될 수도 있다. 당신이 만일 미국 흑인 남자라면 사람들이 당신을 업신여기고 당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당신을 불공정하게 대할 것이라는 신념을 지닐 것이다. 당신이 만일 가난해서 늘 배가 고팠다면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도 여전히 궁핍함을 느낄 것이다. 우리의 신념들은, 비록 그 뿌리가 과거에 박혀 있다 해도, 늘 현재하는 것으로 작용한다. 생각과 느낌들이 그것에 결부되어 지금 당장의 경험을 걸러내고 거기에 반응하는 방법을 지시한다. 당신 파트너가 무엇에 정신이 팔려서 당신의 질문에 답하지 않으면 당신은 옛적에 거절당한 일을 기억하고 멀쑥하게 뒤로 물러나거나 아니면 공격적으로 반발할 것이다. 당신 보스가 당신이 제시한 프로젝트를 수정하라고 하면 당신은 옛적에 실패한 일을 기억하고 좌절하거나 맥이 풀리거나 아니면 화를 낼 것이다. 당신의 신념은 당신의 경험을 간단한 하나의 해석으로 좁혀놓는다.”
경험 없이 살 수 없긴 하지만 과거 경험에 대한 자기 해석의 사슬에 묶여서 끌려 다니는 건 인간만이 연출할 수 있는 가벼운 비극인가? 아니면 무거운 희극인가? (2017. 1. 11)
⎈ 점심으로 삼겹살을 고추장 발라서 구워준다. 맛있게 배부르게 먹었다. 그런데 몸에 아무 이상이 없다. 가렵지도 않고 거북하지도 않다. 체질이 달라진 모양이다. 그래도 안심할 수 없으니 음식점에서 고기 먹는 건 삼가란다. 당연히 그러겠다고 했다. (2017. 1. 12)
⎈ 새벽꿈에 소금(素琴) 선생을 뵈었다. 선생께서 무슨 강의를 하시는데 나도 그 밑에서 한 강좌 맡았다. 내가 무엇을 강의했는지는 모르겠다. 어느 학생이 자기가 제출한 과제물을 선생께서 꼼꼼하게 검토해주셨다고 감탄 섞어 말하는 걸 들었다. 자기가 한 일본어 번역의 틀린 부분을 친절하게 고쳐주셨다는 거였다. 선생이 약간 고단한 자세로 커다란 고목 기둥에 몸을 기대어 앉아계셨다. 그 뒤에 몇 명의 제자(?)들이 앉거나 서 있는 게 보였다. 한 여자가 선생의 강사료에 대하여 말을 꺼냈다. 너무 비싸다는 거였다. 곁에 있던 젊은이가, 저마다 낼 수 있는 만큼 내는 건데 뭐가 비싸냐고 물었다. 그걸 왜 선생 혼자 가지는 거냐고 여자가 말했다. 내가 나서서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냐고, 모든 강의를 선생께서 혼자 하시는데 강사료를 누구하고 나누라는 말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선생 뒤에 있던 누가 맥주 한 컵을 선생의 종이봉투에 부었다. 안에 있던 서류들이 모두 젖었다. 내가 난처해서 달려가는데 선생이 앉은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약간 비틀거리는 몸에 속옷을 입으셨다. 검은 양복을 입혀드렸다. 붉은 넥타이도 매드렸다. 울컥, 속에서 설움 같은 게 올라왔다. 선생이 빙그레 웃으셨다. 그러면서 나에게 괜찮아, 괜찮아, 하시는 것 같았다. 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문득, 이분이 하느님이셨구나, 이런 느낌이 들었고 동시에, 이분이 소소공인가? 이런 생각도 들면서 꿈에서 깨어났다.
10시, 효선을 통해 전화 드리니 친구들이 염려해줘서 덕분에 잘 있다고 하신다. 감사.
바람빛이 요리사라는 젊은이와 아들 준서 데리고 와서 저녁을 메기탕으로 대접한다. 푸짐하게 잘 먹었다. 대광횟집 바깥주인, 언제 봐도 넉넉하고 소탈해서 좋다. (2017. 1. 13)
⎈ 효선은 새벽 기차로 서울 가고 꼼짝 없이 앉아서 카비르 번역.
아무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잠들 수 없다,
귀신 아니면 거지들이 아우성치는.
네 입술이 ‘람’을 부르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태어남과 죽음 위에 눈물 뿌리리.
나무 제 그림자 보듯이 그렇게 숨 떨어지는 날,
말해다오, 네 재물 뉘 것이 되겠느냐?
악기 울리던 소리처럼 떠나간
영혼들의 비밀을 네 어찌 알겠느냐?
호수 위 백조인 양,
죽음이 몸 위로 내리는구나.
오, 카비르.
람의 비장(秘藏)된 신주(神酒)를 마셔라.
오후 4시, 명상을 하겠다며 화개 일행 세 영혼이 광주에서 오다. 바람 부는 황혼의 추운 바다 썰물 빠진 갯벌에 흑두루미 한 마리 목상(木像)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2017. 1. 14)
⎈ 효선이 서울에서 식재료 어쩌고 자격증 따는 시험을 치렀는데 문제 자체가 뭔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단다. 전문가란 원래 보통사람은 잘 알 수 없는 용어를 써야 하는 건가?
용화사 예배. 반디, 민들레, 신난다, 소리샘과 둘러앉아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 이야기. 하늘과 땅으로 이루어진 사람이 왜 모순을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 것인지 이런 이야기를 웃으며 나누다. 소리샘이 동네에서 사온 커피를 녹차 잔으로 마시니 맛이 별미다. (2017. 1. 15)
첫댓글 선생님! 선생님을 독차지해야 겠다는 저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