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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티소(James Tissot). 국적 불명의 이름이다. 성은 프랑스식인데 이름은 영국식이다. ‘자크(Jacques)’라는 이름으로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일찍이 영국식으로 개명했기 때문이다. 그의 행적은 이름만큼이나 혼란스럽다. 호사스럽기 그지없는 사교계의 여인들을 그린 예쁜 그림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말년에는 은둔하듯 숨어 살며 종교화에 매진했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아무런 어려움 없이 화가로 교육을 받았으면서도, 프로이센에 점령당해 모두가 떠나버린 파리에 남아 파리 코뮌에 가담했다. 에드가 드가와 평생토록 친분을 나누었지만, 인상주의와는 거리를 두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임에 틀림없었지만,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연애 스캔들의 여주인공을 사랑했다. 천박한 불륜관계라고 만인의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그는 연인을 어느 누구에게도 숨기지 않고 당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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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화보를 보는 것 같은 당시의 최신 트렌드
티소는 파리코뮌에 참여했던 경력 때문에 1871년 파리를 떠나 런던에 정착한다. 패션 잡지 배니티 페어에 캐리커처를 그려주면서 에디터와 알게 되었고, 그를 통해 티소는 런던의 고급 사교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에꼴 데 보자르에서 전통적인 아카데미식 교육을 받아 세련된 드로잉과 우아한 색채구사에 능했던 티소는 자칫 딱딱할 수 있는 관습적인 양식으로 당시 상류 사회의 이모저모를 대단히 매력적이고 아름답게 담아냈다. 그의 작품에는 화원에서 차를 마시고, 연못가에서 피크닉을 즐기며, 콘서트와 무도회장을 장식하는 세련된 여인들이 등장한다. 여인들이 입고 있는 드레스의 풍성한 주름 장식, 반짝이는 리본, 화려한 레이스와 다채로운 패브릭의 질감을 찬찬히 살펴보면, 마치 오늘날 패션지의 화보를 보는 것처럼 당시의 최신 트렌드를 파악할 수 있다. 티소는 화가이면서 동시에 쉬크한 패션감각을 갖고 있는 스타일리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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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미술가들은 죽은 이후에야 인정을 받았지만, 티소의 경우는 이미 동시대인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고 고가에 그림을 팔았다. 1873년, 영국에 온 지 단 두 해 만에 런던 외곽의 최고급 주택가인 세인트 존스우드에 저택을 구입해, 드가를 비롯한 파리의 동료들로부터 부러움을 살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영국의 보수적인 비평가들은 티소의 작품이 졸부들을 위한 그림이라고 폄하했고, 특히 존 러스킨은 “천박한 사회의 사진을 베껴 그린 그림일 뿐”이라고 비난했다. 한편 프랑스의 미술계에서는 지나치게 영국적으로 변절한 작가였다. 1874년, 최초의 인상주의 전시가 예정된 해, 드가는 간곡한 편지를 보내 프랑스로 되돌아와 함께 전시하며 ‘네 친구들과 프랑스의 화가’가 되어 달라고 권유하기도 했지만, 티소는 인상주의와 함께하지 않았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 양국에서 티소는 대단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중요한 화가’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혼외 관계의 연인을 선택한 용기와 사회적 비난
1876년경부터 티소의 그림에 유난히 예쁘장한 젊은 여인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무도회]의 주인공이기도 한 캐틀린 뉴튼(Kathleen Newton)이다. 그녀의 삶에 대해서는 비교적 최근에서야 자세히 알려졌다. 당시의 영국 사회, 즉 빅토리아 시대의 잣대로는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행실의 여인이었기에 그녀의 가족들이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기 때문이다. 캐틀린은 인도의 동인도회사에서 복무하던 군인 찰스 켈리의 딸로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고, 17세에 인도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던 아이잭 뉴튼과 정략결혼을 위해 인도로 보내졌다. 인도로 향하는 배에서 그녀는 선장 팔리서의 구애를 받았다. 1871년 1월 3일, 결혼 직후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캐틀린은 그 사실을 남편에게 고백했고, 그 자리에서 이혼을 당한다. 신은 믿되 사람은 믿지 않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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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티소 [숨바꼭질] 약 1877년 목판에 유채, 73.4cmx53.9cm, 워싱턴 DC 내셔널 갤러리 |
제임스 티소 [여름] 1878년 캔버스에 유채, 92.1cmx51.4cm, 개인소장 |
팔리서는 캐틀린이 영국으로 되돌아가는 비용을 댔고, 그녀에게 청혼 했지만 거절당했다. 그 해 12월 20일, 뉴튼과의 법률상 이혼이 최종적으로 마무리 되던 날 캐틀린은 팔리서의 딸을 낳았다. 티소가 정확히 언제 어디서 캐틀린을 만났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1876년부터는 티소의 저택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고, 그 해 3월에 낳은 아들은 티소의 자식이라고 알려져 있다. 결국 혼외의 관계에서 아버지가 다른 두 아이를 낳은 것은 오늘 날에도 그렇겠거니와, 당시로서는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었기에, 티소는 사회 생활과 캐틀린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티소는 물론 연인을 선택했다.
[숨바꼭질]은 세인트 존스우드에서 생애 가장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티소와 캐틀린의 저택을 보여준다. 근처에 살던 그녀의 조카들과 아이들이 티소의 집에서 숨바꼭질을 하는 중이다. 어린 술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난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 거리며 바닥을 기어 다니고, 그보다 조금 큰 아이들은 병풍과 의자 뒤에서 머리들을 내민 채 숨죽여 웃고 있다. 거실은 유리 지붕이 덮인 온실을 향해 열려있어 지금 이 방안의 공기는 매우 따스하고 촉촉할 것이다. 고풍스런 가구와 동양풍의 도자기, 잿빛 얼굴의 일본 가면과 사치스런 카펫이 신기하게도 아이들의 천진한 놀이터로 잘 어울린다. 그 한 켠에는 의자에 깊이 파묻혀 무심하게 신문을 읽고 있는 캐틀린이 있다. 짙푸른 벨벳 드레스 위로 떠오른 그녀의 얼굴이 유난히 창백하다. 그녀는 그 즈음 이미 결핵을 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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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티소 [명상하는 여인 혹은 여름 저녁] 19세기경 패널에 유채, 34.9cmx60.3cm, 오르세 미술관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작품 보러가기
장밋빛 뺨을 가진 매력적인 여인 캐틀린은 당시로서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결핵으로 서서히 시들어갔다. 티소가 남긴 그녀의 초상화를 보면 그가 진정 캐틀린이 아름다울 때나, 병으로 고통 받을 때나, 한결같이 아끼고 사랑했음이 느껴진다. [여름]은 티소의 정원에서 금빛 찬란한 햇빛을 받으며 노란색 일본 양산 아래 평화롭게 앉아있는 캐틀린의 모습을 보여준다. 일광욕과 신선한 공기가 결핵을 앓는 그녀에게 내려진 처방이었다. 티소는 그의 정원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낙원이 되도록 아낌없이 노력했고, 캐틀린은 늘 그 자리에 앉아있었지만, 병을 이길 수는 없었다.
아편 과다복용으로 자살한 캐틀린
1882년, 캐틀린은 28세의 젊은 나이에 결국 아편을 과다복용하고 자살한다. 기독교에서 자살은 큰 죄악이다. 따라서 그녀는 교회의 묘지에 묻힐 수 없었다. 티소는 꼬박 나흘 동안 그녀의 관을 지키다, 닷새째 되는 날 화구와 미완성 캔버스 등 집기들을 그대로 버려둔 채, 세인트 존스우드를 떠나 파리로 되돌아갔다. 파리로 돌아온 이후 3년 정도 티소는 여전히 패셔너블한 파리의 사교계 그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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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885년부터는 팔레스타인을 순례하는 등 종교에 전념하며 1902년에 세상을 뜰 때까지 17년 동안 은둔 생활을 하며 예수의 생애와 성경의 내용을 중심으로 한 종교화에 몰두했다. 혹자는 그가 당시 유행하던 신령주의에 경도되어, 죽은 캐틀린의 영과 접속해보고자 수 차례 시도했다고도 한다. 그는 결코 캐틀린을 잃은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여생을 보냈던 것이다.
[야망을 품은 여인]은 [무도회]와 거의 비슷한 구도를 가졌지만, 매우 다른 그림이다. [무도회]의 여인이 맑은 얼굴을 하고 빛나는 황금빛 드레스를 입고 신사의 팔짱을 낀 채 파티장으로 들어가는 중이라면, [야망을 품은 여인]은 무척 아름답고 매혹적인 자태임에 틀림없으나 눈에 띄게 수척하고 눈가에는 짙은 그늘이 졌다. 숨이 막힐 것처럼 파티장을 가득 메운 성장의 신사숙녀들이 그녀를 곁눈질로 바라보며 노골적으로 수군거린다. 색채는 화려하기 그지없고, 아름다운 드레스의 향연이 매혹적인 장소이지만, 티소의 여주인공은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홀로 외롭고 불안을 애써 감추고 있는 듯 보인다.
티소의 그림 속 여인들은 결국 그의 연인 캐틀린 뉴튼의 운명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은 아름답게 장식한 채 무도회를 즐기고, 안온한 화원에서 온화한 대화를 나누는 꽃 같은 존재들이었지만, 결혼할 상대를 선택하거나 이혼을 결정하거나 재산을 소유하거나 정치적 의견을 낼 수 있는 권리, 즉 스스로의 삶을 결정할 권리는 그 어느 것도 소유하지 못했다. 티소의 그림들이 패션 화보와 다른 것은 사치스런 의상이 아니라, 그 딱딱한 코르셋 안에 옥조인 채 예쁘장한 얼굴아래 복잡한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사람’이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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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우정아 /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미술사 석사, 이후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주립대학 (UCLA)에서 현대미술사를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발행일 2011.02.07
이미지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Wikipedia, Yorck Pro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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