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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여행기
일시: 2017년 7월1일~12일 11박12일
인원: (명단) 최창규부부 조철제부부 서원석부부 황재식부부~권상학부부~박윤규부부~하남호부부~남시진~진재윤~이한범~최옥자~김해수~차이나몽(장은정)
이동: (인천˜서안 대한항공)~(서안˜서녕 중화항공)~서녕˜라싸 칭창열차)~라싸~시가체~사 가~다르친~마나사로바~사가~시가체~라싸(전용버스)~서안(중화항공)~인천(대한항공)
-토번국가-
토번(吐蕃)은 티베트고원의 중앙에 성립된 고대왕국으로, 7세기 송첸캄포에서 9세기 중순 랑다르마에 이르기까지 2백여 년간 지속된 티베트 지역 역사상 국력이 가장 강했던 왕조였다. 당나라는 이 시기 티베트에서 존속한 왕조를 ‘토번’이라고 불렀고, 이 명칭이 14세기 중순까지 티베트의 통칭으로 사용되었다.
토번의 역대 왕들은 姓(성)을 가지지 않았으며, 왕가와 왕족도 호칭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왕조의 명칭을 토번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청나라 때까지 중국 문헌에서는 티베트의 전역을 일컫는 말로 또는 그 지배 세력을 일컫는 말로 토번이라 언급됐다. 명나라 때 쓰인, 원사(元史) 선정원(宣政院)의 조항에도 토번의 영역에 대해 기술하고 있고, 명나라 때 서장기(西蔵記)에서도 서장이 토번의 서쪽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7세기 초반 송첸캄포에 의한 통일 이후, 북동쪽으로 티베트의 토욕혼, 남동쪽으로는 남조, 북방에서는 서역의 동서통상로 패권을 둘러싸고 분쟁을 했다. 641년 당 왕실에서는 문성공주를 평화사절로 시집보내기도 했지만, 당과는 화친과 전쟁을 반복했다. 안사의 난 이후는 국력이 약해진 당나라를 물리치고 서역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유지해, 하서·농우지구와 실크로드의 대부분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791년 치송데첸이 불교를 국교로 하고, 이윽고 불교 지도자가 국정을 실시하여, 대장경이 번역됐다. 822년에는 당과 대등한 위치에서 국경을 확정하고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그 후 국내에서 불교를 둘러싸고 대립이 일어나고, 또 왕위계승 문제로 남북이 분열되어, 농노들의 반란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건국
티베트 왕실의 선조는 인도에서 왔다는 설이 있지만 불교도들의 책에서 주로 서술되고 있어 설득력이 없다. 송첸캄포의 조상들은 라사 남동의 얄룽창포(톨기 지방)를 기점으로 삼아 근처의 여러 부족을 흡수해 세력을 늘렸다. 630년, 남리송첸 왕이 독살되고 그의 아들 송첸캄포 왕(재위 630년~650년)이 즉위 한다. 633년, 송첸캄포왕은 스키타이를 평정하고, 수도를 라사로 정하고 토번 왕조를 열었다.
송첸캄포 왕
634년, 송첸캄포 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예물을 교환한다. 또한 왕국의 남쪽에 위치하는 네팔의 릿체비 왕조에 사자를 보내, 브리티크 데이비(赤尊公主)를 왕비로 맞이한다. 636년 당 태종에게 당나라의 황녀를 왕비로 맞이하고자 사자를 보냈지만, 당은 같은 티베트계 유목민 부족인 토욕혼의 존재를 이유로 들면서 거절했다. 같은 해 송첸캄포왕은 20만의 군사를 일으켜, 당의 속국이던 토욕혼에 출병하여 정벌하였고, 백란 등의 강족의 마을을 공략하고, 송주(현 사천성 송반현)를 요구하기도 했다. 몇몇 학자들은 이 전투에서 당이 승리했다고 하나 토번 측의 사상자가 1천임에 비해서 당군 사망자가 2만인 것을 비교한다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 후 다시 태종에게 특사 가르통첸(재임 652-667)을 보내, 금 오천냥을 납폐로서 주고, 641년 당 태종의 조카딸인 문성공주를 왕비로서 맞이한다. 문성공주가 ‘자면의 풍습’(얼굴에 적토를 바르는 풍습)을 싫어했기 때문에 이를 폐지하고 포탈라궁을 건립하는 등 공주에게 정성으로 대한다. 문성공주는 당나라에서 데려 온 장인들로 하여금 소소사(라모체)를 건립케 하고, 당나라에서 가져온 석가모니 상을 모셨고, 첫 왕비인 브리크티 데이비의 조캉사원 건립을 도왔다. 문성공주가 가지고 온 신진산물은 토번의 문화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기도 했다.
646년 송첸캄포왕은 고구려 승전 축하연에 가르통첸을 축하사절로 보냈다. 647년, 바르다나조 북인도의 왕, 하르샤·바르다나(계일왕)가 죽어 혼란한 바르다나 왕조에 1천5백의 기마병을 파병해, 정권을 찬탈한 아르쥬나를 잡아 당의 사자 왕현책을 보호했다. 649년, 당 태종이 죽고 당 고종이 즉위 하면서, 왕은 ‘부마도위’, ‘서해군왕’의 관직과 많은 예물을 받는다. 이에 태종의 영전에 15종의 금은주옥을 올리자, 당나라는 ‘빈왕’의 호칭을 더하고 예물로 화답하였다. 또 토번은 뛰어난 당의 공예기술(누에씨, 주조, 제지, 제묵)을 도입하기 위해 당나라 장인을 요청하여 파견 받았다. 송첸 캄포 왕은 650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티벳을 구경하려면 먼저 토번국을 알아야 한다. 토번국은 신라와 외교적으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왜냐하면 당나라가 신라를 삼키려고 안동도호부를 차리고 8년 동안 침략을 감행할 때에 토번국은 끈질기게 장안을 공격하니 당태종은 조정이 풍전등화에 놓이자 신라 침략을 결국 포기하고 철수 하였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모르기는 하여도 지금쯤 중국에 한 개의 성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볼 때에 토번국(티벳)은 신라의 고마운 우군이 아니었을까?
-삼한일통-
요즘도 일부 좌파들은 고구려가 통일을 해야지 신라가 통일하여 오늘날 반도에 머물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당시 민족공동체란 민족의식이 있었을까? 당시는 삼한이 모두 독립된 국가라고 보아야 한다. 신라는 마지막 도박을 한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말이다. 백제와 고구려의 양면 공격에 나라가 風前燈火에 놓이자 당과 동맹을 맺어 백제 고구려를 물리친 것이다.
그럼 고구려가 통일을 했으면 오늘날 광활한 만주지방을 대한민국이 물려받아 중원지방을 다스리고 있을까?
천만에 말씀이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와 전쟁을 하면 한 두 번 이길 수는 있지만 소국이 전쟁으로 대국에 승리하여 영원히 자기 땅을 지킬 수는 없다고 본다. 요나라(걸안족)와 금나라(만주족)는 나라 자체가 망하고 없지 않은가? 또 몽골은 어떤가? 내 몽골은 중국에 한 성으로 전락해 있지 않은가? 이들 삼국이 한때는 중국대륙 중원을 지배했지 않은가?
신라가 통일을 했기 때문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오천년 역사를 내세우며 세계 10대국가에 당당하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7월1일 새벽2시 경주에서 이번에 동행하는 동료들과 함께 리무진을 타고 인천으로 향했다. 4시간 동안 비몽사몽 하는 사이에 인천에 도착하였다는 기사의 말에 잠이 깼다. 공항부근 어느 식당에서 순두부 국으로 아침을 먹고 곧장 공항으로 갔다. 수화물을 탁송 하고 티켓을 받아 9시30분발 대한항공에 몸을 실었다. 중국 서안에 도착하니 11시30분이다. 가이드의 안내로 공항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17시40분까지 공항에서 기다렸다가 서녕행 비행기를 타고 19시20분 西寧 공항에 도착하였다. 시내 어느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소피텔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7월2일 날씨 비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8시 전용버스를 타고 약4시간을 달려 청해호에 도착하였다. 호수가 너무나 넓다보니 버스를 타고 가면서 차창으로 비 내리는 호수를 조망하는데 끝도 없이 펼쳐진다. 가이드가 티벳 청해호에 대하여 장황하게 설명을 하였다. 청해호 鳥島(조류 박물관)에 들려 방대한 鳥獸(조수) 사진과 剝製(박제)를 구경하였다. 50분간 박물관을 구경하고 버스를 티고 왔던 길을 다시 2시간 내려와서 차카 鹽湖(염호)에 내렸다. 염호가 워낙 크다 보니 관광객을 위하여 궤도차를 운행하고 있었는데 우리도 鹽湖(염호)에 들어 갈 때는 軌道車(궤도차)를 타고 20분간 염호 심장부로 들어가서 백색의 장관을 구경하였다. 예비 신랑신부들이 염호에 들어가서 웨딩촬영을 하는 것을 보니 백설공주가 따로 없었다. 나는 친구끼리 사진을 몇 컷 찍고는 걸어서 주차장으로 나와 다시 버스를 타고 2시간을 달려 서녕 호텔에 도착하였다. 샤워를 하고 시내로 나가서 저녁식사를 하고 곧장 호텔로 돌아와서 잠자리에 들었다.
7월3일 06시 일찍 기상하였다. 식사는 Hotel에서 간단하게 먹고 타얼사 관광에 나섰다.
타얼사[塔尔寺(탑이사)]
티베트불교 거루파[格鲁派]의 6대 사원으로 손꼽힌다. 명(明)나라 때인 1560년에 축조되었으며, 4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샤오진와쓰[小金瓦寺], 다징탕[大经堂], 다추팡[大厨房], 주젠뎬[九间殿], 징탕[经堂], 포타쓰[佛塔寺]로 구성된, 티베트와 중국의 예술구조가 서로 결합한 건축군을 이루고 있다. 티베트어로 ‘군번셴바린[滚本贤巴林]‘라고 하며, 그 뜻은 ‘십만 마리의 사자가 울부짖는 불상의 미륵사‘이다
칭창열차(4인/1실)
7월3일 12시14분 서녕역에서 칭창열차에 올랐다. 서녕역에서~꺼울무~곤륜산맥꺼커시리 무인지구~타타하~탕구라산~안도~탕구라~나무취호~당숭~라싸까지 22시간이나 가는데 지루하기가 말로 표현이 어려울 정도였다. 말이 고속열차지 완행열차도 이 보다는 빠를 것이다. 열차도 가다가 자고 승객도 자고 먹고 또 자고 해발고도가 올라가자 일행들 모두가 힘들어했다. 탕구라를 지날 때는 해발 고도가 5천이 넘는다고 하였는데 비몽사몽 하다가 언제 지나갔는지 몰랐는데 H씨 부인은 고산 증세로 열차 내에서 많이 힘들어 하고 있었다.
열차에서 식사는 라면, 햇밥으로 떼우고 소주를 나누어 마시고 또 잠을 청했다.
7월4일 09시55분 만 하루를 달려 온 끝에 드디어 라싸역에 도착하였다. 인구가 약 50만이라는데 우리나라 포항시 정도 될까? 시내가 황량하다고나 할까? 왠지 횅한 느낌이 들었다. 라싸 인터콘티넨탈파라다이스 Hotel에 짐을 들여놓고 식당으로 가서 점심 식사를 하고 포탈라궁 관광에 나섰다.
포탈라궁(해발3.700m)
중국 서장(西藏)자치구 티벳의 첫도시 라싸는 ‘태양의 도시’라고 한단다. 해발 3,700m의 고지이다.
세계 10대 건축물로 13층에 높이 117m, 폭은 110m, 동·서의 길이가 360m나 된다.
포탈라궁 건물 정상은 황금을 입힌 전통양식의 구리기와 지붕 5체로 이루어졌다. 넓이가 36만㎡에 이르는 궁은 남쪽 출입구를 제외하고 성벽과 담으로 둘러싸여 바깥세상과 차단 되어있다.
포탈라궁은 우리나라 신라시대인 7세기에 건설됐다. 티벳의 역사와 티벳인들의 기원을 담은 성전이자 궁궐이다. 인도불교가 티벳에 들어온 것은 5세기 무렵이다. 인도불교는 티벳 토속의 원시무속 종교인 본교(本敎)와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인 후 라마불교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라마불교의 일인자는 달라이 라마이다.
포탈라궁 역시 달라이 라마의 거처이자 라마불교의 사원이 됐다.
포탈라란 이름은 본래 ‘관음의 성지’란 뜻이다. 이 궁은 티벳 각 부족과 지역을 통일한 강력한 티벳 왕국(吐蕃)을 세운 송첸캄보가 631년에 지었다고 하였다.
처음 1천간 규모로 지었는데 당시 당나라 황실의 문성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이 궁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곧 포탈라궁은 세속의 티벳왕궁이었다. 그러나 각 부족과 지방 분열로 왕권의 공백이 생기면서 세속권력까지 장악한 라마불교의 지도자가 궁을 접수했다.
그 뒤 왕궁이란 기능 말고도 사원 기능 을 추가하고 산속 드레풍사원(철봉사)에 살던 달라이 라마가 1645년에 들어왔다. 오랜 분열과 내전 등으로 폐허화한 포탈라를 접수한 달라이 라마 5세는 궁의 성벽과 성루 등을 재건했다. 달라이 라마 5세가 궁을 재건한 것은 政敎合一(정교합일)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신권(神權)뿐 아니라 세속권력마저도 장악한 달라이 라마는 1690년 오늘날 사원으로 쓰는 홍궁을 따로 착공 1693년 완성했다. 그리고 오늘날 라마교의 상징 인 5개의 금정을 추가로 세웠다.
궁의 외벽은 흰색과 붉은색을 칠해 백궁과 홍궁을 구분한다. 백궁은 달라이 라마가 사람을 만나고 정무를 돌보고 생활하는 공간으로 쓰이고 홍궁은 지금까지 사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궁에는 대불만도 1천구가 봉안됐다. 작은 불상까지 합하면 수만 점이 넘을 것이란 추산이다. 포탈라궁의 부처상은 화려하다. 달라이 라마의 소상을 모신 각(閣)이 불상을 모신 불전(佛殿)에 비해 훨씬 많다.
이는 라마 불교의 특색이기도 하다. 부처가 달라이 라마로 환생한 것이라고 믿는 환생설(還生說)을 바탕으로 달라이 라마를 생불(生佛)로 추앙하고 있는 것이다.
홍궁사원의 중카바와 역대 달라이 라마 소상들은 하나같이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쓰고 있다. 중카바는 역대 달라이 라마의 뿌리로 달라이 라마 2세가 그의 직계 제자다.
지금 망명중인 달라이 라마 14세를 비롯한 모든 달라이 라마들이 그의 법통을 이은 후계자이다. 중카바는 14세기에 라마교를 개혁하고 이른바 격로파(格魯派)를 창시한 인물이다. 라마교를 오늘의 모습으로 완성한 사람이다. 중카바가 이끈 격로파의 승려들은 노란색 고깔모자를 썼다고 한다.
그래서 황모파(黃帽派)또는 황교파라고 하는 이들은 라마교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 중카바와 역대 달라이 라마들의 지위가 부처에 버금갈 정도로 신격화 한 것도 격로파 세력이다.
포탈라는 산자와 죽은 자가 함께하는 궁전이다. 그래서 달라이 라마는 죽어서도 생전에 살던 포탈라를 떠나지 않았다. 이들 산자와 죽은 자를 같이 경배하기 위한 순례객의 발길이 이어진다. 티벳은 물론 사천성과 네팔, 스리랑카 등에서 온 라마불교 신도들로 붐비는 포탈라궁에서 달라이 라마가 앉았던 의자에 입 맞추는 순례 객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달라이 라마가 살아서 쓰는 궁전은 백궁이다. 백궁은 ‘최상의 행복궁’이 나 ‘영원한 생명의 궁’ 따위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백궁 가장 높은 층인 ‘영원한 생명의 궁’에서만 잠을 잤다. 포탈라에는 다른 불교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영탑전(靈塔殿)이 있다. 영탑은 달라이 라마의 시신을 모신 탑인데 전각(殿閣)안에 봉안되었다. 화장한 뒤 뼈만 모아 넣어두거나 약품 처리한 시신을 그대로 넣어두는 경우도 있다.
홍궁 맨 뒤쪽 아래층의 영탑전에는 5세와 7∼9세, 13세 등 다섯 달라이 라마의 영탑이 자리하고 있다.
그중에 5세와 13세의 영탑은 화려하다. 5세 달라이 라마의 영탑은 죽은지 5년 뒤인 1690년에 조성되었다.
영탑은 기단에 호리병을 올려놓은 것 같은 모양이다. 14.85m에 이르는 탑신은 동과 은으로 만들고 황금칠을 올렸다. 주옥과 산호 따위의 보석을 군데군데 박아놓았다. 은이 1만량 황금이 11만9천량이 들어갔다는 기록이 있다. 13세의 영탑은 1934년에 완성되었다. 영탑전은 홍궁 다른 공간에도 하나가 더 있다. 홍궁 후문 서편 강당 뒤쪽이다.
달라이 라마 5세와 10세, 11세와 12세의 영탑이 두 방에 봉안 되었다. 그런데 영탑전과 이웃한 서편 강당에서는 1959년 까지만 해도 달라이 라마의 음성이 들렸다. 그 음성은 바로 포탈라에 사는 수백 명 승려들에게 들려 준 달라이 라마 14세의 설법이다. 59년 이후 어떤 행사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달라이 라마는 없지만 라마승과 순례자들이 켜놓은 촛불은 그냥 타고 있다.
달라이 라마 14세가 망명한 1959년 이후 변화한 공간은 또 있다. 백궁의 동쪽 정원이다. 이 정원에는 절기가 바뀔 때마다 승려와 티벳 사람들이 천여 명씩이나 몰려들었다. 달라이 라마가 의례히 백궁 발코니로 모습을 드러냈다. 종교의식을 베풀고 나서 민속놀이를 즐기는 군중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그 정원이 지금은 빈 뜰로 남아있다. 백궁과 홍궁을 합뜨려 포탈라는 1천개가 넘는 방을 갖추었다.
이 가운데 일반에게 공개하는 방은 30여개뿐이다. 동쪽 정원에서 3층 정도의 계단을 올라가면 달라이 라마 집무실이 있는데 비공개 공간이다. 달라이 라마가 정무(政務)와 종무(宗務)를 본 집무실은 명상의 공간이기도 했다. 백궁의 복도와 회랑에는 티벳사와 티벳불교사,역대 달라이 라마의 일생을 담은 벽화들이 가득하다. 방마다에는 달라이 라마들이 앉았던 자리를 보존한 가운데 달라이 라마들의 소상을 세워두었다.
한쪽 벽에는 닫 집을 만들어 불상을 모셨다. 또 다른 벽에는 경전함을 덧대어 천정 꼭대기 까지를 불경으로 채웠다. 이들 경전은 티벳어, 몽골어, 만주어 등 소수민족 언어 로 되어있다.
어마어마한 장서들은 라마불교권 학승(學僧)들을 포탈라로 불러들인다. 포탈라를 세계적 불상박물관 또는 세계적 불교박물관이라 부른다. 그것은 티벳불교가 정치를 손에 쥔 종교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홍궁에는 여러 부처 이름을 딴 방도 곳곳에 널려있다.
미륵 보살전이나 천수관음보살전, 관음보살전과 만다라전이 그것이다. 이들 불전(佛殿)에서는 야크 기름을 태우는 순례자들의 참배가 계속된다. 그 많은 부처의 상(像)중에서도 티벳불교의 핵심은 관세음보살상이다. 관세음보살이 티벳인들 신심 속에 자리 잡은 연유는 상게 감쵸(1653∼170 5년)로 거슬러 올라간다.
달라이 라마 5세의 제자인 그는 당시 생존한 달라이 라마의 원수라는 정당성을 부여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문수리근본의궤(文洙利根本儀軌)’의 예언을 믿었다.
티벳은 본래 관음보살 교화(敎化)의 땅이 라는 그 예언에 따라 관음보살은 티벳불교를 깊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관음보살전 규모는 의외로 적다. 3구의 관음보살상 가운데 한구는 키가 1m 남짓한데 7세기쯤에 만들었다. 금물을 입힌 단향목(檀香木)불상이다. 티벳인들은 이 보살상은 누가 만든 것이 아니라 저절로 관세음 보살 모양을 하게 된 것으로 믿고 있다.(자료: 인터넷 검색과 가이드 설명 요약)
조캉사원
조캉 사원(大昭寺, Jokhang)은 중화인민공화국 티베트 자치구의 수도 라싸에 있는 티베트 불교 사원이다. 중국 명칭은 따쟈오시(大昭寺). 일반적으로는 본당에 해당하는 부분의 명칭인 ‘조캉사원’으로 불린다. 또 본당이라는 의미의 트크라칸을 붙여, 투루 낭·트크라칸으로 불리기도 한다. 티베트를 통일한 토번 티베트 왕조 제 33대의 손챈감포 왕이 641년 당나라 태종의 조카딸인 문성공주가 시집을 오자 맞이하기 위해 7세기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본당에는 문성공주가 당나라에서 가져왔다는 석가모니상이 있다.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라싸의 포탈라궁의 역사 유적군에 추가등록 되었다
저녁에는 인터콘티넨탈파라다이스에 여장을 풀었다
7월5일 호텔에서 조식을 하고 노브랑카관광에 나섰다.
조캉사원 고양이는 돈 방석에 잔다
조캉사원에는 고양이가 돈 방석에서 자는 것을 보고 관람객들이 한마디씩 하였다. 돈방석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보진 못했는데 티벳 조캉사원에 와서 보니 과연 저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순례자들이 시주한 돈이 한없이 쌓이니 젊은 스님은 빗자루로 돈을 쓸어 삽에 담아 자루에 넣어 매고 어디론가 간다. 사원 곳곳에 돈이다. 작은 구멍이라도 있으면 어김없이 지폐나 동전을 끼워 넣어 놓았다. 돈이 지천이다. 이렇게 돈이 모이니 어디 쓸데가 있는가? 부처님 몸에 금을 입히고 사원 지붕에 금박을 붙여 화려하게 해 놓았다. 종교의 힘이 정말이지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라싸 캄발라(해발4.990m)
노브랑카 중국 티베트 자치구의 수도 라싸에 있는 별궁과 그 정원. 티베트어로 노블(보물) 링카(뜰)를 뜻하며 티베트의 라싸에 있는 달라이 라마의 여름 별궁이다.
1751년 달라이 라마 7세에 의해 건립된 이후부터 중국이 티베트에 지배권을 선언한 1950년대 후반까지 달라이 라마의 여름궁전으로 사용되었다
쿰붐사원
쿰품사원은 중국인들이 하얀색 큰 탑이 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티베트인들은 펠코르 최대 곰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펠코르 최대 곰파 이름은 장즈 일대를 다스렸던 랑다르 마라는 왕의 아들 이름에서 연유 되었다
펠코르최대사원은 흙으로 불상이 만들어져 있다 부처상이 과거부처 현재부처(석가모니)니 미래부처(미륵불) 상이 전면 왼쪽부터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대형 보살상들이 좌우로 다수가 세워져 있었다 어떤룸을 들어가니 탱화 중에 창으로 남자 고환을 찌르는 그림이 있었다. 좌우에는 남자 정자와 여자 난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티벳 밀교에 성교를 통한 오르가즘 순간에 깨달음을 얻는 것이 있는데 밀교에 대해서는 드러내놓고 전해지지는 않고 있다
왼쪽에는 원형 흰색피라미드탑 모양의 간체 쿰품사원 내부로 들어갔다 5층 규모인데 층마다 작은 룸이 여러 개 있어 불상과 탱화가 벽에 그려져 있다 벽은 많이 훼손되어 가고 있었다.
11시경 사원을 나와 버스출발해서 티벳 제2의 도시 인구65만명 시가체(3,900m)를 오후1시30분 도착했다 여기서 인도까지 200킬로 거리이다
중식은 고급 중국식 이었다 야채쌈, 오양장육, 돼지갈비, 땅콩야채, 쑥갓겉저리, 흰밥이 입에 잘 맞았다
판첸라마의 거주지 타쉬훈포사원 관람했다 타쉬훈포사원은 시가체 지구게르쿠파 최대의 사원이다 길상수미사 찰십륜포사, 타쉬룬포사 등으로 불린다 라사의 3대 사원인 간덴, 세라, 드레풍 사원과 함께 게룩파 4대 사원으로 불린다
사원 내부에는 거대한 26m 미륵불이 있었다 앞에는 9,10,11대 판첸라마 사진이 걸려있었다. 9대는 티벳독립운동 하다가 돌아가시고 10대는 아파서 치료차 북경에가서 간호사와 사이에 딸을 낳았다 티벳은 딸을 환대했다 중국정부에서 11대 라마를 세우고 티벳을 통치하고 있다
판첼라마가 달라이 라마보다 더 지위가 높다. 달라이라마는 정치 종교를 같이 했다
서로 다음 대의 상호 선생님이 되었다
10대 판첸라마는 중국정부에서 1,300억원 들여 금으로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무덤 상부에는 실제 라마의 시신으로 만든 등신불이 있었다. 등신불은 시신을 내장을 제거하고 소금물로 세척 후 방부제 처리하여 앉은 자세로 등신불을 만든다고 한다
타쉬룽포 대승원(시가체 해발4.441m)
1300년전 당조 문성공주는 번화한 성도였던 장안(지금의 섬서성 서안 서북)을 떠났다. 그리고 3000 km 에 이르는 먼 길을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도착한 곳은 눈 덥힌 고원지대였다. 당과 송첸캄포 사이에 화친의 희생양으로 간 것이었다. 당과 토번과의 새 시대를 가능 하게한 송첸캄포와 문성공주와의 이야기는 티벳과 당 두 나라에 널리 퍼져 전해져 내려온다.
7세기 초 중원지구는 크고 작은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당고조 이연 이세민 부자가 드디어 제국을 통일하여 618년 당나라 제국을 세우고 나자 국력은 강성하여졌고 동아지구 문명의 중심이 되었다. 주변 국가들이 강성해질까 두려워 소수민족교류에 나섰다.
당태조 정관 8년에 송첸캄포가 토번 왕에 즉위하자마자 토번을 통일하여 강성해졌다. 즉위후에 적극적으로 대외관계에 힘써 당과 화친관계를 유지하였다. 634년에 사신을 파견하여 당황제로부터 신부감을 구하였는데 641년 당태종은 이에 응하여 문성공주를 보내게 된 것이다. 문성공주와 사자 시종들은 천천히 토번국으로 향하였고 문성공주는 당황제가 설치한 난제를 하나하나 풀고 마침내 송첸캄포와 결혼하게 된다는 고사이다.
송첸캄포는 이 결혼을 위하여 수년간 고심하였기에 십분 기분이 들떴고 친히 군을 이끌고 백매까지 나가 마중하였다고 한다. 이곳에 송첸캄포가 세운 백해행관「柏海行館」을 짓고 화촉동방을 갖게 된다.
송첸캄포와 문성공주는 옥수(玉樹,지금의 청해성 靑海省)에 약 일개월간 머물다 갔다고 한다. 문성공주는 한가할 때면 가지고 간 곡물종자와 채소씨앗을 심고 경작하는 법, 술을 담그는 법을 옥수인들에게 가르쳐 주었으므로 옥수인들은 매우 감격하였다고 한다.
공주가 납살로 다시 출발할 때 그들은 모두 따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가 머물던 곳과 그녀의 족적을 석각한 것도 있으며 해마다 그녀를 기렸다. 710년 당황실은 또 금성공주를 시집보내었다. 문성공주를 기리는 묘가 일좌 있는데 사명 문성공주묘라 한다. 賜名爲「文成公主廟」
문성공주가 납살(나싸)에 이르자 사람들의 노래와 춤을 추었고 기뻐서 허리를 흔들고 환영하면서 그녀를 맞이하였다 한다. 당시 당조는 불교가 성행하여 문성공주 역시 불교도였기에 그녀는 많은 불탑을 지었다. 그리고 불경과 불상도 토번에 들여왔으며 대소사「大昭寺」를 건립하였다.
대소사를 지은 후에 송첸캄포는 묘문밖에 버드나무를 심었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를 당류「唐柳」著名的「甥舅同盟碑」,也稱「長慶會盟碑」라 하였다. 현재도 대소사 대정전의 석가모니상은 지극한 공봉을 받고 있다. 대전 양측에는 송첸캄포와 문성공주의 상이 있는데 십분 아름답고 생동감이 넘친다
오체투지와 마니차
티벳 어느 사원을 가나 마니차를 돌리는 긴긴 줄이 늘어선다. 이들은 대부분 오체투지를 한다. 오체투지는 말 그대로 오체를 땅에 던지는 것, 사원을 가는 길에 세 걸음을 걸은 후에 온몸을 납작하게 바닥에 엎드리며 나아가는 일이다. 사제들이 수품 때 바닥에 엎드리는 것처럼 불ㆍ법ㆍ승의 삼보(三寶)에 귀의하겠다는 완전한 투신의 약속이다. 물론 사원 앞에 도착하면 제자리에서 오체투지를 하는 순례자들이 엄청나게 많다.
인상적인 것은 티베트 사람들에게 오체투지는 아주 자연스럽고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일이라는 사실이다. 정말 ‘남녀노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차가 다니는 도로에서도 오체투지를 마다하지 않는다. 신도들은 앞치마를 입고 양 손에는 나무판을 끼고 땅 바닥에 스스럼없이 엎어진다. 흙먼지를 하얗게 뒤집어써가며 절을 하는 젊은 아빠가 허리띠에 아들의 허리를 묶어서 아빠가 오체투지를 하면 아들(4~5세)은 아빠를 따라 기도를 해야만 한다. 종교의 힘이 이렇게 대단한가?
티벳 불교신도들은 1년 동안 일하여 성지순례를 소원으로 색각하며 그것을 일생의 낙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은 평생에 한번 성지순례를 해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한단다. 우리가 보아서는 참으로 고된 여정이지만 이렇게 기도를 하다가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선진국 어느 나라 보다가 국민 행복지수가 아주 높다는 것은 종교의 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7월6일 시가체(해발 4.441m)
사가로 버스를 타고 8시간을 가는 도중 좌우에는 히말라야산맥과 끝없는 초원에 양떼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넓은 초원은 그야말로 광할한 대지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고지대 大 平遠이다. 참으로 넓은 땅이다.
오후 늦게 시가체에 도착하였다. 서부역참호텔 삼성급이라 하는데 劣惡한 편이다. 머리가 아파 밤새 뒤척이었다. 고도가 높으니 나는 남보다 더 고산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루에 진통제를 6알 이상을 먹으니 몸이 서서히 지치기 시작하였다.
7월7일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카일라시의 전초기지인 다르친에 도착하였다. 다르친에 가는 중간에 높은 고원에는 해발 5.700m도 있다. 조금만 움직이면 숨이 헐떡인다. 머리도 많이 아프다. 밥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머리가 아파 진통제로 산다.
7월8일
-구게왕국-
구게 왕국은 9세기 티베트의 토번(吐蕃)왕국이 분열된 뒤 성립된 지방 정권으로 비교적 세력이 강성한 국가였다고 한다.
구게 왕국은 토번의 마지막 왕 랑다마(郎達瑪)가 죽은 뒤 벌어진 수 차례의 왕위 쟁탈전에서 패한 지더니마(吉德尼瑪)왕자가 아리(阿里) 지역으로 도피해 새로운 왕국을 건설했다. 지더니마는 후에 아리 지역을 세 부분으로 나눠 아들들에게 나눠줬는데, 이들 나라가 라다크 왕국과 푸란 왕국, 그리고 구게 왕국이다.
구게 왕국은 지더니마의 셋째 아들인 더짜오(德朝)가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서장왕신기(西藏王臣記)'에 따르면 구게 왕조는 700여년간 16명의 왕이 통치했으며 강성했을 때는 서쪽으로 캐쉬미르 일대와 지금의 파키스탄 일부까지도 지배했다고 한다. 또한 구게 왕성은 10세기에서 16세기에 이르는 동안 끊임없이 증축돼 황토산 전체가 왕궁과 사원, 방어시설과 주거지 등이 어우러진 하나의 거대한 건축물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총면적이 72만㎡에 이르는 구게왕국 유적지에는 방 445칸, 토굴 879개, 보루 58개, 비밀통로 4갈래, 불탑 28기 등이 남아있다.
왕성이 있는 황토산의 바닥에는 노예와 백성들이 살았던 300여개의 동굴 주거지와 낡은 오두막이 줄지어 있고, 산허리에는 작은 사원과 전각, 승방 등이 밀집해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왕실 사람들이 거주하던 황토산 꼭대기의 여름궁전과 산 밑바닥에서 추위를 피하던 지하궁전인 동궁(冬宮)이 비밀통로로 연결돼 있다는 점.산성 내부에 인공 암도(暗道·터널)를 상하로 파서 꼭대기까지 연결되도록 설계했고 2km가량의 회전식 취수도(取水道)를 만들어 산꼭대기 왕궁으로 물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결국, 구게 왕국은 1635년 카슈미르에서 온 라다크인들의 집요한 공격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당시 국왕은 성문을 닫고 완강히 저항했으나 라다크인들이 매일 산 아래에서 백성들을 학살하자 결국 투항했다고 한다. 인터넷 검색
구게 왕국 관광을 가다가 고산지대 해발4,800m 커브길에서 대형 화물차가 미끄러져서 구게왕국 견학을 포기하고 수미산 관광으로 바꾸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잘 바꾸었다고 동료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카일라스산(수미산)
티베트 라사에서 서쪽으로 1,650km 거리에 있는 피라미드의 형상의 카일라스는 히말라야에 있는 수 많은 산들과는 다르다.
신들의 땅으로써 불교도와 힌두교도들은 이 산을 우주의 중심으로 생각하여 '수메루(Sumeru)' 즉 수미산이라고 불렸다.
이 산이 순례자들에게는 곧 ‘우주의 중심’이다. 그들에게 카일라스는 천상을 뚫고 선, 신앙의 중심지인 것이다.
이들 종교인들은 이 산을 순례하는 것이 최대의 소망으로 여기고 있다.
서부 티베트 고원의 가장 깊숙한 곳에는 신들의 산해발 6,714m의 카일라스는 불교, 흰두교, 자이나교, 본교(티벳 토속신앙) 등 4대 종교의 최고 성지로 수세기 동안 순례자들이 업보를 지우기 위해 이곳을 돌며 고행을 한 곳이다. 여행자가 생애 최고의 여행길로 꼽는 곳이란다.
우리 일행은 수미산 바로 아래까지 버스를 타고 갔다. 내려서 안으로 20분 정도 더 들어갔다. 정말 웅장한 산이다. 우리를 반기는 것일까 구름에 가렸던 성봉을 스스로 내어 주는 것이 아닌가? 여기가 바로 불국정토 즉 유토피아가 있는 수미산이란 말인가?
참고로 경주 불국사가 바로 수미산에 부처님이 세운 불국정토(유토피아)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라고 배웠다.
마나사로바 호수
한번 돌면 한 생애에 지은 죄가 소멸된다고 전해오는 힌두교 최대 성지 해발 4.500여m에 위치한 호수 주변에도 온통 땅에 엎드리는 오체투지의 순례자들 줄을 잇고 있다.
티베트 서쪽 고원 카일라스산 남쪽 자락에 성스러운 하늘 호수, 마나사로바가 있다. 티베트 사람들은 이 호수를 ‘마팜유초(Mapham Yutso)’라 부른다. 초는 호수라는 뜻이고, 마팜은 누구에게도 정복당하지 않는 존엄한 존재라는 뜻이다. 티베트 전통 종교인 뵌교에서는 카일라스산을 아버지로, 마나사로바 호수를 어머니로 여긴다.
원래 오늘 오전에 구겔왕조를 구경하려고 했는데 밤 사이 비가 많이 와서 구겔왕조 가는 도로 고원 급커버 길에서 대형 트럭이 추락직전에 있는지라 언제 해결이 될지 몰라 우리는 구겔왕조 견학을 포기하고 수미산구경으로 계획을 바꾼 것이다. 그래서 낮에는 수미산을 구경하고 저녁에는 마나사로바 호수에 와서 저녁을 현장에서 밥을 지어 먹었는데 생쌀인지 밥인지 구분이 안 된다. 몇 숟가락 먹다가 도저히 넘어가지 않아 버렸다. 다른 사람들은 보름달을 보겠다고 하는데 나는 머리가 아파 만사가 싫었다. 달이 중천에 올라오는 것을 구경하고 달 사진을 찍고는 다시 호텔로 돌아와서 여장을 풀었는데 밤새 전기가 왔다 갔다 하였다.. 성질 급한 일행은 참다못해 카운터에 가서 항의를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메이요만 되풀이하여 속이 부글부글 끌어 올라도 참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7월9일 (해발4.586m)
다르친 호텔에서 현지식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8시에 버스에 올랐다. 사가도 해발 4,441m다. 머리가 아파 진통제 2알을 털어 넣었다. 약 8시간 동안 사가로 이동을 하여 저녁 6시20분에 도착하였다. 날씨는 비도 오고 눈도 오고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길이 나빠 위험하였다. 그래도 운전수는 능수능란하게 운전을 하였다. 저녁 무렵에 사가에 도착하여 서부역참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그래도 어제 호텔보다는 한결 좋았다.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7월10일
서부역참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버스로 약 8시간을 달려 라체를 경유하여 시가체에 도착하여 쵸몰랑종호텔에 여장을 풀고 재재시장 구경을 하고 저녁을 먹고 호텔에 들어가서 잠자리에 들었다.
7월11일
시가체 쵸몰랑종호텔에서 양식으로 아침식사를 간단하게 먹고 버스를 타고 라싸로 향했다. 버스는 쉬지 않고 달리는데 밤새 비가 많이 내려 도로가 침수하고 산 절개지가 휩쓸려 내려와서 위험천만하다 당국에서는 도로가 막힌 곳을 장비로 응급 보수를 하고 있었다. 티벳은 연중 강우량이 약 500mm밖에 안 되는데 요즘이 우기라 비가 많이 내린다고 한다.
알롤장포강을 따라 도로가 개설이 되어 있는데 강 넓이가 좁고 깊어 수위가 높아지자 엄청난 황토물이 소용돌이치며 쏟아지고 있었다. 7시간을 달려 라싸에 도착하였다.
라싸 공항 앞에 있는 분식집에서 아침을 먹고 공항으로 가서 12시15분발 비행기에 올라 서안에 도착하니 오후 3시15분이다. 날씨가 얼마나 더운지 섭씨 40도가 넘는 폭염이다.
-라싸공항-
라싸공항은 지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아 비교적 건물 외벽은 깨끗하였다. 공항치고 화장실이 좁아 항상 붐비고 지저분하였다. 티벳은 정말 화장실 문화는 옛날 우리나라 50년 전보다 더 지저분한 느낌이 들었다. 공항 검색대는 또 얼마나 까다롭게 검사를 하는지 남의 몸을 샅샅이 더듬어 정말 기분이 나쁠 정도로 검색이 심하였다. 라싸에서 12시15분발 비행기를 타고 서안에 도착하니 2시30분이다.
-서안공항-
오후 2시30분 서안공항에 착륙하였다. 비행기 트랩을 빠져나가니 더운 열기가 엄습하였다. 어찌나 날씨가 더운지 숨이 막혔다. 서안가이드를 만나 서안 중심가 회교 족 전통 재래시장 구경을 2시간에 걸쳐 하고 저녁은 한식으로 소주 반주를 곁들여 배부르게 먹었다. 그러니까 만 11일 만에 밥을 제대로 한 그릇 비운 것이다. 저녁을 먹고 일행 모두가 야시장에 가서 양꼬치로 맥주를 마시며 마지막 날을 즐겼다. 22시30분 건국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열흘 동안 고산지대에서 진통제로 살다가 고도가 낮은 서안에 오니 머리가 아프지 않아 모처럼 느긋하게 잠을 잤다.
7월12일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10시가 넘어 공항으로 나갔다. 출국수속을 밟고 12시40분 비행기를 타고 인천에 도착하니 16시50분이다. 리무진을 타고 천안에 내려 매운탕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경주에 도착하니 22시30분이다. 11박12일간의 힘든 여정을 끝내고 집에 도착하여 곧장 샤워를 하고 꿈나라라 나가 떨어졌는데 익일 10시가 넘어서야 기상하였다.
-염원의 오색 깃발, 타루쵸-
기원의 오색 깃발 타루쵸! 타루쵸는 오색의 천에 불경 구절을 새겨 넣어 높은 산에는 어김없이 타루쵸 깃발이 어지럽게 나부낀다.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전령사 역할을 한다. 청, 백, 적, 황, 녹색의 다섯 색깔은 하늘, 구름, 불, 땅, 물을 상징한다. 티베트 사람들은 타루쵸를 통해 조상을 기원하고 소원을 빌고 마마교가 세계 방방곡곡 전도되길 빈다고 한다.
1년에 한번씩 오색 깃발을 새것으로 갈아 메는데 이때 신도들은 낡은 깃발을 공평하게 나누어 집에 가지고 가서 가축의 목에 걸어주면 무병 성장한다고 믿고 있다.
-천장, 해탈로 가는 길-
티베트의 전통적인 장례의식에는 천장, 수장, 매장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천장이 최고로 치며 병골이나 죄인은 천장이 안 된다. 불심 이 깊고 건강했던 불자만이 천장을 할 수가 있다고 한다. 병골은 약을 많이 복용하여 천장을 해도 독수리가 맛이 없어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병자는 수장 죄인은 매장인데 매장이 최악의 수치라고 하였다.
천장은 죽은 자의 시신을 쪼개 산에 뿌려 독수리의 먹이가 되게 한다.
윤회 사상을 믿는 티베트인들은 죽은 후, 자신의 시신을 신성한 새인 독수리가 먹으면 사후 바로 승천하거나 부귀한 집안에서 다시 태어난다고 믿는다. 육체는 사라져도 영혼은 없어지지 않으며 육체를 보시함으로써 영혼이 해탈을 얻는다고 믿는 사람들. 티베트인들의 천장 풍습은 현재도 계속 된다
-티벳 화장실 문화-
티벳 시골 화장실 문화는 우리나라 60년대 보다가 더 열악하다고 할까? 대부분 여행객들은 화장실 가기 겁이 나서 음식 먹는 것도 자제를 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Hotel 아니면 화장실은 가지 않는 것이 속이 편하다고 하면 맞을 것이다. 넓은 고원을 버스로 달리다가 도로변에 화장실이 없으므로 불가피하게 路邊 放尿를 하는데 교량이나 언덕이 나오면 차를 세우고 볼일을 보아야 하므로 언덕이나 다리 밑에는 모두가 지레 밭이다.
또 시골 식당이라고 들어가서 화장실을 보면 너무나 실망이다. 악취가 심하게 나고 아래 구덩이에 변이 보이니 식사 전에 구역질부터 나서 밥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다. 이것은 여행이 아니라 고행이었다.
2017년 7월13일
기록: 진재윤
참고 : 사진은 이미지 보기에 올려 놓았습니다.
첫댓글 장문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책자나 가이드의 말에도 없는 내용을 많이 담아서 새로웠습니다. 다시 현장을 보는 듯 해서 좋았고 여행이 아니라 고행이라서 더욱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좋은 분 일행되어 고난의 여행 무사히 다녀오심을 축하 드립니다. 동행 하지 못 한 아쉬움과 부러움이 교차합니다. 사진과 기행문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