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시온장로교회 김상길 목사는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기 전 70·80년대 반독재투쟁과 도시산업선교회 활동 등 사회운동에 헌신했던 분이다. 그리고 1992년 알마티에 선교 활동을 시작해 28년째 목회를 이끌어온 카자흐스탄 선교 역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2014년 주안대학원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알마티신학아카데미 학장, 세미레치예연구소 소장으로 재임하며 중앙아시아 지역의 올바른 선교 방향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초대 한인회에서 고문으로 추대되어 한인회 창립에 기여하기도 했던 김상길 목사를 만나기 위해 시온장로교회를 찾았다.
- 카자흐스탄에는 어떻게 선교사로 오시게 되었습니까?
수원 유신고등학교와 서울 오산고등학교 교목을 거쳐 서울 고척교회 부목사로 사역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제가 잘 알지 못하는 미국 한인교회의 한 목사님께서 선교사로 나갈 의향이 없냐고 물어오셨습니다. 그때 저는 제주도의 어느 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할 예정이었는데 이를 포기하고 선교사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선교지가 원래 얘기되었던 도미니카에서 소련으로 변경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1991년 7월 말 저는 뉴욕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후원교회인 워싱톤주 메릴랜드 시온장로교회 이순각 목사님과 저를 포함해 6명으로 사전답사팀을 꾸려 8월 5일 모스크바로 들어갔습니다.
당시 모스크바는 삭막하기가 그지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려워 제대로 끼니를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고생하며 모스크바에서 3일간 체류한 뒤 2차 답사지로 알마티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알마티로 오게 된 데에는 어이없는 해프닝이 있습니다. 원래는 타슈켄트로 갈 계획이었는데 당시 통역을 맡았던 고려인에게 비행기 표를 사 오랬더니 타슈켄트 행 좌석이 없어 자기 맘대로 알마티 항공권을 사왔던 겁니다. 다들 황당했지만 어쩌겠어요? 어차피 타슈켄트나 알마티 모두 모르는 곳이었던 데다 알마티에도 고려인들이 많이 살아 먹는 데 불편이 없을 것이라는 통역의 말에 끌려 무작정 알마티 행 비행기를 탔던 것입니다.
1991년 8월 8일이었을 겁니다. 새벽녘 알마티 상공에서 바라보는 알마티 주변 풍경은 달력 속 그림처럼 아름다워 놀랐습니다. 알마티에 선교사로 먼저 자리 잡은 김삼성 목사의 안내로 카자흐스탄호텔에 투숙했습니다. 16층에 제 방이 있었는데 창밖을 내다보는 순간 만년설의 천산이 눈앞에 활짝 펼쳐지는데, 그 아름다움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순간 알마티가 제 가슴 속에 꽂혀버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선교지를 알마티로 결정하였지요. 후원교회 목사님은 알마티를 선교지로 정하는데 회의적이셨음에도 저의 확신에 결국은 동의를 하셨습니다. 바로 미국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가 선교사 교육을 마친 뒤 1992년 1월 19일 식구들을 모두 데리고 알마티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인 1월 26일 알마굴에 있던 제 아파트에서 저희 집 식구 넷, 당시 통역이었던 텐 지나이다 빠블로브나 식구 셋, 이렇게 일곱 명이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예배가 올해 28주년을 맞이한 알마티 시온장로교회의 효시인 셈입니다.
- 강도까지 당하는 고초를 겪기도 하셨다는데, 처음 목회를 개척할 때 어려웠던 얘기를 들려주시죠.
어려웠던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요. 1997년도 교회 건물을 짓기 전까진 홀을 빌려 예배를 드렸는데, 예배드린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쫓겨나곤 해서 몇 군데를 전전해야 했습니다. 예배드리는 장소가 안정되지 못하니까 교인들이 모였다간 흩어져버리는 게 너무 속상했지요. 그리고 비자 문제도 심각했어요. 처음엔 잘 주더니만 나중엔 3개월짜리 1개월짜리 주는데, 거기 매달리느라 시간 다 보내곤 했어요. 또 당시 카자흐스탄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인프라가 형성이 되어 있지 않아 교통, 통신, 금융이 아주 힘들었지요. 특히 은행 시스템이 엉망이라 후원교회에선 선교비를 보냈다는데 은행에 가보니 안 들어왔다는 거예요. 그렇게 두세 번 날리고 막막했던 적이 있습니다.
강도요? 다시 꺼내기도 끔찍한 기억입니다. 95년 12월이었지요. 쟌도소바-아우에조바에 있는 아파트에 살 땝니다. 그날 이른 아침 밖이 아직 어둠에 잠겨 있을 때 아들을 학교에 보내려고 아내가 현관문을 여는데 느닷없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강도 네 명이 권총과 칼을 들고 밀고 들어온 겁니다. 저는 방안에 누워 있다가 “악!”하는 비명소리를 듣고 뛰쳐나가니 강도 한 놈이 아내 머리에 권총을 들이대고 있고, 다른 한 놈이 바로 제게 달려들어 칼을 목에 들이대는 거예요. 그리곤 제 팔을 뒤로 묶어 거실 바닥에 엎드리게 한 후 소파 커버를 벗겨 내 머리에 뒤집어씌우더군요. 순간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장이라도 제 등에다 칼로 내리꽂을 것만 같았어요. 한 놈이 계속 뭐라 소리치는데, “젠기(돈)” 소리만 겨우 알아들었어요. 돈을 내놓으란 거지요. 당시는 대개 현금을 은행에 맡기는 게 아니라 집안 침대 밑 같은 데다 보관했어요. 안방 옷장과 벽 사이 틈에 빈 가방들을 쌓아둔 데 맨 위에 교회 운영비 7,000불이 담긴 가방을 올려두었었어요. 그때 7,000불이면 매우 큰돈이었어요. 도리 없이 그 가방을 가리키니까 바로 열곤 돈을 확인하더군요. 그리곤 두 팔이 모두 묶인 저와 가족들을 딸 방에 몰아넣곤 나머지 가방들을 하나씩 열어보는 것 같았어요. 잠시 후 5분 있다 방에서 나오라는 소리가 들리더니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이어지더군요. 강도들이 나간 것 같았어요. 그제야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죠. 옆집에서 사람들이 달려와 묶인 팔을 풀어줬습니다. 저는 허탈한 심정으로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다가 가방들이 쌓여있던 곳을 보았습니다. 맨 밑의 가방 하나만 안 열어봤더군요. 사실 그 가방 안에 교회건축자금 몇 만 불이 들어 있었어요. 가방들을 계속 열어봐도 모두 빈 가방이니까 시간에 쫓겨 마지막 하나는 안 열어봤던 겁니다.
교회건축자금은 간신히 건졌지만, 그때 일로 인해 저희 가족들이 겪은 트라우마는 엄청났습니다.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들은 그 후 큰 소리만 나도 경기를 일으켰어요. 저는 저대로 이 나라에 오만정이 다 떨어졌습니다. 사실 선교고 뭐고 하루빨리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어요. 그런데 아무리 애를 써도 빠져나갈 길이 안 열리더라고요. 회의와 좌절에 빠진 채 일 년 동안 시간만 흘려보냈습니다. 그러다 교인들과 1997년 1월 1일 0시 예배를 드릴 때였습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 있어야 한다면 그 이유를 말씀해주십시오.” 기도를 드리는데 불현듯이 ‘교회건축’이 떠오르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면 제가 교회를 건축하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다시 기도를 드렸지요. 그런 뒤 교회건축 모금을 하러 1997년 2월 한국에 나갔는데, 첫 번째로 찾아가 설교한 교회(부천 참된교회, 박창하 목사)에서 교회건축 기금 전부를 맡겠다고 결의해준 것입니다. 한 달을 계획하고 나갔다가 2주 만에 알마티로 돌아와 1997년 3월 2일 기공예배를 드리고 5년 걸린다는 공사기간을 9개월 만에 끝내고 1998년 1월 25일 헌당예배를 드렸습니다. 1997년 11월 IMF위기도 가까스로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건축자재들이 많지 않아 참으로 힘든 상황이었지만 건축업자를 잘 만나 잘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 올해 카자흐스탄 선교 30주년이기도 합니다. 이 지역 선교에 있어 키워드라 할 수 있는 것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지금까지 선교사로서 견지해 오신 방향과 원칙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알마티에서 선교 사역한 지 20년이 되는 2012년, 교회도 안정이 되고 해서 현지 목회자에게 교회를 이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입니다. 그 동안 해왔던 선교 사업을 반추하며 자주 깊은 상념에 잠기곤 했는데. 그때 문득 어떤 깨달음 같은 것이 왔습니다. 내가 해왔던 것들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카자흐인들의 땅에서 선교를 하면서 막상 그들의 역사나 문화, 그들의 정신이 뭔지조차 모르며 해왔다. 애초부터 방향성도 없이 해온 맹목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선교였다는 것입니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한동안 깊은 허탈감에 빠져 있다, 교회를 현지 목회자에게 이양해주고 저는 주안대학원대학교 박사과정에 들어가 카자흐스탄에 대해 공부하고 이 지역에 맞는 올바른 선교전략이 무엇인지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박사학위를 받은 뒤 세미레치예연구소를 열고 해마다 학술세미나를 통해 정보를 공유하고 중앙아시아에 맞는 선교방향에 대해 함께 논의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야할 선교 방향을 저는 세 가지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현장을 아는 선교여야 합니다. 선교지의 역사와 문화, 현지인들의 정서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그를 바탕으로 선교전략이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젠 정복의 선교가 아니라 삶의 선교여야 합니다. 일방적인 주입이 아니라 현지인들과 삶을 함께 하며 그들과 함께 신앙을 일으켜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개개인 선교사의 독불장군 식 선교가 아니라 지역선교사들이 함께 논의하고 협력하는 네트워크 선교여야 합니다. 물량 중심의 선교 시대는 이미 끝났습니다, 더 이상 서로 중복되고 때론 서로 쟁탈하는 비효울적인 선교가 반복되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 2013년에 받으신 박사학위 논문 주제도 세미레치예에 대한 것이고, 현재 세미레치예연구소를 세워 연구 활동을 계속하고 계신데, 세미레치예 지역의 선교적 특성이 뭔지, 짧게나마 설명해주십시오.
우선 세미레치예란 말부터 설명해드리자면, 러시아어로 ‘7개의 강’을 의미하고 카자크어로는 ‘제띄수’라고 합니다. 즉 천산산맥에서 흘러 발하쉬 호수로 들어가는 7개의 강으로 추, 일리, 까라딸, 바스한, 악수, 랩시 강을 의미합니다. 이 강들 사이로 1,000개가 넘는 샛강들이 흐르는 비옥한 지역을 말하지요. 한마디로 남부 카자흐스탄과 키르키즈스탄 일부 지역을 가리킵니다.
우선 세미레치예는 역사적으로 기독교와 무관한 지역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훈족과 돌궐족 그리고 몽골의 지배에 수난을 당하며 결국에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기독교적으로는 고대 시리아 교회의 영향과 네스토리우스 교회의 영향과 러시아정교회의 영향을 받음으로 1500년의 세월을 기독교 영향권 속에 있었던 곳입니다. 이러한 점을 깊이 연구하고 널리 밝힘으로써 이곳 현지인들에게 기독교를 이질적인 종교가 아닌 그들 내면에 심어져 있는 전통신앙이란 것을 인식시키고 그 신앙을 회복하도록 하는 작업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크로드는 사실상 촘촘히 짜여져 있는 네트워크입니다. 세미레치예를 실크로드 상의 경유지 정도로 간과하는 경향이 있는데, 매우 중요한 삶의 터전으로서 재인식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유라시아 대륙의 판도는 중앙아시아의 상황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했듯이 세미레치예의 지정학적 중요성에 상응하는 선교적 가치가 재평가되어야한다는 것이죠.
인터뷰가 끝나고 김상길 목사가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인 <세미레치예의 유비쿼터스 네트워크 선교전략 연구>를 게재한 책자를 선물했다. 원래 무지한데다 기독교인도 아닌 내가 어찌 이해할까 싶어 서문이나 훑어보자 했는데 나도 모르게 그 두터운 논문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선교적 측면을 빼고서라도 세미레치예에 대한 인문학적 지평이 조금은 넓어진 것 같아 행복한 시간이었다.
박영식 (한인신문 고문)카자흐스탄한인회에서 발행하는 한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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