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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뜨29] 킨 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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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 에무는 올해 22살 미얀마 양곤 대학교 문학부 영어영문과 3년이다. 킨 에무는 동양곤 대학 캠퍼스 여성 전용 베이곤 관에서 학교생활을 영위한다. 남친은 같은 과에 다니는 23살 뚜야이다. 킨 에무와 뚜아는 같은 과 선후배로 만나 뜻이 통하고 호흡이 맞아 마침내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둘은 장차 결혼 약속도 하였다.
그런데 미얀마에서 2021년 2월 1일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이후 선량한 많은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하였다.
2월 9일, 네피도에서 반쿠데타 시위에 참가한 여성이 미얀마 경찰의 실탄 사격을 받고 뇌사 상태에 빠졌다. 13일에는 피해자 가족이 피해자에게서 산소호흡기를 제거하는데 동의하며 첫 사망자가 나왔다. 그 후 계속해서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4월 2일 군경에 피격된 신한은행 양곤지점 직원이 수술을 받았지만 끝내 깨어나지 못하고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4월 10일, 이날 하루만 미얀마군은 중화기까지 동원하여 최소 82명의 사람을 살해했다. 이에 미얀마에 거주하던 한국 교민 411명이 귀국했다
2021년 6월 현재 시위 도중 사망자 수는 845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또한 투옥된 사람 수만도 4500명이 넘는다.
그런데 킨에무의 남친 뚜야는 2021년 22222 항쟁 중 군부가 쏜 총에 맞아 숨졌다. 사랑하는 남친을 잃은 킨 에무는 제 정신이 아니다. 그녀는 군부에 대한 극도의 반감에 미얀마의 자유화에 온 몸을 던져 항쟁할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막강한 군부에 저항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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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곤대학교는 설립 이래로, 대중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920년, 1936년, 1938년의 대부분의 반영 운동은 이 대학교에서 시작되었다. 아웅 산, 우 누, 네 윈, 우 탄트와 같은 반영 운동의 지도자들은 이 대학교의 동문들이다. 이 학생운동의 전통은 1962년, 1974년, 1988년, 최근의 1996년과 같은 반군부 민주화 운동에 까지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이 대학교에는 당시 버마의 최고 엘리트들이 입학하는 학교인 동시에, 격렬한 반식민 활동의 중심지였다. 영국의 식민지배에 항거한 1920년, 1936년, 1938년의 세번에 걸친 대투쟁도 랑군 대학교에서 시작되었다. 1930년대를 거쳐 랑군대학교는 버마 민족주의의 모태가 되었으며, 아웅 산, 우 누, 우 탄트와 같은 버마와 독립 이후 미얀마의 유명한 정치인들을 길러냈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 걸쳐 랑군대학교는 동남아시아 최고대학, 아시아 최고대학의 반열에 들었다. 이 당시 세계 여러 나라에서 많은 학생들이 유학을 왔다.
1962년 7월 7일 랑군 대학교의 학생들은 평화로운 시위를 통해 '부정한 대학 통제'에 저항했다. 이 시위에 대하여 네 윈 정권은 학생들의 시위를 강제 해산하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했다. 이 군대의 발포로 인해 많은 학생들이 사망하였다. 진압에 투입된 군대는 다음날 아침 랑군대학교 학생회관 건물에 포격을 가했다. 1974년 11월 UN사무총장 우 탄트가 사망하자 그의 장례식이 12월 5일 대학에서 있었다. 국장(國葬)으로 치루어진 이 장례식에서 학생들은 경의를 표하지 않는 국가에 저항함을 드러내기 위하여 영구 중이던 관을 빼앗아 학교 인근 카이카라이 도로에서 자체적으로 장례를 치른 뒤 대학교 내 마련된 임시 빈소에 관을 세워두었다. 12월 11일 군대가 캠퍼스에 진압하여 저항하는 학생들을 사살하고 관을 원상태로 했다. 이후 우 탄트의 시체는 슈웨다곤 파고다 밑에 묻혔다.
1989년 군사 쿠데타 이후 국명을 미얀마로 변경하고 이와 함께 랑군대학교의 이름도 양곤대학교로 바뀌었다. 대학교는 학생들이 연합하여 8888 항쟁의 재발을 두려워한 군부로 인해 1990년대 대부분의 경우 폐쇄되어 있었다. 오늘날, 대학교는 정부에 의해 비정기적으로 폐쇄된다. 학생들의 연대를 방지하기 위하여 당국은 존재하는 교육기관과 학부를 양곤대학교로부터 분리하여 양곤시 밖으로 교사를 분산시켰다. 현재, 양곤대학교 메인 캠퍼스에는 대학원 수업과 특정한 전문가 과정, 졸업수업만이 이루어질 뿐이다. 학부수업은 대이곤 대학고, 동양곤대학교, 서양곤대학교에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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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는 2010년대에 단계적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수치와 NLD(국민민주연맹)가 2012년에 합법화되었고, 친군부계 통합단결발전당(USDP)이나 정부군 소속 땃마도(Tatmadaw)가 남아 있었기에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군부의 영향력이 강한 나라였다. 2015년 총선에서 수치가 이끄는 야당의 압승이 확정되며 선거 의석(전체 의석의 75%. 나머지 25%는 군부 몫의 직능 비례대표) 중에 88%를 쓸어 담으며 53년만에 문민정부 수립(전체 의석 중에 67% 이상)에 성공했지만 수치는 외국 국적의 배우자를 가진 사람은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헌법 조항 때문에 대통령에 오르지 못했다. 즉, 형식상의 민주화는 진행하겠지만 기득권을 계속 지니고 있겠다는 것이 군부의 속뜻으로 단독 정부 수립 이후에는 수치가 실질적인 권력을 가질 것으로 보였지만 여전히 막강한 군부의 권력과 군부의 직능 비례대표나 정치적 영향력을 인정하는 헌법 체계로 인한 이중적 권력 체제 때문에 미얀마에서 정치 불안과 쿠데타 우려는 상존해왔다.
사실 치안 및 안보, 국방 관련 등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군부가 쥐고 있었다. 국제 사회에서는 미얀마에서 문제가 터지면 수치를 향해 비판하기 일쑤였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군부가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즉, 민주화 이후에도 군부 보수 세력이 여전히 강하게 유지되고 있던 것이다. 미얀마에서는 대통령과 총리는 군부에 명령할 권한이 없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미얀마 군부는 정치가 자신들의 기득권에 도전할 때마다 쿠데타 위협을 가하여 정부를 하수인 삼아왔고 2021년 쿠데타는 이것이 터진 것이다.
2021년 군부가 아웅산 수치를 구금하고 실권을 장악한 2021년 미얀마 쿠데타에 반발해 미얀마 각지에서 벌어진 민주화 운동이다. 1988년 8월 8일부터 9월 16일까지 있었던 8888 항쟁에 빗대어 22222 항쟁(2021년 2월 22일)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외에도 봄 혁명 등 여러 명칭이 있다.
평화주의를 고수하며 시위 등을 통해 군사반란을 반대하는 뜻을 펼치는 시민들을 군경이 지속적으로 살해하는 등, 군 반란세력이 폭동적 시위진압을 고수하자 끝내 일부 시민들 또한 사냥총, 사제총과 화염병 등을 사용하여 군 반란세력에 대항하고 있다. 4월 6일에는 시위대 측에서 사용한 수류탄으로 시민들을 살해하던 군인 4명이 사망했다. 최근에는 시민군이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고, 그 무장 상황이 진일보하여 AK 소총과 M16 소총 등 본격적인 군용 소총의 입수와 사용이 확인되기도 했다.
현재 미얀마 시위 등에서 미얀마 시민 700여명의 목숨이 희생돼 많은 시민들은 축제 없이 조용히 보내고 있기에 논란이 되었다. 미얀마 민주화 운동을 하던 시민 중 일부에서 분개하여 "생도들이 살인 기계로 훈련받고 세뇌당하고 있다"거나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라는 성토가 쏟아졌다.
민주진영 임시정부격인 '연방의회 대표위원회'(CRPH)에서는 미얀마 사해당 영상을 공유하면서 "민간인들은 공포 속에서 살고 있는데, 군인들은 띤잔 축제를 기념하고 있다. 불법적인 미얀마 군부는 미얀마를 침략한 외국 군대에 더 가깝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코로나19 규칙도 신경 쓰지 않는다"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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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전반적인 인프라 구축이 미얀마 경제의 문제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태국 국경 지대에서는 좋은 여행을 할 수 있지만 불법 마약 거래도 성행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미얀마 국내 철도는 19세기에 지어진 시설물이지만 수리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고속도로는 대도시를 벗어나면 비포장도로이다. 에너지 발전소 및 전력 공급소 부족은 전국적으로 나타나며 수도 양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전체 인구 중 4,500만 명 이상이 전기 없이 살고 있으며 70% 정도의 인구가 시골에 거주한다.
미얀마는 아편 생산 세계 2위 국가이며 세계 생산량 8%를 차지하며 암페타민과 같은 마약 불법 거래가 성행하기도 한다. 다른 산업의 경우 농업, 직물, 목재, 건설 자재, 보석, 금속, 천연가스 및 석유 등이 있다. 민간부문이 농업, 광에너지, 교통 등을 담당한다면 군부 및 정부는 에너지, 중공업, 미곡 거래 등을 맡고 있다.
D10은 대서양 위원회가 10개의 "주요 민주주의"의 지도하에 "규칙 기반 민주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아이디어를 말한다. D10에 포함되는 국가로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태리, 카나다, 일본에 한국, 인도 및 호주를 가한 열 개의 나라를 일컫는다.
"D10" 회의는 전 세계 민주주의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60% 이상을 대표할 것이다.
D10 논의의 중심에는 상임 이사국 중심의 유엔이나 유럽 중심의 G7으로는 미얀마의 군부의 양민 학살 등의 국제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D10 논의는 특히 보리스 영국총리가 열심이다. 보리스 총리는 2021년 G7 회의에 한국, 인도, 호주를 불러 함께 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힌 바 있다. D10은 대중 포위 압박에 효과적이며 중국에 대항하기 위하여서는 경제와 군사 양면의 투트랙 전선을 모두 구축해야 하며 이의 결성체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첨단 기술과 민주주의, 외교가 결합하는 아이디어의 첫 시험대는 오는 6월 11∼13일 영국 콘월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다. 공식 명칭은 G7 정상회의지만, 사실 민주주의 10개국(D10) 정상회의와 마찬가지다. 기존 7개국에 한국과 호주, 인도가 초청받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견제 대상인 중국·러시아는 배제됐는데, 이는 캠벨 조정관이 지난 1월 밝힌 구상 그대로다. 당시 캠벨 조정관은 포린 어페어스 기고문에서 “미국은 모든 사안에 초점을 두는 거대한 연합체를 구성하는 대신, 개별 문제에 초점을 맞춘 유연한 연합체를 추구해야 한다”면서 D10과 쿼드 확대를 언급했다. 실제로 바이든 대통령은 사실상의 D10 정상회의 이후 6월 14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의에 참석해 동맹들의 의지와 지원을 한몸에 받은 상태에서 불과 이틀 뒤인 16일 곧바로 러시아와 정상회담을 한다.
미얀마는 버마족 이외에 여러 소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미얀마 군부의 독재에 항거하여 여러 무장 단체를 결성하고 있다. 카친에는 카친 독립군 (kia)가, 라카인 주에는 아라킨 독립군, 카렌에는 카렌민족연합(KNU)등이 활동하고 있다.
미얀마 군부가 반군부단체인 '국민통합정부(NUG)'와 시민방위군(PDF), 연방의회 대표자회의(CRPH)를 테러단체로 지정했다. 또한 미얀마 임시정부의 시민군을 강경 진압하겠다고 선언하며 시민군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시작했다.
친중 성향의 군부에 저항하는 시위이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반중 성향을 띠고 있다. 때문에 중국 공산당 정부는 미얀마 군부의 편을 들면서 유엔에 미얀마에 대한 간섭을 반대하고 있으며, 미얀마에 경제적 투자를 빌미로 군부에 대들지 말라는 협박도 보이고 있다. 다만 중국 정부가 미얀마 쿠데타의 배후라기에는 NLD 정권을 대놓고 비토하기는 커녕 오히려 투자사업을 확대하는 등 사이가 나쁘지 않았기에 쿠데타의 직접적인 배후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미얀마가 중국의 해상무역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위치인지라 이러한 트러블에도 중국 당국이 전략적인 차원에서 미얀마 군부와 손을 잡고 있다고 보면 된다. 아웅산 수치도 로힝야 문제 때문에 중국과 가까워지는 경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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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한국에서는 그간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문재인 정부를 끝내고 새 정부가 들어섰다.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로 당선된 C 대통령은 나라의 근간인 헌법정신을 존중하고 그간 무너진 법치주의를 되살리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국정의 세부적인 것은 실세 총리를 두고 그의 추천으로 각료를 임명하고 모든 국정은 원칙적으로 각료들이 책임지도록 한다. 그 대신 그는 외교와 국방만큼은 본인이 직접 챙긴다.
미얀마사태는 조금도 개선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정권을 장악한 군부는 저항하는 시민들에게 마구 발포를 하여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있는 것이다. 미얀마 서부에는 체두바 섬(일명 마나웅 섬)이 있다. 여기는 라카인족이 거주하며 아라킨 반군이 활동하고 있다. 이 섬에는 천연가스가 많이 나오며 한국에서 발전소를 지어주어 한국에 대한 호감도가 높다. 특히 이 섬에는 활주로가 있어 비행기의 이착륙이 가능하다. 현재 반군은 숫적으로나 무장면에서 군부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즉 군부는 35만인데 반군은 고작 7만 5천여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한국에서 FA-50 경공격기를 지원해주거나 반군 청년들을 한국의 논산 훈련소에 데려와 기초 군사훈련을 시킨다면 전세는 역전될 수 있을 것이다. 미얀마의 민주화운동에 한국이 힘을 보태 민주화가 이루어진다면 미얀마는 한국의 혈맹으로 자리 잡고 한국의 동남아 진출에 큰 보탬이 될 것이다. 마침내 D10회의에서 미얀마에 대한 지원이 본격 논의되고 미얀마 반군에 대한 군사훈련을 한국이 맡기로 한다. 이에 킨 에무는 한국에 와서 군사훈련을 받고자 지원한다. 킨 에무는 8주간의 고된 군사훈련을 모두 이겨낸다. 군사훈련을 마치고 미얀마로 돌아온 킨 에무는 본격적으로 반군의 일원으로 활약한다.
한국 정부에서도 미얀마에대한 본격적인 지원이 결정된다. C 대통령은 일부의 반대에도 미얀마에 한국군 1개 연대를 유엔 평화유지군의 이름으로 파병한다. 여기에는 다수의 보병용 장갑차와 자주포도 같이 보낸다. 이 정도의 병력이면 대부분이 오합지졸인 미얀마 군부의 몇 개 사단도 너끈히 제압할 수 있다. 우수한 장비와 잘 훈련된 한국군에 미얀마 군부는 제대로 된 전투도 한번 못해보고 지리멸렬한다. 킨 에무는 미얀마 시민군을 대표하여 한국군과의 연락과 소통을 책임진다. 킨에무는 영어에 능통할 뿐 아니라 한국어도 상당 수준 익혀 한국군과의 소통에 큰 어려움은 없다.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지원과 시민군의 맹활약에 군부는 힘을 잃고 마침내 백기투항한다. 그동안 내전으로 피폐한 미얀마의 경제부흥에 한국의 지원이 큰 역할을 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한국의 경제발전 경험이 톡톡히 한몫한다. 한국에서는 KOICA를 비롯한 여러 기관에서 미얀마 경제부흥에 일선에서 직접 뛰면서 지원한다. 그간 도탄에 빠졌던 미얀마 국민들에게 서서히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첫댓글 . . . 읽으며 미얀마의 정치, 지리, 등 공부 많이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