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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르네상스 이후 과도기(16세기 후반) 매너리즘의 등장과 르네상스의 유럽 파급~~
16세기에 고전적인 균형미와 조화에 집착한 르네상스 양식에 대한 반발심으로 매너리즘 건축이 등장했다.
매너리즘은 일반명사로는 '습관적 반복, 상투적인 모방, 진부한 기교' 등을 일컫는 말로 새로운 창조력이 상실되었다는 부정적 의미가 들어있지만, 고유명사가 되면 그 의미가 달라진다.
인공적인 기교를 통해서 구성의 긴장과 불안정성을 강조하는 예술 사조로,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새로운 사조나 화풍을 뜻한다.
*매너리즘
이탈리아어로 "마니에리스모"라고 하며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나타났다. 1530년경에 확산되어 바로크 양식으로 대체된 이탈리아에서 16세기 말까지 지속되었다. 북부 매너리즘은 17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매너리즘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바사리, 초기의 미켈란젤로와 같은 예술가들의 조화로운 이상과는 다른 길을 간다. 르네상스 예술이 비례, 균형 및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반면 매너리즘은 이러한 특성을 과장하여 종종 비대칭이거나 부자연스럽게 우아한 구성을 만든다. 늘어진 형태, 과장되고 균형에서 벗어난 포즈, 조작된 비합리적 공간, 부자연스러운 조명 등등의 특징이 있으며, 인공미를 중시하는 스타일이다. 매너리즘의 특징으로는 왜곡되고 늘어진 구불거리는 형상, 불명료한 구도, 양식적인 속임수와 기괴한 효과 등을 들 수 있다. 콘트라포스트와 인체를 극도로 길게 늘이는 과장된 표현이 조각과 회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매너리스트 미술은 열광적 감정, 긴장과 부조화의 느낌, 신경 불안의 감각을 전달한다. 문학과 음악의 매너리즘은 매우 화려한 스타일과 지적 세련미로 유명하다.
초기 ~ 하이 르네상스를 지나면서 점차 지나치게 균형과 조화에 집착하는 예술에 대한 반감이 생겨났다. 다 빈치, 미켈란젤로, 바사리 등 천재적인 선배 예술가들이 앞서 모든 것을 정립해놓았으니 해부학, 빛, 관상학, 인간이 표현과 몸짓에서 감정을 등록하는 방식, 비유적 구성에서 인간 형태의 혁신적인 사용, 미묘한 톤 그라데이션 사용 등 이미 달성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달성된 것처럼 보였다.
젊은 예술가들은 기존 르네상스 예술 내부에서는 더이상 예술적인 돌파구를 찾기 어려웠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매너리즘이다. 이들은 고의적으로 조화를 깨뜨려 새로움을 찾고자 했다. 위태로운 포즈와 비대칭을 통한 긴장감의 인위적인 조성, 무너진 원근감과 비합리적인 비율 등이 바로 이 매너리즘의 상징인 것이다.
오직 고대 로마의 조화와 비율만을 중시하던 르네상스 건축계에서도 매너리즘의 돌풍이 몰아닥쳤다. 대표적인 매너리즘 건축가들은 '발다사레 페루치', '줄리오 로마노', 미켈란젤로, 안드레아 팔라디오 등이 있다. 이들이 남긴 매너리즘 사조는 훗날 바로크 양식이라는 새로운 양식으로 이어진다.
#발다사레 페루치(1481- 1536)
발다사르 토마소 페루치는 시에나의 건축가이자 화가로 공상주의 건축 그림을 시도한 초기 예술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시에나, 로마, 볼로냐 등지에 전형적인 고전주의 양식의 교회, 저택, 구조물을 설계했고 건물 내외부에 신화나 종교적인 주제의 다채로운 프레스코화를 그려 명성을 얻었다.
#파르네시나 팔라초(Palazzo della Farnesina, 1501년 ~ 1511년)
#동방박사의 경배(Adoration des Mages, 15세기 ~ 16세기경)
#줄리오 로마노(1499~1546)
본명은 줄리오 피피(Giulio Pippi).
조반 프란체스코 페니와 함께 라파엘로의 수제자로 여겨지는 매너리즘의 대표적인 예술가 중 한 명이다. 이 둘은 라파엘로가 유언장에서 자신의 사후 후속 처리인으로 직접 지명했다.
라파엘로 사후 공방을 물려받았고 티치아노가 그를 그린 초상화도 전한다. 위의 프로필이 바로 그 그림이다. 라파엘로의 '친구와의 자화상'의 유력한 모델 후보 중 하나이기도 하다.
라파엘로 사후 스승의 드로잉을 바탕으로 페니, 라파엘리노 델 콜레와 함께 바티칸의 '라파엘로의 방' 4곳 중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콘스탄티누스의 방' 작업을 마무리했다. 그의 빼어난 드로잉은 오랜 기간 동안 수집가들의 수집 대상이었으며 그의 그림들을 라파엘로와도 작업했던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가 판화로 제작하여 전 유럽으로 이탈리아 스타일이 뻗쳐나가는데 큰 공헌을 한다.
아들 하나가 있었고 존경하는 스승을 따라 라파엘로라고 이름 지어 미술을 가르치기도 했으나 일찍 죽었다. 로마노도 라파엘로처럼 많은 제자를 두었다.
#거인의 방'의 천장화
만토바에 있는 '팔라초 델 테'(테 궁전)라는 걸작 건축물을 남겼으며, 건물 안의 방(거인의 방, 프시케의 방 등)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도 로마노의 작품들이다. 여기에 티치아노의 로마노 초상화가 있다.
60대 후반의 초상, 잠바티스타 마간차의 작품
#안드레아 팔라디오(Andrea Palladio, 1508년 ~ 1580년 ) 베네치아 공화국의 건축가이다. 본명은 안드레아 디 피에트로 델라 곤돌라(Andrea di Pietro della Gondola)이다.파도바 출신으로 주로 비첸차에서 활약하였으며 비트루비우스와 알베르티의 저서를 연구하여 당대 건축의 권위자가 되었다. 그 자신도 《건축 사서》를 저작하여 비트루비우스의 기술과 남아 있는 건축물과의 상세한 대조를 하였다. 그는 알베르티 이상으로 이론과 실천과의 긴밀한 관련을 실증하였고 더 한층 실제적이어서 후세에 대한 영향도 컸다. 1994년과 1996년에 ‘비첸차 시와 베네토주의 팔라디오 빌라’(City of Vicenza and the Palladian Villas of the Veneto)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안드레아 팔라디오
비첸차의 빌라 로툰다
영국이 모방한 팔라디오 건축 도면~~
팔라디오 건축의 근원은 로마 건축 양식~~
독일 베를린의 오페라 하우스..
프랑스에도 산재한 팔라디오 모방~~
미국도 하버드 홀등 수두룩~~
#비첸다의 로톤다 빌라와 세계 각국의 모방 건물들~~
발다사레 페루치는 1481년 시에나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활동했다. 대표작은 로마에 세워진 '마시모 알레 콜로네 팔라초'. 거리를 향해서 약간 둥글게 튀어나온 파사드를 가진 것이 특징이다.
정통 고전주의의 건축법을 준수하지 않으면서 매너리즘의 문을 연 건물이다.
안마당 전경. 매너리즘을 대표하는 장면으로, 고전주의의 비례와 구성법칙을 철저히 파괴해서 유머와 패러디를 가했다.
안마당 입면 디테일. 가지런하게 일렬로 이어야 할 트리글리프가 이빨 빠지듯 밑으로 내려 앉았다.
#마시모 알레 콜로네 팔라초
줄리오 로마노 역시 유명하다. 그 유명한 라파엘로의 제자인데 '팔라초 테'가 대표작이다. 거대한 프레스코화와 정원 동굴을 활용했는데 다소 불균형하고 정렬되지 않은 느낌을 준다. 일부러 긴장감을 유발하도록 만들었기에 그가 지은 건축물들의 전체적인 느낌은 혼란스럽다고.
#팔라초 테(1534)
해자로 둘러싸인 팔라초 델 테는 원래 마구간이 딸린 농장이었다. 만토바의 군주였던 곤차가 가문의 귀공자이자 방탕아였던 페데리코 2세는 라파엘로의 제자이기도 했던 줄리오 로마노(1499년경~1546년)를 만토바로 초청해 정부의 여름 별장이자 피서용 돌집에, 인공 동굴에 작은 폭포를 중심으로 손님용 방을 배치한, 한마디로 당대의 '플레이보이 맨션'을 감독하도록 의뢰했다.
마니에리스모 건축은 구조보다는 장식에 더 치중하는 것이 특징인데, 팔라초 델 테 역시 예외가 아니다. 열주형 건물들이 둘러싼 외부 정원들로 외부 세계로부터 차단된 안뜰 주위로 정방형 블록이 형성되어 있고, 그 아치와 문을 통해 아름다운 경치를 즐길 수 있으며, 동서남북 네 방향의 파사드는 기둥, 페디먼트, 아치볼트, 트리글리프는 물론 팔라디오 모티프에 그로테스크까지, 온갖 고전적인 요소들이 나타난다. 사실 시각적으로는 보는 이의 시선을 잡아끌 만한 것이 별로 없다. 내부는 외설적인 프레스코와 신들과 님프들을 실물보다 더 크게 그린 벽화들로 장식되어 있다. 올림포스 산의 신들의 손에 티탄(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거구의 신족)들이 몰락하는 장면을 웅장하게 그린 <티탄들의 몰락>은 마치 3차원 프로젝션 영화처럼 거침없이 거인들의 홀(Sala dei Giganti)의 벽, 창문, 천장을 뒤덮고 있다. 홀의 음향마저 멀리 떨어진 방에서도 종이가 찢기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놀랄 만한 스테레오다.
"이보다 더 자연스럽고 멋진 건물은 찾아볼 생각조차 말라."
조르지오 바사리
놀랍게도 말년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역시 매너리즘 건축가들 중 하나다. 그가 남긴 최고의 매너리즘 양식 건물은 바로 성 베드로 대성당과 로렌시아 도서관! 특히 메디치 가문의 서적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로렌시아 도서관의 현관은 좁은 창으로 들어오는 빛과 세 방향으로 갈라져 내려오는 계단 때문에 위압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르네상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건축가'라는 평을 듣는 안드레아 팔라디오는 고전주의 건축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기존의 건축가들은 콜로세움이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처럼 특정 유적에서 모티브를 따왔지만, 팔라디오는 특정 건물이 아닌 일반적인 고대 로마의 신전에서 영감을 찾았다. 그가 지은 건물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빌라 카프라'라고 하는데 돔이 얹힌 중앙 홀과 4개의 동일한 현관이 모든 면에 지어진 빌라로 마치 옛 로마의 판테온을 연상케 한다.
이탈리아 매너리즘으로 자성 그리고 회의를 겪을 시점에 르네상스 건축은 알프스 이북으로 넘어가 독일, 프랑스 등으로 퍼져나갔다.
알프스 이북 너머로 르네상스 건축 양식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은 프랑스였다. 이탈리아와도 지리, 인종, 언어, 문화 등 여러 면에서 가까웠을 뿐 아니라 고대 로마 시대부터 전 국토가 속주에 편입되어 로마 건축 양식을 경험한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거부감이 적었다.
롬바르디아를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있었고 종교개혁의 여파가 적었기 때문에 교황청이 주도하던 르네상스 표준 고전주의를 적극 수입할 수 있었으며, 프랑수아 1세가 르네상스 애호가였기에 지도층의 반발도 적었다.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은 예술가들을 프랑스로 초청했고, 그중에 1541년 이주한 세바스티아노 세를리오는 프랑수아 1세의 수석 화가이자 건축가로서 부분적으로 프랑스 전통 양식을 혼합된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성관을 지으면서 프랑스 르네상스 건축 양식의 시작을 알렸다. 이후 피에르 레스코와 필리베르 들로름를 거쳐 세르소 가문에 이르러서는 점차 이탈리아 르네상스 표준 양식과도 거리가 먼 프랑스만의 르네상스 건축이 발전한다.
#세바스티아노 세를리오(1475~1554)
이탈리아의 건축가. 페루치의 제자로 1541년 프랑스 궁정건축가를 지냈다. 비극, 희극, 풍자극의 무대장치를 만들기도 했다. 저서로는 《건축서》8권이 유명하다. 군사건축을 다룬 미완성원고도 남아서 전해진다.
#프랑수아 1세(1494~1547)
프랑수아 1세는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의 차남인 앙굴렘 백작 가문 출신으로 루이 12세가 아들을 두지 못하고 1515년에 사망하자 남성남계 원칙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대외적으로는 이탈리아 정복을 두고 당시 최대의 영토를 자랑하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와 경쟁 구도를 이루었고 대내적으로는 르네상스 예술과 인문주의 문화의 확산, 절대주의적 체제의 토대 구축을 추구하였다. 또한 아메리카 탐사와 인도양 교역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시작한 재정과 통치에 있어서의 절대주의적 경향과 종교개혁에 대한 탄압은 향후 프랑스 구체제의 문제들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피에르 레스코(1515~1578)
프랑스 건축에 있어서 고전적인 요소를 도입한 16세기 위대한 프랑스 건축가 중 한 명이다. 대표적으로 그는 프랑수아 1세에 의해 시작된 루브르 궁전의 재건축 작업에 참여하여 프랑스 르네상스 양식으로 ‘레스코 윙’을 완성하였다.
#루브르궁 지금은 미술관~~
#필리베르 들로름
프랑스의 건축가, 건축이론가. 리용에서 출생, 파리에서 사망. 1533~1536년경 이탈리아에 유학, 1540~1547년경 생 모르 성을 건축함. 1547~1559년에는 왕실 건축기감이 되고, 퐁텐블로, 생 제르맹 앙 레, 뷜레 고트렐, 마드리 등의 궁전공사를 지휘하고, 생 드니 성당의 『프랑수아 1세의 묘』(1547), 『아네의 성곽』(1552~1559)을 비롯해 만년에는 쉬농소성의 갤러리를 계획하고, 파리의 튈르리 궁전을 설계(1564) 했다. 또 『실용신주택건축구조(Nouvelles inventions pour bien batir et à petits frais)』(1561), 『건축개론(Architecture)』(1567)을 저작. 네덜란드, 영국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의 작품인 "아네성의 예배당"
#세르소 가문
16~17세기에 활약한 프랑스 건축계의 명문. 시조는 자크 1세(Jacgues I 1510~1585년경)이며, 파리출생이고 사망지는 안시라고 추측됨. 1530~1533년 이탈리아에서 배우고 귀국후 베르누이 쉬르 오와즈 성관(1565 이후), 살르바르 성관(1572 이후)을 지었으나 모두 현존치 않는다. 그의 명성은 당시의(명건축 판화에 의한) 귀중한 기록인 『Les plus Exellents Batiments de France 1576. 79(프랑스 명건축집)』에 잘 나타나 있다. 자크 1세의 장남 밥티스트(Jean Baptiste 1544년경~1590)는 레스코의 뒤를 이어 앙리 3세(Henri Ⅲ)의 왕궁건축장관에 임명되었다. 파리 시테 섬 하류의 퐁뇌프 교, 루브르 궁내 왕실예배당(1580, 현재 없음)을 설계하였으며 오텔 드 라모아뇽(1584, 파리)도 그의 작이라고 한다. 자크 1세의 차남 자크 2세(Jacgues Ⅱ 1550년경~1614)는 한때 도울에서 왕족의 건축가 일을 하였으나 1595년 앙리 4세 왕실건축가가 되어 루브르 궁의 대갤러리(그랑 갤러리)와 파리의 보주 광장 및 퐁텐블로 궁 공사에 종사하였다. 밥티스트의 아들 장(Jean 1585년경~1650)은 1617년 루이 13세(Louis XⅢ)의 건축가가 되어 퐁텐블로 궁 '백마의 중원'에 있는 유명한 마제형(馬蹄形) 계단(1634), 당시 도시 저택에 큰 영향을 준 파리의 오텔 드 불튼베리(1634~1643, 현존하지 않음), 오텔 드 슈리(1624) 등을 설계하였다. 당대의 대표적 건축가 사르몬드 브로스는 그들의 종형제이며, 자크 1세의 딸이 모친이다. 자크 2세의 아들 자크 3세도 왕실 건축가가 되었으나 특별한 작품은 없다.
영국은 1세기가 지난 16세기 들어서야 뒤늦게 르네상스 건축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지리적으로 이탈리아와 먼 것은 물론 종교개혁의 여파 때문에 1534년에 교황청과 단절되는 등 가톨릭이 지배하고 있던 로마와의 교류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1세 때부터 권력층의 성채나 생활환경 등에서 이탈리아 풍이 유행하는 형식으로 르네상스 건축이 단편적으로 등장했지만 본격적으로 양식 운동으로 나타난 것은 17세기가 지나서였다. 영국의 르네상스 건축은 프랑스와 달리 자연스러운 예술운동이 아니라 왕권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등장했다는 특징이 있다. 스튜어트 왕조는 개신교와 연합하면서 자신들의 정치 이상을 상징할 새로운 건축양식을 원했다. 이때 바로 중세 가톨릭을 이끌던 고딕을 밀어내고 르네상스 고전주의가 선택된 것이다. 영국의 르네상스 건축은 대체적으로 '이니고 존스' 한 개인에 의해 선도되었고, 따라서 독창성도 부족했다.
#이니고 존스(1573~1652)
영국에 팔라디오 양식(Palladian style)을 도입한 건축가이자 무대 디자이너, 화가이다. 그는 극장에 프로시니엄 아치(Proscenium arch)와 이동식 무대 배경 장치를 도입했고, 그리니치 궁전(Greenwich Palace)과 화이트홀(Whitehall) 내부의 연회장을 설계했다.
스튜어트 가문의 문장
영국의 역대 왕조 중 하나. 잉글랜드의 국왕 엘리자베스 1세의 사망으로 튜더 왕조의 대가 끊기자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국왕 제임스 1세를 겸하게 되면서 그레이트브리튼 섬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제임스 1세의 아들인 찰스 1세는 잉글랜드 내전으로 의회파의 크롬웰에게 죽고 찰스 2세가 왕으로 선언된다. 찰스 2세 때 왕정이 복구되자 친카톨릭 정책을 펼쳤으며, 제임스 2세로 이어졌으나 명예혁명으로 딸인 메리 2세와 사위 윌리엄 3세가 공동으로 왕이 되어 직계가 끊긴다. 왕권은 메리 2세의 여동생 앤 여왕을 끝으로 스튜어트 왕조는 물러난다. 그리고 다음 왕위계승권자인 조지 1세를 독일에서 데려오며, 하노버 왕조로 넘어감과 동시에 내각책임제가 시행된다.
독일의 경우 영국보다도 더욱 침체된 상태였다. 개별 건물에 부분적으로 르네상스 건축을 사용하는 정도였고, 정식 양식운동으로서의 르네상스는 미진한 상태였다. 이는 16세기 종교개혁부터 불거진 가톨릭·개신교 간 갈등이 폭발한 30년 전쟁과 같은 외부 요인 탓이 컸다. 15세기 독일과 네덜란드의 미술을 '북유럽 르네상스'로 지칭할지, '후기 고딕'으로 지칭할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거리지만,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와는 다른 성격을 지닌 북유럽 르네상스의 의미를 긍정하는 편이다. 이 모든 것이 지나가고 나서야 등장한 '고딕 매너리즘'은, 이탈리아 매너리즘과 달리 분산적 장식을 이용한 흥겨운 율동이 주요 특징이었다.
다만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그 당시 문명 발전의 최전으로 본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식의 역사관은 다소 비판적으로 볼 여지가 많다. 같은 시대에서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두 집단을 단순비교하는 것이 맞는 문제인지 생각해보자. 우선 본문에서 언급되는 독일에서 유행한 '매너리즘'은 '국제 고딕양식'이라고 부르는 '고딕 매너리즘'이지, 르네상스 이후의 '매너리즘'와는 다르다.
#야코프 부르크하르트(1818~1897)
스위스의 미술사가, 문화사가. 바젤에서 출생, 그곳에서 사망. 바젤대학 교수(1858~1893). 그의 저 『Die Kultur der Renaissance in ltalien, 1860(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는 이탈리아 미술 안내의 체제를 취하면서 고대부터 바로크에 이르는 양식사가 훌륭하게 서술되고 있으며, 『Geschichte der Renaissance in ltalien, 1867(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사)』는, 사항별의 개설에 문헌적인 뒷받침을 하고 있어 다같이 근대미술사학의 기초를 확립한 명저로 꼽혀진다. 광대한 박식은 수수한인품과 진지한 미술애호심에 지탱되어 ‘르네상스의 대사제(大司祭)’란 별명을 얻었다. 뵐플린의 스승으로, 양자의 왕복 서간집이 있다. 그 외에 『Erinnerungen aus Rubens, 1898(루벤스 회상)』, 또 문화사로서는 『Die Zeit Konstantins des Groβen, 1853(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시대)』, 『Griechische Kulturges Chichte, 1898~1902(그리스 문화사)』 등이 있다. 니체에 큰 영향을 주었다.
독일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와는 다른 양식이 유지되었던 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핵심이었던 고전주의적인 양식이 독일인들의 취향과는 너무 동떨어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고전주의적인 양식 외에는 독일 역시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같은 관심사들을 공유하고 창작에 활용했다.
실제로, 독일인들의 취향과 맞아떨어지는 바로크는 르네상스와 달리 매우 쉽게 유입되었다. 베네치아 출신의 화가 티에폴로 등이 독일 내에서도 활동하고, 많은 독일인 건축가들과 화가, 조각가들이 바로크 시대에 활동하게 된다. 이는 비슷한 사정이었던 네덜란드도 마찬가지이라고 생각되는 경향이 생기고 있다.
하지만 중부 유럽의 많은 예술가들이 이탈리아로 여행하면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경험했는데, 알브레히트 뒤러가 대표적인 예이며 또한 밀라노 공국의 보나 스포르차와 결혼한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가 폴란드 내에 르네상스 양식의 예술을 후원한 것을 미루어 볼 때 네덜란드나 독일 지역 또한 르네상스의 영향이 아예 없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 독일 지역과 네덜란드의 국제 고딕 양식이 국제 고딕 양식이라 하더라도 고딕 양식에 없던 르네상스적 건축 장식이 파사드를 장식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일례로 현재는 폐허가 된 하이델베르크의 성을 본다면 일부 구관의 건물들의 파사드가 르네상스적 요소가 더러 섞여 있는 것 알 수 있다. 독일의 백과에서는 르네상스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은 고딕 건축의 사조를 노르딕 르네상스, 베저 르네상스로 명명하고 있다.
#알브레히트 뒤러
일전에 그에 대하여 적은 글로 대체합니다.
https://band.us/band/87344862/post/514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는 알프스산맥을 넘어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 저지대, 잉글랜드, 저멀리 북유럽까지 쭉쭉 뻗어나갔다. 가장 먼저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받아들인 나라는 프랑스였다. 애초에 이탈리아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치는 나라들 중 하나였고 교역도 활발했기 때문. 1400년대 후반 벌어진 이탈리아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프랑스인들이 이탈리아에 발을 내디뎠는데, 이때 북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처음 접하게 된다. 1516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는 다 빈치를 초대해 극진한 대접을 해줬다. 이때 갖고온게 그 유명한 모나리자, 성 안나와 성 모자와 세례 요한,세례 요한 등의 작품이다. 이후 프랑스 르네상스는 앙리 4세 등 왕가의 후원을 바탕으로 매너리즘 화풍을 거쳐 초기 바로크 화풍으로 발전한다.
독일의 경우 이탈리아식 르네상스를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특히 건축학적으로는 여전히 고딕 양식을 고수했고 이탈리아식 르네상스 양식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것이 독일이 문화적으로 뒤떨어졌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 오히려 독일은 당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지식의 전파가 빠른 지방들 중 하나로 꼽혔다.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자 기술이 책의 대량 생산을 가능케 했고 야금, 광업, 은행업, 섬유업 등이 발전된 지방이었기 때문. 도시화율 자체는 이탈리아나 네덜란드에 비해 떨어졌지만 독일계 국가들의 부유함은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요하네스 쿠텐베르크(1400~1468)
"오늘날 세상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모두 구텐베르크 덕분입니다. 모든 것이 이 근원으로 추적될 수 있지만 우리는 그에게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거대한 발명이 초래한 악은 인류가 선호하는 선에 의해 천 배나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마크 트웨인[4]
신성 로마 제국 출신의 세공업자이자 인쇄업자. 그가 고안한 인쇄기는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명품 중 하나로, 구텐베르크 이후의 유럽사회는 지식과 정보의 보급이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광범위하게 확대되었으며 덕분에 유럽사회는 이전과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쿠텐베르그의 일화~~
구텐베르크는 1452년부터 본격 성경 출판에 착수했으며 3년간의 노력 끝에 1455년 구텐베르크 성서라 불리게 되는, 최초의 불가타 성경 인쇄본이 완성되었다. 이 성경은 2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0굴덴이라는 거액에 팔렸다. 이 구텐베르크의 성경 초판은 180부가 인쇄됐는데, 매우 비싸긴 했지만 당시에는 성경 필사본은 100굴덴이 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인쇄품질도 훌륭하다는 장점때문에 꽤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성경을 팔아서 대박을 쳤던 구텐베르크는 같은 해 채권자인 푸스트로부터 원금반환 소송에 휘말린다. 독일의 괴팅겐 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1455년 11월 6일자 헬마스페르거 공증문서에 이 소송에 대한 기록 일부분이 남아 있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푸스트는 구텐베르크가 자신이 빌려준 돈 상당수를 다른 용도로 유용했으며 변제하려는 의지도 없어서 소송을 걸었다고 되어 있다. 이 소송은 1456년 결국 푸스트가 승소하면서 2번에 걸쳐 빌린 원금 1,600굴덴에 6% 복리이자를 합해서 합계 2,026길더를 갚으라는 판결이 내려졌으며 구텐베르크는 이 거액을 갚을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인쇄장비를 비롯한 모든 재산을 빼앗기는 신세가 됐다.
목판화와 판화는 오히려 다른 국가들보다 독일에서 더 먼저 발전했다. 독일 르네상스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로 꼽히는 알브레히트 뒤러는 뉘른베르크에서 견습생으로 경력을 시작했다. 1490년 견습과정을 마친 뒤러는 독일과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을 한 몸에 흡수한 채 다시 독일로 돌아왔다. 독일에 르네상스를 소개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했지만 여전히 성모 마리아와 가톨릭 성화들을 그렸고, 구교파와 신교파 소속 인물 모두에게서 의뢰를 받았다. 덕분에 그는 '북유럽의 레오나르도', '독일 미술의 아버지'라는 헌사를 받았다. 그의 대표작은 '기도하는 손', '알브레히트 뒤러의 자화상' 등이 있다.
뒤러는 종교 분열이 확실해지기 전인 1528년 사망했기에 별 상관이 없었지만, 가톨릭과 개신교의 분열이 확실해지자 더이상 가톨릭식의 대규모 종교화나 천장화는 독일에서 그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루터교도 벽에 성인과 예수의 초상화를 그리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장 칼뱅의 칼뱅파가 힘을 얻으며 그마저도 불가능해진 것. 교회에서 의뢰하는 성화나 벽화들이 주 수입원이던 예술가들에게 개신교의 우상숭배 금지 조치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이 때문에 독일의 회화 발전은 1550년대 이래로 한동안 침체기를 겪어야 했다. 뒤러의 사망 이후 약 수십년간 독일의 미술 발전은 정체됐으나 일부 화가들이 이탈리아, 플랑드르 등지에서 배워온 매너리즘을 독일에 도입하는가 하면, 가톨릭이 여전히 위세를 떨치던 남부 독일에선 회화의 발전이 이어졌다.
#이젠하임 제단화/마티아스 그
뤼네발트(1475~1528)
#추락하는 이카로스가 있는 풍경
(1558)
네덜란드 등 저지대 지방은 독일에 비해서는 종교적인 회화가 맥을 보존했다. 르네상스의 영향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1500년대 이후에도 여전히 종교적인 모티브들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저지대 르네상스 최고의 거장은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있다. 낯설고, 비합리적인 이미지가 가득찬 작품들로 환상적인 세계를 담아냈다는 평을 받는다. 1550년대 이후 플랑드르와 네덜란드 화가들은 자연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이탈리아식의 우아한 자연의 전원풍경보다는 풍경, 정물화, 풍속화 등 일상생활에 더 비중을 두었다. 이 시기의 대표가 바로 피터르 브뤼헐이다. 그의 대표작은 '추락하는 이카로스가 있는 풍경'인데, 정작 주인공 이카루스는 저 배경에 숨겨져 있고 작품의 메인은 이카루스가 떨어지든말든 밭을 가는 농부의 모습이다. 브뤼헐은 인간을 반(反)영웅적이고 우스꽝스러우며 때로는 기괴한 존재로 묘사한다.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 1450년경 ~ 1516년)네덜란드의 화가이다. 상상 속의 풍경을 담은 작품들로 유명하다. 20세기 초현실주의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고 여겨진다.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에서 '지옥' 부분
판에이크 형제 이후의 대표적인 종교화가로 특이한 색채로 이상한 괴물, 납 속의 유령, 텅 비어 있는 눈과 특이한 몸을 가진 사람 등 무서운 지옥의 세계를 많이 그렸다.
보스는 나무 판넬에 그려진 3개의 그림이 서로 맞붙은 3연작화를 여러 점 그렸다.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이다. 이 작품의 왼쪽 판넬에는 아담과 이브와 수많은 경이로운 동물을 담은 낙원을 묘사하며, 중간 판넬에는 다수의 벌거벗은 사람들과 거대한 과일 및 새를 담은 지상의 쾌락의 모습을 그리며, 오른쪽 판넬에는 다양한 종류의 죄인들을 향하여 공상의 징벌의 묘사를 그린 지옥의 모습을 담는다. 관람자가 볼 수 있는 외부 판넬이 닫힌 곳에, 그리사유 기법으로 신이 지구를 창조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보스의 그림은 채색의 방법에 의해 거친 표면을 가진다. 이는 전통적인 플랑드르 화풍 이 매끄러운 표면의 그림으로, 인간에 의한 것임을 숨기려 했던 것과 대조된다. 그의 그림에는 무서움이나 잔인한 모양 그리고 악덕과 범죄 등이 나타나 있다. 뛰어난 상상력으로써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환락의 땅》, 《성 안토니오의 유혹》 등이 유명하다.
보스는 자신의 작품에 날짜를 기록한 적이 없으며,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서명을 하지 않았다. 다른 서명들은 그가 직접 남긴 것이 아니다. 전체적으로 25개 미만의 그림이 오늘날 보스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보스가 죽은 후, 그의 그림 다수를 획득하였다.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은 이제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을 비롯하여 보스의 작품 여러 점을 소유한다.
처음에는 경시됐지만 후에는 그의 이상한 예술성이 피터르 브뤼헐 (1525? ~ 1569)등의 영향으로 높이 평가됐다. 피터르 브뤼헐은 보스와 비슷한 양식으로 《죽음의 승리》(1592년)등 여러 점을 그렸다. 보스는 20세기 초현실주의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할 수 있다.
#피터르 브뤼헐(1525~1569)
북유럽 르네상스의 대표적 화가인 그는 태어난 마을 이름을 성을삼았다.
1551년 안트베르펀의 화가 조합에 들어간 후, 이탈리아·프랑스에서 유학하였다. 처음에는 '민간 전설'이라는 속담 등을 주제로 하여 그림을 그렸고, 후에 네덜란드에 대한 에스파냐의 억압을 종교적 제재로써 극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이어서 농민 생활을 애정과 유머를 담아서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므로 '농민의 브뤼겔'이라고 불리었다. 여기서의 풍경 묘사는 풍경화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작품은 동판화 1점을 포함하여 45점이 알려졌지만 〈장님〉, 〈바벨탑〉, 〈농부의 혼인〉, 〈눈 속의 사냥꾼〉 등이 특히 유명하다.
그는 작품에 서명과 날짜를 기입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1559년부터는 작품 서명에 ‘h’를 빼고 ‘Bruegel’로 적었다.
큰 아들 피터르 브뤼헐 더 용어(Pieter Brueghel de Jonge)과 작은 아들 얀 브뤼헐 더 아우더(Jan Brueghel de Oude)도 유명한 화가이지만, 아버지로부터 미술교육을 받지는 않았다. 장남 소 피터르는 아버지와 같은 제재의 작품 외에, 환상적·악마적 화면을 즐겨 그려 '지옥의 브뤼헐'이라고 불리었으며, 차남 얀은 화초나 풍경을 잘 그려 '꽃의 브뤼헐', '천국의 브뤼헐'이라 불리었다.
#바벨탑/1563 빈 미술사 박물관..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늦게 르네상스를 받아들인 국가들 중 하나였다. 이탈리아가 영국과 너무 거리가 멀고 영국이 섬인지라 유럽 본토와 고립되어있었던 탓이 크다. 그래서 영국에는 헨리 8세의 재위기인 1500년대 초반에야 처음 르네상스가 들어왔고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인 150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영국 르네상스가 절정기를 맞았다. 영국 르네상스의 가장 큰 특징은 문학과 음악에 치중되어있다는 것으로, 회화는 딱히 파장을 일으키지 못했다. 게다가 영국의 종교개혁으로 성상파괴가 일어나며 기존의 성화들이 죄다 불살라지며 르네상스 예술이 설 자리는 더 줄어들었다. 이후 영국 회화는 초상화 위주, 그 다음에는 풍경화 위주로 발전해나갔다.
르네상스 인본주의란 고대 문헌들을 토대로 인간을 중심으로 두는 세계관을 의미한다. 이탈리아에서 처음 시작되어 서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인본주의라고 하여 신에게서 벗어나 독립적인 인간을 중시한다는 뜻과는 좀 거리가 멀다. 르네상스인들은 거의 하나도 빠짐없이 유신론자들인데다가 독실한 기독교도들이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부패해 썩어빠진 가톨릭 교회를 '정화'하는 것이지 '폐지'하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르네상스 인본주의자들의 최종 목표는 중세 가톨릭 신학의 지나친 복잡성을 걷어내고, 복음과 신약의 단순성을 기둥삼아 기독교 사상의 초심을 되찾는 것이었지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거나 신의 자리에 인간을 올려놓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상당수의 인본주의자들은 의외로 성직자였다. 애초에 글을 읽고 편안하게 학문을 탐구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계층이 사제계급이었으니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비오 2세, 식스토 4세, 레오 10세 같은 교황들은 인본주의를 후원했다.
종교개혁 이래로 가톨릭 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면서, 성경과 초기 기독교 문학에 대한 이해와 번역을 개선하기 위해 인본주의자들의 입김은 더욱 강해졌다.
에라스뮈스, 자크 르페브르 같은 비이탈리아인 신학자들이 등장해 성경, 교리, 그리고 전반적인 신앙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인본주의의 영향력을 더욱 강화했다.
고대 문헌들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흔히 말하는 '이교'와 기독교 교리가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1417년에 루크레티우스가 남긴 저서 'De Rerum Natura'가 발견되었는데, 놀랍게도 이 저서 안에는 수천년 동안 잊혀졌던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가 소개되어있었다.
처음에는 루크레티우스의 문법과 표현방법에만 관심을 가졌지만, 150년 후에는 책에 실린 쾌락주의 자체에도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에 대한 평가는 당연히 좋지 못했는데, 한 프랑스 평론가는 쾌락주의에 대해 '공상적이고 터무니없으며 반기독교적'이라고 쏘아붙였다. 그의 평가는 무려 19세기까지 서양 학계가 쾌락주의를 바라보는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신의 세계를 묘사한 단테의 '지옥'. 르네상스 인본주의는 매우 기독교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평가를 부정했던 인물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이탈리아의 언어학자 로렌초 발라였다.
그의 작품 안에서 그의 대담자 중 하나의 입을 빌려 에피쿠로스식의 쾌락주의를 옹호했다. 그는 '기분좋게 사는 사람들이 쾌락주의자라면, 경건하고 신실한 사람들보다 더 쾌락주의적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라고 썼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장 진정한 즐거움과 쾌락을 누릴 수 있으므로 예수를 믿는 것이 진정한 에피쿠로스 주의자라는 설명이다.
이런 식의 시각은 르네상스 인본학자들이 대부분의 이교 철학들을 바라보던 관점과 일맥상통한다.
14세기부터 17세기까지 활발하게 일어났던 자유사상의 전파는 인본주의의 확산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북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동방과 교류하며 취향과 의복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점차 개방적으로 변해갔다. 단테와 페트라르카, 마키아벨리 등의 저작들은 모두 지적 자유와 개인 표현의 미덕을 강조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역시 그들의 의식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르네상스 인본주의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점은 르네상스 신플라톤주의와 헤르메스주의다. 이중 헤르메스주의는 꿋꿋이 살아남아 서구 사상에 계속 큰 영향을 끼쳤지만, 신플라톤주의는 대부분 지적 경향 수준으로 소멸되어 신지학, 뉴에이지 사상처럼 서구 밀교 수준으로 크게 격이 떨어진다.
신플라톤주의와 헤르메스주의가 이끌던 르네상스 인본주의는 16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종교계와 협력하며 발전해나갔지만, 종교개혁이라는 초유의 대사건이 터지며 모든게 바뀐다.
권위가 흔들리며 더이상 내부의 불경한 사상을 용납할 수 없었던 가톨릭계는 인본주의를 탄압했다. 신으로의 회귀를 주장했던 개신교 역시 별다를 바는 없었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 장 칼뱅, 울리히 츠빙글리 등 대표적인 종교개혁가들은 상당수 인본주의자일 정도로 인본주의의 영향력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시작된 가톨릭의 대항 종교 개혁으로 인해서 인본주의의 입지는 날로 좁아졌다. 오직 스콜라 철학에 기반한 엄격한 가톨릭 정통 신학만이 강요됐다. 교황청은 상당수의 인본주의자들, 심지어 온건파에 속하는 에라스뮈스마저도 이단으로 몰릴 수준으로 인본주의자들을 때려잡았다. 물론 이러한 제한 속에서도 이냐시오 데 로욜라와 같이 여전히 인본주의의 명맥을 유지한 신학자들이 일부 있었지만,가톨릭 교회의 강경한 태도는 최종적으로 인본주의를 사양길로 접어들게 만들었다. 여담이지만 교회한테 이렇게 탄압받았다고 인본주의가 신을 인간으로 대체하겠다는 그런 류의 불경한 사상은 전혀 아니었다. 르네상스 인본주의는 근본적으로 오히려 지극히 기독교적이고 하느님에게 의지하는 사상이었다.
르네상스의 몰락과 서유럽 지역으로의 파급을 주마간산격으로 돌아보았습니다..
유럽 그리고 그분들은 활동한 국가에서는 당연히 대단한 지명도가 있겠습니다만
일부를 제외하고는 생소한 분이 즐비하네요!
잘 모르는 분들이고 서양 미술사에 대하여 관심보다는 정보에서 취약한 국내에서는 잘 검색도 되지 않는 분이 대부분입니다!
역사서인지 미술사인지 어중간한 글을 두편 연속 남겼는데 아는 지식이 일천하니 양해 부탁~~
르네상스~(매너리즘)~바로크~로코코까지는 서양 미술사가 아직 "제자 백가" 시대가 되기전이라 큰 겉가지없이 진행됩니다..
다음편에는 장황하게 내용없이 글만 많았던 르네상스와 작별하고 바로크로 찾아 뵙겠습니다..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