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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사
鄭求福(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于史 조동걸 선생님은 1932년 3월 23일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나셔서 지금까지 60여년을 한국사 연구의 새로운 면을 많이 개척하셨습니다. 선생님은 대학 재학 중 민주화 학생운동으로 신원조회 상 문제가 되어 졸업 후 10여간 어려운 생활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학자적 성실성은 학계의 주목을 받아 춘천교대, 독립운동연구소, 국민대학에 자리를 잡으면서 안정기에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역사 연구는 크게 향토사, 독립운동사, 사학사, 시론 등 네 분야에서 엄청난 연구성과를 이룩하였고, 그 연구성과는 곧바로 한국현대사의 정론을 제시하였습니다.
선생님이 다른 것에 한 눈을 팔지 않고 오직 역사연구에만 全力을 기우리고 역사를 끔직히 사랑하셨음은 주위의 동료교수들이 ‘于史’라는 호를 지어주었고 이를 선생님 자신이 좋아하신 점에서 단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선생님의 저작집 20권의 출판을 경하하며 그 공로는 우리학계의 성장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이런 출판된 책을 다시 저작 집으로 냄에 헌신적 기여를 한 제자 또는 후학들인 장석흥·김용달·한시준·최기영·김희곤·박걸순 교수들의 노고를 충심으로 축하하는 바입니다.
선생님이 일생동안 연구하신 연구 분야가 한국근현대사인데 이 분야의 연구가 거의 없는 제가 선생님의 저작집 출판기념회에서 축사를 하게 된 것을 한편으로는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대단히 외람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게 된 연유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는 제가 자청을 한 것입니다.
지난 9월 25일 한국사학사학회 발표장에 나오셨고, 식사 후 택시를 잡아드리기 위해 함께 걸으면서 출판기념회를 11월 3일에 할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제가 축사를 해드리겠다고 먼저 제청을 했고 그 자리에서 곧바로 쾌락을 받았습니다. 물론 하객 중에 축사를 해주시려는 분이 많이 계실 것으로 믿습니다만 저는 오늘 축사준비를 위해 며칠간 생각을 다듬고 선생님의 20책의 머리말을 모두 읽었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가까이에서 모신 계기는 선생님의 저서 한국현대사학사를 1998년 10월 초에 기증받고 이를 독파하였는데 그 책에서 한국사학사학회를 조직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에 감동을 받고 12월 20일 경에 양재동 “커피나라”에서 김경수 교수와 셋이서 직접 만나 사학사학회를 조직하기로 합의하면서 부터입니다. 1999년 2월말까지 사학사 전문연구자 3-4명을 더 모셔 확대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2-3차의 회의를 거쳐 그 얼개를 만들고 3월 말에 창립총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한국사학사학회’ 창립총회에서 선생님을 초대회장으로 모셨고, 선생님께서는 학회의 기틀을 튼튼히 마련하셨습니다. 그 후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어 지금까지도 학회에 자주 나오십니다. 또한 선생님과 가깝게 지낸 계기는 학회에서 식사 중 앞으로 국사교과서가 검인정으로 바뀔 터이니 이를 학회차원이던지 개인적인 차원이던지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셔서 저는 우선 교과서의 문제보다도 일반인이 읽는 교과서의 모체가 될 개론서의 준비가 우선 더욱 필요하니 이를 함께 계획하자는 수정제의를 하였고, 선생님은 흔쾌히 받아들이셨습니다. 그 준비로 12번 정도 만나 역사관의 통일을 위해 토의를 하고 난후에 집필을 하자는데 합의를 보아 한 달에 한 번씩 인사동 찻집에서 만났습니다. 무려 10번을 만났는데 한 번도 시간에 늦게 오신 적이 없음을 보고 선생님의 성실함에 감탄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작업은 거의 계획한 목표에 달성하려는 순간 “한일역사연구공동위원회”가 조직되어 선생님은 위원들의 선출에 의해 위원장의 중책을 맡으셨고, 저는 위원으로 연구에 참여함으로써 공동계획은 미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2004년 봄에 선생님은 위암수술을 받으면서 건강이 극히 악화되었습니다. 상상을 초월한 여러 가지 혹독한 병마와의 싸움에서 이겨내셨지만 부상병에 가까운 상태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위원장직을 내놓겠다는 사의를 여러 번 표했지만 당시 위원이었던 이만열 국사편찬위원장께서 선생님이 병환에서 회복되게 하려면 임무를 맡겨 놓아야하며 위원회의 일이 거의 이루어 졌으니 자리를 지키게 함이 좋겠다는 의견에 의원들이 모두 동의를 했습니다. 이 위원회는 후대에 부끄럽지 않는 성과를 내기 위하여 한국 측에서는 많은 공동연구자와 함께 연구하는 계기를 만들었고, 한국역사학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 매달 회의를 민주적으로 가졌습니다. 그 임기는 원래 3년으로 한정되었는데 출판물을 내기 위하여 1년 연장되어 2005년 동경모임으로 끝을 냈는데 이 때 조선생님은 위원장으로 참석하셔서 유종의 미를 거두셨습니다.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 서설이 너무 길어졌습니다만 선생님의 저작 집을 20권으로 출간하겠다고 공표한 것은 2007년 6월의 한국사학사학회에서 ‘나의 역사연구’에서 발표하실 때입니다. 저는 과연 그 일을 해내실 것인가 속으로 걱정을 했습니다. (「나의 역사연구-다국적 국제인사회의 실현을 위한 꿈을 키우는 역사연구」 {韓國史學史學報} 16집)
선생님은 그 동안 잦은 병원출입으로 환경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아파트를 줄여서 이사를 하시고 연구실(별채아파트)인 우이서재를 가득 채운 장서 1만여권과 독립운동자료 등을 독립기념관에 기증을 하셨습니다. 또한 옆에서 생활을 뒷바라지해 주시던 인자하고 현철하신 사모님을 먼저 보내야 하는 인간적 슬픔을 당하기도 하셨으며, 지금은 강서구 등촌동 시니어스 타운 3030호에 홀로 거처하고 계십니다. 선생님은 3년여 동안 20책의 편집과 교정 작업에 매달렸습니다. 이 사명감이 선생님의 건강을 회복하게 하는 동인이었음을 알고서 이만열 교수의 충고가 아주 적절하였음을 재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 특별한 계획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선생님에게 과제를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이제 실증적인 역사연구는 접으시고 세상사에 대한 역사가의 사론을 쓰는 일에 전념하시기 바랍니다. 선생님이 이미 강조한 역사란 꿈을 그리는 학문이라는 말이 실제 연구를 통해서는 실감을 할 수 없습니다. 물론 꿈을 그린다는 말이 역사가의 관심은 과거의 그 자체를 그릴 뿐만 아니라 이를 현재와 미래에 투영하는 시각을 가지라는 말로 이해됩니다만 이는 개별연구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가는 정년퇴임 후 해오던 개별 연구도 게속적으로 해야겠지만 그보다는 일생동안 역사연구를 통해서 얻은 지식이 아닌 실천의지가 담긴 “지혜”를 실현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매일 신문을 세 네가지 읽으시고 그 파장이 계속될 가능성이 있는 문제에 대하여 역사가의 논평을 1주에 한편씩 쓰셔서 신문 등에 발표를 하거나 아니면 역사가들의 언론지를 만들어 논지를 전개하는 일을 구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의 세태가 책을 읽지 않는 풍토가 만연되고 있으니 이를 출판만이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서 함께 확장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제가 새롭게 제의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새로 쓰신 일기체의 시론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모든 사건을 풀이함에 왜 역사적 성찰이 필요한가를 실제로 사론을 통해서 보여주셔서 역사를 중시하는 풍토를 확장할 필요가 절실합니다.
한국의 역사가는 과거의 것만을 아는 好古家로 낙인되기 쉽습니다. 역사가의 논문은 장황한 사료의 인용으로 인해서 일반인이 읽기가 대단히 어렵고 하나의 논문은 비록 새롭게 문제를 개척하는 학문적 공과가 있겠지만 매우 어렵고 재미없는 작업입니다. 정년퇴임한 교수는 이런 논문의 재생산보다는 역사를 통관하는 하나의 저술을 남길 필요가 있습니다. 선생님의 20권의 저작을 한 두 권으로 요약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는 역사가가 역사의 지평을 일반대중에게 넓힐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역사가는 현재의 역사창조와 미래의 역사창조에 일반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서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 이론적 뒷받침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의 역사 자료 대부분은 모든 역사의 참여자가 배제되고 집권층의 몇 사람이 그 공로를 독차지하여 마치 그들만이 역사창조의 주인공인 것처럼 서술되었습니다. 역사는 우리 학자들의 연구대상이기도 하지만 또한 역사는 우리가 매일 매일 만들어가는 인간 활동의 총체이고 내일의 역사를 어떻게 창조할 것인가를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역사는 모든 사람의 생활에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란 여유 있는 사람의 사치품인 것처럼 여기거나 또는 역사를 이야기함이 오히려 개혁과 변화에 방해가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우리 선배 역사가들이 현대사를 등한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근현대사를 집중적으로 개척을 하셨고 국가의 독립을 위해 귀중한 생명과 재산 가족을 희생한 독립운동가의 조명에 혼신의 노력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역사는 과거만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와 깊은 관련을 가졌음을 {한국근현대사의 탐구}(2003.) 총설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쓰셨습니다.
“역사란 꿈을 만들고 실천해가는 작업의 연속이다. 따라서 한국근대사는 중세나 고대의 어느 때보다 그 꿈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시대가 되어야했다. ‘좋은 꿈’이란 어떤 꿈인가? 그것은 인간주의를 실현하는 꿈을 말한다.
이는 정치적으로는 자유평등을 기초로 한 민주공화국을 실현하는 것이고, 경제적으로는 자유로운 경제행위를 추구하는 자본주의를 말하고 사회적으로는 인권을 보장한 사회를 말한다.”
민주주의와 인도주의는 선생님의 역사연구의 화두이고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그 기틀을 다지기에는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양의 민주주의 방식을 정착화할 뿐만 아니라 동양인이 추구한 국가운영과 철학, 문화의식, 가족 및 친족 공동체의 정신, 예와 법의 정신의 조화 등도 가미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국민의 민주의식을 확장함에 필요한 역사적 과정도 있습니다. 이런 역사정신은 비록 대상은 한국의 것을 다루었지만 이는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으로 어떻게 확산시키는 문제가 그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의 문제는 북한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포함해야 할 것입니다. 독재체제 하에 자유와 평등를 잃고 국가라는 감옥에 갇힌 인민의 인권을 어떻게 신장하는가의 문제는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자유와 평화를 외치는 소리가 강하지만 국제적으로는 테러행위와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 세태입니다. 국제기구에 한국인이 참여하는 기회는 점차 넓어져 이제 한국인은 세계사 창조의 주역이 되었고 한국사는 이미 세계사의 일부로서 세계사의 변화와 깊은 관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민족주의로 남북분단의 문제를 해결하자고 합니다만 남북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이 시대의 역사를 어떻게 균형 잡힌 시각으로 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정치권력의 소수집중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전근대 동양의 왕조국가에서도 마찬가지였고, 북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의 기능이 무엇이고 과거 역사상 국가의 기능 중 순기능과 역기능을 역사가는 밝혀야 합니다.
독립운동사는 근대 개항기로부터 식민지기까지의 역사를 우리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에서 이 시대의 중심과제임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근현사의 변화와 발전을 다룬 한국근현대사의 탐구 총설에서 마지막 구절에서 역사의 교훈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 역사의 퇴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제도의 우상화와 자기 자신의 우상 즉 자만에서 비롯됐다. 조선시대 초기의 {經國大典}(1469)이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때 세계적으로 보면 우수한 제도를 정비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조선조말 {大典會通}(1865)에 이르기 까지 4백년에 걸쳐 사회 변화에 부응하여 개혁하지 못한 것처럼 제도의 우상이 나라와 역사를 그르쳤다. 고을마다 향교를 두고 서원. 서당을 설립하고. 마을마다 글방을 두고 집집이 조상의 문집을 만들어 글과 도덕을 숭상한 그런 조선시대와 같은 도덕주의 인간상은 세계적으로 드물었다. 그런데 그 글과 도덕이 사회변천에 따라 어떻게 변해야 할 것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우상화하다가 그 글과 도덕이 무력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우상의 고집으로 말미암아 자주적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 제국주의의 침략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런 역사의 교훈을 생각하면서 세계화를 촉진하고 비판에 비판을 거듭하며 자성해야한다. 21세기는 우상을 버리고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한 개혁에 박차를 가해야할 것이다. ”
여기서 우상화는 폐쇄화, 고립화라는 또는 배타적인 독단이란 말로 대치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줄기찬 의병운동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파악한 결론에서 덧붙인 견해로서 균형 잡힌 시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한국은 그 동안 민주화를 이룩하고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였으며, 6.15공동선언을 한 현대사의 발전을 논하고 남북한 모두 우상화, 자만하지 말라는 역사가의 충고로 이해되지만 이는 인민, 주체라는 미명으로 지배자를 우상화 하고 있는 북한을 염두에 둔 견해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들 역사가는 모두 남북통일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통일을 이룩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사회인 통일사회여야 합니다. 1948년의 대한민국의 건국을 분단을 자초했다고 폄하함은 잘못된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정권을 비판한다고 무조건 처형하는 독재주의로의 통일은 반대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자유를 지키는 우리의 역사적 과제입니다. 더구나 한국 내에서도 막대한 경제적 비용으로 통일을 반대하는 목소리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더구나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의 동반자로서 중국이라는 거대국가에 돌저귀를 매달고 있어 통일이 그리 쉽지 않을 전망입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역사적 이론적 논리를 적극적으로 개발 확산시켜야 할 것입니다.
엊그제 남북한 이산가족 상봉에서 60년 만에 만난 가족의 상봉을 지켜보면서 60년이란 세월이 얼마나 긴 것인지를 새삼 실감하고 더구나 국군으로 포로가 된 자 중 현재 생존자가 500여명이라 하니 이들은 남쪽에 고향을 둔 사람일 것입니다. 그들은 ‘전향자’라고 하니 명칭은 어떻든 그들이 태어난 고향을 자유롭게 방문하고 친족과 서신을 교환하며,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도록 함이 인도주의 실현 중 가장 커다란 문제일 것입니다. 북한 인민을 해방시키는 일이 한국지식인들의 중요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국제적십자사도 현재 국가체제를 당해내지 못하고 있음에 지식인들이 피안의 등불 보듯 나와 상관없다고 보는 의식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비록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해도 북한 인민의 인권 신장을 위해 한국지식들의 목소리를 높여야 할 것입니다. 이는 정치가에만 맡길 일이 아닙니다. 선생님의 인도주의를 현실에 적용해서 역사적으로 논하는 평론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또한 우리사회의 진보와 보수의 논쟁도 역사가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가 어떻게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를 주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수도 그렇고 진보도 역사적 뿌리를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바꾸면 좋다고 하는 풍조가 팽배하고 있습니다. 역사에서는 변화도 소중한 것이지만 지속의 의미도 대단히 소중함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역사는 시대마다 뚝 끊어지는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역사의 중심축이 약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사는 시대마다 연구자가 자기가 연구하는 시대를 비판적으로 보지 않고 미화시키려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이는 각 시대의 연구성과를 사다리로 연결하면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는 역사의 미화이고 과거 역사에 대한 학자의 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역사 해석은 마침내 정론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알고 배움이 왜 소중한가를 논리적으로 설명해야하고 일반인의 생활상의 발전을 서술하지 않고는 이제 일반인에게 흥미를 끌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은 연구성과에서 철저한 논증을 중시했습니다. 이는 최근에 쓴 저작전집 18책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연구자는 논설을 좋아하면 안 된다. 논문을 작성할 때 논증하지 않고 논설로 결론을 말하는 나쁜 버릇이 생기기 쉽기 때문이다. ((전집 제18책) {사람의 시대로 가는 징검다리} 서문 )”
이는 후배 학자에게 주는 경계이고 선생님은 실제로 연구에서는 실증의 태도로 일관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선생님은 역사연구자로서의 짐을 벗어던지고 전 국민에게 모든 사람이 현재역사의 창조자라는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노력에 경주하시기 바랍니다. 이왕 역사 속에 삶을 바치기로 하여 호까지 于史라는 한 소신을 지켜주실 것을 굳게 믿습니다. 선생님이 65년 전의 아버지의 약속을 지켜 송아지 한 마리 값을 그 후손에게 보내준 것처럼 실천적 지성인이기 때문입니다.
현대한국사학사의 결론 부분에서 100년간의 한국사학사를 총정리하면서 선생님의 역사학은 사회문화사학, 또는 문화사회사학의 사관을 가질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런 역사관에 입각한 한국 근현대사의 서술이 필요합니다. 선생님의 역사관은 한국사학사에서 중요한 학문적 위치를 차지할 것이 분명합니다.
인생의 만년에 학자의 직업이 대단히 좋은 것은 소일거리가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제 시대를 뛰어 넘어 전시대의 역사, 문학작품, 다른 분야의 저술 등을 자유롭게 탐익하는 독서를 즐기실수도 있습니다. 만년의 지루한 시간이 주는 고독이 없는 것이 학자의 특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매일 틈을 내서 건강을 챙기시어 선생님이 지금까지 주장한 미래의 꿈이 역사연구와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 역사란 학문이 왜 일반인에게도 중요한 것인지를 좀더 차분하게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역사의 실천적인 실용성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적 연구 성과를 넘어서 공동의 노력을 집중할 필요는 없는지도 고민해주시기 바랍니다. 선생님이 독서를 통해 다른 시대, 다른 연구자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선생님의 이러한 막중한 임무가 달성될 수 있도록 하늘이 선생님에게 시간과 건강을 함께 주시어서 더 좋은 성과를 이룩하시기를 거듭 기원합니다. 운동도 규칙적으로 열심히 하시기 바라고 혹 여유 있으면 모든 생각을 잊어버리는 ‘無念’의 시간도 간간히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축사가 선생님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드리지 않았나 생각됩니다만 取, 不取의 문제는 오직 선생님의 자유에 맡기겠습니다. 건승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덧붙임: 조선생님의 그날 답사에서 저의 제안을 수용할 수 없다고 하셨다. 아마 하기야 수전증으로 컴퓨터를 칠 수 없다고 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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