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굶주린 여우가 많은 포도송이가 잘 익어 매달려 있는 포도밭으로 몰래 숨어들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포도송이가 너무 높아서 여우에게는 닿기 어려울 만큼 높은 시렁 위에 매달려 있었다. 여우는 어떻게든 거기에 닿아 보려고 뛰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훌쩍 뛰었다. 하지만 모두 헛 일이었다. 마침내 여우는 완전히 지쳐서 말했다. "아무나 딸 테면 따라지, 저 포도는 시단 말이야."
얼마 전 미국 알파인 CC로 안내하던 지인이 내게 해준 말이다. '알파인'이란 동네는 미국 10대 부촌(富村)으로 그 곳에 위치한 알파인 CC는 아주 특별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 싱글을 친다는 사람 뿐 아니라 미국 교포사회 유력인사들도 한 번쯤 이곳에서 라운딩을 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다들 '에이, 알파인 CC가 별거겠어. 골프장은 다 똑같지'하고 포기합니다. 그래서 알파인을 두고 신포도 같다고 합니다."
알파인 CC는 220명 정도의 회원을 갖고 있지만 모두 지역인들로 국한되어 있다. 입회비만 해도 10만달러가 넘고 연간 회비만 해도 2만달러지만 현재 30명 정도가 대기 중이란다. 또 회원의 게스트 초청 조항도 매우 까다롭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회원이 아닌 사람은 칠 수 없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만 회원이 월 2회 게스트를 초청할 수 있다.
이는 바쁜 비즈니스맨이라면 주간 골프는 꿈도 못 꿀 뿐 아니라 주말 골프는 아예 금지되어 있는 실정이니, 한 마디로 회원이 아니면 치지 말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까다로운 조건 탓에 아무리 애를 써도 알파인 CC에서 골프를 칠 수 없게 되자 신포도니 뭐니 해가며 골프장을 깎아 내리는 것.
나를 이곳으로 안내한 지인은 10년 전 미국에서 인연을 맺은 뒤 줄곧 내게 "차법사님, 제발 골프 좀 배우십시오. 골프만 배우시면 정말 환상적인 골프 코스로 안내하겠습니다"라고 말했던 사람. 당시 골프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아 그 근처에도 가지 않다가 90년대말이 되어서야 골프채를 잡았고 이제야 그와 '신포도 골프장'으로 가게 된 것이다.
"골프 잘 치신다는 법사님께서도 아마 힘드실 겁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 싱글을 친다는 유력 인사도 이 곳에서 이틀 간 도전해 100타를 훌쩍 넘겼다며 15년 가깝게 회원권을 갖고 있는 자신조차 86타가 최고 기록이며 80타를 넘은 것도 단 세 번 뿐이라고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알파인 CC의 그린은 정말 유리알 같았다. 조금만 잘못 쳐도 쓰리 퍼팅 뿐 아니라 포, 파이브 퍼팅까지 막 나가버렸다. 나도 모르게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이 쪽으로 치십시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캐디인 줄 알았으나 그 곳 캐디는 30년 경력의 캐나다 출신 할아버지. 깜짝 놀라 뒤를 보니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영가가 서 있는 게 아닌가.
"알파인에서 골프 치기 어려우시죠?" 알고 보니 그는 생전에 알파인 CC 회원이었다. 몇 명 안 되는 한국인 회원 중 그가 포함되어 있었고, 사후에 그의 자녀가 회원이 됐다. "차법사님, 다른 사람의 미스터리는 다 밝혀 주시면서 왜 제 죽음의 미스터리는 밝혀주지 않으십니까? 제가 어떻게 죽었는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나는 그에게 생전 가장 친한 친구였던 백태하 장군은 내가 잘 모시고 있다고 말하며 언젠가 때가 되면 밝히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그는 내가 마의 100타 벽을 넘도록 돕겠다며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초청하게 만들어 일주일에 무려 4회나 알파인 CC에서 골프를 치게 해줬다. 게스트로는 기록을 세운 셈이었다. 100타의 벽까지 무난히 깨자 김형욱 영가는 "꼭 다시 초청하겠습니다"라며 작별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지금도 김형욱 영가는 알파인 CC의 그린에서 쓸쓸히 골프를 즐기며 미스터리가 밝혀질 날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