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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의 첫 대패배 - 수동 전투
1950년 10월 압록강을 은밀하게 건너와서 매복했던 중공군은
군우리와 운산등의 초전에서 대 승리를 거두었다.
멋모르고 무작정 북상하던 유엔군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매복과
기습, 그리고 차단 전술을 유동적으로 구사하는 중공군에게
큰 피해를 입고 남쪽으로 긴 후퇴를 해야 했다.
세계 최강군을 격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중공군은
기세를 드높이며 추격을 해서 서울까지도 재점령했다
그러나 화려한 한국전 참전 개막의 팡파레 속에서
모택동 정부가 중국인민들이 알까봐 쉬쉬하며 감춘
창피스러운 대패배의 전투가 중공군이 참전한지
단 2주 뒤에 있었다.
서부전선의 초전에서 8군 산하 미군들과 유엔군들이 중공군의
매복 기습에 큰 타격을 입은 반면 동부 전선에서 있었던
미군과 중공군의 첫 대결에서 중공군의 한개 사단이
미 해병대에게 거덜 날 만큼의 대패를 당했었다.
철수중 콜세어기가 전방의 중공군에게 가하는 네이팜
공격을 지켜보는 해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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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투는 미 해병대가 흥남과 장진호 중간에 자리한 수동[리]
마을 남쪽 언덕에서 중공군을 격멸했던 전투로서
장진호 탈출의 혈전들에 가려져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미군이 중공군과의 초전에 이를 박멸했다는 점에서
이 전투는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전투이다.
1 해병사단은 10월 중순, 사단이 배속되었던 미 10군단장
아몬드 중장이 먕형 했던 대로 장진호를 따라 서진하여
서쪽 평안도 쪽에서 북진하는 미 8군과 같이 합류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아몬드 중장 - 불같은 성미가 그의 카운터 파트너 송 시륜과
비슷하다. 한국 전쟁중 공과 과가 같이 있는 작전 지휘를
했는데 장진호 전역에서는 해병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군을 좁은 길로 몰아넣고 무턱된 진격을 독려하여
후세의 비난을 많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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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는 해병 사단장 스미스 소장에게 리첸버그의 7연대를
해병 1사단을 선도해서 장진호로 먼저 향하도록 지시했다.
리첸버그는 해병대의 또 다른 연대장 풀러 대령
[과달카날 전투에서 대대장을 한 사람으로 해병대의 전설이다.
장진호 전투에서는 후위연대였기 때문에 큰 전투를
하지는 않았다.]처럼 나이는 들었지만
‘나의 진정한 부하 해병은 단지 퍼플 하트
[purple heart-상이기장]를 받은 해병뿐이다’라고 하는 진짜
해병대 기질이 넘쳐흐르던 사람이었다.
10월 31일 아침 7연대는 좁고 먼지 나는 구불구불한
오르막길을 걸어 북쪽 산길로 접어들었다.
도로를 따라 물이 거의 마르고 바위투성이인 개천이 뻗어 있었다.
주변은 해발 1,000피트에서 1,500 피트의 산들이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그들 앞에는 거대한 중공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군이 장진호반을 따라 서진해서
평안북도에서 북진중인 미 8군과
합류하리라고 미리 내다 본
모 택동은 이 시도를 분쇄하고자
송 시륜 휘하 6 만 병력의 병력을
장진호에 투입했다.
송 시륜 - 대장정시 20대 나이로 연대장을 했다.
아몬드 중장과 같이 만용스러운 저돌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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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은 이 장진호 전투에 과대 개입을 해서 6병단이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는 결과에 한몫을 했다.
모택동은 다음해 봄 중공군의 춘계공세 때도 이 짓을
되풀이해서 전 부대가 붕괴 일보직전까지 가게
하는 큰 피해를 입게 했다.
국가 지도자가 과다하게 전투에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이 점, 2600년 전의 손자가 지적했다-
히틀러나 모 택동, 사담 후세인 같은 독재자들은
시시콜콜한 일선 작전에 참견하기를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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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연대가 1사단의 앞장을 선 것과 같이 6병단의 선도를
위 우이린이 지휘하는 42군이 했었다
군 휘하에 124사, 125사,126사등이 있었다.
중공군 42군 사령 위 루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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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42군은 1950년 10월 16일 만포진 건너 중국 땅에서
압록강을 건너 북한 쪽으로 왔다.
도하 후 부대를 정렬한 중공군들은 한국 참전 중공군이 다
그리했듯 도보로 강계를 지나 장진호 호반에 위치한 작은 동네인
유담리로 쪽으로 왔다.
유담리는 한 달 뒤 미 해병의 2개 연대가 장진호
최북단까지 전진했던 동네로서 이 일대에서 포위한 중공군과
탈출하려던 미 해병대 간에 치열한 전투가 있어서
역사에 그 이름이 자주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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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으로 기다란 장진호를 왼쪽으로 보며 덕동 고개[이 고개에서
미 해병 F 중대가 치러 낸 엄청난 전투 기록은 조만간 소개한다.]
역시 나중에 유명해진 장진호의 꼬리 지역에 있는
하갈우리로 들어왔다.
하갈우리는 그 산골에서 보기 힘든 제법 넒은 개활지였다.
나중에 미 1 해병 사단 사령부가 자리 잡고 철수 작전을
총지휘했었다.
이곳에 급조된 야전 비행장이 철수 작전에 큰 역할을 했다.
미 해병 1 사단의 대 탈주 - 진흥리 밑의 수동리를 다시
통과해서 흥남으로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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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갈우리 남쪽 길로 계속 남진했던 42군 전위 부대는 10월 25일,
이 계곡을 따라 장진 호 쪽으로 북진했던 한국군 3사단
26연대[연대장 :이 치업 대령]를 기습해서 큰 피해를 입혔다.
피해를 입고 철수하고 있던 한국군을 추격하던 중공군은
진격해오던 미 해병 1사단 전위 7연대 병력과 조우했다.
해병 1 사단 7연대 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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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격돌은 북한군 패잔병이 주동을 한 야습으로서
구불구불한 오르막길을 따라 장진호로 가는 초입에 들어와서
야영을 하던 해병 7연대 1대대를 기습하는 것으로 시작했으나
이 전투에서 공산군은 격퇴 되었다.
이 날 밤 획득한 포로로부터 중공군 대부대가 참전한 것을
알게 된 해병들은 극히 주의를 하며 전진했다.
수동 전투의 개전 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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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수동 전투에 참전했던 한 미군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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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1월 2일 날씨는 맑고 온화했다.
해병 1 사단의 전위인 해병 7연대는 도보로 장진호로 가는
수동 계곡에 들어섰다.
수동 계곡은 수동리 마을에서 함흥 쪽으로
2킬로 정도 남쪽에 있다.
그들은 남쪽으로 도주해오는 한국군들과 조우하였다.
후퇴하는 한국군들은 겁먹은 표정으로 북쪽을 가리키며
중국 놈들! 중국 놈들! 하고 말했다.
중공군이 패주하는 한국군을 추격해올 것이
확실해 보였기 때문에 선두 중대장은 전방의 중공군이 선점하고
있을 698고지를 점령하도록 명령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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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내내 접적할 때는 주변 고지부터 선점하는 것이
기본 전술로 되어있었다.
백 선엽 장군의 회고록을 보면 다부 동 전투가 시작 전에도
다부동 일대 고지부터 점령했던 작전 전개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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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상당히 고도가 높은 이 고원에서 698고지야 별로
높아 보이지 않은 언덕 같은 곳이지만 대단히 가파른
급경사로 이루어졌다.
해병들이 고지를 공격하자 아니라 다를까 고지에 먼저와서
점령했던 중공군은 기관총을 동원해서 반격했다.
산의 급경사는 공격을 극히 힘들게 만들었다.
해병의 공격은 하루를 다 보내고 이른 저녁까지도 계속되었다.
중대에 사상자가 급증했다.
탄약도 바닥이 나기 시작했다.
황혼이 내리기 시작했을 때 해병이 할 것은 두 가지 방법뿐이었다.
철수하던가 교체하던가 하는 것이었다.
사상자 속출로 이미 전력이 밑바닥까지 왔던 D중대는 후방으로
철수하고 아직 싱싱한 병력인 E중대가 D중대를 교체했다.
D 중대는 전사자와 부상자를 이끌고 산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급경사진 산을 내려오는 것은 오르는 것만큼이나 힘들었다.
부대원들은 걷기보다 미끄럼 타기로 하산했다.
중대는 전원 산 아래 도로가에 도착해서 부상자와 전사자
후송을 하고 근처 과수원에 적의 기습을 대비한 호를 파고
밤을 보냈다.
우리는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야간은 아무런 상황 없이 지나갔다.
아침이 되었다 .
대대 정보 장교는 우리가 교전한 고지의 적이 북한군이 아니라
한국전에 개입한 중공군이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우리가 짐작 한 대로였다.
다음날 11월 3일 아침은 너무 빨리 왔다..
우리는 차디찬 C 레이션을 까 먹고 장비를 걸친 뒤 도로
양쪽으로 산개한 이열 종대로 북쪽을 향하여 행진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전방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된
7연대 1대대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행진을 시작해서 50미터도 가기 전에 앞 북동쪽 산에서
기관총의 집중 사격이 쏟아져 내려왔다.
해병들은 모두 길가 도랑으로 뛰어 들어 적의 사격을 피했다.
중대장 헐 대위는 우리에게 도로의 서쪽 언덕을 넘어서
계속 전진하라고 지시했다.
적의 화력으로부터 엄폐된 도로 서쪽 언덕을 넘어서서 행진은
2킬로 정도 적의 저항 없이 계속되었다.
우리는 언덕의 반대편 사면을 내려와 다시 도로에서
진격을 계속하였다.
도로에 올라서서 행진한지 수분도 안 되어 개울 건너
정동쪽의 산에 수많은 중공군들이 붙어있는 것을 보았다.
중대장 헐 대위는 공중 지원을 먼저 요청하고 이어 후속하는
포병대대에 화력 지원도 요청했다.
도로에 기관총이 거치되고 우리 중대는 기관총 엄호아래
개울을 건너 공격을 개시했다.
우리의 공격은 화력지원을 받아가며 신중하게 진행되었다.
저녁 땅거미가 지기 전 우리 중대는 목표를 점령했다.
중대는 밤이 되면 꼭 올 것이라고 생각한 적의 공격에
대비해서 참호를 팠다.
수동 전투 한달 뒤 고토리에서 수동쪽으로 철수하는 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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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에 들어앉은 우리는 달빛 아래에 공습을 받아 네이팜에
시커멓게 타서 여기저기 널 부러진 적의 시체는 보기에도 끔찍했다.
중대가 공격을 개시할 때 중공군들이 들어앉아서 저항하던
참호에는 검게 탄 중공군의 시체가 그득했다.
다음날 11월 4일 새벽 중공군의 치열한 박격포 사격과
함께 대병력으로 공격해왔다.
그들은 해병의 주저항선을 뚫고 쏟아져 들어왔다.
중대장 헐 대위는 산꼭대기로 잠시 후퇴하였다.
해병들이 정신없이 수류탄과 기관총을 휘둘러서 그들을 물리쳤다.
한 기관총 사수는 철수 명령을 듣지도 못해 기관총을 휘두르며
쇄도하는 중공군을 수없이 쓰러뜨렸다.
그러나 기관총이 잠시 작동불량이 되자 한 중공군이 기어 올라와
기관총 양각대의 다리를 잡고 늘어졌다.
두 사람은 서로 안 빼앗기려고 해병은 기관총 손잡이를
잡아 다녔고 중공군은 양각대 다리를 잡아 다녔다.
이 줄다리기 같은 쟁탈전은 기관총 사수가 허리의 권총을
빼서 중공군을 쏴 죽이자 끝장이 났다.
중공군 동료들이 떼거리로 달려들자 그는 고장 난 기관총을
버리고 부대가 피신한 산꼭대기로 줄달음쳐서 위기에서 벗어났다.
3일 밤의 야간 전투와 다음 4일 주간 전투에서 우리 7연대는
중공군 124사단의 적병 696명을 사살했다.
나중에 얻은 정보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죽은 124사 소속
중공군만 3,000명이 넘었다.
승리한 7연대 3대대는 1대대와 2대대를 추월하여 장진호
방향으로 진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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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 지역의 전투는 3일 더 계속되어 11월 7일 상황이 끝났다.
이틀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리첸버그의 연대는 적 124사단을
완전히 궤멸 시켰다.
이 전투로 대 타격을 입은 적 124사단은 다시는 한국 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수동에서 전사한 중공군 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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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첸버그는“나의 진정한 부하 해병은 단지 퍼를 하트
[purple heart-상이 기장]를 받은 해병뿐이다.”라고 말하던
진짜 해병대 기질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중공군의 참전을 알고 첫 대결에서 적에게 최대의
패배를 안겨 주자고 결심했었다.
과연 그의 계획대로 첫 대결에서 중공군은 문자 그대로
궤멸되어서 편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없어 후방으로 철수하고
이 사단은 한 반도에 영원히 나타나지 않았다.
미 해병과의 첫 대결에서 치욕적인 대패를 한 6병단장
송 시륜은 치를 떨었다.
성질 과격한 성질의 그는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시킨 미 해병을
서전에서 박살 낼 야심에 넘쳤었는데 그만 대패를 해서 스타일을
형편없이 구기게 되었다.
이 굴욕감에 부채질 한 것은 서부 전선에서 싸웠던 그의 동료들이
미 8군과 한국군에 연타를 안겨주는 승전고 소리였다.
뒤에서 자꾸 엉뚱한 부채질을 해서 전황을 엉망으로 만든
모택동과 함께 그는 수동 전투 후 장진호 지역에 들어온
1해병사단을 몇 겹으로 포위해서 섬멸시키려는 야심에 불탔었다.
그래서 그는 뼈까지 얼어붙은 날씨에 휘하 병사들을 무자비하게
몰아부쳤음에도 미 해병대를 섬멸하기는커녕 되려 해병대에게
심하게 두들겨 맞고 동장군이라는 제 3의 적에게도 엄습당해
살아남은 부하들 조차 거의 동상 환자로 만들어 놓았다.
해병들이 결사의 의지로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탈출한 뒤에
송 시륜은 대다수가 죽고 병신이 된 이 부대를 더 이상 전선에
내 몰 수가 없어서 함흥 평야에 주둔하면서 그해 오월 춘계
공세 때 까지 치료와 재정비에만 몰두해야 했다..
모 택동의 참견에 송 시륜의 앙심 섞인 명예 회복심이 9병단을
초상집과 환자 집단으로 만든 것이다.
리첸버그의 7 연대는 최 전방의 유담리까지 진격했다가
포위되었으나 무사히 탈출해서 다른 1사단의 부대들과 함께
길고 긴 후퇴를 감행, 드디어 12월 14일 무사히 포위망을
탈출하고 흥남으로 철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