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호가 하나 더 있는데 화양구곡의 주인이라는 뜻의 화양동주(華陽洞主)이다. 화양구곡은 송시열과 그의 제자들이 지배한 천국이자 극락이였다.
은진 송씨로 宋甲祚의 아들로 태어나 사계 김장생에게 수학하였다. 조선왕조 실록에 3000번이나
나온다는 우암을 모르고는 조선시대 17세기 이후 역사를 알 수 없고 당쟁을 이야기할 수 없다. 노론의 영수로서 그의 제자들이 많을때는 45명이 조정에서 국사를 마음대로 하였다.
우암 송시열을 모르고 조선을 말하지 말라.
충청도 화양구곡 10리길 계곡은 굽이굽이마다 발걸음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화양계곡 곳곳마다 아름답고 멋있는 바위에 이름을 새겨 놓았다.장희빈에게 쫒겨났던 민비의 친정 아우
민진원(閔鎭遠)이 새긴 것이다.
제1곡은 하늘을 떠 받히는 절벽 경천벽(擎天壁), 제2곡은 거울처럼 맑은 물이 지나던 구름도 제 모습을 비춘 운영담(雲影潭), 제 3곡은 송시열이 효종의 제삿날에 활을 잡고 운 바위 읍궁암(泣弓巖), 제 4곡은 물아래 모래가 금가루 같은 금사담(金沙潭), 제 5곡은 별을 볼 수 있을 만큼 높은 바위 첨성대(瞻星臺), 제6곡은 큰 바위가 마치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 바위
능운대(凌雲臺), 제 7곡은 누운 룡을 닮은 와룡암(臥龍巖), 제 8곡은 푸른 학이 노송에 앉은곳 학소대(鶴巢臺), 제9곡은 뱀처럼 매끄러운 바위 파곳(巴곳) 이다.
계곡 굽이굽이마다 멋진 글씨를 쓴 사람은 우암 송시열의 제자 단암(丹巖) 민진원( 閔鎭遠)(1664-1736)이다. 이 사람은 숙종비 인현왕후 민비의 친정 오빠이다.
송시열은 제 4곡 금사담에 암서재(巖棲齋)라는 별장을 짓고 화양계곡을 한없이 누리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溪邊石崖闢 내가 바위 벽을 열어,
作齋於其間 그 사이에 서재를 지었네.
靜坐尋經訓 고요히 앉아 경전의 가르침을 탐구하니,
分寸欲제攀 한 치라도 더위 잡고 올라보려네.
송시열의 제자들은 1695년 스승이 서재로 사용했던 암서재 맞은편에 화양서원을 세우고, 다음 해
조정에서 내린 편액과 땅과 노비로 사액서원으로 승격시켰다. 당시 전국에는 44곳에 송시열을 모시는 서원이 있었지만 송시열의 고향인 이곳의 화양서원이 가장 세력이 컸었다. 권력이 커지면 남용하는 법, 송시열의 권위에 기댄 지식 패거리들은 화양서원을 유지하는 명목으로 인근 백성들에게 돈을 뜯어 호화 호식하였다.
지금은 사라진 화양서원 옆에는 만동묘(萬東廟)가 있다. 송시열이 죽으면서 유언으로 만동묘를 지으라고 부탁해서 그의 수제자 영의정을 지낸 권상하가 주동이 되어 만들었다.
이 만동묘는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중국을 얼마나 추종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유적이다.
임진왜란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황제 신종과 마지막 황제 의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만동묘란 이름은 선조임금이 내린 만절필동(萬折必東), 즉 중국의 물은 만번을 꺾여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는 뜻에서 따온 말로서 중국을 무조건 추종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 특히 송시열의 제자들은 멸망한 명나라를 바라보면서 새롭게 자란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고 오랑케라고만 여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명나라를 사모하는 착각에 빠졌다.
결국 조선이 멸망하고서야 현실과 이상을 분별하지 못했음을 뉘우쳤지만 이미 백성들은 일본의 노예가 된 후였다.
송시열과 노론을 모르고는 조선을 알 수 없고 노론과 남인의 당쟁을 모르고는 현실 정치의 맥락도 가늠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시간이 나면 꼭 만동묘를 찾아 그 때의 역사를 되 새겨 볼 필요가 있다.
(화양구곡 중 제 4곡 금사담에 지은 암서재의 모습)
우암은 여기에 은거하면서 제자들을 진두지휘하고 현실 정치에 참여하기도 하며 남인과 당쟁을 하였던 곳이다. 맞은편에 만동묘가 있다.
만동묘의 앞 모습-명나라 신종과 의종을 모신 사당, 萬折必東에서 떠 온 말
중국의 물은 만번을 꺾여도 동쪽으로 흐른다는 선조의 대명사대 모화사상에서 따 온 말
( 만절 필동(萬折必東)과 화양구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