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 유재일 |
상담사는 태현이에게 시를 한 편 읽어오라고 권유했다. 박목월 시인의 시 ‘나의 배후’였다. 숙제를 내준 뒤에는 함께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의 TV 강연을 봤다. “김난도 교수가 설명하는 것처럼 인생을 시계로 설명하자면, 중학교 2학년인 태현이는 겨우 오전 6시 반~7시에 와 있는 거야. 아직 일어나기도 전이지.” 강연을 본 뒤 상담사가 태현이에게 말했다.
태현이는 다음 만남에서 시를 읽고 TV 강연을 보면서 느낀 감정을 서툰 언어로 표현했다. 드문드문 망설이며 “이렇게 생각해도 되나요?”라며 눈치를 보는 태현이에게 상담사는 “같은 시를 읽어도 각자 다르게 느끼기 때문에 틀에 얽매이지 말고 느낌을 표현하라”고 말해줬다. 책 ‘인생 치유’와 퇴계 이황의 시 등을 읽으며 모든 스케줄을 정해주는 어머니에 대한 불만, 친구 관계에 대한 고민, 미래에 대한 불안을 두서없이 털어놓았다. 태현이는 상담사와 세 번째 만나는 날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찾아보겠다”고 털어놓았다.
환자마다 읽는 책 달라
‘문학치료’가 최근 힐링 열풍을 타고 주목받고 있다. 문학치료란 문학작품을 이용해 독서, 토론, 글쓰기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치료방법이다. 미술치료나 음악치료, 놀이치료는 잘 알려진 방법이지만 문학치료는 아직 우리에게 생소하다.
전문가들은 문학치료가 공감 능력을 키우고 자아를 성찰하며 스스로 문제 해결책을 찾는 좋은 방법이라고 설명한다. 문학치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환자마다 받는 상담 내용이 다르다는 것이다. ‘헬로스마일’의 박민근 원장은 “무기력증에 빠진 청소년에게는 ‘행복한 이기주의자’라는 책을, 조급증에 빠진 성인에게는 동화책 ‘마음이 아플까봐’를 추천하곤 하지만, 꼭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작품을 읽는 데만 그치지 않고 글을 쓰거나 말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때문에 ‘감정의 객관화’가 잘 이뤄진다. 박민근 원장은 “속에 있는 이야기를 꺼내놓는 자체로도 치유가 된다”며 폭력, 자살 시도 등 어두운 과거를 글로 풀어낸 사람들은 일반인보다 43%정도 병원을 적게 찾는다는 미국의 심리학자 페니베이커의 실험을 예로 들었다.
문학치료를 위해서는 먼저 환자의 문제가 무엇인지 상담자가 파악해야 한다. 문제의 원인과 치료 목적이 정해지면 환자에게 맞는 책을 선정한다. 상담자가 먼저 환자에게 필요한 책을 골라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가끔 ‘직접 책을 골라 보라’고 할 때도 있다. 치료에 대한 의지가 부족할 때, 환자가 원하는 치료 목적이 분명할 때 더 많은 선택권을 주는 것이다. 환자가 골라온 책을 읽을 때 치료 속도는 한층 빨라진다.
종종 문학치료가 심리적 거부감을 일으키는 이유는 ‘치료 과정이 어려울 것 같다’는 선입견 때문이다. 그러나 변학수 경북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문학감상의 기본은 감동을 느끼는 일”이라며 “등장인물, 줄거리 등부터 파악하게 하는 일반적인 문학 ‘교육’을 떠올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때에 따라서는 작품의 일부분만 읽는다. 변 교수는 “내용 파악보다 읽고 나서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를 자유롭게 얘기하는 게 문학치료의 기본”이라고 설명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은 청소년이 “데미안처럼 살고 싶다”고 말하면 상담자가 “왜?”라고 질문을 던지면서 마음속 상처를 끄집어내는 것이 문학치료 방법이다. 그래서 문학작품뿐 아니라 영화, 멀티미디어 동영상, 노래 등을 듣고 보는 것도 문학치료의 방법에 속한다.
문학치료가 환자 본인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청소년을 중심으로 문학치료를 받으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 어릴수록 약물치료보다 인지행동 치료를 선호하는 경향도 커, 미술치료나 음악치료를 알아보다가 문학치료를 받으러 온다. 대개는 학습 의욕이 떨어지거나 가벼운 우울증을 앓는 학생이 개인적으로 찾아오지만 주변 교사의 권유로 문학치료를 받을 때도 있다. 최근 학교폭력 문제가 사회문제로 떠오르면서 학교폭력 피해자는 물론 가해자에게도 문학치료를 권유하는 사례가 있다.
온 가족이 함께 받을 때 효과적
성인 중에서 문학치료를 받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힐링’ 열풍이 불면서 일상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싶은 욕구가 커진 결과다. 또 반드시 정신과적 질병이 있어야만 심리상담을 받는다는 인식이 옅어져 문학치료를 받으려는 성인들은 다양한 목적으로 문학치료를 시작한다. 박민근 원장은 그래서 ‘문학치료’ 대신 ‘문학치유’라는 말을 즐겨 쓴다고 말했다. “문학치료는 상담실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다. 집에서, 학교에서 작품을 읽고 느끼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꼭 일주일에 한 번 상담실을 찾을 필요도 없다. 그 사이에 혼자서 글을 써보거나 상담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얘기를 나누는 것도 훌륭한 문학치료 방법이다.”
온 가족이 함께 문학치료를 받기도 한다. 특히 청소년의 심리적 상처는 가족관계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가족과의 상담도 필수적이다. 성적이 잘 나오지 않는다고 초등학교 6학년 지훈(가명)이를 닦달하던 엄마는 상담자의 권유로 함께 문학치료를 받았다. 박민근 원장은 “내내 눈물을 흘려 ‘마음에 맺힌 상처가 많구나’ 생각하게 했던 환자”라며 “나중에는 아이의 문제를 고치며 온 가족이 정신적으로 건강해졌다”고 전했다.
외국의 경우에는 문학치료가 일상화돼 있다. 문학치료의 원류는 1940년대 미국의 도서관 사서들이 정신과 의사들과 함께 만든 몇 가지 가이드라인에서 시작한다. 독서와 글쓰기의 효과를 심리적 장애를 치료하는 데 활용하기 위해서다. 이 때문에 미국이나 영국, 독일 등에서는 지역이나 조직별로 전문적인 문학치료사가 방문하는 독서클럽이 잘 조성돼 있다. 문학치료사가 가이드라인과 읽을 문학작품을 제시해주면 클럽 회원들끼리 얘기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치유를 얻는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아직 문학치료를 전문적으로 받을 수 있는 곳이 많지 않다. 박민근 원장은 “힐링이라는 단어는 여기저기서 들리지만 어떻게 힐링할 것인지는 잘 얘기하지 않는다”며 “꼭 상담소를 찾지 않아도 일단 읽고, 말하고, 글 쓰는 일이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해결하는 방법이라는 사실부터 알려졌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