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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장 주석
누가복음의 서문 (누가복음 1:1-4)
찬사의 서언과 헌사, 아첨하는 말씨, 그리고 자만심에 양식과 연료가 되는 말은 응당 지혜롭고 선한 자들에게는 정죄를 받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유용하고 교훈적인 말까지 헐뜯어야 된다는 뜻은 아니다.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이 경우이다. 성 누가는 그의 복음을 자기의 친구 데오빌로에게 보낸다. 비록 데오빌로가 높은 직위의 사람이었으나, 그를 자기의 "후원자"로서가 아니라 복음을 배우고 지켜야 할 자기의 한 "생도"로서의 데오빌로에게 헌사한 것이다.
"하나님의 친구"란 이름을 가진 이 데로립로가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떤 사람은 그 이름이 어느 특정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하몬드(Hammond) 박사는 어떤 고대의 글을 인용하여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는 그리스도 복음과 또 그 복음의 계획과 의도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를 하나님께 이끌려는 것이다.
그러나 데오빌로란 인물은 어떤 정치인을 가리키는 특정인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누가가 그에게 붙여 준 호칭은 바울이 총독인 "베스도"에게 주었던 호칭kra,tirte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행 26:25). 그것을 사도 행전에서는 "가장 고귀한 베스도"라고 번역하였고, 여기에서는 "가장 훌륭한 데오빌로"라고 번역했다(한글 성경은 모두 "각하"라고 함-역주). 종교는 아름다운 예절을 파괴하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들의 국가의 관습에 따라서 "영광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에게 영광을 부여하라"고 가르쳐 준다.
이제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자.
Ⅰ. 왜 누가는 이 복음서를 썼는가? 그는 이 복음서를 "쓰도록"하는 것뿐만 아니라 저술하는 "중에도" 성령에 의해 감동되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그는 이성적인 피조물로서 감동 받은 것이지 단순한 기계처럼 움직여진 것은 아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었다.
1. 그가 기록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 중에 가장 분명히 믿어져 왔던"(우리 성경에는 "우리 중에서 일어났던" -역주) 것이 무엇인가, 따라서 그들이 무엇을 믿는지 알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할 것, 그리고 후손들에게 꼭 전해 주어야 할 것(후손들도 우리 이상으로 거기에 관심이 많다)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는 저술을 하는 수밖에 없었으니, 저술이야말로 후대들에게 지식을 전달해 주는 가장 분명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누가는 "회의적인 논쟁," 즉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의견을 달리하고 해결을 지을 수 없는 그런 문제들을 쓰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확실히 믿던" 바요, 또 확실히 믿어야 될 것들, 즉 pra,gmata peplrhoforhme,na 즉 실행된 것들을 기록하려 했다. 그런 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실행했던 바요, 그리고 그 사건들이 실제적으로 일어났던 주위 환경으로서 영원히 신빙성이 있는 것만을 기록했다. 우리들의 신조의 조항들이 긴 시간을 두고 "가장 확실히 믿어져 왔던"것이라는 사실이 우리의 신앙의 기초는 아니라 하더라고 그 기초를 튼튼히 해주는 도움을 주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수천의 가장 현명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가장 위대한 확신과 만족감을 가지고 "자기들의 영혼들을 걸고 모험해 왔던 것이다."
2. 그것들을 "차례대로" 써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즉 그리스도의 생애의 역사는 보다 신빙성 있게 전달되기 위하여서는 "순서 있게 되어야" 하고, 기록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건들이 "차례대로" 정리되어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그것들을"어디서 "발견해 내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그것들을 어떻게 간수할 수 있을지 그 방법을 그만큼 더 잘 알게 되는 법이다.
3.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해설을 "저술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선의에서 우러나와 그런 일을 했으며, 훌륭히 "구성"을 했고 "훌륭히" 수행했으며, 또한 그들이 저술한 바는 "선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지 못했고, 또한 흡족하게 되지도 못했거니와 영원한 미래를 위해 저술된 것이 아니란 사실을 감안했다.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타인들의 작업이 ─ 만일 충실하고 정직하다면 ─ 비록 많은 결함 때문에 책망을 들어야 할지라도, 그것을 "무시"할 것이 아니라 "찬사"를 보내고 "격려해야"함이 마땅하다.
(2) 타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봉사는 우리들의 봉사를 대신하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을 보고 용기를 얻어 우리도 그런 봉사를 해야 하는 법이다.
4. 누가는 자기가 기록해야 했던 사실들의 진실성은 그 사실들에 대한 정확한 증인들의 "공통된 증언"에 대해 "확증"된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즉 그것은 이미 저술되었고, 이제 누가가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와 일꾼들"이었던 자들에 의해서 몇 번이고 되풀이되어 구전(口傳)으로 설명되어 왔던 것과 일치하게 기록하려는 것이다(2절).
다음 사실들을 명심해 두자.
(1)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의 일꾼들(ministers)"이다. 또 그리스도가 바로 "그 말씀이다"(라고 혹자는 이해한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일꾼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 말씀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으로 봉사했다(요일 1:1). 그들은 교사가 되기 위해 복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일꾼으로서 전파하기 위해 복음을 가진 것이다.
(2) 그 말씀의 일꾼들은 그들이 전파하는 것의 "목격자"들이요, 또한 귀로들은 증인들(ear-winesses)이기도 하다. 그들 자신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듣고," 그의 기적을 "보았다." 그들은 그 사실들을 소문이나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보았고, 들었던" 사실들을 지극히 큰 확신으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행 4:20).
(3)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처음부터" 그러했었다(2절). 그리스도는 그의 첫 번째 기적을 행할 때에도 제자들과 같이 계셨다(요 2:11). 제자들은 "그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하실 때 늘 그를 따랐다(행 1:21).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신앙을 튼튼하게 하기에 충분한 모든 사실을 보고 들었을 뿐 아니라, 만일 그 신앙에 충격을 주는 어떤 사건이 있었다 하여도 신앙을 밝혀낼 수 있는 기회를 소유했다.
(4) 우리가 "오늘날"까지도 소유하고 있는 이 "기록된" 복음은 교회의 "첫 날에" 선포되었던 복음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5) 누가 그 자신은 그가 쓴 "것을 처음부터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3절. 한글 성경과 다수 다름-역주). 혹자는, 이 복음서는 누가 이전에 기록해왔던 사람들을 암암리에 반영해 주고 있다고 한다. 즉 그들은 그들이 쓰고 있는 것에 대해 "완전히 이해"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 주소서"(facit indingnatio versum(즉 나의 격노가 나의 붓을 몰아쳤다)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반영해 주는 것이라기보다는 단지 이 사명을 위한 누가 자신의 능력을 주장한다고 보는 게 좋겠다. "모든 것들의 정확한 지식"을a;nwqen ─즉 위로부터(이 말을 흠정역과 한글 새 번역 등은 "처음부터"의 뜻으로, 한글 개혁은 "근원부터"라고 풀이했음-역주) 획득하는 것이 "내게 좋은 줄 알았도다"는 뜻이리라. 내 생각으로는 그렇게 번역해야 될 것 같다. 왜냐하면 누가가 a;nwqen 이란 단어로 "처음부터"(2절에 나옴)란 뜻을 나타내고자 했다면 같은 단어를 썼을 것이기 때문이다.
[1] 그는 이 모든 일들을 "자세히 살폈고"(또 문자 그대로의 의미처럼) "추척했다." 마치 구약의 예언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폈던"것과 같다(벧전 1:10). 그는 그 이전에 저술해 왔던 다른 사람들처럼, 사실들을 용이하게 또 피상적으로 수집하지 않고, 관심 있는 특정 인물에게 그 자신을 알리는 것을 그의 사업으로 삼았다.
[2]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랬듯이 전승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계시에 의해서 그 전승을 굳게 다지고 그것을 기록함에 있어서 어떠한 실수나 착오가 생기지 않도록 했다. 그는 지식을(문자적 의미대로) "위로부터" 찾았고 거기서부터 그것을 얻었다. 그리하여 엘리후처럼,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그의 지식을 가져왔다." 그는 그의 역사서를 모세가 기록하듯이 전승으로 "보고된" 것을 썼으나, 영감에 의해서 "확증된" 것만을 썼다.
[3] 그러므로 누가는 이 모든 사건들을 자기가 "완벽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한글 개역에는 나타나 있지 않음-역주). 즉 그는 그 사건들을 avkribw/j 자세하고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위로부터 이 사실을 받았으니 그것을 전해 주는 것이 좋은 줄을 알았노라." 왜냐하면 이러한 재능을 묻어 두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Ⅱ. 왜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이 복음서를 보냈는가? "내가 당신에게 차례대로 이것들을 적어보냄은 당신으로부터 나의 저술에 대한 칭송을 얻고자 함이 아니라, 이 복음서로 당신이 교화되게 하고자 함이니라. 즉 이는 당신으로 그 배운 바가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4절).
1. 이것은, 그가 세례 받기 전에는 그 후에, 혹은 그 전후에 규율에 따라 이러한 일들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마 28:19, 20). 아마도 누가는 그에게 세례를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훌륭히 가르침을 받았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peri. w=n kathch,qhj ─즉 그대가 교리 가르침을 받은 것에 관해서 잘 알고 있었다(문자적 의미는 그렇다). 가장 지력(知力)있는 기독교인들도 신앙 문답을 배움으로부터 시작된다.
데오빌로는 사회적으로 높은 가문이나 귀인이었다. 그런 자들이 젊었을 때부터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가르쳐 주는 수고를 많이하면 많이 할수록, 그들은 세상의 높은 지위에 있을 때에도 유혹에 대해 강한 무장을 하게 되고, 기회 있는 대로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게 되는 법이다.
2. 데오빌로로 "그 일들의 확실성을 알고," 좀 더 뚜렷이 이해하고 더욱 더 확실하게 믿게 하려는 것이 그 의도였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확실성"이 있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다 확실성을 수립할 수 있다. 또 젊었을 때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 훌륭히 가르침을 받아왔던 사람들은 나중에 그 사건들의 "확실성을 알기 위하여," 즉 우리가 믿고 있는 내용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왜 믿는지를 알기 위하여 부지런히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그래야 우리는 "우리들 속에 있는 희망의 이유"를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세례 요한의 출생 통고 (누가복음 1:5-25)
누가복음 앞에 있는 두 복음서 기자들은 다같이 요한의 세례와 그의 사역으로 복음서를 시작하고 있다. 요한의 사역은 우리 구주의 공생에 보다 6개월 전에 시작된다(그러나 이때는 위기가 다가오고 있으므로, 이전에는 "짧은"기간이었던 6개월이 당시는 "긴" 시간이었다). 그러므로 이 복음서 기자는 이제까지 있었던 구세주의 잉태와 탄생에 대한 기사보다도 더욱 자세한 설명을 하려는 구상을 하면서, 잉태에 있어서나 탄생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선구자요, 선주자인 동시에 의(義)의 태양을 위한 샛별인 세례요한의 이야기부터 기록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복음서 기자가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나중에 가서 위인들로 입증된 사람들의 출생과 초기 생활에 대한 것을 다소 알아야 만족하는 것이 일반의 경향이기 때문에서일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기적적인 사건들이 있었고, 나중에 가서 알려진 사건들의 전조들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대목에서 영감을 받은 이 역사가(누가)는 세례 요한의 잉태라는 아주 초창기부터 시작한다.
이제 다음과 같은 것을 관찰해 보자.
Ⅰ. 그의 부모에 관한 설명(5절)을 보자. 그들은 "헤롯 왕 당시에"살았는데, 헤롯은 외국인이었으며, 나중에 유대나라를 로마 제국의 한 부속 지역으로 만들어 버린 로마 제국의 대리인이었다. 이것은 홀(왕권)이 유다를 완전히 떠났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야곱의 하여금 예언(창 49:10)에 의하여 실로가 오실 때가 된 것임을 말해 준다. 다윗 왕의 가문은 몰락되었으나 이제 메시야에게서 다시 일어나고, 번성할 때가 되었다. 비록 정치적 자유가 완전히 상실된 때라도, 종교의 번영과 부흥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이스라엘은 노예가 되었지만, 바로 그 때에 이스라엘의 영광이 다가오고 있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는 "사가랴"라고 이름하는 아론의 아들이며 제사장이었다. 이 세상의 어떤 가문도 아론과 다윗의 가문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영예를 받는 가문은 없다. 한 가문에는 왕권에 대한 계약이 주어졌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그러한 영예를 엎어버리고 말았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후세에 복음이 다시 영예를 주고 있다. 즉 세례 요한에게서 아론의 집안에, 그리스도에게서 다윗의 집안에 영예가 부여된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는 그것들이 모두 소멸되고 사라졌다.
그리스도는 다윗가의 출신이요, 그의 선구자는 아론가의 출신이었다. 왜냐하면 요한의 제사장직인 기능과 힘이 그리스도의 왕 적 권위나 직위에 이르는 길을 닦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 사가랴는 "아비아 반열"의 한 사람이었다. 다윗 당시에 아론의 가게는 여럿이었으나 다윗은 그들의 직무를 보다 더 질서정연하게 수행하기 위하여 그들을 24 반열로 나누었다. 그래서 그 직무는 일손이 모자라서 "소홀히 되는"일이 없었고, 소수인에 의해 "독점될"수도 없었다. 그들 중 제 8조가 "아비아" 반열이었는데(대상 24:10), 아비아는 아론의 맏아들인 엘르아살의 후손이었다. 그러나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제사장 집안의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서 결손 되었으므로, 다시 돌아온 후로는 다른 집안의 사람들을 택하여 각 반열의 두령의 이름을 붙여 주었다고 보고 있다.
사가랴의 아내 역시 아론의 딸 중에 한 사람이며, 그녀의 이름은 "엘리사벳"인데, 바로 엘리사벳이라는 그 이름이 아론의 아내 "엘리세베"와 같은 이름이다(출 6:23). 조세푸스(Josephos)는 말하기를, 제사장들은 자기들의 집안 내에서만 결혼하는 데 철저했으므로, 그들은 제사장직의 품위를 계속 유지하여, 그 집안에는 다른 피가 흐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사가랴와 엘리사벳에 관해 살펴보자.
1. 그들은 지극히 경건한 부부였다(6절). "그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확신하는 바로는, "사실에 입각한" 하나님의 판단에서 볼 때 그러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들은 진실로 의로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노아가 그 당대에 그랬던 것처럼(창 7:1),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들이었다. 그들은 그 자신들을 "하나님에게 입증했으며,"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은혜롭게 받아들여 주셨다. 결혼으로 서로 연합한 부부가 모두 "주께 연합되어"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행복 된 일이다. 특별히 주님의 사역자인 제사장과 멍에를 같이 메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 와야 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그들은 "사람들에게 모범"이 될 것이요, 저들의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행했다."
(1)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들이었음은 그들의 생활의 방향과 방법에 의해 입증되었다. 즉 그들은 말이 아니라 자기들의 "행실로" 보여 주었다. 즉 그들이 행하는 길과 그들이 행할 때 통제 받은 법칙으로써 의로움을 입증했다.
(2) 그들은 자신들과 합일했다. 즉 그들은 그들의 신앙과 생활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룩한 예배와 연관되어 있는 주의 "규례"대로 행했을 뿐만 아니라, 선한 생활의 모든 실례(實例)를 말해 주는 주의 계명대로 행했다.
(3) 그들은 한결같이 복종적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의무에 "부족한"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의무를 "열심히" 이행하려고 계속적인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4) 이런 점에서, 그들이 "죄가 없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흠이 없는"사람들이었다. 아무도 그들에게서 드러난 어떤 추악한 죄로 그들을 비난할 수가 없다. 그들은 "정직하고" "악의 없이" 살았다. 사역자들과 그 가족들은 각별히 주의하여 "자기들"이 비난을 들음으로써 그 직무가 비난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2. 그들은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다"(7절). 자녀들은 "여호와의 유업"이다. 그러나 결혼은 했으나 아직 그들에게 이"유업"이 없는 가정들이 많이 있다. 자녀는 값어치있고 바람직한 축복이다.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 자녀를 가지면 그들을 하나님을 두려워하도록 양육시킬 것이지만 아직도 자녀를 갖지 못한 자들이 많은가 하면, "이 세상의 사람들"은 "자녀를 많이" 가지고 있어서(시 17:14), "양떼같이 자기들의 아이를 내어 보내는" 자들도 많이 있을 수 있다(욥 21:11).
엘리사벳은 수태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영영 아이를 갖지 못하리라고 실망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나이가 많았고," 아이를 가장 많이 낳을 수 있는 여인도 "아이 낳기를 그치는"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삭, 야곱, 요셉, 삼손, 사무엘, 그리고 세례 요한처럼 오랫동안 아이를 못 낳던 어머니에게서 훌륭한 아들이 태어난 수가 많다. 그것은 그들의 출생을 더욱 뚜렷이 돋보이게 해주고, 또 하나님이 그의 자비로 그 백성을 오래 기다림으로 지켜왔을 때, 마침 내 다가온 그 자비의 값어치를 "갚기로" 함으로써, 그들의 인내에 보상해 주시는 것을 즐겨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Ⅱ.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성전 안에서 제사 드리고 있을 때에 나타나 한 천사의 출현(8-11절)을 보자. 예언자 스가랴는 천사와 교분이 있었던 구약의 마지막 인물이며, 제사장 사가랴는 신약에서 첫 번째로 천사와 교분을 가진 인물이다. 이제 다음 사실들을 관찰해 보자.
1. 어떻게 사가랴가 하나님 봉사에 쓰여졌는가?(8절) 그는 "그의 반열의 순서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였다"고 했다. 그때에는 그가 "시중들 주간"이요, 그의 "직무"때였다. 비록 그의 가정이 이룩되거나 성장하지는 못했지만, 아직도 그는 그 자신의 위치와 그의 날에 해야 할 일을 양심 있게 해 내었다. 우리는 비록 우리가 "바라던 자비"를 받지 못했다해도, 계속 우리는 "주어진 봉사"에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들이 부지런하고 변함이 없이 충실히 봉사하면, 자비와 위안이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이제 아침과 저녁으로 향을 피우는 일이 제비뽑기에 의해 그에게 떨어졌다. 다른 일은 역시 제비뽑기에 의해 다른 제사장들에게 떨어졌다. 예배는 제비뽑기로 분담했다. 그것은 어떤 사람들이 소홀히 하거나 또 독점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제비는 주님의 뜻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므로, 그 직무에 대한 거룩한 부름에 그들은 만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일은 구세주의 탄생 시기를 이것으로써 알아내려고 연구해왔던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분향하는 그런 일이 아니었다. 그 분향은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드린 것이 아니라, "성전에" 있는 "분향의 제단"에서 매일 드리던 분향(11절)임이 분명하다. 유대인들은 한 제사장이 자기가 담당한 모든 기일 내에 2번 분향할 수 없으며, 최소한 한 주간 동안에 한 번만 분향할 수 있다고 한다.
아마 이 분향이 "안식일"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이유로 거기에 참석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10절). 평일에는 그렇지 않았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자기의 날을" 영예롭게 하셨다.
그리고 만일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가 계산한 대로 5월과 6월중의 일부에 해당하는 시반달(月), 즉 제 3월달, 17일째 되는 날이 아비아 반열이 제사를 시작하는 날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날 회당에서 읽혀졌던 그 율법과 예언서는 당시 성전에서 행해지는 일과 아주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이 좋으리라. 즉 나실인에 관한 율법(민 6장)과 삼손의 잉태(삿 13장)에 대해 읽은 것이다.
사가랴가 성소에서 분향하고 있는 동안 "모든 백성은 밖에서 기도하고" 있었다(10절). 라이트푸트 박사는 말하기를, 제사 드리는 차례가 다니 제사장들은 기도하는 시간에 늘 성소에 있었고, 만일 그 날이 안식일인 경우에는 지난 한 주간 동안 집무해 오던 제사장들 모두가 성전에 있어야 하고, 그 제사장들 밑에서 거들던 레위인들 그리고 랍비들이 일컫는 것처럼 "그 처소의 사람들"도 대기했었다 한다. 그리고 그들은 백성들의 대표가 되어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대기했었는데, 그들은 하나님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서 자기들의 직업을 잠시 떠나 있던 감동어린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커다란 무리"를 이루었을 것이고, 안식일과 절기 때에는 특히 더 했으리라.
그런데 이들은 모두 경건한 기도를 드리고 있었고, 종이 울림으로써 제사장이 분향하러 성소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영적 기도를 드리므로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제 그 사실을 살펴보자.
(1) 하나님의 진정한 이스라엘 백성은 늘 "기도하는" 사람들이며,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그로부터 은혜를 가져오는, 또한 그 앞에서 우리의 친교를 간직하는 예배의 중대한 원칙적의 한 부분이다.
(2) "그 때에는," 예식과 의식의 법이 완전히 유효하던 때였다. 물론 도덕적이고 영적인 의무가 그에 병행될 것이 필요했고, 또 주요하게 탐구되었다. 다윗은 그가 제단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때에는 자기의 기도가 "분향 없이도" 응답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그 기도는 "분향처럼" 하나님 앞에서 수행되었기 때문이다(시 141:2). 그러나 그가 "제단 주위"에 있을 때에는, 속없는 조개껍질처럼, "기도 없는" 분향은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3) 그러나 만일 우리들의 마음이 예배에 부합되지 않고, 모든 분야에서 그저 사역자들을 따르기만 한다면, 단순히 우리가 하나님이 예배되고 있는 곳으로 가 있더라도 불충분할 것이다. 만일 사역자가 가장 타당하고 지혜롭고, 살아 있는 기도로써 아주 잘 분향하였다 하더라도, 또 우리가 그와 연합하여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이 유익 될까?
(4)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에게 드리는 모든 기도는, 위에 계신 하늘의 성전에서 드려지는 그리스도의 중보의 분향 덕택으로만 하나님께 허락될 수 있고, 훌륭히 될 수 있다. 성전 예배에 대한 계시록의 언급은 이러한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 것 같다(계 8:1, 3, 4). 그곳에 보면, "반시간 동안" 성전에서 기도가 드려졌고, 그 동안 백성들은 자기들의 심령을 하나님께 "조용히" 아뢰고 있는 동안 "하늘에는 고요가 있었다"는 사실을 엿보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는 "보좌 앞에서 모든 성도의 기도로 많은 분향을" 올리고 있는 "천사" 곧 계약의 천사가 있다고 했다.
우리가 만일 "기도하지" 않으며, 또 "우리의 영으로" 기도하고 꾸준히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중보의 특혜를 기대할 수 없다. 또한 우리는 "영원히 생존하시사 중보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중재가 없이는 아무리 훌륭한 우리의 기도라도 응답을 얻는다거나 평화의 해답을 가져오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2. 사가랴가 그렇게 쓰임 받았을 때, 그는 하늘에서 그에게 파송 된 특별한 사자를 맞이하는 영광을 받았다(11절). "주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났다"고 했다. 어떤 사람의 관찰로는, 사가랴에서의 이 경우를 제외하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오는 천사가 성전에서 나타났다는 것은 결코 성서에서 읽어볼 수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성전에서" 는 하나님이 그룹들 사이에서 나는 작은 소리에 의해서나 우림과 둠밈을 통해서 자기의 마음을 알릴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제 2 성전에는 언약궤와 신탁이 없었었다. 그러므로 성전에 있는 제사장에게 분명한 뜻을 전하기 위해서는 천사가 쓰임 받게 되었고 복음도 그렇게 소개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율법"처럼, "그" 복음은 처음에는 주로 "천사들의 역사(役事)"를 통해서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서와 사도행전 속에서 천사들의 등장을 종종 읽게 된다. 그러나 율법과 복음의 공통된 구상은 모두가 완전해지고 났을 때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보다 영적인 다른 교통법을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의 말과 같이, 이 천사는 사가랴의 오른편, 그 제단의 북쪽, "분향 제단의 오른쪽에" 있었다. 이 사건을 스가랴 3장 1절과 비교하라. 그 곳에 보면, 제사장 여호수아의 오른편에 사탄이 여호수아를 방해하기 위해 서 있었으나, 사가랴의 경우는,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그의 오른편에 서 잇는 선한 천사를 만났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이 천사가 "지성소에서 나왔다"고 본다. 그래서 그 천사가 그를 제단의 오른편에 서도록 인도했다고 보는 것이다.
3. 이 사건이 사가랴에게 어떤 감명을 주었는가 보자(12절). "사가랴는 천사를 보고" 놀랐다. 그는 "무서울" 정도로 놀랐다. "놀라며 무서워했다." 비록 그는 자기 생활에 "부끄러움"이 없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였지만, 그 용모와 모양으로 보아 "인간" 이상의 존재임을 말해 주는 그런 분을 보자, 그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모두 죄인인지라, 그의 마음은 그런 영광스런 계시를 감당할 수 없었고, 그의 양심은 어떤 좋지 못한 소식이 있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다니엘도 이러한 것을 감당할 수 없었다(단 10:8).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무섭게 하지 않기 위해" 우리와 같은 사람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을 택하셨다.
Ⅲ. 그 천사가 사가랴에게 전해야 했던 소식은 무엇인가? 그 천사는 천사들이 일반적으로 하듯, "두려워 말라"는 말로 메시지를 시작했다. 아마도 사가랴가 "분향"하는 차례가 되기 전에 일어난 일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는 대단히 진지하고 양심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그 분향을 "잘" 드렸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아마도, 그가 천사를 보자, 자기가 자기의 어떤 실수나 실책으로 인해서 천사로부터의 힐책을 받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던 것 같다. 그래서 천사는 "두려워 말라"고 말하고, "나는 그대에게 좋지 못한 소식은 하나도 가져오지 않았다"고 말하고, "두려워 말라. 그러나 침착하여 내가 너에게 설명해야 할 메시지를 영으로 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1. 그가 종종 드리던 "그 기도"가 "평안한 대답"을 들었다는 것이다. "두려워 말라. 사가랴야 ! 네 기도가 응답되었도다."
(1) 만일 자기의 가문을 이룰 "아들을" 달라고 한 그의 특별한 기도를 뜻한다면, 필경 그러한 자비를 얻기 위하여 이전에 드렸던 그 기도가 이루어진 것을 말해 줌이 틀림없다. 그래서 그는 이제 아이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 부부는 모두 "매우 늙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식을 기대하는 만큼 또한 그것을 위해 기도해 왔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 기도가 모세의 경우처럼 "그들에게 족했고," "그들은 그 일로는 더 이상 하나님께 고하지 않았다"(신 3:26).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 이러한 자비를 주시려 하고 있으며, 사가랴는 이삭과 그의 아내의 경우처럼 그의 아내와 함께 오랫동안 행해 왔던 그 기도에 대한 위대한 응답을 받게 된 것이다(창 25:1). 믿음의 기도는 그 기도한 것이 비록 당장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도, 하늘에 "쌓이며," 거기서는 잊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어렸을 때, 세상에 태어날 때에 드린 기도는 늙어서, 또 세상을 하직할 때에 응답될 것이다.
(2) 그러나 만일 "지금 드리고 있는 기도," 분향으로 드리는 그 기도를 천사가 말한 것이라면, 그의 기도는 그의 지위에 맞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그들의 평안, 그리고 메시야와 그의 나라에 관해 지금까지 약속해 온 것을 성취시켜 달라는 기도였음이 분명하다. 바로 "그대의 기도가 이제 상달되었도다. 그래서 너의 아내는 곧 메시야의 선주자인 자를 잉태하게 될 것이다."
유대 학자들 중 어떤 자들은 사가랴 제사장은 분향 드리면서 "전 세계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으며, 그 기도가 상달되었다고 말한다.
(3) 혹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기도와 너의 모든 기도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졌으며, 그 앞에 기념물로 올려졌다"는 뜻이다(마치 고넬료에게 찾아왔던 천사가 말한 것과 같다. 행 10:30, 31 절).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이 너의 기도를 받아들이셨다는 징조이니, 곧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이다." 자기들의 "기도"가 "상달"된다는 것을 아는 것은 기도하는 자들에게는 지극히 즐거운 일이며, 이러한 자비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갑절로 복된 것이다.
2. 그는 노년에, 그것도 오랫동안 수태하지 못 했던 그의 아내를 통해서 아들을 얻게 될 것이요, 기적적인 일이나 "다름없는" 그의 출생으로 인해서 백성들이 "완전히" 기적적인 사건, 곧 쳐녀가 아들을 낳는 일을 인정하게 될 준비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아들을 낳는 일을 인정하게 될 준비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아들을 "요한"이라고 명명하라는 명령을 들었다. 그 이름은 우리가 구약에서 가끔 만나게 되는 이름, 곧 히브리어로는 "요하난"이라고 하는 이름이다. "그를 요한이라 부르라." "요한"이란 이름은 "은혜스러운"이란 의미이다. 제사장은 "하나님이 은혜스럽게 여겨질 자를 하나님 앞에 간구 해야"했다(말 1:9). 그리고 "백성들에게' 그런 "축복을 기원"해야 했다(민 6:25). 이때 사가랴는 그렇게 기도하고 있었으며 천사는 그에게 그의 기도가 응답되어졌고 그래서 그의 기도의 응답의 징표로 아들을 얻을 것이며, 그는 "은혜스러운 자"즉 "주가 은혜를 베푸시리라"는 이름으로 불릴 것이라(사 30:18, 19)고 일러주었다
3. 그 아들은 그의 가족과 모든 친척들 간에 기쁨이 될 것이라 했다(14절). 그는 또 하나의 이삭 곧, 너의 웃음이 되리라 했다. 혹자는 "요한"이라는 그의 이름에 부분적으로 그러한 뜻이 들어 있다고 본다. 그는 "환영받는 아이"가 되리라는 것이다. 때문에 "너는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게 되리라"는 것이다. 오랫동안 "갈망해 왔던" 긍휼이 "드디어" 현실로 도래하면, 더욱 즐겁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는 너의 기쁨의 이유가 되는 아들이 될 것이다. 많은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이 장차 되어질 일을 미리 알 수 있다면, 그들의 출생을 기뻐하기보다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네 아들이 어찌 될지를 말하겠는데, 너는 - 사람은 아무리 기쁜 일에라도 그래야 하지만 - 그의 출생에 대해 두려워하면서 기뻐할 필요는 없게 되리라. 아니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그의 탄생을 기뻐할 것이다. 네 집안의 모든 친척들과 그 일에 대한 모든 지지자들도 그의 탄생을 함께 즐거워하리라. 왜냐하면 그의 탄생은 그 집안의 영광과 위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58절). 모든 선한 사람들은 사가랴와 엘리사벳 같은 경건한 자들이 아들을 낳으면 기뻐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그에게 좋은 교육을 하며, 그들의 세대에 공적인 축복이 되도록 교육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복음이 소개되는 기쁜 날의 한 징조로서, 그 일을 "무한히" 기뻐하게 될 것이다.
(1) 그는 "주의보시기에 위대하게" 될 것이다. 헛되고 속된 세상의 눈으로 보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눈에 위대한 사람이야말로 정말로 위대하다. 하나님은 늘 "자기의 면전에 그를 거하게" 하며, 그의 사역에 그를 사용할 것이며, 자기의 심부름꾼으로 보낼 것이다. 나아가 그를 진정으로 위대하고 영예로운 인물이 되게 하실 것이다. 그는 "예언자"가 될 뿐 아니라 "예언자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고, 그 때문에 이제까지 여자에서 난 어느 누구보다도 더 위대하게 들어올려질 것이다(마 11:11)
그는 세상을 아주 "물러나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살 것이고, 그가 대중 앞에 나설 때에는 아주 "미천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주의 눈에서 보면" "지극히 위대하게" 보일 것이다.
(2) 그는 "더러운" 모든 것에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께로 향하여 나간 나실인이 될 것이다. 이것의 표징으로 나실인의 율법을 따라, "술과 독한 술을," 곧 "새" 술과 "낡은" 술을 "먹지 않을 것이다." 영어 성경에 "독한 음료수"라고 한 것은 일종의 술이기 때문이다. 삼손이 신성한 명령에 의해 그랬듯이(삿 13:7), 사무엘이 그의 어머니의 서약에 따라 그랬듯이, 그는 생활에 있어서 나실인이 될 것이다. "백성에게서 예언자를 일으키고" "젊은이들 중에서 나실인"(암 2:11)을 일으키신다는 것은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해주는 중요한 본보기로 알려져 있다. 예언자가 되도록 예정된 사라들은 사무엘과 세례요한처럼 나실인의 훈련을 받았던 것 같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훌륭한" 종이 되고자 하는 자들, "훌륭한' 일을 하고 싶은 자들은 자기 부정과 겸비의 삶을 사는 법을 배워야 하고, 자기들의 정신을 흐리게 하고 멍청하게 하는 모든 것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3) 그는 때가 오면 그가 부름 받아 해야 할 그 위대하고 훌륭한 봉사를 하기에 합당한 자격을 충분히 갖추게 될 것이다. "그는 어머니의 모태에서부터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리라" 했다. 그래서 때가 오기만 하면 그의 그러한 모습이 드러날 수 있었다.
다음 사실들을 주목하자.
[1] 성령에 충만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고 절제해야 하며, 술이나 강한 음료수를 삼가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이것에" 합당하기 때문이다. "술에 취하지 말고, 오직 성령으로 가득 차 있으라." 즉 불멸의 것으로 충만 하라.
[2] 유아들이나 혹은 "모태"에 있는 아기에게도 세례 요한이 일찍이 그 중심에 성령으로 가득찬 것처럼, "성령에" 의해 역사 될 수 있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구세주의 도래를 보고 기뻐하면서, 세례 요한이 "모태에서 기뻐 뛰었을" 때, 그것은 그러한 사실을 아주 일찍부터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오에도 그가 "성별 되었다"는 것이 매우 초기부터 밝혀졌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의 "자손"에게 "그의 성령을 부어 줄" 것을 약속했다(사 46:3). 그리고 하나님께 일찍부터 자신들을 헌신하는 그들의 첫 "샘물"은 성령의 열매이었다(4, 5절). 그러므로 우리가 아는 범위 내에서(그리고 우리는 성령을 돈으로 사려고 했던 시몬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할 수 없다), 우리들처럼 "은혜의 자손"이 된 자들이요, 우리들처럼 성령을 받은 자들에게 누가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을 금하리요 ? (행 10:47)
(4) 그는 많은 영혼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또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도구가 될 것이다(16, 17절).
[1] 그는 "이스라엘 자손," 곧 유대 민족에게 보내어질 것이며 - 메시야도 그들에게 "먼저" 보내졌다 - 이방인들에게 보내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민족 "전체"에게 보내어진다. 즉 그는 제사장의 가문에 속해 있는 자이지만, "제사장들에게만" 보내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가 자기 집안에 대해서만 어떤 특별한 일을 했다는 것을 찾아낼 수 없다.
[2] 그는 "그들의 주(主)," 즉 메시야에 앞서 가야 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했던 "그들의 왕"에 앞선 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흔히 메시야를 그들 민족의 "현세적인 왕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의 마음에 대한 감화력에 의해서 "영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돌보고, 보호하고, 다스리실 "그들의 주님," "그들의 하나님"에 앞서서 나아갈 자였다. 도마가 그리스도에게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나 다니엘이 "선생이여 ! 당신은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하고 말한 것 이상으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요한은 메시야보다 조금 먼저, 그의 도래를 알려 주기 위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그를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를 시키기 위해서 "그에 앞서 나아갈 자였다."
[3] 그는 "엘리야의 심령의 능력으로" 나타날 것이다.
첫째, 그것은 그가 엘리야와 같은 사람이 되며, 엘리야가 행하듯 행하고 - 엘리야처럼 털옷과 가죽띠를 두르고, 세상을 물러나서 살게 된다 - 그리고 엘리야처럼 타락하고 부패한 세대에게 개심과 회개의 필요성을 설교할 것이며, 죄를 드러내고,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자의 죄일지라도 그 죄를 고발하는 데 용감하고 열심일 것이며, 또 엘리야가 아합과 이사벨에 의해 그랬듯이, 헤롯과 그의 아내 헤로디아에 의해서 미움과 박해를 받을 것을 말한다. 그는 엘리야차럼 거룩한 "심령(영)과 권능"으로 그 맡은 일을 수행하게 된다. 바로 그 영과 권능이 그의 사역을 놀랍도록 성공하게 해 주는 관건이 되리라. 또 엘리야가 구약 성서의 예언자 이전에 갔었고, 자신이 조그마한 "저술"(대하 21:12)에 의하여 구약 성서의 문서 시대를 여는 "신호등"처럼 일했는데, 요한도 그리스도와 사도 이전에 와서, 복음의 가르침과 의무 즉 "하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라"는 설교를 통하여 복음의 시대를 도입할 것이다.
둘째, 요한은 "주의 날의 도래" 이전에 엘리야라는 이름으로 오리라고 말라기가 예언했던(말 4:5) 바로 그 사람이다. "보라 ! 내가 너에게 한 예언자 엘리야를 보내리라"(70인역에 있듯이).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니라 복음이 해석한 대로 "엘리야의 심령과 권능으로" 입힌 예언자를 보내리라는 것이다(70인역은 유대인의 전승에 편승하여 말라기의 말씀을 잘못 해석했다).
(4) 그는 많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주(主), 그들의 하나님에게로 돌아오게 한다." 그들이 마음으로 메시야를 받아들이게 하고, 그들에게 죄책감과 의(義)에 대한 열망을 일깨워 줌으로써 메시야를 영접하도록 할 것이다.
요한의 설교나 세례처럼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돌이키게" 하는 것은 무엇이나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주와 하나님" 되시는 그리스도에게로 우리를 돌아가게 할 것이다. 은혜로 통하여 죄의 멍에를, 즉 세상과 육의 지배를 떨쳐 없애는 자들은 곧 "주 예수"의 멍에를 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5) 이로써 그는 "아버지들의 마음을 자녀들에게로 돌이킬" 것이다. 즉 유대인의 마음을 이방인에게로 돌이킬 것이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대해 가져오던 뿌리깊은 편견을 극복하게 해 줄 것이다. 이것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은 어디서든 일어난 일이요, 이제 세례 요한에 의해서 시작되어야 했다. 그 세례 요한은 "그를 통해 모든 사람의 증인으로"왔으며, 유대 바리새인들뿐만 아니라, 로마 군인들에게도 세례를 주고, 가르쳤으며,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하던 유대인들의 자만심과 자신감을 고쳐 주었고, 그들에게 "하나님은 이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마 3:9). 이것은 이방인들에게 대한 그들은 적개심을 "고쳐 주기" 위한 말이었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이방인의 교회를 유대 교회의 자손 격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예언자들이 항상 사용하는 어법이었다는 점을 지적했다(사 54:5, 6, 13; 60:4, 9; 62:5; 66:12).
그리고 그는 "복종치 않는 자들을 의인들의 지혜로 돌이킬 것이다." 즉 복음을 소개함으로써 지금은 "불복종하는" 이방인들이 복음에 의해서 그들의 조상인 유대인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앙 - 이것을 여기서는 "의인들의 지혜"라고 불렀다 - 에로 돌아설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믿음을 가진 유대인들과 서로 친교 하게 될 것이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녀들의 마음과 함께 아비들의 마음을 변화시킬" 것이다. 즉 나이 많은 자들과 젊은 자들의 마음이 모든 세대의 사람들을 "경건하게"하는 도구가 될 것이고, 유대 민족의 대 개혁을 역사할 도구가 되며, 그들이 머물고 있던 의식적이고 전통적인 종교에서 그들을 "헤어가게" 하고, "경건의 실체"에로 인도하는 도구가 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결과는 증오가 소멸되고, 반목이 중지되는 것이 될 것이다. 또 그의 세례에 연합하는 많은 자들은 서로 잘 화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조세푸스(Josephus)가 설명한 세례 요한과 잘 일치한다(Antiq. Lib. 18. Cap 7). "그는 선한 사람이며, 또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과 이웃을 향한 의로움으로 유대인들에게 덕의 실천을 가르쳤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모이고 세례로 결합했던 것이다"라고 했다. 또 조세푸스는 말하기를, "그의 뒤로 따라 무리를 이룬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을 참으로 기뻐했다"고 했다.
이렇게, "그는 불복종하는 자들을 의인의 지혜에로 돌이킴으로써" 아비들의 마음과 자녀들의 마음을 하나님과 이웃을 향하고, 서로를 향하도록 돌이켰다.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첫째, 참된 신앙은 "이 세상의 지혜"와 구별되는 "의인들의 지혜"임을 알자. 경건해지는 것은 우리의 지혜요 의무이다. 경건에는 공평과 신중함이 공존한다.
둘째, 지금까지 불신앙과 "불순종하여" 오던 사람들이 "의(義)의 지혜"로 돌이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리 커다란 무지(無知)와 편견이라도 능히 극복할 수 있다.
셋째, 복음의 중대한 의도는 사람들을 하나님에게 "돌아가게" 하는 것이며, 또 사람들끼리 더욱 더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사명을 띠고 세례 요한이 세상에 보내졌던 것이다. 요한이 사람들을 "돌이키리라"는 말이 "두 번"나와 있는 것은 엘리야에게 디셉 사람이란 이름이 주어진 것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혹자들은 디셉 사람이란 말이 그이 출신 지방을 말한 것이 아니라, 호칭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그들은 그 말에 의해서 엘리야는 "개종시키는 자"라고 해석한다. - 즉 사람의 마음을 돌이키는 일에 크게 쓰임을 받았고, "회개시키는 일"에 크게 성공한 자라는 뜻의 이름으로 보는 것이다 - 그러므로, 신약 성서의 엘리야도 많은 사람들을 그들의 주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전향시키는"자라고 일컬어진 것이다.
(6) 이렇게 해서 그는 "주를 위하여 백성을 준비하게" 될 것이고, 그들이 주님의 가르침을 즐거움으로 맞을 수 있도록 그 백성들의 마음을 조정할 것이다. 그들을 주의 도래가 주는 "위안"을 받도록 "준비시킬"것이다. 여기서 명심해 둘 일이 있다.
첫째, 주 앞에 "헌신"할 모든 사람과 주안에서 "기뻐할"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그를 위한 "준비를" 먼저 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은총에 의하여 저 세상에 있을 영광을 위해 준비해야 하며, 율법의 공포에 의하여 복음의 위안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하며, 속박의 영에 의하여 양자(養子)의 영을 잠을 준비를 해야 한다.
둘째, 회개를 요구하는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복종하는 것 이상으로 그리스도를 위한 백성을 더 잘 예비할 수 있는 방도는 없다. 그로 인해서 죄가 통한히 여겨지면, 그리스도는 매우 귀중한 분이 될 것이다.
Ⅳ. 천사의 예언에 대한 사가랴의 불신앙과 그러한 그의 불신앙에 대한 천사의 힐책을 보자. 그는 천사가 하는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그는 머리를 숙여 경배해야 했고, 주님께 예배했어야 했다. 당신이 말씀하셨던 "그 말씀에 주의 종을 따르게 하옵소서"라고 말했어야 했다. 사가랴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제 그 점을 살펴보자.
1. 그의 불신앙은 무슨 말을 했는가(18절). 그는 "어떻게 해서 내가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까?"라고 천사에게 말했다. 이것은 자기의 신앙을 굳세게 하기 위한 겸손한 기원이 아니었다. "나는 이 사실을 결코 믿을 수 없습니다"고 하는 말투였다. 자기에게 말한 그것을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에게 말하고 있는 자가 "천사"라는 점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된 그 메시지는 구약의 예언을 참조해 보면, 거기에 맞는 증거를 많이 찾아낼 수도 있었다. 구약에 보면, 노년기에 들어선 사람들이 아이를 갖게된 실례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그는 아직도 그가 약속된 이 아이를 얻으리라고 믿을 수 없었다. "나는 늙었고, 내 아내는 잉태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나이가 많으니, 도무지 아이를 낳지 못하리이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천사는 한 "징표"를 그에게 주어야 했다. 그렇지 않고는 사가랴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천사의 출현 - 그것만으로 충분한 표징이 되었다 - 에도 불구하고, 감히 악한 천사는 들어오지 못한다고 능히 믿을 수 있었던 하나님의 신탁의 장소인 성전에서 천사가 그에게 이 소식을 전해 주었지만, 그가 기도하면서 분향을 드리고 있을 때 일어난 일이요,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신앙의 기본 진리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남에게 가르쳐야 한다 -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그는 아브라함의 아들답지 않게 자기 자신의 몸과 아내가 너무 늙었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서, 그는 "이 약속을 의심했다"(롬 4:19, 20).
2. 어떻게 그의 불신앙이 "잠잠해졌으며," 그가 "침묵했을까?"
(1) 천사가 자기의 권위를 "주장"함으로써 "그의 입을 닫아 버렸다." 그는 "어떻게 해서 내가 이 사실을 알리이까?"라고 물었는가? 그렇다면, 그는 "내가 가브리엘이라"하는 사실로 알게 되리라(19절)는 것이다. 그는 마치 친필로 "내 말이 그것을 증명한다"는 서명이라도 하듯, 그 예언에 자기의 이름을 붙였다. 천사들은 때때로 마노아와 그의 아내에게 했던 것처럼 자기들의 이름을 밝히는 것을 거절해 왔으나 이 천사는 즉시 "나는 가브리엘이다"라고 말했다. 그 말은 "하나님의 권능" 또는 "하나님의 능한 자"를 뜻한다. 그러므로 그 말을 하게 하신 그 하나님이 그 말을 이루시리라는 사실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또 그 천사는 사가랴에게 가브리엘이란 이름을 밝힘으로써 "사람 가르비엘"에 의하여 다니엘에게 보내졌던 메시야 도래에 대한 소식을 상기시켰다(단 8:16; 9:21). 또 그는 "나는 그때 보내졌던 바로 그 천사이고, 지금도 그와 같은 뜻을 전하러 왔다"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의 존전에 서 있고," 또, 그의 보좌에서 직접 시중드는 가브리엘이었다. 파사 궁전에 있던 국무대신들은, "그들이 왕의 얼굴을 보았다"는 말로써 설명되고 있다(에 1:14). 가브리엘은 "비록 내가 지금 여기서 너에게 말하고 있을지라도, 나는 하나님의 존전에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눈이 나에게 머물러 있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정당하게 할 말 이상은 감히 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 전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노라. 즉 이 기쁜 소식을 그대에게 전하기 위하여 보내졌노라. 이 소식은 모두가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너는 마땅히 기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니라"고 말한 샘이다.
(2) 그 천사는 "자기의 권능을 주장해 보임으로써" 실제로 "그의 입을 막았다." "보라. 너는 벙어리가 될 것이니(20절)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리라. 만일 네가 너의 신앙을 돕기 위한 징표를 자기 원한다면, 그 징표는 너의 불신앙에 대한 벌의 징표도 되는 그런 것이 될 것이다. 즉 그대는 이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말을 할 수 없으리라"(20절). 그대는 "벙어리"와 "귀머거리"가 될 것이다. 같은 단어가 둘의 의미를 다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친구들이 그에게 말도 하지 못하고, "손짓으로 표시했고"(62절), 그가 또 그들에게 그렇게 한 것으로 보아(22절), 그는 말하는 힘뿐만 아니라 듣는 힘도 잃어버린 것이다. 이제 그를 벙어리로 만듦으로써,
[1] 하나님은 그를 "공정히" 다스렸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에게로 향한 하나님의 인내와 오래 참으심을 찬양해야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자주 더럽히는 말을 해왔던 우리들을 만일 사가랴처럼 우리들의 죄에 따라 다스린다면, 우리는 모두 벙어리가 되어 버렸을 것이나 지금까지 용서받고 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은 그를 매우 "친절하게" 대하셨다. 그리고 또한 매우 부드럽고 은혜스럽게 대하셨다. 그 이유는,
첫째, 사가랴가 더 이상 하나님을 불신하는 그런 말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악한 것을 생각하고서도," "자신의 손을 입에 갖다 대고' 자기 입에 재갈을 먹이지 않으려 한다면, 하나님이 행하실 것이다. 그래서 악한 것을 말하는 것보다는 전혀 말하지 못하는 것이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둘째, 하나님은 그의 신앙을 "확증해 주었다." 다시 말해서 "말"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그는 더욱 훌륭한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만약에 우리가 우리의 죄로 인해 꾸지람을 들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신뢰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 꾸지람에 대해 불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셋째, 이리하여 그가 그 환상을 누설하고, 또 자랑하는 일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그는 쉽게 자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환상은 당분간은 그만이 아는 비밀로 묶여 있어야 했다.
넷째, 그것은 사가랴의 죄악적인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의 말씀을 적당한 때에 이루시리라는 것을 말해 주는 커다란 자비이다. "인간의 불신앙이 하나님의 약속을 쓸모 없게 만들지 못하며," 그 약속들은 "적당한 때에 이루어질 것이며," 사가랴는 영원한 "벙어리"가 아니라, "이 일들이 이루어지는 날까지만" 그럴 것이고, 그 후에는 그의 "입술이 열려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비록 하나님은 "채찍으로" 자기 백성들의 "죄악을 벌하실지라도", 그의 "사랑 가득한 자비는 떠나지 않을 것이다."
Ⅴ. 사가랴는 사람들과 또 그의 가정으로 돌아가고, 그 약속의 자녀, 곧 그의 노년에 가질 아들이 잉태된다.
1. 사람들은 사가랴가 성전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왜냐하면 그가 성전에서 나와 주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내리는 축복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보통 때 이상으로 그가 지체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집회에서는 아주 흔히 있는 일이지만, 그들은 서둘러 축복 받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성소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며 또 어떤 잘못이 있지 않는가 하는 두려움을 품은 채로 그를 "기다렸다"(21절).
2. 그가 성전에서 나왔을 때에는 "말을 못했다"(22절). 그래서 그는 이제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려 돌아가게 해야 했지만, 벙어리이었으므로, 메시야를 기대할 수 있게끔 하였다. 메시야는 축복을 "선언"할 수 있고, "실제적으로 축복할 수 있으며," 그 안에서 "땅 위의 모든 나라들이 축복을 받는" 분이다. 이제 "더 좋은 것에 대한 희망"을 위한 길을 열기 위해, 아론으로부터 내려온 제사장직은 곧 "잠잠케 되고" "제거되어야' 할 판이었다.
3. 그는 그가 "본 환상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원가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그는 "말을 못하고" 그들에게 "손짓으로" 전했다(22절). 이 사실은 복음의 섭리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다가 비교할 때 레위인의 제사장직의 부족함과 결함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구약은 하늘의 일들과 신성의 비밀을 표징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으나, 그것은 "불완전하고" 불확실하다. 그것은 "우리에게 손짓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말없이 그대로 있다." 그것이 명료하게 우리들에게 이야기하고, "구약이라는 어두운 거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졌던 것을 확실하고 뚜렷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은 바로 복음이다.
4. 그는 "그의 직무의 날이 다 지나기까지 머물러 있었다." 그것은 제비에 따라 "분향할" 때였으므로, 그가 "벙어리"이며 "귀머거리"였을지라도, 분향하는 일은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대로 하나님에게 잘 예배할 수가 없을 때에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정성껏 예배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들의 예배를 받으실 것이다.
5.그리고는 그는 그의 가정과 "임신한 아내"에게로 돌아갔다.(23, 24절). 그녀는 그 약속에 의해서 임신했다. 그녀는 이 일에 알고 있었으므로, "5달 동안 숨어 있었다." 즉 그녀는 집에 틀어 박혀 있으면서, 그 비밀을 지켜왔으며, 이전처럼 자주 나다니지 않았다.
(1) 그것은 유산을 하거나 혹은 태아에게 어떤 피해도 주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2) 그녀는 삼손의 어머니에게 주어졌던 명령과도 같이, 그녀가 나실인의 아이를 수태하고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부정한 일에 관계치"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삼손의 어머니에게 주어졌던 명령을 엘시사벳이 자신에게 적용시킨 것이다(삿 13:14). 그리고 "5개월간"이란 언급이 있지만, 그 다음에 "6째 달에"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아, 우리는 그녀가 아이를 수태하고 있는 동안에 항상 자신을 돌보는 태도를 취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3)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그녀가 "자신을 숨긴" 일은 지나친 정숙이고, 그녀는 그녀 생애 중에 아이를 수태한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나도 늙고, 내 주인도 늙었는데, 어찌 내게 낙이 있으리요?"(창 18:12)
혹은 그녀의 겸손의 표시이다. 그녀는 자기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축복을 자랑치 않으려 했을 것이다.
(4) 그녀는 경건 생활을 위해서 "숨어 있었다." 그녀는 기도와 찬양으로 시간을 보내려 했던 것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숨겨진 자들"이다. 그녀는 이렇게 자기의 은거를 말할 수 있었으리라. 즉 "주께서 나를 돌아보셨나이다. 은혜스럽게도 아이를 주셨을 뿐 아니라 영광스럽게도 나실인이 될 아이(그의 남편이 글을 통해서 그녀에게 알려 주었다)가 주어졌나이다. 하나님은 사람들로부터 받는 나의 비난을 없이 해 주셨나이다." 생산(生産)이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커다란 축복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것은 그들 민족이 번성되리라는 약속과 그 민족에게서 메시야가 나오리라는 약속 때문이다. 따라서 불임은 커다란 비난거리였다. 따라서 불임의 여인들은 설령 "흠이 없을지라도" 벌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으로 여기고, "알려지지 않은" 어떤 큰 죄를 졌으리라고 여겨왔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 엘리사벳은 이 비난이 거두어졌을 뿐만 아니라, 커다란 영광이 그녀에게 임했기 때문에, 개가를 부른 것이다.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내 마음에 있었던 생각과 기대를 넘어 서서 "주가 내게 이렇게 행하셨나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롭게 대하신 것은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긍휼과 은혜로 우리를 보살피셨다. 그렇게 "우리에게 행하신"것이다.
예수 탄생의 통고 (누가복음 1:26-38)
세례 요한이 수태된 지 6개월 후에, 우리의 복되신 구세주의 성육신(成肉身)과 수태에 관한 것을 이제 우리가 알아보는 것이 합당하리라. 사가랴에게 "그의 아들"에 곤한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었던 바로 그 천사 가브리엘이 다시 이 일에 쓰임 받는다. 그때부터 이미 "시작된" 구속의 영광스러운 일이 여기에서 "계속되기" 때문이다. 악한 천사들은 결코 구속받는 자의 자리에 들지 못하듯, 선한 천사들은 결코 구속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그들 선한 천사들은 하나님의 사자(使者)로서 구속주에 의해 쓰임을 받고, 즐거이 그의 심부름을 맡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구속주의 아버지의 비천한 종들이며, 그 자녀들의 다정한 친구이고 지지자들이기 때문이다.
Ⅰ. 우리는 앞으로 태어날 우리 주님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우리는 그의 탄생을 기도할 수 없지만 그의 탄생으로 인해서 마땅히 하나님에게 찬양해야 한다.
1. 그녀의 이름은 모세와 아론의 누이의 이름인 "미리암"과 동일한 이름 "마리아"였다. 그 이름은 "존귀한 자"를 뜻한다. 그리고 다윗의 가문에 속한 모든 딸들 중에서 진실로 "지극히 숭고한 은혜를 받은" 자가 되게 했다.
2. 그녀는 다윗의 직계 후손으로, 왕가(王家)의 딸이었으며, 본인이나 친구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세상에서는 천하고 가난하지만, "다윗 족속"의 권한과 위풍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는 하나님의 섭리와 유대인들의 보살핌으로 인해서 "자기의 가문"을 보존하고, 그것을 "입증할"수가 있었다. 그리고 메시야의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는, 그 가문이 "지켜질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만 오늘날 이 세상에서 미천하게 된 자들이 자기들은 영광스런 명사들의 후손이라는 것을 언급하는 것은 가치 없는 일이다.
3. 그녀는 순결하고 흠 없는 "처녀"였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처럼 천한 신분인 같은 층의 왕족 중의 한 사람과 "정혼한" 자였다. 그래서 어느모로 보나 그들 사이에는 평형성이 있었다(마땅히 그래야 하듯이). 그의 남편의 이름은 요셉이었으며, 그 역시 "다윗 가문"중의 한 인물이다(마 1:20). 그리스도의 어머니는 "처녀"였는데, 그는 평범한 생리작용이 아니라 기적적인 방식으로 탄생되어야 할 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성정을 타고나기는 해도 인간의 부패된 본성을 타고나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렇게 태어나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정혼한 처녀"에게 태어났으니, 정혼은 결혼과 맞먹는 것이요, 혼약이 된 처녀에게서 났으니, 그것은 결혼한 처지를 영예롭게 하기 위함이었다(결혼은 무흠한 규례였다). 그리하여 구속주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것으로 인해서 경멸을 받지 않게 된 것이다.
4. 그녀는 그 나라의 먼 구석에 있는 "갈릴리의 한 마을 나사렛"에서 살았다. 그곳은 종교로나 학문으로나 별로 이름이 나지 않았던 곳이다. 그러면서도 이방 국가와의 접경 지역이어서, "이방인들의 갈릴리"라고 불리웠다. 그리스도가 그 지방 주민들과 교분을 맺었다는 사실은 이방 세계를 위해 예비된 은혜를 시사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요나도 출생으로 보면 갈릴리인이며, 엘리야와 엘리사는 갈릴리에서 생활을 많이 했으며, 이들은 모두 유명한 "이방인의 예언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 천사는 나사렛에서부터 그녀에게로 보내졌다. 하나님은 어떤 거리에 있는 어떤 장소이든 개의치 않고 당신의 은혜를 저장해 두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천사 가브리엘은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사가랴에게 했듯이, 갈릴리 나사렛에 있는 마리아에게도 즐거이 소식을 전했다.
Ⅱ. 마리아에게 전했던 그 천사의 "말"을 들어보자(28절). 천사가 마리아를 방문했을 4, 그녀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으며, 어떻게 쓰임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그 천사는 "그대는 지극히 은혜를 받은 자"라는 인사로써 그녀를 놀라게 했다. 이것은 그녀를 높여 주려고 하는 의도가 있었다.
1. "그녀 자신"에 대한 가치를 높여 준다. 이런 의도를 가지고 자기들의 마음속에 어떤 불꽃을 튀겨야 하는 자들이 세상에는 매우 드물지만, 이렇듯 마리아처럼 자기의 "낮은 처지"를 숙고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그런 기회가 온다.
2. 해외에서 온 것이 아니라 위에서 들려오는 엄청나게 커다란 새 소식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하늘은, 의심할 필요도 없이, 천사가 cai/re - 즉 그대여 기뻐하라고 문안을 드리는 그런 자들을 위해서는 비범한 은혜를 예비하고 계신다. 그런데 이 말은 항상 하는 인사말의 한 형식이며, 그녀에 대한 존경과 그녀와 그녀의 앞날에 대한 자비를 표한 것이다.
(1) 그녀는 존귀하게 되었다. "그대는 지극히 큰 은혜를 받은 자이다. 하나님이 그대를 메시야의 어머니로 선택하시사, 모든 생명의 어머니인 하와의 명예보다 뛰어난 특별한 은혜로 그대를 명예롭게 하셨느니라."
그런데 불가타역은 이 말을 gratia plena - 은혜의 충만이라고 번역했다. 그래서 어느 누구보다도 더욱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받았다고 말해 주고 있다. 한편, 이러한 사실은, 그녀가 우리의 거룩한 주님을 수태하고 낳게 된 것은 그녀만의 특유한 은혜를 받은 것임을 분명히 말해 주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여인의 후손"으로 태어나야 하기 때문에, 여인 중 누군가는 그 영예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 영예는 "개인의 공적" 때문이 아니라 "값없이 주시는 은총"에 기인되는 것이요, 거기에 바로 마리아가 선정된 것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 그녀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득했다. "비록 그대는 가난하고 비천하며, 생계조차 망막하여, 결혼 생활로 가정을 꾸려 나가는 것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는 처지에 있었지만, 주께서 그대와 함께 하시도다." 천사는 "주가 너와 함께 하신다"(삿 6:12)는 이 말로 기드온의 신앙을 돋우었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예배드리는 일이나 은혜를 얻는 일 등,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모두 해결된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을 생각나게 해 주었으리라. 즉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 했다(사 7:14). 그런데 왜 마리아가 그렇게 되면 안 되겠는가?
(3) 그녀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았다. "여인들 중에 축복 받은 자로다. 사람들이 그렇게 여길 뿐 아니라, 실로 너는 그러하리라. 너는 이 점에서 지극히 은혜를 입었으므로, 다른 것에서도 복을 기대할 수 있도다." 그녀는 이렇게 자기를 설명했다. "모든 세계가 나를 축복 받은 자라 부르리라"(48절). 드보라가 야엘에 대해 언급한 것과 비교해 보면, "장막에 거하는 여인들 위에 복이 있으라"(삿 5:24)는 것이 그녀의 또 하나의 영광이었다.
Ⅲ. 그녀는 이 이야기에 놀라와 했다(29절). "그녀의 천사와" 그 주위에 있는 광채를 보자, 그 광경에 놀랐고, "그의 말에" 더욱 당황해 했다. 만일 그녀가 교만한 야망에 불타는 젊은 여인이며, 이 세상에서 위대한 일을 겪게 되리라고 스스로 자부하던 여자라면, 그 천사의 말에 "기뻐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한껏 부풀어 있고(그녀는 지각 있는 여자였을 것이다), 즉시 그런 뜻에 대답을 준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일을 자랑하는 대신에 "당황했다." 그런 위대한 일에 대해서는 자기는 "자격이" 없으며 "약속을 받은" 일도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 무슨 인사인가 하고 놀랐다." 이 인사가 하늘에서 왔을까 사람에게서 왔을까? 그 인사말이 그녀를 기쁘게 했을까? 그것은 그녀를 함정에 빠뜨리는 것인가? 그녀를 조롱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 말속에는 실질적이고 중대한 어떤 것이 있는가? 그러나 "이 무슨 인사인고?" 하는 그녀의 모든 생각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가 이 인사말은 공연히 한 말이라거나 지금처럼 타락한 적그리스도 시대의 교회가 예배 때에 수없이 중얼거리는 주기도문과 같은 식의 기도문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나는 확신한다. 사실 로마 교회 시대에는 그러했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 대한 그녀의 사려 깊은 행동은, 젊은 여인들에게 요긴한 모범을 보여 준다. 즉 젊은 여인들에게 인사말이 전해졌을 때 그들은 생각하고, 그들이 받은 "인사말"의 양식을 숙고해 보아서, 그 말이 어디서 왔고, 무슨 뜻인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 말을 받아들이고, "항상 경계"하는 태도를 갖출 수 있게 된다.
Ⅳ. 천사가 그녀에게 전한 메시지의 내용을 보자. 잠시 동안 천사는 그녀에게 "여유"를 주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녀로 하여금 더 당황하게 만드는 것들을 보자, 천사는 자기의 용무를 계속하였다(30절). 그가 한 말에 마리아는 아무 대답도 안 했다. 그러므로 천사는 그 사실을 재확인시켰다. "마리야야 두려워 말라. 그대는 그대가 생각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려 줄 뿐이니라. 그러나 세상에는 실제보다도 자기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믿지 못하는 데서 오는 그런 불안은 버려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하나님이 당신에게 은혜를 베푸셨는가? 세상이 당신을 비난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라. 그분이 당신편인가? 그렇다면 누가 당신을 대적하든 걱정하지 말라.
1. 비록 그녀는 "처녀"였지만, "어머니"가 되는 영예를 지니게 된다. "그대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에게 이름을 주게 될 터인데, 또 그를 예수라 하라"(31절). "모든 살아 있는 자의 어미"가 되는 영예를 이제 마리아가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와가 받은(벌에 대한) 선고였다. 그러한 영예는 "여인의 소욕은 그 남편에게 있고, 남자는 여인을 다스리라"(창 3:16)라는 이 굴욕이 여인의 그 영예에 대한 감소제가 되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제 그런 감소제가 없이 그 영예를 지니게 된 것이다.
2. 그녀는 비록 "가난"과 "소외" 속에서 살았지만, 그녀는 메시야의 어머니가 되는 영광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의 아들은 "예수" 곧 "구원자"라고 불리울 것이로되, 그는 유대인이 "기대"하는 그러한 구원자가 아니라 세상이 "필요로"하는 구원자가 될 것이다.
(1) 그는 "윗 세계"와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자가 될 것이다. 그는 "큰 자," 곧 지극히 큰 자, 비할 데 없이 큰 자가 "되리라." 그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아들"이라고, 즉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같은 분이 되리니, 아들은 아버지와 같은 본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매우 귀여운 자가 되리니, 아들은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우나" 그것은 "잘못된 이름"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 "만물 위에 계시고, 영원히 축복 받으실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롬 9:5). 비록 양자됨과 중생에 의해서이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정말로 훌륭하다." 따라서 "지극히 선한" 자들이 되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요일 3:12).
(2) 그가 비록 가장 나쁜 조건에서 태어났고 종의 형태로 나타났을지라도, "주 하나님이 그의 조상 다윗의 보좌를 그에게 주었기 때문에"(32절), "낮은 세상"에서도 "지극히 높은 자"가 될 것이다. 그 천사는 그녀가 "다윗의 가문에" 속한 자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이 일은 여자의 상속권을 인정치 않는 샐릭법(法)이나 장자 상속권에 상관없이 그 보좌의 계승권이 주어졌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그 보좌의 "후사"를 낳는다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그녀는 하늘에서 온 천사에게서 그녀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사실을 더욱 쉽사리 "믿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홀은 영광스럽고 전통 있던 그 가문에서 이미 오랫동안 "떠나" 있었다가 이제 다시 돌아와, 상속이 아니라 영원히 같은 손에 들려지게 된 것이다. 그의 백성들은 "그 보좌를 그에게 돌리려 하지" 않을 것이며, "백성들을 다스릴 그의 권리"를 인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 하나님"은 그에게 "권세를"주시고, 그를 "거룩한 산 시온"에 "자기의 왕"으로 세우실 것이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이런 확신을 주었다.
[1] 그의 나라는 "영적"인 것이다. 육에 의한 이스라엘은 그의 권세 속에 들어오지 않을뿐더러, 백성에 대한 동경이 계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육에 속한 이스라엘이"아니라, "야곱의 가문을 통치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다스려야 하는" 나라는 반드시 "영적인" 왕국, 즉 "약속에 의한" 이스라엘 족속이다.
[2] 그 나라는 영원하리라. 즉 다윗 가문의 현세적인 통치가 오랫동안 있어 온 이후이므로, 그는 "끝없는 나라를 영원히 다스릴 것이다." 그 밖의 다른 왕들은 "대대에 걸쳐" 지속될 수 없지만, 그리스도의 왕권은(잠 27:24) 그러하리라. 복음은 영원한 경륜이므로, 우리는 또 다른 것을 찾지 말아야 한다.
Ⅴ. 이 왕자의 출생에 관한 그녀의 의문에 대해, 천사는 더 자세한 소식을 전해 주었다.
1. 그녀에게 일어난 의문,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어찌 이일이 있으리이까?(344절) 내가 어떻게 당장 임신할 수 있습니까?(천사가 그렇게 되리라고 했기 때문에)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나이다. 그런 일은 틀림없이 보통 출생의 방식에 따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했다. 마리아는 메시야는 반드시 "처녀"의 몸에서 출생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일 그녀가 메시야의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면,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알고 싶었을 것이다.
이것은 불신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천사가 말한 것에 대한 어떠한 의심도 아니다. 앞 일을 더 알고 싶어할 것뿐이다.
2. 다음은 그 의문에 주어진 만족할 만한 대답이다(35절).
(1) 그녀는 "성령의 권능으로" 임신할 것이다. 성령의 본래적인 역사와 직능은 "성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성령이 이제 이러한 의도로 처녀를 성별 하는 것이다. 성령은 "지극히 높으신 자의 권능"이라 불리웠다. 그녀가 이 일이 어떻게 될까를 질문했는가? 그렇다면 이 답변이 그 사건에서 일어나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그녀를 충분히 도우리라. 즉 거룩한 능력이, 다른 불가사의한 역사(役事)에서도 그렇듯이, 그 일을 이루리라. 이 사건에 쓰임 받은 천사의 능력이 이루는 것이 아니니라. "거룩한 영" 자신의 권능이 행하리라는 것이다.
(2) 그녀는 그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까 하는 방법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물음도 묻지 않았다." 그 이유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능력"인 성령이 -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을 받으실 때 구름이 성막을 덮듯 - 그녀에게 "덮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막을 구름이 덮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기둥을 지나친 호기심으로 관찰하다가 그 신비의 희생물이 되는 일이 없도록 미리 방지해 주는 것이다. 모태에 아기가 생기는 일과 생명의 영이 그 아기 속에 들어가는 일은 본질적으로 신비이다. "아무도 성령의 길"을 모르며, "어린아이를 밴 여인이 태에서 어떻게 뼈가 자라는지를 모른다'(전 11:5). 우리는 "은밀하게" 만들어졌다(시 139:15, 16). 그런데 아기 예수의 조성은 더욱 "신비"이다. 논쟁의 여지없이, "하나님이 육체 속에 구현하신 그 신성(神聖)의 신비는 크도다"(딤전 3:16). 그것은 "세상에 창조된 전혀 새로운 일"이다.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기록된 이상으로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렘 31:22).
(3) 그녀가 잉태한 어린아이는 "성스러운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 본성이 지니고 잇는 공통 타락이나 죄악에 물들어서는 안 되기에, "일상적인 출생법"으로 잉태될 수가 없었다. 그는 "거룩한 자"라고, 그와 같은 자가 없었다고 강조해서 말해지고 있다. 그는 모든 세대에게 성부(聖父)의 아들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 울 것이다. 이것은 그가 지금 성령으로 잉태된다는 사실에 대한 암시이다. 그의 인간성은 이렇게 탄생되어야 한다. 그래서 신성(神性)과 합치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3. 나이가 많았으나 그녀의 "사촌(한글 개역:'친족'-역주) 엘리사벳도 수태했다"는 이야기는 마리아의 신앙에 더 한층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었다(36절). "여기에 기이한 출발을 한 세대가 이미 있다. 그러므로 그리 놀라지 말라. 그 일은 이 일만큼 그렇게 크지는 않다고 할지라도, 네 친척 중에도 정말 위대한 사람이 있다. 기사(奇事)를 행해 나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통일과 마찬가지이니라. 이 일을 보라. 더 큰 일을 네가 하리라."
엘리사벳은 부친 쪽에서 보면, "아론의 딸"(5절)이지만, 어머니 쪽에서 보면 다윗의 가문이다. 왜냐하면 이 두 가문은 메시야에게서 왕족과 제사장족이 하나로 될 것의 한 전조로서 가끔 통혼했기 때문이다. "본래 수태하지 못하던 그녀가 벌써 6개월이 되었느니라."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의 생각에 의하면, 구약 성서에 나오는, 이른바 장기간의 불임 여인이 아이를 갖게 되는 모든 사례(이것은 자연적인 일 이상의 일이다)는 처녀가 아들을 낳으리라는 믿음(이것은 자연을 거스리는 일이다)을 위해 세상을 준비하려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그래서 이삭의 출생 때에도,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날을 보았다. 즉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탄생을 예견했던 것이다.
그 천사는 "하나님께는 능치 못하심이 없기 때문이라"(37절) (그렇다면 이 사건도 불가능하지 않으리라)는 말로 마리아에게 이 사실을 확신시켜 주었고, 그녀의 신앙에 용기를 북돋아 주었으며, 의심할 필요가 없는 확실성과 보편적인 유용성을 지니고 있는 위대한 진리에로 결말을 지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이 강했기에, 하나님의 약속을 주저하지 않고 믿었다(롬 4:20, 21).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아무 것도 "그에게 불가능하지" 않다면, 하나님의 "말씀" 중 아무 것도 "우리에게 불신되어서는" 안 된다.
Ⅵ. 그녀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그녀의 순종을 보자(38절) 그녀는 고백한다.
1.하나님의 권위에 대해 신실한 복종을 약속했다. "주의 계집종이니다. 주여, 나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를 이행하리이다." 그녀는 결혼을 망칠 위험이나 그녀의 평판에 대한 오점을 생각하여 반대하지 않고, 하나님께 결과를 맡기도 그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했다.
2.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기대하겠다고 했다. 그녀는 그 일이 그렇게 될 것에 흡족해 할 뿐 아니라,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고 간절히 원했다. 그것은 경시하거나 냉담해 할 수 없는 은혜였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이루실"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는 그 약속에 대해 "아멘," 즉 "그렇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내게 희망을 주신, 주의 종에게 주신 주의 말씀을 기억하옵시고," 이루소서. 여기에서 마리아가 그렇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우리들의 소망을 "인도해야"하며, 하나님의 말씀 "위에" 우리의 소망의 "기초"를 두어야 하겠다. "주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말씀이 !
이제 그 천사는 용무를 마치고, 그 일을 보고하기 위해서, 그리고 새로운 지시를 받기 위해서, "그녀를 떠나갔다." 천사와의 대화는 언제나 일시적이고, 곧 끝이 난다. 그러나 미래에는 그것이 길이길이 영속되리라.
동정녀 마리아는 성령의 "덮치는 능력"에 의해서, 바로 그 순간에 "수태"했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 추측이다. 그러나 성서는 그런 사건에 대해서는 조용히 침묵한다. 따라서 우리가 거기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거나 "확신"을 못 가지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마리아의 찬사 (누가복음 1:39-56)
우리는 여기에서 행복한 두 어머니,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면담을 볼 수 있다. 그 천사가 그녀의 사촌 엘리사벳에게 임했던 은총을 마리아에게 알려 주면서(36절), 그 면담의 기회를 준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선한 사람들을 한데 불러들이고 또 의견을 나누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훌륭한 봉사의 일부임을 경험한다.
Ⅰ.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보다 "젊고," 아이도 더 늦게 가졌다. 그래서 둘이 만나야 한다면, 마리아가 자기의 임신이 더욱 중대하다고 내세우지 말고, 직접 엘리사벳을 찾아가는 것이 지극히 합당하였다(39절).
마리아는 "일어났다." 그녀는 보다 중대한 일에 참여하기 위하여 자기의 일을 버려두었다. 마리아는(예레미야가 밝혀 말해 주듯, 렘 33:15; 50:40) "그 날, 그 때에," 즉(생각컨대) 먼저 잠시 예배를 위한 시간을 가진 후, 천사가 나타났던 하루 이틀 후에 서둘러 자기의 사촌의 집으로 갔던 것이다. 마리아는 그 제사장의 집에서 좀 더 여유를 가지며 도움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meta. spoudh/j ─즉 조심스럽게 부지런히(개역은 "빨리"), 그리고 "급히" 갔다. 젊은 여인들은 흔히 "기분 전환"으로 밖으로 친구를 찾아가지만, 마리아는 자기의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 갔다. 그녀는 "산중에 있는 유대 동리로"갔다. 이 말은 그곳 지명이 아니라(수 21:10, 11 과 비교하라). 아마 "헤브론"이 그 지명이었을 것 같다. 왜냐하면 헤브론을 "유다의 산중"에 있는 동리라 했고, 또 그 마을은 아론의 아들들인 제사장들의 소유지였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그곳이 상당히 멀지만 속히 그곳으로 갔다.
1.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그녀가 헤브론에서 가서 우리의 구주를 "잉태"하도록 되어 있었고, 아마도 그 사실이 천사나 그 밖의 다른 방법으로 그녀에게 아주 자세하게 알려졌으므로, 그녀는 그쪽으로 그렇게 걸음을 재촉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제기한다. 라이트푸트 박사는 유대 지파 소속이요, 다윗의 자손인 실로(메시야)는 유다의 동리인 동시에 다윗의 동리인 곳에서 "잉태되어야" 한다고 ─마치 그가 유다와 다윗의 다른 한 동리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했듯이 ─추측을 하고 있다. 헤브론에서 이삭에게 약속이 주어졌고, 할례가 규정되었다. (라이트푸트 말에 의하면) 그곳은 아브라함이 가졌던 첫 번째 땅이요, 다윗의 첫 번째로 왕관을 쓴 곳이다. 또 여기가 세 쌍, 즉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레아 부부가 묻힌 곳이요, 옛 사람들의 주장대로 하면, 아담과 하와가 묻힌 곳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라이트푸트는 이렇게 생각한다. 족장들에게 주어졌던 그 약속이 메시야의 잉태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역사를 통해서 사용하시는 조화의 통일에 전적으로 일치한다고 보는 것이다. 나는 이런 추측이 불가능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래서 엘리사벳이 한 말. "이루어지이다"(45절)는 말이 그런 생각을 가능케 해 준다. 즉 엘리사벳은, 이직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거기(헤브론)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심정인 것이다.
2. 마리아는 자기에게 천사가 보여 줄 표정, 곧 잉태한 그녀의 사촌을 통해서 자기의 신앙을 견고히 하며, 또한 엘리사벳에게도 내려진 그 은혜를 같이 기뻐하기 위해 그리고 달려갔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 외에도, 마리아는 아마 좀더 한적한 곳에 있고 싶었거나, 또는 나사렛에서 보다 더욱 즐거운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그리로 갔을 것이다. 마리아는 나사렛의 이웃에게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자기가 하늘로부터 받은 소식을 알려 주지 않았지만, 그녀가 수천 번이나 "생각했던" 한 가지 사실을 "말하고자" 갈망했을 것이며, 자기의 사촌인 엘리사벳을 제외하고는 "자유스럽게" 이야기할 사람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엘리사벳에게로 발걸음을 재촉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자기들의 영혼에 은총의 선한 역사가 시작되었고, 거기에 그리스도가 "조성"되고 있는 자들이 자기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과 상의하여 자기들의 체험을 서로 나누는 것은 매우 유익하고 고무적인 일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리하면 그들은 수면이 수면과 대하듯, 사람의 마음이 서로 대면하며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서로 대면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Ⅱ. 마리아의 엘리사벳의 만남을 보자. 마리아가 사가랴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벙어리"요 "귀머거리"가 되었으므로, 아마 방안에만 있었을 것이다. 그런 연고로 동반한 흔적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그녀는 "엘리사벳에게 문안하고"(40절), 그녀를 방문하기 위해 자기가 왔으며, 그녀의 동정을 알고 싶었고, 그녀와 기쁨을 나누기 위해 왔다고 말하였다.
이제 그들은 처음으로 함께 만났는데, 그것은 자기들의 신앙을 북돋을 수 있는 비상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이 임신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자기의 사촌 마리아가 메시야의 어머니가 되기로 되어 있다는 것을 이미 들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므로 엘리사벳이 메시야의 잉태에 대해 아는 그 지식은, 마리아에게 대단한 용기를 북돋아 주었을 것이고, 그것은 "계시에"의해서 온 것임에 틀림이 없다.
1. 아이가 "복중에서 뛰어 놀았다"(41절). 엘리사벳에게는 수주간이 "순식간"처럼 지나갔고(이미 6개월이 지났다), 그의 아기가 태동하는 것을 종종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아이가 evski,rthse ─즉 뛰어 놀았다는 것은 비상한 태동이요, 어떤 비상한 일을 엘리사벳이 기대하게 해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뛰놀았다"는 그 원어는 칠십인 역에 의하면, 리브가의 태 속에서 야곱과 에서가 "싸움한 것"(창 25:22), 그리고 산들이 "뛰노는 것"(시 114:4)을 표현할 때 사용한 단어와 같은 것이다. "아기가 복중에서 뛰놀았다"는 것은, 말하자면 태어날 때나 일할 때에 약 6개월 후에 시작될 메시야, 곧 자기 후주자가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자기 어머니 엘리사벳에게 암시한 신호와도 같았다. 또 어쩌면 그 어머니에게 어떤 강한 인상이 주어진 결과인지도 모른다. 이제 천사가 세례 요한의 아버지에게 했던 말 "그는 모태로부터 성령이 충만해지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15절). 또 어쩌면 세계 요한이 "신랑의 목소리를 듣고 신랑의 친구들도 크게 기뻐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지도 모른다(요 3:29)(물론 이때 그는 신랑 자신이 아니라 신랑의 어머니 음성을 들은 것이다).
2. 엘리사벳 자신이 "성령에" 즉 예언의 영에 "충만해"졌다. 그녀는 성령의 특별한 제안에 따라서 메시야가 가까워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메시야에게서 예언은 부활하게 된다 ─그를 통해서 성령이 어느 때보다 더 충만히 부어진다. 그리하여 그것은 "이스라엘의 위안을 기다렸던" 자들의 기대에 부응된다. 엘리사벳의 모태에 있는 아기의 비상한 거동은 그녀가 하나님의 감동을 입고 있음을 표시해 준 것이다. 그리스도가 은혜스럽게 찾아 주는 사람들은 "성령 충만"에 의해서 그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왜냐하면, "만일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Ⅲ. 엘리사벳은 예언의 영에 의해 우리 주(主)의 어머니를 평범한 친구의 흔한 방문이 아닌 메시야의 어머니가 될 사람으로 환영했다.
1.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영광을 축하했다. 그녀는 아마도 그 일에 대해 "지금까지는" 몰랐었으나, 바로 지금 아주 큰 확신과 만족으로써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엘리사벳은 "큰 소리로 말했는데," 그것은 (혹자가 생각하듯이). 그들 사이에 어떤 막힌 담이나 장벽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전혀 아니며, 단지 즐거움으로 기뻐하며 황홀해 있어서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한 것이다. 그녀는 "그대는 여인 중에 축복 받은 자"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천사가 했던 말과 같은 것이다(28절). 아들의 영광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이루어진" 그대로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당신이 태중의 열매(개역은 "아이")도 복이 있도다"라고 그 축복의 이유를 첨가하고 있다. 마리아가 이렇게 탁월한 위엄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았고, 제사장의 아내였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보다 훨씬 연소하며 모든 면에서 자기보다 못하나 처녀로 잉태하는 영광을 입었으며, 메시야의 어머니로 자기보다 훨씬 더 큰 영광을 입은 자기의 친척 여인 마리아에게 "질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나중에 자기 아들도 그렇게 된다─그것을 "기뻐했다." 즉 "자기 뒤에 오는 자가 자기보다 위대하다"는 사실을 기뻐했다(요 1:27). 우리는 우리에게 합당한 것 이상으로 하나님에게 "은혜"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한, 결코 다른 사람이 "더 풍성한" 은혜를 입었다고 해서 그것을 부러워하지 말자.
2.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방문을 보고 그녀의 겸손을 시인했다. "나의 주의 모친이 나에게 찾아오니 어찌된 일입니까?" 하고 말했다(43절). 관찰해 볼 바가 있다.
(1) 그녀는 메시야가 "만물의 주"가 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동정녀 마리아를 "나의 주의 어머니"(다윗도 영적으로 메시야를 주, "나의 주"라고 불렀다)라고 불렀다.
(2) 그녀는 마리아가 미천한 환경에서 온 자이지만, 자기 집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이 방문은 자기에게 큰 은혜라고 생각하고, 자기는 그것을 감당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게 어찌된 일입니까?" 하고 말했다. 이 말은 실상 불평이 아니라, "내가 기대하지 못했던 커다란 은혜입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성령으로 가득찬 사람들은 자기들의 공적을 "천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 생각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녀의 아들인 세례 요한도 이런 입장에서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 3:14)라고 말했었다.
3. 그녀는 자기의 몸 속에 잇는 아이도 기쁨으로 마리아를 맞이한다고 알려 주었다(44절). "그대는 확실히 어떤 비범한 소식과 축복을 가지고 왔도다. 왜냐하면 당신의 인사하는 소리가 내게 들리자마자, 그 이유와 원인을 직접적으로는 모르는 내 가슴이 기뻐 뛰었을 뿐만 아니라,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내 태중의 아기도 그러했도다." 그 태중의 아이는 사실 자기가 메시야의 선구자가 되며, 그 메시야가 자기를 따라 곧 태어날 것이라는 사실에 "기뻐 뛰었다." 이렇듯 남들에게 알려졌다는 사실이 그 동정녀의 믿음을 더 강하게 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으리라. 그리고 그것은 이미 자주 예언되었던 것의 부분적인 성취이다. 즉 주가 오실 때에는, "주 앞에 만인의 기쁨이 있으리라"고 했다(시 98:8, 9).
4. 엘리사벳은 그녀의 신앙을 칭찬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믿는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45절). 믿는 자는 목 있는 자며, 마침내는 그것이 사실로 드러날 것이다. 이 축복은 "신앙을 통해서" 오며, 그리스도와 연관되는 축복도 그러하며, "영혼에다 그를 조성하는" 축복도 그러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는 복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그들로 하여금 실족치 않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의심할 바 없이, "주께서 그 여인에게 들려주신 일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약속이 지니는 범할 수 없는 확실성은, 그 약속 위에서 있으며, 거기에다 모든 기대를 걸고 있는 사람들의 더할 나위 없는 행복임을 명심하자. 하나님의 신실성은 곧 성도의 신앙의 축복이다. 하나님이 말씀을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신 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위해 행하신 바를 너에게 말하리라"고 말해 줌으로써, 하나님은 그들에게도 신실하리라는 것을 믿도록 독려해야 한다.
Ⅳ. 이 일로 인해 마리아는 찬양의 노래를 드렸다. 엘리사벳의 예언은 동정녀 마리아의 문안에 대한 응답이며, 이 노래는 엘리사벳의 예언에 대한 보다 강한 "메아리"이다. 그리고 엘리사벳보다 더욱 성령이 충만함을 그녀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동정녀는 여행 때문에 매우 "지쳐서" 들어왔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마리아는 그 피로를 잊고, 엘리사벳의 신앙과의 만남에서 더욱 힘을 얻어 새로운 생명과 힘과 기쁨을 가지게 되었다. 이 갑작스런 영감과 환희에 의해서, 그녀는 자기가 여기에 온 사명이 이것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자기는 몹시 피곤하지만 아브라함의 종처럼 그녀는 "자기의 일을 진술하기 전까지는 먹지도 마시지도" 안고자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창 24:33 참조).
1. 여기에는 기쁨과 찬양의 표현이 있으며, 하나님 홀로 그 찬양과 기쁨의 중심이 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 노래를─모세의 누이요, 마리아와 이름이 같은 ─미리암이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행한 개선의 출발과 홍해를 건넌 개선의 도해(渡海) 사건에 대한 노래와 비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보다 훌륭하게 ─이 경우와 비슷하게 대중과 일반인을 위해서 가정의 보호로부터 떠난 사람, 사무엘의 출생에 즈음하여 노래한 한나의 노래와 비교한다. 한나의 노래나 마리아의 노래는 모두 "나의 마음은 주안에서 기뻐한다"는 말로 시작된다(삼상 2:1), 여기에서 마리아는 하나님에 관해 어떻게 이야기했는가를 알아보자.
(1) 그녀는 하나님을 깊은 경외심을 가지고 "주"라고 말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나이다. 나는 지금 주가 선하심을 알았는데, 이전에는 이토록 그가 위대하심을 몰랐도다"라고 했다. 하나님을 보다 더 "높고" "영광스럽게" 생각하게 된 자들, 그리고 그들만이 자비에 의해 "진출한" 자들이다. 반면에, 출세하고 잘 되면, "우리가 섬겨야 할 전능하신 분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고 말하게 되는 자들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더 많이 임하면 임할수록, 우리는 그에게 더 많은 영광을 돌려보내려고 애써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가 그를 찬양하는 것으로 인정될 것이다. 즉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 안의 모든 것"이 하나님을 찬양할 때 말이다. 찬양하는 일은 영혼으로 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2) 하나님을 "자기의 구주"로서, 큰 만족감으로 말했다.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나이다." 그런데 이 말은 아마도─자기가 그 어머니 될─메시야를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녀는 메시야를 "하나님 나의 구주"라고 불렀다. 그것은 천사가 메시야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아들"이요, 그의 이름은 "예수, 곧 구주"라 하라고 그녀에게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나의 구주입니다 !"라고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켰다. 우리 주의 어머니까지도 그를 자기의 구주로 삼는, 그와의 특별한 관계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그녀도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에게만 있는 특별한 영광이 메시야의 어머니가 된 것보다도 모든 믿는 이들과 더불어 공통으로 갖는 그 행복을 더욱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 그리스도가 자기의 어머니와 형제들보다 복종적인 신자들을 더욱 우위에 둔 것과 일치한다(마 12:50; 눅 11:27, 28, 참조).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구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기뻐할, "심령으로 기뻐할"─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가졌던 그런 기쁨이다(눅 10:21)─영으로 기뻐할 커다란 근거를 소유하게 된다.
2. 여기에 이렇게 기뻐하고 찬양하게 되는 정당한 이유가 나와있다.
(1) 그녀 자신에 대한 이유 때문이다(48,49절).
[1] 그녀의 "마음이 주를 기뻐하였다." 이유는 주께서 자기에게 "이런" 일을 베푸셨기 때문이다. 즉 그녀에 대한 주의 "겸비"와 "동정" 때문이었다. "주는 그의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도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주께서 그녀를 "동정어린 눈으로" 살피신 것이다. 원문이 그런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분은 나의 비천함과 가난과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이 영광으로 나를 선택해 주셨도다"고 말한 것이다. 아니, 그 표현법을 보면(기드온의 경우와 같이, 삿 6:15) 그녀의 "가족"은 유다에서 가난하게 지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도 "그녀의 아비 집에서 가장 작은 자"였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는 듯하다. 마치 그녀는 어떤 특정한 치욕을 입고 있으며, 친척들 둥에서도 수치를 당하고 있으며, 부당하게 무시 받고 있으며, 그 집안에서는 버린 자와도 같은 위치에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모든 경멸을 능히 상쇄할 수 있는 이같은 영예를 그녀에게 허락하셨다는 듯한 말투이다. 내 생각으로는 그렇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본다면, 다른 자들에게도 이 비슷한 영예를 부여한 일을 찾아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레아가 "미움을 받는" 사실을 아시고는 "그녀의 태를 열어" 주셨기 때문이다(창 29:31). 또 한나가 브닌나로 인해서 고달프게 되고 역정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게 되자, 하나님은 그녀에게 아들을 주신 적이 있기 때문이다(삼상 1:19).
사람들이 어떤 자를 악의로 억압하고 멸시하면, 하나님은 그들이 그런 일을 인내로 감수하는 것을 보았을 때는 종종 그에 못지 않는 큰 영달과 진출을 허락해 주신다(삿 11:7 참조). 마리아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녀의 천함을 돌아보셨다"면, 그것은 시편 기자가 말하듯이(시 136:23) "각자의 천함을 기억하신"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다는 한 전조를 보이신 것이요, 그녀에게 영원한 영예를 보장해 주신 것이다(하나님이 주시는 영에는 시들어 버리지 않는 영예이다). "이후로부터 모든 세대가 나를 복되다 하리라. 나를 행복한 여인이요 지극히 영달을 누린 여인이라 생각하리라."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받는 모든 자들은 "그를 나은 태와, 그에게 젖을 물린 그 젖은 복되도다"라고 찬양할 것이다(눅 11:27). 엘리사벳도 다시 한 번 그녀를 "복되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로다. 유대인들뿐 아니라 갈릴리의 모든 세대들도 나를 그렇게 부르리라"고 그녀는 말했다.
[2] 그녀는 "영혼이 주를 찬양했다."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그의 "놀라운" 일 때문이었다(49절). "전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도다." "처녀"가 "수태"했다는 것은 실로 "큰" 일이었다. 그토록 오래 교회에 약속되어 왔고, 그처럼 오래 교회가 대망해 오던 메시야가 마침내 탄생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큰"일이로다. 이렇게 하여 나타난 것은 "지극히 높으신 자의 권능"이다. 그녀는 "그리고 그의 이름이 거룩하도다"라고 첨부했다. 한나도 찬송할 때 "주 외에는 거룩하신 이가 없나이다"라고 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나서 한나는 "주 외에는 다른 이가 없나이다"라는 그 마음 말로 그 사실을 설명했었다(삼상 2:2).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다. 그는 특히 우리를 구속하시는 사건 속에서 당신의 그러함을 보여 주셨다. "능하시고" "그의 이름이 거룩하신" 분이 "내게 큰 일을 행해 주셨도다." "능하시고" "거룩하신" 분에게서는 영광스런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고, "또 모든 것이 잘," "최상으로" 되도록 "원하시는" 분이시다.
(2)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서이다. 메시야의 어머니, 동정녀 마리아는 일종의 공인(公人)이 되었고, 공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므로 즉시 다른 정신이 부여되었다. 즉 이전의 그녀보다 더 공적인 정신을 소유하게 되었다. 따라서 "멀리 보고," "주위를 살피고," "자기의 앞을" 보게 되었고, 인생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여러 가지 행위를 깨닫게 되었다(50절 이하). 한나도 그렇게 되었었다(삼상 2:3 이하).
이 사건을 통해서 보면, 그녀는 특히 구속주의 도래를 안중에 두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 사건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1] "하나님은 그의 엄위(한글 성경에는 없음)를 두려워하는 모든 자들" 그리고 그의 주권과 권위를 깨닫고 있는 모든 자들을 위해 "자비를 쌓아두셨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실은 그가 자기의 아들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으로 보내시기까지는 결코 그렇게 밝히 나타나지는 않았던 사실이다. "그의 자비가 그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있도다"(50절). 이것은 항상 그랬었다. 하나님은 "충성된 두려움"의 눈으로 자기를 바라다보는 "자들"에게는 "특별한 은혜"의 눈으로 항상 하감하셨다. 그의 아들을 보내사 세상이 영원한 의를 도래하게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위해 영원한 구원을 역사하며, "세세토록" 이러한 은혜가 미치게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영원히 계승되어 나아갈 복음의 특권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자기들의 조물주와 심판자로 삼아 "두려워"하는 자들은 중보자와 변호자를 통하여 "그에게서 자비"를 기대할 희망을 격려 받는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든 자들을 위해 "자비," 용서하는 자비, 치료하는 자비. 용납하는 자비, 면류관을 씌우는 자비가 이 세상이 존립하는 한 계속 "세세토록" 주어져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다 "수천인(人)을 위한 자비를 간직하고 계신다."
[2] 하나님이 섭리를 통해서 "교만한" 자들을 "낮추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영예"를 주신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이 사실은 인간을 구속하는 전체의 경륜 속에서 아주 뚜렷이 드러나는 일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자비"를 그녀에게 베풀고, 자신의 "능하심"을 입증하셨듯이(48,49절), 역시 "그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자비"를 보이심으로써 "그의 팔의 강하심"을 입증하셨다.
첫째, 하나님은 섭리의 과정 속에서 흔히 "인간의 기대를 물리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고, 인간이 스스로에게 약속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경륜이 있다는 것을 보이셨다. "교만한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기들 마음대로 처리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의 생각을 어지럽히신다." 그들의 계획을 꺾고, 그들의 목표를 좌절시키신다. 나아가 그들을 낮추시고, 그들이 자기들의 영달에 방편이 되리라고 믿고 있던 자로 그것들을 이용하여 그들을 하락시키신다. "권세" 있는 자들은 "자기들의 보좌에" 편히 앉으리라고 자부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내려앉게" 하시고, 그 자리를 전복시키신다. 한편, "낮은 자리"에 처하여서 결코 자기들의 출세를 꿈꾸어 보지 못하던 자들, "언제나 낮은 데" 있으리라는 생각밖에는 할 수 없던 자들은 이상하게도 "존귀하게" 된다.
"명예"에 대한 이러한 관찰은 역시 "재물"에도 그대로 통한다. 너무나 가난하여서 자기들과 식구들이 먹을 양식도 없던 많은 자들이 섭리의 놀라운 전환으로 인하여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되는 때도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부자들, 내일도 오늘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자기들의 산이 영영 서고 결코 떠나지 않으리라고 크게 믿고 있던 자들이 이상하게도 영락되고 "빈손으로 떠나게 된다." 또 이러한 관찰은 한나가 깨달은 바요, 자기 자신과 자기 원수들의 처지에 적용하여 자세히 찬송을 드리는 중에 나타났던 그 관찰과 같은 것이다(삼상 2:4-7). 그런데 그 사실은 여기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그리고 시편 107편 33-41절과 113편 7-9절, 그리고 전도서 9장 11절을 비교해 보자.
하나님은 스스로에게 이 세상에서 "큰 것"을 차지하리라고 자부하는 자들에게는 그 기대를 "좌절"시키기를 즐기며, 자신들에게 작은 것"을 기대하는 자들의 소망을 "넘치도록 이루시는" 것을 기뻐하신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스스로를 "높이는" 자들을 "비천하게" 만들고, 그 방심에 공포를 가하시는 것은 그의 영광이시다. "자비로운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는 자들을 높이고, 그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위안을 전해 주는 것은 역시 그의 영광이다.
둘째, 이것은 복음의 은혜로운 방법 속에 특히 잘 나타난다.
"영적 존귀함" 속에서 드러난다. 교만한 바리새인들이 거부되고, 새리들과 죄인들이 그들보다 먼저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될 때─"의의 율법을 좇는" 유대인들이 의에 이르지 못하고, 생각지도 못하던 이방인들이 의에 다다르게 될 때(롬 9:30, 31)─하나님이 "육을 따라 지혜로운 자나 권세 있는 자를, 또는 귀인들"을 선택하여 복음을 전파하게 하지 않고, 세상의 "어리석고 약한" 자들, 멸시받던 자들(고전 1:26, 27)을 택하여 복음을 전파하게 하실 때─바로 그 때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권세자들을 낮추시되" "낮은 자들은 높이시"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양떼를 지배하며" 언제까지나 그렇게 되기를 멸시받던 일단의 어부들인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들에게 부여된 권능으로 "보좌에 앉아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 때 ─4 계급의 군주의 권력이 무너지고 "손으로 빚지 않은 산에서 파낸 돌"인 메시야의 나라가 "땅에 충만하게" 될 때─바로 그때에 "교만한 자들은 흩어지고," 낮은 자들은 높아진다."
또한 "영적 재물"에서도 드러난다(53절).
① 그리스도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자들, 그래서 그분 안에서의 의와 생명을 목마르게 갈망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좋은 것," "최상의 것"으로 "배부르게 하신다." 그는 그들에게 아낌없이 주신다. 그리고 그들은 그가 주시는 축복으로 "흡족히 배부르게" 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은 그리스도에게서 안식을 찾을 것이다. 또 목마른 자들은 "그에게 나아와 마시라"는 부름을 받으리라. 그들만이 그의 은사의 진가를 알기 때문이다. "굶주린 자들에게는 모든 쓴 것도 달데 된다." 만나는 천사의 음식이다. 그리고 그 "목마른" 자들을 위해 "반석에서 꿀이 나온다."
② 부유한 자들, "굶주리지" 않은 자들, 라오디게아 교회같이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자들, 이미 만족하고 있고, 자기 자신들의 의로 충만해 있는 자들을 그는 문밖으로 "내어쫓는다." 그들은 그에게 영접되지 못한다. 그는 그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시며, 그들은 "자아로 가득 차게" 되고, "그리스도 없이" 버림을 받는다. 그는 그들이 "섬기던 진들"에게로 그들을 보내시며, 그들이 신임하고 있던 자기 나름의 의와 힘으로 보내신다.
[3] 메시야는, 특별한 의미에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힘과 영광이 되어 주시리라는 것은 언제나 기대되어 왔던 바이다. 그리고 이제 메시야는 특별한 의미에서 그렇게 되셨다. "그는 그의 종 이스라엘을 avntela,beto-즉 도우셨다(54절). 그는 그들을 손으로 붙드셨고, 넘어져서 더 이상 스스로 구제할 수 없는 자들을 "도우셨다." 무흠한 계약의 파괴로 인해서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고 영락 되었던 자들은 은총이라는 갱신된 계약의 축복에 의해서 "도우심을 받는다." 가엾은 죄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메시야를 보내심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이 받을 수 있는 최상의 도움이다. 그리고 그 사건은 이런 뜻을 지니고 있다.
첫째, 그것은 "그의 자비를 기억하심"이다. 즉 메시야의 본성적인 자비, "그의 종 이스라엘"을 위해 쌓아 놓은 자비를 기억해서였다. 이 축복이 지연되는 동안, 그 축복을 기다리던 그의 백성은 "하나님이 긍휼을 잊으셨는가?"라는 말을 종종 했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잊으신 것이 아니라 "자비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히 나타났다. 하나님은 자기의 이전의 자비를 기억하셨고, 이전에는 "현세적" 은혜로 베푸시던 것을 이제는 "영적" 축복으로 그들에게 반복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옛날을 기억하셨도다." "그들을 바다에서" 곧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이가 어디 계신가?"(사 63:11) 그는 그 사건의 실체가 되는 원형을 다시금 행하실 것이다.
둘째, 그것은 "그의 약속을 이행하심"이다. 그것은 계획된 자비일 뿐만 아니라 이미 선포된(55절) 자비이다. 그것은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 바로 그것이다. 즉 여인의 후사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고 하셨다. 또 하나님이 셈의 장막에 거하시리라 하셨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에게는, "그의 후손으로 땅의 모든 족속이 축복을 받으리라"고, "영원한" 축복을, 그리고 영원한 후손들에게 주시리라고 하셨다. 즉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에게이다. 왜냐하면 이 사건 있은 지 얼마 후 아브라함의 "육의" 후손은 "끊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가 말씀하신 바를 실행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조상들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셨든지, 그것은 그 후손들에게서 이루어진다. 그의 후손의 후손들에게 영원한 축복이 있게 된다.
끝으로, 마리아는 "석달 간" 엘리사벳과 같이 유하다가 나사렛으로 돌아갔다(56절). 석달 간이란 "수태한" 여인으로서는 최대한 오래 있은 것이요, 그동안 그는 자기의 사촌 엘리사벳에 의해서 확신을 더했다. 흑자는 생각하기를 여기에 보면 엘리사벳이 해산하기 전에 마리아가 고향으로 돌아간 것처럼 되어 있지만 ─왜냐하면, 복음서 기자는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를 끝맺고 싶었던 것이다 ─마리아는 자기의 사촌이(소위) "누웠다가 다시 일어날" 때까지 그대로 머물렀다고 한다. 그래서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시중들어 주고, 해산을 도와주며, 엘리사벳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완전히 실현되는 것을 보고 자신의 믿음을 돈독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문에 나와 있는 이야기의 순서를 사실상의 순서로 잡는다. 그래서 마리아는 엘리사벳이 해산할 때가 가까워 오자 다시 돌아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여전히 조용히 살고 싶어했고, 따라서 약속의 자녀의 출생이 그 집에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게 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 한다. 마음에 그리스도가 형성된 자들은"홀로 앉아 조용히 있는 것"을 이전보다 더욱 즐기게 된다.
세례 요한의 탄생 (누가복음 1:57-66)
여기에 나오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세례 요한의 탄생(57절). 비록 요한은 기적으로 잉태되었지만 자연의 보편적 추세에 따라 모태에서 계속 자라고 있었다(우리의 구주께서도 마찬가지였다). 엘리사벳은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약속된 자비는 기한이 찰 때에야 기대할 수 있지 그 전에는 기대할 수 없다.
Ⅱ. 이런 비상한 일을 당하자 그 집의 모든 친척들은 큰 기쁨을 누렸다. "그 이웃과 친족은 그 일을 들었다." 그 일은 기적에 버금가는 일로 인구(人口)에 희자되었던 까닭이다. 라이트푸트 박사(Dr. Lightfoot)는 헤브론이 아론 가계의 제사장들 거주지였으며 본문에서 언급하는 친척은 바로 이들이라고 진술한다. 또한 그는 주변 평야와 촌락에는 유다 자손이 거주하였고, 그들이 바로 본문에서 말하는 이웃이라고 관찰한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사실은 다음 두 가지이다.
1.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존경. 그들은 주께서 그녀에게 대한 자비를 크게 하셨다(원뜻은 그러함)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녀의 치욕을 제거하신 것은 자비였고, 그녀의 가계를 일으켜 세우신 것도 자비였으며 하나님께 헌신하고 그를 위해 종사하는 제사장 가족이 되게 하신 것은 한층 더 큰 자비였다.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이 병발(倂發)하여 그 자비를 크게 하였다 즉 엘리사벳은 오래도록 아이를 배지 못하는 여자였는데다 이미 노경에 이른 여자였다. 특히 그 아이는 주께서 보시기에 큰 자가 되리라고 것이다. 이런 여러 일들은 그 자비를 크게 하는 데 기여하였던 것이다.
2. 엘리사벳에게 대한 호의적 존중심. 그녀가 즐거워할 때 그들도 함께 즐거워하였다. 우리는 우리 이웃과 친구들의 형통을 즐거워하고 그들의 위안을 우리자신의 위안이나 다름없이 감사해야 마땅하다.
Ⅲ. 그의 이름을 짓는 일에 대해 그들 간에 있었던 논란(59절). 하나님이 지정하신 팔 일이 되매 그들은 아이들 할례 하러 왔다. 할례가 최초로 규례화 된 곳이 여기 헤브론이었다. 이삭은 세려 요한처럼 약속에 의해 태어난 사람으로 맨 먼저 약속에 바쳐진 자 중 하나였고 적어도 약속의 규례에 주안점을 두게 된 자였다. 요한의 출생을 즐거워하던 자들은 그를 할례하는 일에도 함께 왔다. 우리가 자녀들한테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위로는 그들을 하나님께 바치고 그들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인식으로 데 있다. 우리는 자녀의 세례를 탄생보다 더욱 기뻐해야 한다.
그때는 자녀를 할례하고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는 일은 관습이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새 이름을 주사 아브라함이라고 부르셨던 것이다. 하나님께 이름으로 바쳐진 자가 되기까지 이름 없이 지낸다고 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1. 어떤 자는 그가 자기 아비의 이름 곧 사가랴로 불리워야 한다고 제의했다. 우리는 그 아이가 자기 아비의 이름을 물려받아야 한다는 사례를 성서 안에서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서도 볼 수 있는 관습은 아마 나중에 가서야 유대인 사이에 사용되었던 것 같다. 그들은 이렇게 하여 딴 아이를 더 낳을 것 같지 않은 부친을 영예롭고 하고자 했을 것이다.
2. 그 어머니는 그 제의에 반대하고 요한이라고 부르기를 원했다. 그녀는 성령에 의한 영감으로든 자기 남편이 써 준 글씨로든 하나님께서 아이의 이름을 요한으로 정하셨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요한이라 할 것이라"(60절). 그는 요하난(Johanan)이라고 불릴 것이다. 요한이나 요하난이란 말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운 선물을 뜻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소개할 자였고, 하나님의 은혜는 그 복음 속에서 어느 때보다 많은 광채를 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3. 친족들은 이에 반대했다.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61절). 그러므로 그를 아비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으려거든 친족 중 어떤 이의 이름을 따서라도 이름을 지어 주라. 그러면 그는 이와 같은 기적의 아이가 자기 이름으로 불리우는 것을 명예로 여기게 될 것이다." 친구된 자가 우정을 표시해야 하듯, 친척된 자는 친척으로서 보통 치러야 할 모든 관심사에서 그들에게 잘해 주어야 한다는 걸 명심하자.
4. 그들은 부친에게 물었다. 그들은 그의 심중을 알게 될 수 있는지 시험하고자 하였다.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은 부친의 직분에 속했던 때문이다(62절). 그들은 그에게 형용해 주었다. 이로써 보건데 그는 벙어리였을 뿐만 아니라 귀머거리이기도 하였던 것 같다. 아니 그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누구나 그들이 처음부터 그에게 아이의 이름을 쓰도록 하려고 했으리란 생각을 할 수 있다. 그가 만일 그렇게 된 뒤 기록으로 의사 소통을 했더라면 그들은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할 수 있는 데까지 일을 밀고 가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논란이 일고 있는 게 무엇인지를 그에게 이해시키고자 하였다. 그것은 그만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에 대해 그는 그들에게 서판을 갖다 달라는 시늉을 하였고, 서판은 당시 사용되던 탁상용 기록부였다 그는 연필로 "그 이름은 요한이라"(63절)고 썼다. "그의 이름은 요한이 될 것이다"라거나 "그 이름은 요한으로 하였으면 좋겠다"가 아니라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라고 못박았다. 그 일은 이미 결정이 난 것이다. 천사가 그에게 그 이름을 지정해 주었던 것이다. 사가랴가 말할 수 없을 때 썼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자. 목사들은 입막음을 당하여 설교할 수 없을 때에라도 손이 묶여 쓰지 못하게 되어 있지 않는 한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순교자들이 감옥에서 친지들에게 편지를 썼고, 그것은 크게 소용이 되었던 것이다. 복된 바울 선생도 친히 그렇게 하였다. 사가랴가 엘리사벳이 택한 것과 꼭 같은 이름을 선정한 사실도 무리들에게 큰 놀라움이 되었다. "다 기이히 여기더라." 그들은 사가랴가 귀가 먹고 말을 못하였기 때문에 엘리사벳과 상의할 수 없었지만 그 둘이 한 분이신 동일한 성령의 인도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기이히 여긴 것이다. 아니면 그들은 아마 사가랴가 너무나 분명하고 너무나 이성적으로 썼으며(그의 증세는 중풍병자의 마비 증세와 비슷하였다), 이전에는 그와 같이 쓰지 못하였으므로 기이히 여겼을 것이다.
5. 그는 언변을 회복하였다. "이에 그 입은 곧 열렸다." 벙어리가 되리라고 미리 정한 시기는 "이 일이 되는 날까지였다"(20절). 요한의 사역에 대해 선행하는 "모든 일"이 아니라. 그의 탄생과 이름에 관련된 일이 이루어지기까지만 이었다(13절). 그 시기가 만료된 것이다. 속박은 해제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하신 것같이(겔 3; 27) 그이 입을 열어 주셨다. 라이트푸트(Light foot) 박사는 사가랴의 경우와 모세의 경우를 비교한다(출 4:24-26). 사가랴가 불신으로 벙어리가 된 것 같이 모세는 생명의 위협까지도 받았다. 그러나 사가랴는 본문에 나오는 대로 자기 아이의 할례에 즈음하여 믿음을 회복하고 위험은 제거되었다. 불신은 그의 입을 봉하였지만 이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입은 다시 열린다. "저가 믿으매 말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다윗은 자기 아이의 잉태일부터 출생 후 수일까지 죄 아래 있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그의 죄를 사하셨고, 그가 회개하자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삼하 12:13). 마찬가지로 여기서 사가랴는 이상 더 벙어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 입을 열어 주실 때 우리 입에서 하나님께 대한 찬송 소리가 발해져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사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말이 없는거나 매 한 가지다. 말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될 때 우리에게는 혀가 가장 큰 영광이 된다.
6. 이 일들은 전국에 퍼져서 드는 자는 모두 크게 놀랐다(65, 66절). 우리는 사람들의 감정을 무시해선 안 되고 주목해야 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1) 이 모든 말들은 유대 산중에 두루 퍼졌고 모든 사람의 화제 거리가 되었다. 그 이야기들이 작성되어 즉각 세상에 공포되지 않았다는 것은 유감이다.
(2) 이 일에 대해 들은 사람은 그로 말미암아 대경실색하게 되었다.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였다." 우리는 복음 위에 구축된 선한 소망을 품어야 마땅하다. 만일 우리가 그런 소망을 품고 있지 못하다면 그 소식이 우리를 두려움에 가득 차도록 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그들은 믿고 기뻐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이에 반해 그들은 믿으면서도 떨었던 것이다.
(3) 그 일은 이 아이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를 불러 일으켰으며 그들로 하여금 그 아이를 주목하게 하였다. 그들은 그 아이가 무엇이 될 것인지 눈여겨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이 전조를 마음에 두었다. 그들은 나중에 이 일들을 회상할 때가 있을 것으로 예견하면서 마음과 기억에 담아 두었다. 우리는 우리가 듣는 것 즉 우리에게 유용할 수 있는 것을 비장해 두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새"것과 옛 것을 막론하고 끄집어내어 타인에게 혜택이 되게 할 수 있다. 또 그 일들이 이루어질 때는 그 전조를 회고하면서 "그 일은 우리가 예기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속으로 또 그들 사이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 아이는 장차 어찌 될꼬? 이들이 싹이라면, 또는 그토록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혹은 뿌리, 사 53:2)라면 그 열매는 어떠할 것인가?" 아이들이 세상에 태어날 때 그들이 어떤 인물로 판명될 것인지는 불확실하다는 데 주목하자. 그러나 모세나 삼손, 사무엘, 본문의 요한 등의 탄생처럼 때로는 위대한 어떤 점이 초기에 징후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세례 요한이 자신의 공적 사역을 시작했을 당시 이 일을 기억하고 남에게 말해 줄 사람들이 일부 생존해 있었으며 이것은 어느 무엇보다 군중의 운집에 더 많은 기여를 했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다.
마지막으로, "주의 손이 저와 함께 하셨다"고 하고 있다. 즉 그는 출생시부터 모종의 위대하고 괄목할 만한 일에 내정된 자로서 전능자의 특별 보호 아래 있었고 이에 대한 예증은 여러 가지였다. 동시에 성령께서는 매우 일찍부터 그의 영혼에 역사하셨던 것 같다. 그가 말이나 걷기를 시작하던 순간에 아마 그에게서 매우 비상한 점을 감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유아기의 아이들에게 효과를 나타내게 하실 방법이 있으시다는데 유념하자. 하나님께서는 성화시키실 줄 모르시는 영혼이라곤 하나도 맏으시지 않으셨다
사가랴의 찬가 (누가복음 1:67-80)
여기에는 사가랴가 자기 입이 열리자 하나님을 찬양하고 부른 노래가 나온다. 본문에는 그가 예언했다고 되어 있는데(67절). 극히 엄밀한 의미에서 그는 예언했던 것이다. 모든 예언자가 증거 하는 것은 바로 이 메시야의 나라에 대해서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Ⅰ. 그는 이 일에 매우 적격이었다. 그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고 이 목적을 위해 보통 양이나 정도 이상의 성령을 부여받았다. 그는 신적 영감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불신앙과 불신뢰를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이것은 그에게 대한 형벌의 면제로 예고되었다), 믿는 자에게 대한 풍족한 은혜의 표본으로서 성령의 충만함도 주셨고, 하나님의 영예를 위해 기를 사용하신다는 영예도 그에게 부여하셨다.
Ⅱ. 그의 찬가의 내용. 여기에는 그 자신의 집안의 개인적 일에 관한 말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즉 그가 득남으로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여가가 있었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이 아이의 탄생을 통해서 비난을 제거한다든가 명성을 높인다든가 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하지 않았다. 그는 이 찬가에서 전적으로 메시야 왕국과 그를 통해 도입될 공적 축복에 몰두하고 있다. 그는 만약 이 일에서 예루살렘의 복과 이스라엘의 평강과 시온에서 나오는 복을 예견하지 못했다면(시 128:3, 5, 6)자기 "포도나무의 다산성"과 자기의 "어린 감람나무의 유망성"도 거의 즐거워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구약 예언은 왕상 찬미와 새 노래로 표현되는데 신약 예언의 시작인 이 찬가 또한 그렇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여. 주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시리로다." 사가랴는 구속 역사를 언급하여 하나님을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구속에 대한 예언과 약속과 표징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졌고, 구속은 그때 처음으로 이스라엘에게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선민으로서의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서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예표였다. 하나님께서는 구세주를 보내심에 있어서 특히 이 민족을 주목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여기에서 하나님을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고 부른다.
1. 사가랴는 이제 메시야께서 친히 이루실 구속 역사를 인하여 하나님을 송축한다(68-75절). 그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을 때 그를 꽉 채운 것은 바로 이 점이었고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모든 자가 충만해 있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1) 메시야를 보내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은혜로이 돌아보셨다.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자기 백성을 소홀히 여기시며 그들과 사이가 뜸한 것처럼 보이셨다. 그는 그들의 사정을 인식하는 친구처럼 그들을 돌아보셨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을 때는 속박 중에 있는 그들을 권고하셨고(출 3:6; 4:31)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을 때는 기근 중에 있는 그들을 돌아보셨다고 한다(룻 1:6). 그는 틈틈이 그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셨으며 그들과의 통신을 계속 유지하셨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을 직접 찾아오셨다.
(2) 그는 자기 백성을 위해 속량을 이루셨다. "그는 자기 백성을 속량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이 일 때문이다. 즉 죄에 대해 팔린 바 되고 죄 아래서 팔린 바 된 자들을 속량 하려는 사명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하나님 자신의 백성, 즉 그의 이스라엘이요, 그의 아들이요, 그의 맏아들이요 나면서부터 자유한 자이던 그들조차 속량 받을 필요가 있으며, 구속함을 받지 않으면 멸망할 터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값을 주고 그들을 하나님의 공의로운 손길에서 속량하시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부터 구출하셨듯 사탄의 잔인무도한 손길로부터 권능으로써 그들을 구원하신다.
(3) 그는 극히 유명한 "구약의 제왕" 곧 다윗과 맺으신 "왕위의 언약"을 성취하셨다. 다윗의 가계에 대해서는 영화로운 일들이 약속되었다. "돕는 힘"이 능력 있는 자로서의 그에게 더해지며, "그 뿔이 높아질" 것이고 그 "후손"이 영원히 끊이지 않으리라는 것이다(시 89:19, 20, 24, 29). 그러나 그 가계가 어느 정도 노여움을 입어 물리침을 당한지가 오래되었다. 이제 여기서는 약속대로 다윗에게서 다시 불이 나게 하리라(시 132:17)는 것으로 다윗 집은 영화롭게 된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기 때문이다(69절). 그 일은 약속된 일이었고 기대되던 일이었다. 다윗은 선량한 사람으로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다스리는" 왕으로서도 하나님의 "종"이라 불린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통치에 발탁됨으로써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정사(情事)"가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히 5:9). "우리를 위한 구원"은 그리스도께 있으며 그에게만 잇고 그것은 "구원의 뿔"이 된다.
[1] 그것은 "명예로운" 구원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구원보다 그 구원을 뛰어나게 일으키셨다. 어떤 구원도 그 구원에 비교할 수는 없다. 그 구원에서는 구속주와 구원받는 이의 영광이 높아지면 그들의 뿔은 존귀로 높아질 것이다.
[2] 그것은 "풍성한 구원"이다. 그것은 cornucopia─즉 풍성한 뿔로서 우리가 신령한 축복과 하늘의 것을 풍성히 얻게 되는 구원이다.
[3] 그것은 "능력이 많은 구원"이다. 짐승의 힘은 그 뿔에 있다. 그는 우리의 영적 원수를 파하고 우리를 보호해 주실 구원을 일으키셨다. 구속주께서는 이 "구원의 병거"를 타고 진멸하실 것이며 계속 이기시면서 나아가실 것이요, 또 "이기러 나아가실" 것이다.
(4) 그는 극히 유명한 구약 선지자들이 교회에게 한 모든 고귀한 약속을 성취시키셨다.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70절), 메시야에 의한 구원의 교훈은 선지자에게 대한 호소로 확증되었고, 그 구원의 위대성과 중요성은 이로써 증명되고 확대되었다. 그것은 선지자들이 말하던 바로 그 일이다. 그러므로 그 일은 마땅히 기대하고 환영해야 할 일이다. 이것은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피던" 일이다(벧전 1:10, 11). 그러므로 결코 경시하거나 우습게 생각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오래 전에 말씀하신 일을 현재 행하고 계신 셈이다. 그러므로 "모든 혈기 있는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슥 2:13). 다음 사실을 살피자.
[1] 이 구원의 예언은 얼마나 "신성"했던가 ! 구원의 예언을 전한 선지자들은 "거룩한 선지자"였다. 그들은 감히 속이려 하지 않았고 인간 세상에 거룩함을 진작시키려고 도모했다. 그들을 통해 "말씀하신 분은 거룩하신 하나님" 자신이었다.
[2] 선지자들은 얼마나 "옛적" 사람인가 ! "주께서는 세상이 생기고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셨다." 그 시기는 세상이 시작된 이래이다(우리 개역 성서에는 "예로부터"라고 되어 있음). 세상이 시작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약속은 아담이 여인의 바로 그 후손을 위해 자기아내를 하와 즉 생명이라고 이름지어 불렀을 때 반영되었다. 한편 하와가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하면서 자기 첫아들을 가인이라 불렀고, 딴 아들은 "대신에 다른 씨로 보상해 주셨다"하여 "셋"이라 불렀으며, 노아가 "안위함"(rest)이라고 불리우고, 하나님의 셈의 장막에 거하시리라고 예언되었을 때도 하나님의 약속은 그대로 반영되었다. 노아에게서 새 세계가 시작된 지 오래지 아니하여 아브라함에게도 그의 후손에 의해 "땅의 열국"이 축복을 받게 되리란 약속이 주어졌다.
[3] 우리는 이 예언과 약속에게서 얼마나 놀라운 화음과 협주곡을 들 수 있는가 ! 하나님께서는 그 모두를 통해 동일한 일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본문은 "선지자들의 입들"이 아니라, "입(단수, dia. sto,matoj)으로"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전부가 말하지만 하나의 입으로 그리스도께 대해 말하고 있는 때문이다.
이제 예언된 이 구원은 어떤 것인가?
첫째, 그것은 우리 원수들의 악의로부터의 구출이다. 그것은 o,wthri,an e,x evcqrw/n h`mw/n 즉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자의 권세에서 구원"하는 구원이다. 그것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며 내적 타락과 의적 시험으로써 우리에게 왕노릇하려는 사탄의 권세로부터의 구원이다. 세상적 유대인들은 로마의 멍에로부터 해방되기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 구원은 다른 성질의 구속이 될 것이라는 암시가 때맞추어 주어졌다. 그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니 이는 저희 죄로 그들을 다스리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다(마 1:21).
둘째,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자비를 이루시는 것이다(72절). 구속주께서는 우리를 파멸시키는 원흉 곧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 가운데서 우리를 복원시키시고 그의 언약 안에서 우리를 재확립시키실 것이다. 그는 말하자면 우리를 낙원으로 다시 데려가실 것이다. 이것은 족장들에게 하신 약속과 그들과 맺으신 거룩한 언약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에 나타났다(73절).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조상에게 약속되었고 우리에게서 성취된 것은 긍휼 곧 순수한 자비이다. 그것은 추호도 우리의 공적 때문이 아니다(우리는 진노하심과 저주를 받아 마땅한 존재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자비 덕분이다.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에게 은혜와 생명을 주시려고 의도하신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기를 원하셨으므로 ex mero motu─즉 자신의 선한 욕구에서 우리를 사랑하셨다.
2. 하나님께서는 이 일로 자신의 언약, 거룩한 언약 즉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주목하셨다. 그것은 곧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하나님이 되리라"는 언약이었다. 그러나 실로 아브라함의 자손은 범죄로 말미암아 이 언약을 몰수당하였다. 그들에게 재난이 임해 있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을 잊으신 것같이 보였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이 이 언약을 기억하실 것이며 그 사실을 나타내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은혜로이 돌아오시는 것은 전부가 이 언약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내 언약을 생각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레 26:42).
셋째,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대한 자격 부여이며, 격려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기를 섬길 수 있는 능력과 은혜를 주시고자 하신다는 것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였고, 그것은 하나님께는 기뻐 받으실 수 있는 모습과 우리 자신에게는 위로가 될 모습의 능력과 은혜였다(74. 75절). 여기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출한 사실을 암시하는 것같이 보인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듯 이것은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추구하는 것이었다(출 3:6-8). 또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려는 것이 그들을 애굽에서 데려 나오신 의도였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이 보인다(출 3:12), 복음의 은혜가 갖는 큰 목적은 하나님 섬기는 일을 우리에게서 면제시키는 데 있지 않고 우리를 하나님께 대한 봉사에 끌어들이고 격려하는 데 있다. 기독교는 언제나 이러한 개념으로 파악되어야 했다. 즉 기독교는 우리를 참으로 경건하게 만들고 하나님께 대한 봉사에 불러들이며 우리를 하나님 예배에 묶어두고 우리를 고무하여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쇠멍에로부터 놓인 바 되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즐겁고 편안한 멍에를 목에 메게 된다. 주께서 푸셨던 바로 그 결박은 우리를 그에게 더욱 더 단단히 멘다(시 116:16 참조). 다음을 주목하자.
1. 우리는 이로써 avfo,bwj─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결한 안전 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해 받음을 두려워하는 것으로부터 평온한 자들 마냥 경건한 안보와 마음의 평정으로써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데는 사랑의 두려움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두려움은 공경하고 순종하는 두려움이어야 하며, 각성시키고 소생시키는 두려움이어야 하고 주인을 엄한 분으로 상상한 게으르고 비이성적인 종의 두려움같이 노예적 두려움이어서는 안 된다. 그 안에 고통과 놀램이 있는 두려움이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은 율법적 정신의 두려움 즉 종의 영이 갖는 두려움이 아니라 복음적 정신 곧 양자의 영이 갖는 담대함이어야 한다(롬 8:15).
2. 우리는 성결과 의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된다. 이 두 가지에는 하나님과 이웃에게 대한 우리의 전 의무가 포함되어 있다. 복음의 의도와 직접적인 경향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 위에서 새롭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태초에 그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그 형상내에는 의와 진리의 거룩함이 내재하고 있었다(엡 4:24).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희생과 제사의 율법적 예배가 아니라 성결과 의의 영적 예배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시기 위함이다(시 50:14 참조). 주의 앞에서 섬긴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직접 그를 예배하는 의무 안에 있음을 말한다. 우리는 자신을 주의 앞에 바쳐야 하며 항상 시선을 그에게 돌리고 있는 자로서 그를 섬겨야 하며 우리 곧 우리의 속 사람에게 향하고 있는 그의 시선을 언제나 바라보아야 한다.
4. 우리는 종신토록 그를 섬길 수 있게 된다. 복음은 우리가 후퇴하지 않는 데에 얼마나 많은게 달려 있는지 보여 주고 그리스도께서 끝까지 얼마나 사랑해 주시는지를 보여 주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항구적이고도 인내하게 하며 우리로 그를 끝까지 사랑하게 한다.
2. 사가랴는 이 구원에 대한 "준비"를 이루어주신 "하나님을 송축한다." 구원의 준비 역사는 세례 요한에 의해 수행될 터였다(76절). 이 아이는 현재 비록 생후 팔 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극히 높으신 분이다. 왜냐하면 그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오, 천부와 동등된 분이기 때문이다(롬 9:5). 아론이 모세의 선지자였듯(출 7:1),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선지자였다. 세례 요한이 말한 것은 그의 입으로서였고, 행한 것은 그의 선발대로서였다. 예언은 오래토록 중단되어 있었으나 요한에게서 다시 소생되었다. 이 점은 사무엘과 흡사하다. 사무엘은 세례 요한과 마찬가지로 늙은 어미한테서 출생했고, 예언도 오랫동안의 중단 끝에 그에게서 재개되었던 것이다. 세례요한의 업무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막중한 복음의 의무인 회개와 개혁을 설파함으로써 백성에게 구원을 예비시키는 일. "네가 주 앞에 앞서 가서 즉 그보다 조금 앞에 가서 그의 길을 예비하게 하며 백성을 불러 주를 위해 자리를 비우게 하고, 그가 즐길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게 하리라. 그의 행진을 방해하거나 난처하게 하거나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오는 것을 훼방하는 것이며 무엇이든지 다 제거하도록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며 산마다 낮아지게 하라"(사 40:3, 4).
(2) 구원에 대한 일반적 개념을 백성에게 설명하는 일. 이는 백성들로 하여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뿐만 아니라, 무엇을 기대할지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전파한 교훈은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구원을 이루는 두 가지 요소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1] 우리가 잘못 범한 것에 대한용서. 그것은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다. 죄는 구원의 길에 거침이 되는 방해물이며 우리 모두 죄로 말미암아 파멸과 정죄를 당하게 된다(77절). 세례 요한은 죄로 말미암아 백성의 형편이 처참하다고는 하나 절망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백성에게 주지시켰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의 긍휼(단어의 원뜻은 자비심임)을 인하여 사유하심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동정을 사게 될 만한 것은 우리 안에 아무 것도 없었다. 있다면 우직 불쌍한 처지뿐이었다.
[2] 장래를 위해 보다 선한 일을 행하라는 지시. 복음의 구원은 우리의 용기를 북돋아서 어두웠던 일들의 용서를 소망하게 할뿐만 아니라 확연한 진리의 빛을 세워 주기로 한다. 우리는 이 빛에 의해 발걸음을 올바로 떼 놓을 수 있게 된다.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였다"('새벽이 우리에게 임하리라'고 읽는 이도 있다.78절).그리고 이 또한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다. 그리스도는 avnatolh.─즉 새벽빛이시오, 떠오르는 태양이시다. 복음은 빛을 동반한다(요 3:19). 복음은 우리를 이교도의 무지한 암흑이나 구약 예표 또는 상징의 달빛 속에서 방황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복음 속에서 날은 동터 오는 것이다. 세례 요한에게서 날은 새기 시작하였고, 그 속도를 더 빨리 하며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게 되었다(잠 4:18). 아침을 오래도록 고대하던 자가 그 아침을 맞이하는 것에 못지 않게 복음의 날을 향유하는 우리는 그 날을 환영할 만한 이유를 가진다.
첫째, 복음은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복음은 이전에 우리가 전혀 캄캄하던 일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79절). 복음은 어두움에 앉아 있는 자에게 빛을 비춰 준다. 그 빛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하는 빛이다(고후 4:6). 새벽빛이 이 어두운 세상에 임하여 이방인들을 밝혀 주었다(행 26:18).
둘째, 복음은 소생케 하는 것이다. 정죄받아 옥에 갇힌 죄수처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복음은 빛을 비춰 주며 죄 사함의 소식을 가져다주며, 적어도 유예와 죄 사함 받을 수 있는 기회에 대한 소식을 전해 준다. 복음은 갇힌 자의 놓임을 선포하며(사 61:1) 생명의 빛을 비춰 준다. 그 빛은 얼마나 즐거운가!
셋째, 복음은 지시해 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며 결국 우리를 평강하게 할 길로 안내한다. 복음은 우리 눈에 빛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 발에 빛이 되기도 한다(시 119:105).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하고 안락한 교제를 유지할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죄인된 우리는 그 평강의 길에서 유리하여 방황했고 그것을 알지 못했으며 혼자서는 알 수도 없었다(롬 3:17 참조).
우리는 마지막 절에서 세례 요한의 유년 시절에 관한 약술을 일게 된다. 그는 제사장의아들이었지만 사무엘과는 달리 소시 적에 여호와 앞에서 섬기러 올라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보다 선한 제사장직을 위해 길을 예비해야 했던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게된다.
1. 속 사람에게 관한 한 그는 탁월하였다. 그 아이는 여느 아이들보다 정신적 기능이 훨씬 더 많이 성장하였다. 그래서 그는 심령이 강하여졌다. 그는 강한 판단력과 결단심을 소유하였다. 이성과 양심(이 양자는 여호와의 등잔이다)은 너무나 견고하여 그는 탐욕가 정욕의 열등한 기능을 적시에 완전히 복종시켰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그는 때맞추어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심령이 강한 자는 주안에서 강한 자이기 때문이다.
2. 겉 사람에 관한 한 그는 미미한 존재였다. 그는 빈들에 있었다. 이것은 그가 은둔자로 지냈고 대인 교제를 단절했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이 절기에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갔고 안식일에는 종종 회당에 나타났으나 그가 상주하던 곳은 다윗 기사 중의 숲이나 마온 광야에 산재해 있던 어떤 가옥이라고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다. 그는 그곳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명상과 기도에 소비하였으며 학교나 랍비 앞에서 교육을 받은 적은 없었다. 크게 쓰일 만한 자격을 구비한 자가 초야에 묻혀 있는 경우는 적지 않으며 많은 사람이 최후의 아주 큰 유익함을 위해 의도되고 준비되어 있으면서 이토록 오래 파묻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하지 말자.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만 곧 그가 삼십 세가 되는 때까지만 빈들에 있었다. 준비된 은총이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데에는 정한 때가 있었다는 것을 눈여겨 살피자. 그 은총에 관한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에는 말하게 될 것이며 결코 거짓되지 않을 것이다"(합 2:4 참조).
첫댓글 2020년 연말입니다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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