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7. 2. 주일예배 설교(사도행전 강해 45)
사도행전 27장 1-44절
사명(使命)은 죽음보다 힘이 셉니다.
■ 라틴어에 ‘Donum’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은혜’라는 단어입니다. 은혜를 나타내는 이 라틴어 Donum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선물’(膳物, present)이라는 뜻입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푸신 사랑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대가도 지불함 없이 공짜로 얻은 사랑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사는 게 선물이 됩니다. 다른 하나는 의외의 뜻입니다. ‘과제’(課題, homework) ‘숙제’(宿題)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지만 더불어 과제/숙제도 주십니다. 이 땅에서 각자가 살아가야 할 사명을 과제로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오늘 우리는 Donum의 두 번째 의미인 ‘각 인생에 부여된 하나님의 과제로서의 사명’에 초점을 맞춰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명의 의미를 살펴보는 시간이 아니라 ‘사명의 힘’ ‘사명이 갖고 있는 힘’에 대해 살필 것입니다.
■ 바울은 드디어 소원대로 로마행 배에 승선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바울이 이 배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다난(多難)한 사건들이 있었습니까? 세 번째 전도여행을 하면서 그에게는 한 확신이 들어왔는데 로마로 가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유는 당시 로마는 세계 정치의 중심이었고, 이 중심에 주님의 복음이 전달되는 것이 복음의 세계적 확장의 물꼬를 트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생각은 성령께서 주신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사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로마로 어떻게 갈 것이냐, 어떤 방식으로 갈 것이냐 하는 문제도 바울의 결정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로마행이 바울의 결정 사항이 아니듯 방법론도 그의 결정 사항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는 그가 3차 전도여행을 마치면서 에베소교회 장로들과 드린 고별예배에서 한 설교 내용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20:22-25입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이 고백은 바울이 운명이 사명에 매여 있고, 사명에 의해 살아가는 일상이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명의 특징 중 하나는 예측 불가한 미래에도 불안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본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 곳입니다. 먼저 22-26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그리고 33-37절입니다. “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더라.”
바울에게 로마로 가는 것은 사명이었습니다. 일반인들은 이를 운명(運命) 또는 숙명(宿命)이라고 하는 데, 우리는 이를 사명(使命)이라고 합니다. 이 사명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간택(揀擇)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명은 순종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구약의 선지자 ‘요나’의 경우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 그런데 순종을 요구하는 사명은 하나님의 폭력이 아닙니다. ‘생명과 평화를 위한 동행’을 요청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영혼들이 생명을 얻기를 원하시기에 다수에게 ‘복음 전도의 사명’을 맡기십니다. 세상이 평화를 누리기를 원하셔서 다수에게 ‘평화 만들기 사명’을 맡기십니다. 이렇게 맡은 사람들에게 당신과의 동행을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Donum,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길만한 사람에게 맡기신 과제/숙제입니다. 이것은 은혜입니다. 바로 이것에서 우리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사명은 그 자체가 힘’이라는 것입니다.
사명은 하나님이 맡기신 과제라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관리하시는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영역은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맡기신 숙제가 반드시 되도록 사명자에게 힘을 제공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천사들을 배치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도 사명을 막지 못하고,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을 뒤집어 읽으면, ‘사명이 있는 한, 하나님께서 맡기신 과제가 끝나기 전까지는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의 인생도 실패도 하고 망하기도 하고, 부도도 나고, 파산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숙제를 가진 사람은 다시 일어나고 다시 시작하게 하십니다. 바울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바울의 로마행은 결코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그를 넘어뜨리려는 암초와 복병들이 가는 데마다 있었습니다. 특히 로마행 배에 오르는 날부터 바람은 죽음의 파도를 일으켰습니다. 바울과 그와 함께 있는 수 백 명의 목숨을 앗아가기 위해 파도는 거칠고 거칠었습니다.
그러나 바람도 파도도 바울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물론 로마행 일정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항로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었고, 사람들의 마음을 부정적으로 뒤집어 놓았지만, 결코 바울을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숙제로서의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난은 힘들었습니다. 당연히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죽지 않았습니다. 끝내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산다는 것이 참 녹녹치 않습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다는 것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감당해야 할 것이 버겁기에 삶이 늘 힘듭니다. 장수 시대인 것이 부담스러울 정도입니다. 과연 살아낼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심각합니다.
저도 ‘한 달 한 달’이 늘 위태롭습니다. ‘하루하루’가 버겁습니다. ‘과연 살아낼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서 ‘살아야하나?’라는 의심을 하기도 합니다.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상황이 위태롭고 현실이 버겁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 살아있고, 아직 잘 지내고 있습니다. 상황은 위태롭기에 하루하루가 쉽지 않음에도, 현실이 버겁기에 한 달 한 달이 고통스러움에도, 저는 아직 살아있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 때문입니다. 아직 숙제를 다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빨리 숙제를 끝내야겠구나...ㅠㅠ’ 힘드니까요. 그러나 그때마다 바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시간과 길이는 내 소관이 아니라 주님의 소관이라는 사실을 바로 깨닫습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과 함께 본문 22-26절을 한 번 더 읽어보고 싶습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우리에게 은혜로서의 삶의 숙제가 있다면, 현재 우리가 만난 고난은 곧 힘을 잃게 될 것입니다. 아직은 우리가 복음을 전할 숙제가 남아 있고, 아직은 세상에 평화를 만들어내야 하는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그렇게 해주실 수도 있지만, 우리가 이 고난을 넘는 것은 맡기신 숙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곧 이 고난이 지나갈 것입니다. 곧 이 폭풍우가 사라질 것입니다. 곧 우리를 실은 배가 구원의 항구에, 구원의 섬 ‘멜리데’에 다다를 것입니다. 자, 주님이 주시는 말씀의 곡식을 먹고 조그만 더 힘을 내십시다. 잠시 후에 구원에 섬에 다다를 것입니다.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