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보다 무서운 복중(伏中) 손님
김 국 자
며칠 동안 기온이 35도를 넘나드는 폭염이 이어졌다. 삼복더위라지만 이렇게 푹푹 찌는 더위는 처음인 것 같다. 냉수에 얼음을 동동 띄워 벌컥벌컥 마셔보아도 시원한 걸 모르겠다. 날이 저물면 좀 서늘해지려니 기대했지만 열대야현상으로 밤잠까지 설쳤다. 이렇게 더운 여름이면 어머니 생각이 난다. 내 고향은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대천이다. 평소에는 자주 왕래하지 않던 친척들이 여름만 되면 우리 집으로 피서를 왔다. 아이들은 방학이라며 해수욕하러 오고, 어른들은 모래찜질 한다고 오고 어지간히 손님들이 꼬였다.
어머니 고생하는 건 아랑곳없이 여러 날 묵어가는 친척들, 여름 내내 손님 치다꺼리에 쉴 틈 없는 어머니 등에는 땀띠가 가라앉을 겨를이 없었다. 삼시 세 때 불을 때서 밥을 해대던 시절, 어머니는 여름 돌아오는 게 겁난다고 하셨다. ‘호랑이보다 무서운 건 복중(伏中)에 찾아오는 손님이라’고.
어머니 말씀처럼 우리 집에도 호랑이보다 무서운 복중 손님들이 도착했다. 방학을 맞은 손자들이다.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손자들이지만, 꼬마손님은 어른보다 몇 곱절 신경이 쓰이게 마련이다. 먹이고 재우고 놀아주고 일일이 씻겨 주어야한다. 다섯 살 여덟 살 철부지들이라 아무리 주의를 주어도 복도에서 큰 소리로 떠들고 뛰어다닌다. 이웃집 모두 연로한 어르신들이라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이웃 눈치 보지 않으려면 야외로 나가는 게 상책이다. 그래서 아이들과 지낼 계획표를 짜 놓았다. 첫날은 동숭동에 있는 마로니에 공원에 데리고 가고, 다음 날은 발바닥공원에 가서 놀고, 그 다음 날은 무수골 계곡에 가서 물놀이하기로 정해 놓았다.
산에 가는 날, 손자들이 좋아하는 할머니표 김밥을 말아놓고 과자와 과일, 음료수를 넉넉히 준비했다. 물놀이 하다가 적시면 갈아입힐 여벌옷도 챙기고 비상용 약품으로 물파스와 피부연고까지 챙겼다. 자주 다니던 길이라 아이들이 룰룰 랄라 신나게 앞장섰다. 원통사 아래 무수골에 계곡이 있다. 가재와 송사리 떼들이 보일 만큼 물이 맑다. 유유히 헤엄치는 송사리 떼를 보고 개구쟁이들이 그냥 있을 리 만무하다.
맨발로 뛰어 들어가 돌멩이를 들었다 놓았다하며 텀버덩거리더니 두 녀석 옷이 금세 젖어버렸다. “할머니! 옷이 젖었는데 어떡해요?” 큰 손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걱정 말고 실컷 놀아!” 할머니의 선심에 “와! 신난다!” 하며 마음대로 물속을 휘젓고 다녔다.
물속을 휘젓고 다니던 녀석들이 환성을 질러댔다. 두 손바닥을 맞붙여 오그린 채 엉거주춤 서있는 큰 손자가 송사리 담을 그릇을 달라고 재촉했다. 무슨 재주로 잡았는지 송사리 한 마리가 손바닥 위에서 팔딱거렸다. 과일 담았던 봉지에 물을 부어주었더니 엄마아빠 보여줘야 한다고 송사리봉투를 서로 들겠다고 다투었다. 멀쩡하던 아이들 얼굴에 빨간 반점이 보였다. 송사리 잡는데 정신이 팔려가지고 모기가 무는 것도 몰랐던 모양이다. 내 자식들 같으면 그까짓 모기 물린 것쯤 걱정도 아니련만 ‘애 본 공은 없다.’고 은근히 걱정되었다.
더 놀다 가겠다는 아이들을 달래어 내려오는 길이었다. 울퉁불퉁 바위 길을 내려오는데, 송사리봉지 들고 앞장섰던 작은 녀석이 넘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아이를 일으켜 세우는 순간 너무 놀랐다. 이마에서 피가 흐르며 순식간에 얼굴과 옷이 피투성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마를 손으로 막으며 “도와주세요! 빨리요! 빨리!” 다급한 소리에 등산객들이 뛰어왔다. “쑥 좀 뜯어다 주세요.” 부탁했다. 그들이 뜯어온 쑥을 비벼가지고 출혈 점을 지그시 눌러주었더니 금방 피가 멎었다. 지혈은 되었지만 ‘몇 바늘이나 꿰매야 하나? 아들 며느리를 무슨 낯으로 보나?’ 불안했다. 응급실에 데리고 갈 요량으로 부랴부랴 내려오다가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그렇게 많은 피가 어떻게 흘렀을까? 의심할 정도로 흠집이 아주 작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제 아빠엄마에게 보고하느라 바쁜 녀석들. 서로 수화기를 주고받으며 수선을 피우더니 “엄마가 할머니 바꾸래요.”하며 수화기를 건네주었다. “어머니, 많이 놀라셨지요?” 며느리와 통화를 마치고 비로소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얼마나 애를 태웠던지 무덥던 더위가 달아나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