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건 주인공 장편소설 "일장기를 지워라" 1 (개정판, 연재)
“현진건은 ‘참 작가’였다. 한국 근대소설의 기틀을 나름의 소설미학으로 자리매기는 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피압박 민족의 지식인으로서 민족적 양심을 끝까지 지켜나간 몇 안 되는 문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 현길언, 《문학과 사랑과 이데올로기》
“현진건은 식민지 시대 최고의 단편 작가로 종종 불렸다. 그는 한국근대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근대문인으로 먼저 독자들에게 기억된다. 그리고 그는 작품에 비견될 만한 선물을 후세들에게 전해주었으니 그게 바로 자신의 ‘삶’이다. 현진건의 매력은 문학에서만 오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현진건의 삶을 현진건 문학의 원천적인 매력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참 작가’ 현진건을 기리는 마음에서
현진건 주인공 장편소설 "일장기를 지워라"
개정판을 연재합니다.
아래는
2021년 판 '서문'입니다.
현진건은 〈빈처〉, 〈술 권하는 사회〉, 〈운수 좋은 날〉, 〈고향〉, 〈B사감과 러브레터〉, 〈신문지와 철창〉 등의 단편과 〈적도〉, 〈무영탑〉 등의 장편을 남긴 소설가입니다. 그의 창작집 《조선의 얼골》도 많이 알려진 책명이고, 일제가 중단시킨 장편 〈흑치상지〉도 현대의 독자들에게 기억되고 있는 작품명입니다.
현진건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손기정 우승 쾌거를 ‘일장기 말소 의거’로 재점화하여 직접 일제와 싸운 독립유공자이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위원과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을 역임한 그의 형 현정건도 일제에 피체되어 4년 3개월의 옥고를 치른 뒤 고문과 장기간 영어 생활의 후유증으로 끝내 세상을 떠난 독립지사입니다.
현정건의 유명한 정인 현계옥은 유일한 여성 의열단원으로 이름이 높습니다. 또 재종형 현상건은 고종황제의 명을 받아 러시아와 프랑스를 순방하며 대한제국의 중립화를 도모한 후 상해로 망명한 지사입니다.
아버지 현경운은 대구전보사 사장을 지낸 후 대구에서 노동야학교를 열었던 개화기 교육운동가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숙부 현영운은 한 시대를 풍미한 친일파였고, 한때 숙모였던 배정자는 이토 히로부미의 애첩이라는 소문이 돌았을 만큼 이름난 반민족 행위자였습니다.
그의 벗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이상화는 어릴 적부터 같이 뛰어놀며 자랐는데, 나이는 한 살 차이였지만 1943년 4월 25일 같은 날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봄은 고양이로다〉를 쓴 이장희, 《상화와 고월》을 펴낸 백기만, 그와 사돈을 맺은 역사소설가 박종화, 이웃사촌이었던 의열단 부단장 이종암 지사도 있습니다.
이렇듯이, 소설가 현진건의 생애는 매우 소설적입니다. 단순한 소설가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독립운동을 펼쳤고, 집안에 대단한 독립지사와 친일파가 뒤섞여 있다는 점도 그렇습니다. 일장기 말소 의거 이후 일제 탄압으로 《조선의 얼골》이 판매 불가 도서가 되고, 일간신문에 연재소설을 집필하는 일이 강제로 중단되고, 동아일보 사회부장 경력자임에도 언론계 종사가 금지되어 매우 어렵게 지내다가 43세 한창 나이에 가난과 질병으로 타계했다는 사실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유명한 이름과 역사에 기록될 업적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는 현진건을 기릴 수 있는 자취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대구의 생가는 번지가 멸실되어 어디인지도 모르게 되었고, 신혼 살림을 살았던 처가는 불과 몇 년 전에 파괴되었습니다.
서울의 고택 또한 몇 년 전에 사라졌습니다. 생가로 여겨지는 대구 계산동 골목 입구와 서울 집터 앞에 안내판이 하나씩 있는 것, 그리고 대구 두류공원에 ‘현진건 문학비’ 빗돌이 전부입니다. 물론 기념관도 문학관도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정신사가 의심스럽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선생을 기리는 일은 후대를 사는 사람의 도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뜻에서, 선생의 삶을 이야기하는 장편소설 《일장기를 지워라》를 펴냅니다. 또 선생의 주요 단편을 21세기 버전으로 재창작한 《조선의 얼골 ‧ 한국의 얼굴》과, 평전 겸 문학세계 해설서 《현진건, 100년의 오해》도 펴냅니다.
부족한 3종 5권의 책이 불씨로 타올라 선생의 가르침을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뜨거운 꽃 한 송이로 피워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앞으로는 더 이상 ‘술 권하는 사회’가 아니라, 정신적 물질적으로 황폐한 ‘고향’이 아니라, 날마다 ‘운수 좋은 날’이 우리 모두에게 펼쳐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정만진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