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도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전선戰船(판옥선)과 화포를 충분히 만들어 두어야 한다는 점이오. 오늘날 왜노의 전함이 중국인들과의 교통을 통해 예전보다 아주 견고해지기는 했지만今則與唐人交通造船極牢 예로부터 얇은 판자를 덧붙이고 쇠못질을 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古者倭船以薄板爲之 부수기가 쉽소故破之甚易. 바다 싸움에서 전함이 차지하는 비중은 더 이상 중언부언할 필요조차 없는 것인즉, 전선 한 척을 건조하는 데에 수많은 시간과 재물이 소요되는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 후 부지런히 제작에 열중해야 하오.
적선은 가벼워 속도는 빠르지만 무거운 화포를 싣지 못하오. 그런 까닭에 왜노는 50보에서 100보가 유효 사거리인 조총의 성능에 맞춰 늘 가까이 접근해 총을 쏘고, 우리 전함으로 건너와 백병전으로 승부를 가름하려 드는 게 상술이지요. 우리 전함은 육중하여 얼마든지 무거운 화포를 적재하고 당당히 출전하는데 400보에서 600보에서 충분히 가격할 수 있고, 따라서 적선은 아군에 미처 가까이 다가오지 못한 채 화염에 휩싸이거나 반파되어 휘청거리게 마련이오. 그때 화살을 퍼붓고 전선으로 들이박아 아주 부숴버리면撞破 모조리 물귀신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소. 장쾌한 승리가 우리의 것이란 말이오!”
왜군 전선들이 물속으로 하염없이 가라앉고, 왜노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죽어가는 광경이 눈앞에 선하다. 말을 듣고 있노라니 수령들이 낯빛이 저절로 봄날 복사꽃처럼 피어나고 고개는 저절로 끄덕여진다.
조선 수군의 주력 전함인 판옥선이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36년 전인 을묘왜변(1555년) 때로, 당시 적의 선봉을 보고 모두들 지레 겁을 먹어 후퇴하고 피했지만望見賊鋒先自恇怯退避不進 정걸 홀로 진격해 왜선들을 모두 사로잡았다丁傑獨進力戰全船捕捉.
이 사실을 익히 아는 전라 좌수영 5관 5포의 지휘관들은, 왜선 아다케 安宅船보다 갑판 높이가 낮아 적이 위에서 쏘아대는 조총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던 맹선猛船을 최초로 2층 판옥선板屋船을 개조하고(미주1) 갑판 위에 대포를 장착해 왜적을 장엄하게 쳐부순 역전의 노장 정걸이 승전 경험을 바탕으로 들려주는 생생한 전술전략 앞에서 오직 감화감동할 따름이다.
거기에다가 정걸은,
“이 늙은이가 지금 몹시도 기꺼운 바는 신임 수사 영감이 수전에서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전술전략을 이미 모자람 없이 터득하고 있다는 사실이오. 이제 남은 것은 여러 수령들이 일심으로 협조하여 좌수영의 지휘 체계를 더욱 굳건히 할 과제뿐이니, 더 이상 무엇을 바라리오!”
라는 말까지 해서 수령들의 두 눈들을 휘둥그렇게 만들어 놓은 다음,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전함은 노를 저어야 원하는 방향으로 속도를 맞춰 나아갈 수 있소. 그런 만큼 격군格軍(노 젓는 군사) 확보와 훈련이 매우 중요하오. 2층으로 되어 있는 판옥선은 배의 네 귀퉁이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로 사면을 가려 담장을 치고 마룻대를 얹은 덕분에 격군이 전투 중에 생명을 잃거나 크게 다칠 일은 거의 없다는 장점이 있으니, 그 점을 잘 이해시켜 바닷가 마을 장정들을 대상으로 격군을 모집해서 훈련시켜야 할 것이오. 격군은 키가 작아 전투병으로는 조금 적당하지 않더라도 어깨가 두꺼우면 노를 젓는 데 아주 훌륭하지!
참전 장정들에게는 둔전屯田(군량미 조달을 위한 군대 토지)에서 소출되는 곡물을 그 가족에 배급해 사기를 높이는 것이 좋소. 본래 출중한 용병은 배불리 먹이는 것을 우선으로 삼는 법이고自古善用兵者必以足食爲先, 군사가 있어도 먹을 것이 모자라면 쓸 수가 없는 법이니까食不足雖有兵不可以用之!”
수령들이 얼굴 가득 밝은 웃음을 짓는 것으로 정걸의 가르침에 일제히 반응했다. 그런 후배들을 바라보면서 정걸이 문득 묵중한 음성으로 다짐을 했다.
“거듭 말하지만, 수사 영감은 공부하는 자세가 분명하게 정립되어 있어 아주 믿음이 가오. 오늘 이곳을 찾아온 좌수영의 영웅들 또한 내가 일찍부터 마음으로 응원해온 귀한 인재들이고! 이제 여러분들은 왜노의 도발을 앞둔 만큼 그 어느 때보다도 특히 피를 나눈 형제(미주2)의 의기투합을 이루어야 하오. 그리만 한다면, 왜적을 통쾌하게 물리쳐 나라에 큰 공신으로 기록되고, 백성들의 신망을 한몸에 누리게 되는 날이 머잖아 도래할 것이야. 지금 이 늙은이 앞에서 굳게 맹세할 수 있겠는가?”
이순신은 물론 다른 수령과 장수들이 일제히 직선으로 몸을 곧쳐 세우면서 노장의 물음에 호응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왜노를 격퇴해 사직을 구하고 백성들의 목숨을 보전해야 하는 누란지세累卵之勢(달걀을 포개놓은 듯 위험한 시기)에 어찌 장군의 분부를 따르지 않겠습니까! 일말의 염려도 하지 마소서!”
제장들이 굳세게 다짐을 하는 그 순간, 이순신이 오늘 가장 듣고 싶어했던 말을 정걸이 해주었다.
“후배님들의 간곡하고도 진심어린 청을 어찌 내가 끝까지 사양하겠는가? 자, 좌수영으로 가세!”
마음이 격해진 이순신이 미처 뭐라고 입을 떼기도 전에, 권준과 어영담 등이 이구동성으로 환호를 하였다.
“이제 최고의 수사 영감을 만났고, 거기에다가 송정松亭(정걸) 대장군께서 우리들을 이끌어 주시기로 하셨으니, 앞으로 왜적을 격퇴하는 일은 그리 염려하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그제야 이순신이 수령과 장수들에게 ‘과찬의 말씀들이시오.’하며 겸양을 나타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정걸의 얼굴에 온화한 아버지 느낌의 미소가 번져간다. (계속)
(미주1) 데이비드 로스 외 1인, 〈판옥선〉, 《전함 ‧ 군함 백과사전》(휴먼앤북스, 2018): 조선 전기의 맹선이 일본의 안택선에 상대가 되지 않자 1555년(명종 10) 당시 남도포 만호였던 정걸 장군이 개발했다. 판옥선이란 배 위에 판잣집(판옥)이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선저가 평평하고 흘수선이 낮으며 선회가 빨라 혼전에서 유용했다. 2층 구조로 만들어져 있어, 노를 젓는 군사와 전투를 하는 군사를 나누어 효율적인 전투를 할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주력선으로 사용되었다. 대선, 중선, 소선 등 크게 세 가지 크기로 건조되었다.
(미주2) 이순신은 1592년 10월 11일 〈녹도만호 정운을 이대원의 사당에 배향하기를 청하는 장계請鄭運追配李大源祠狀〉을 올렸다. 이 장계에서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 중에서 권근, 이순신李純信, 어영담, 배흥립, 정운 등은 따로 믿고 의지하는 바가 있어서 같이 죽기를 기약하고 매사를 함께 의논하고 계획을 세웠다.”라고 기술했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왕조실록》 1597년 3월 14일에 ‘원균이 이순신에게元均謂舜臣曰 “너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다汝有五子”라고 하였으니, 그의 분해하고 불평함을 알 수 있습니다其忿惋不平可知."라는 기록이 전한다. 〈대하소설 난중일기〉는 이 대목을 정걸이 전라 좌수사 5관 5포 수령과 장수들에게 이순신과 더불어 형제 같은 우애를 다져야 왜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강조한 것으로 원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