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내주 교수의 세계사여행]
식민제국의 해체와 제3세계의 대두
독립의 불꽃 훨훨~ 종전 후 식민제국 붕괴 ‘도미노’
2차 대전 이후 70개 이상의 신생 독립국가 탄생
미·소 중심 냉전체제 벗어나 또 다른 세력 형성

아프리카의 대표적 독재자였던 우간다의 이디 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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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은 경쟁적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으로 진출해 식민지를 차지했다. 그 결과 아프리카의 대부분 지역과 인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지역들은 유럽 열강의 지배하에 놓이게 됐다.
이러한 상황은 제1차 세계대전을 겪고 난 이후에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 단지 패전국 독일의 해외 식민지를 전승국인 영국과 프랑스가 나눠 가졌을 뿐이다. 그 결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시점(1939)에도 제국주의 국가들은 여전히 세계 육지 면적의 28%와 세계 인구의 30%가량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는 1차 대전의 경우와 사뭇 달랐다. 그토록 막강해 보이던 식민제국들이 붕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1947년 인도 독립을 기점으로 아시아에서 불이 붙은 탈식민화는 곧 검은 대륙 아프리카로 비화(飛火)했다.
이후 식민지 독립의 불꽃은 1975년 앙골라와 모잠비크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할 때까지 거의 한 세대 동안 아프리카 대륙을 달구었다. 이러한 민족해방의 물결 속에 2차 대전 후 무려 70개 이상의 신생 독립국가가 탄생했고, 약 6억 명의 인구가 식민지배의 질곡에서 벗어났다.
약 6억 명 식민지배 질곡에서 벗어나
이때 탄생한 국가들은 미·소 중심의 냉전체제에서 벗어나 또 다른 세력을 형성했다. 1950년대에 인도와 중국을 중심으로 결성된 이들 집단을 흔히 ‘제3세계’라 불렀다. 이들이 국제정치 무대에 등장하는 직접적 계기는 1955년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개최된 회의였다. 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29개국이 참가한 이 모임에서는 서방과 소련의 신(新)식민주의를 비판하면서 양극체제하에서 독자적인 제3세계의 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반둥회의 후 인도와 중국 등 핵심 회원국들 간에 대립 국면이 전개되면서 이들의 세력화 시도는 무산됐다.
2차 대전 이후 식민제국을 해체시킨 원동력은 어디에 있었을까? 해체의 핵심 동인이 식민제국의 중심부인 유럽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지 아니면 주변부인 식민지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지에 따라 제3세계 대두를 바라보는 용어에 차이가 있다.
전자의 경우 식민제국의 해체를 ‘탈식민화(decolonization)’라고 부른다. 식민지 획득 초기의 기대와는 달리 세월이 흐르면서 식민지가 식민 종주국에 이익보다는 부담으로 다가왔기에 종주국이 자발적으로 식민지로부터 철수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후자의 경우 식민제국의 해체를 ‘민족해방(national liberation)’으로 본다. 식민 종주국이 식민지 통치에 활용할 의도로 서구식 교육으로 양성한 토착 엘리트들이 민족주의의 세례를 받고 식민지 독립운동으로 전환, 그 세력이 점차 강성해져서 종국에는 식민 종주국을 축출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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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英에 많은 유·무형 이점 제공
지역별로 제국의 해체는 어떻게 전개됐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탈식민화의 양상은 식민지 현지의 민족주의 운동의 성숙도와 식민 종주국의 대응 수위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나타났다. 식민제국의 해체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은 아마도 1947년 인도의 독립일 것이다.
인도는 최대 식민제국이던 영국의 상징적 식민지로서 광대한 영토와 엄청난 인구(4억)로 인해 영국에 많은 유·무형의 이점을 제공했다. 2차 대전 중(1942) 자치를 허용하는 조건으로 인도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으나 완전독립을 요구하는 인도 민족주의자들의 거부로 실패했다.
종전 후 식민지 문제에 전향적인 태도를 보인 노동당이 집권하면서 종교적 갈등으로 인해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시켜 독립을 허용(1947)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스리랑카가 독립하고, 종전 후 공산세력의 준동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말레이시아도 1959년 독립을 달성하고 영연방의 일원이 됐다.
영국의 유연한 대처 방식과는 달리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동남아시아 식민지인들의 독립운동에 강경하게 대응했다. 그 결과 양국은 토착 민족주의자들과 치열한 무력투쟁을 벌여야만 했다.
4년간에 걸친 싸움 끝에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의 독립(1949)을 인정했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상황은 더욱 복잡했다. 종전 직후 군부의 반발로 베트남 식민지인들의 독립 요구를 묵살한 프랑스는 이후 약 7년 동안 호찌민이 이끄는 공산주의 세력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여야 했다.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벌어진 최종 결전에서 중공의 전폭적 지원을 받은 호찌민의 공산세력이 승리하면서 일단락됐다. 참패에 충격을 받은 프랑스는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베트남을 분할 독립시켰다.
독립에 걸림돌 된 ‘아프리카 낙후성’
식민지 해방에서 가장 복잡했던 지역은 아프리카였다. 거의 대부분 지역이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배 상태에 있었다는 점 이외에도 아프리카의 낙후성과 미약한 민족주의 운동이 원활한 독립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하지만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아프리카 대륙에서도 자각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1951년 이탈리아로부터 리비아가 독립한 것이 변화의 신호탄이 됐다.
이후 아프리카 식민지의 해방은 크게 3단계로 전개됐다. 우선 1950년대 말까지는 주로 북아프리카 지역이, 1960년대 초중반에는 서아프리카 지역이, 그리고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동아프리카 지역이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났다.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그런 대로 평화적으로 권력 이양이 이뤄졌으나 영국 식민지였던 케냐와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는 식민 종주국의 군대와 토착 민족주의 세력 간에 길고도 지루한 혈전이 벌어졌다. 종국에는 독립을 쟁취했으나 그 후유증은 컸다.
종전 후 시간적 격차는 있으나 지구상 대부분 지역에서 식민지인들은 독립을 달성했다. 하지만 이들 신생국가의 주민 및 지도자들은 독립 후 국가건설을 진행하면서 이상과 현실 간에 큰 간극이 있음을 곧 깨닫게 됐다. 왜냐하면 특히 아프리카의 경우 토착민들에게는 강고한 부족적 유대만 있었을 뿐 근대적 의미의 국민의식이나 국민국가의 개념이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국경선마저 토착 부족들 간의 구분선보다는 유럽인들의 통치 편의에 따라 그어졌기 때문이다.
독립 후 이러한 구조적 문제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서 대부분의 국가들은 치열한 내전과 냉혹한 독재자의 출현이라는 홍역을 치러야만 했다.
또한 그렇다고 과거 식민제국이 완전히 물러간 것도 아니었다. 정치적으로 독립은 쟁취했으나 경제적·문화적 측면에서는 식민 종주국과의 유대 관계가 더욱 심화되는 이른바 신식민주의(Neo-colonialism) 문제가 대두했다.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Songs From a Secret Gard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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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가든: Songs From a Secret Garden
Secret Garden 1995–present
No.1 - Noctur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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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um Title: Songs From a Secret Garden - Secret Garden
Studio/Live Studio Mono/Stereo Stereo Audio CD (April 16, 1996) Label: Polygram Records / PHILIPS (P) 1995 PolyGram A/S Norway (C) 1996 Philips Classics Marketed in the UK by Philips Class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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