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어사에서 광덕 사형님과 보낸 시절
각원선과(覺園善果) | 부산 범어사 법사
2. 기연, 벽암록(奇緣, 碧巖錄)
『벽암록』이야기가 나왔으니, 우리 나라 해방 이후 최초로 『벽암록』강의를 하고 책을 낸 이야기를 해야겠다. 당시 불국사 주지였던 능가스님과 선방 수좌로 있다가 범어사 교무를 맡았던 진상스님과 광덕스님, 이 세 분은 삼총사로 불릴 만큼 서로 절친한 도반이었다. 그 무렵 범어사 강사였던 성호스님이 『벽암록』을 현토하여 강원에서 강의를 했다. 그러자 선방 대중들까지 모두 강원으로 몰려가서 강의를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셨던 조실스님이 선방에 와 보니 텅빈 방이었다. 그 다음날 큰방 공양시간에 대중을 대표하여 내가 조실스님께 죽비 경책을 받았고, 그로 말미암아 『벽암록』강의는 중도에 끝나고 말았다. 그때 조실스님께서 대중을 염려하여 하신 말씀은 이러했다.
“나도 여태까지 『벽암록』을 보지 않았어. 내가 이렇게 선방에서 오랜 세월 지냈으면서도 『벽암록』을 보지 않았던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 그래. 그런데 엊그제 선방에 들어온 사람들이 『벽암록』을 봐서 대관절 무슨 이득이 있겠나.”
참선하는 사람들이 오로지 화두정진은 하지 않고 『벽암록』을 본다면 자칫 알음알이에 떨어지거나 문자에 휘둘릴 것을 염려하신 말씀이라고 나는 새겨들었다. 이러한 일은 조실스님뿐만 아니다. 일찍이 원오스님의 제자였던 대혜스님은 스승이 강설한 『벽암록』을 책으로 만들자 그것을 몽땅 가져다 불태워 버렸다. 조실스님과 같은 생각에서였고 이와 같은 두 분의 심모원려는 후학들에게 베푸는 지극한 자비였다고 생각한다. 단 한 사람이라도 잘못될세라 어긋날세라 노심초사하셨던 대비의 은혜가 그렇게 후학들을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고인의 노파심절이 이렇게 지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벽암록』강설을 실천했던 것은 세 분 스님들의 설에 대한 특별한 이해 때문이었다. 그것은 20세기 문명사회가 안고 있는 인간의 문제(기아, 질병, 전쟁, 소외 등등)를 선이라는 획기적인 방법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까닭이다.
그래서 1961년 동안거 때, 불국사에서 『벽암록』 강설을 준비하였고, 그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 일을 시작하면서 처음부터 조실스님의 염려를 감안하여 모든 동참 대중들은 불국사 선방에서 철저하게 정진하도록 규칙을 세웠고 거기에 따라 방을 짰다. 즉 참선 정진의 토대 위에서 하루 두 차례씩 『벽암록』 강설을 열었던 것이니, 이것은 전적으로 조실스님께서 이르신 경책의 힘이었다. 조실스님의 말씀을 조금도 어기지 않았던 삼총사 스님들이 의논하고 협력하여 한국 초유의 『벽암록』 강의가 그렇게 막이 올랐다.
장소가 불국사였던 것은 능가스님이 주지인 때문이고, 진상스님은 대중을 모았고, 광덕스님은 강사인 설봉 큰스님을 모시는 일과 교재를 책으로 엮는 일 등, 기타 여러 일을 맡았다.
범어사 강사인 성호스님이 현토한 『벽암록』을 교재로 정하고 그것을 책으로 엮어서 사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책 한 권 내는 데 보통 일 년씩 걸리던 시절이라 막상 강의 때는 미처 책이 나오지 못해 교정본을 가지고 공부하였다. 때는 한겨울 석 달 동안, 무척 추운 엄동설한이었다. 지금 같은 난방시설은 꿈도 꾸지 못할 때였기에 강의실에 앉아 있으면 온몸이 저절로 덜덜 떨렸다. 그렇지만 누구 한 사람 강의에 빠지거나 춥다고 소홀한 사람이 없었다. 아무리 추워도 배우겠다는 열의와 구도심은 활활 달아오른 화로 같았다. 오히려 그 더운 열기에 토함산 바람도 주춤했고 기와 지붕위의 눈도 녹는 것 같았다. 그때 동참한 대중이 무려 40명이 넘었는데 거의 선방 수좌들이었고, 몇 명의 학인들이 있었지만 그들도 모두 이력종장들이었으니 그 당시의 쟁쟁한 수행자들이 모였던 것이다.
3. 현대선학연구회(現代禪學硏究會)와 대한불교역경원(大韓佛敎譯經院)의 등장
앞에서도 여러 차례 말했지만 이 모든 기획과 준비는 전적으로 광덕 사형님의 몫이었다. 성호스님이 현토한 『벽암록』에 대한 해제도 사형님이 직접 썼고, 그때 ‘현대선학연구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그 모임에서 『벽암록』강설을 주최, 주관하는 형식을 취했는데 그 모든 일의 시종전말 역시 사형님이 맡아서 추진해 나갔다. 그때 간행한 『벽암록』 말미에 현대선학연구회의 취지문이 실려 있다. 그 글을 보면 당시 주최자들의 생각을 알 수 있다. 그 글 역시 사형님이 대표로 쓰신 것이라고 들었다.
그때 간행한 『벽암록』의 발행소는 ‘대한불교역경원’이었다. 주최측에서는 『벽암록』뿐만 아니라 여러 선적(禪籍)들을 계속 번역, 출간해 나가려고 하는 뜻에서 ‘대한 불교역경원’이라는 이름을 내걸었던 것이다. 앞에서 말한 ‘현대선학 연구회’와 마찬가지로 세 분 스님들의 뜻을 담은 명칭이었으며, 여기에 대한 기획과 실행도 사형님이 전담했다고 한다. 즉 선어록을 차례차례 현토하여 강의하고, 또 그것을 번역하여 책으로 묶어내는 작업을 순차적으로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니, 이러한 희망과 의지의 피력이 취지문에 담겨있다.
다시 한 번 그때의 분위기를 되살려 보면 무척 열정적이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강의하는 큰스님뿐만 아니라 배우는 사람들도 열성이 대단했다. 미처 책이 나오지 않아서 희미한 교정본을 손에 들고 공부를 시작했지만 설두스님의 본칙과 송고, 원오스님의 수시와 착어, 평창에 따른 구절구절은 여느 책에서도 느끼지 못하는 초출함이 있었다. 거기다가 선지(禪旨) 번뜩이는 큰스님의 종횡무진은 가히 천하 사람들이 다 나서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으니 어찌 나의 필설로 형언할 수 있으랴!
이와 같은 여러 요소가 한데 어울려 참으로 놀라우리만큼 대단했던 모임이 되었다. 수강자들이었던 선방 수좌들이나 강원 학인들의 열정은 그 당시로는 보기 드물 정도의 열렬함이 있었다. 마치 사자굴 속에는 다른 짐승들이 없다는 말과 같이 한 구절도 비켜 가거나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치열했다. 나는 그때의 모임이 저 신라의 백고좌를 능가하는 영산회상과 버금가는 모임이 아니었을까? 그도 아니면 서방불굴의 미타회상이었을까? 하는 회상을 해본다.
당시 보살계의 오랜 전통을 자부하고 범어사의 계율정신은 섬뜩할 정도로 삼엄했다. 그러한 계단의 단주였던 조실스님은 설봉스님만은 일상생활에서 특별한 예외를 두었다. 그분의 선지가 높았음을 인정하는 것이었고 또 기회 있을 때마다 설봉스님의 안목에 대해서 말로 전하지 못할 극찬을 했다.
설봉스님께서는 강의할 때 『벽암록』현토를 읽어 내려가며 자주 성호스님의 안목을 높이 평했다. 나는 그때, 범어사 강원 강사이신 고봉스님께 능엄경을 듣다가 홍원, 선래, 정단 등 도반들과 함께 『벽암록』 살림에 동참하기 위해 불국사로 향했다. 내 나이 불과 스물셋 무렵이었다. 『벽암록』강의는 하루에 두 차례씩 꼬박 3개월이 걸렸으니, 1961년 동안거는 그렇게 뜨겁고 숨가쁘게 지나갔다. 당시 동참대중들은 모두 불국사 선방에 방부를 들여서 소임을 정하여 대중생활을 여법하게 했고, 첨선경전에 소홀함 없이 하루 두 차례, 오전. 오후에 열리는 강의에 참석하는 빈틈없는 일과가 결연히 진행되었다. 내가 알기로는 『벽암록』이 근래 우리 나라에서는 책 발간도 그때가 처음이었고, 강의도 처음이었으며 현토도 처음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종문 제1서(宗門 第一書)라고 칭송하는 『벽암록』살림이 불국사에서 한겨울 내내 뜨거운 열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나는 그때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딴 세상에 사는 것 같았다. 어쩌면 제불회상에 있는 듯 넘쳐오르는 법열로 잠을 덜 자도 피곤하지도 않았고 졸립지도 않았다. 어떻게 하는 도인이 되겠다는 옹골찬 결의로 순식간에 석달을 보냈다.
나중 책이 나오고 보니까 서문은 조실스님께서 친히 붓을 들어 써 주셨고 제호는 당대 명필의 단아하고 묵직한 글씨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선불교의 종문에서 『벽암록』 살림이 불국사에서 최초로 이루어졌던 것은 지효.능가. 광덕 세 분 사형님들이 막역한 우애와 진상스님의 뜨거운 응원, 성호스님의 정성, 설봉 대선사의 안목 때문이었다고 본다.
광덕스님 시봉일기 4 위법망구, 송암지원, 도피안사
첫댓글 20세기 문명사회가 안고 있는 인간의 문제(기아, 질병, 전쟁, 소외 등등)를 선이라는 획기적인 방법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벽암록의 새로운 이해로 강의를 기획하신 큰스님의 혜안을 여기서도 봅니다. 그리고 대한불교 역경원을 만들어 역경사업의 기초를 만드신 일! 등 수많은 한국불교 발전을 위한 혜안들!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렇게 펼쳐놓으신 길 저희들은 묵묵히 따라 가기만 하면 되는 길!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고맙습니다..마하반야바라밀.._()()()_
내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나무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