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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의 좋은 열매 렘24: 1-10
■ 모든 이를 만족 시킬 수는 없다.
고대 페르시아의 재담가였던 물라 나시르딘은 그의 아들과 같이 나귀를 앞세우고 시골길을 걷고 있었다. 나귀는 만족스럽게 길가의 풀을 뜯으며 가고 있었다. 그들이 땀을 흘리며 걷는 것을 본 한사람이 당신들은 정말 바보군요 걷지 말고 나귀를 타고 가시지요 !`라고 말했다. 물라와 그의 아들은 나귀등에 올라타고 다음 마을을 지나가는데, 한 노인이 이를 보고 외쳤다.
그 불쌍한 나귀에 두 명씩이나 타다니 당신들은 부끄럽지도 않소?` 라고 외쳤다. 물라는 내리고 아들이 나귀를 타고 다음 마을에 다다랐다. `가엾슨 노인네 ! 저 아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늙은 아버지를 걷게 하다니 !` 그래서 물라가 나귀를 타고 아들은 걸어서 얼마쯤 가다보니 한마을 사람이 말했다. `저 노인네 좀 봐 아들을 걷게 하다니 잔인하군 !` 물라는 그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면서 말하기를 항상 모든 이를 만족 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이 비유는 인간은 각기 나름대로의 관이 있음을 보여준 말씀입니다.
가난 속에서도 만족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자가 되어도 만족을 모르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풍성한 지식을 가지고 학·박사가 되어도 만족하지 못하지만, 불학무식한 사람도 만족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병들어 어려운 나날을 보내는 사람은 만족하지만, 건강하고 정욕이 넘치는 사람들 중에 만족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문제는 ‘만족’이란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족해 주셔야 합니다. 인간의 만족은 다른 사람과 경쟁하지 않을 때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감화감동하심으로 만족을 채울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
오늘 본문은 '무화과가 담긴 두 광주리의 환상'이라고 합니다. 이 비유가 언제 있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에 의해 3차례 걸쳐 바벨론 지역으로 포로로 끌려갑니다.
1) 제 1차는 주전 605년에 있었고, 이 때를 제 1차 바벨론 유수(포수)라고 합니다.
이때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2) 제 2차는 주전 597년에 있었고, 이때를 제 2차 바벨론 유수(포수)라고 합니다.
이때 대표적으로 끌려 간 사람이 바로 에스겔입니다.
3) 제 3차는 주전 586년에 유다가 완전히 멸망당하면서 있었고, 이 때를 제 3차 바벨론 유수라고 하며, 이때 예루살렘이 거의 폐허가 되었습니다. 모든 백성들은 이사야가 예언한대로 벌거벗은 채 벗은 몸 벗은 발로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던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제 2차 바벨론 유수 직후에 보여졌던 환상입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수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긴 후에..." 이때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전 앞에 놓인 두 개의 광주리를 봅니다
한 광주리에는 좋은 무화과가 있고,===다른 광주리에는 나쁜 무화과가 있었습니다(2절)
좋은 무화과는 무엇을 상징하고, ----------------나쁜 무화과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좋은 무화과는 바벨론 땅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을 상징합니다(5-7절). 악한 무화과 열매는 예루살렘과 애굽에 남아서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은 사람을 상징합니다(8-10절)
Ⅰ. 우리의 시선(視線)은 미래에 있어야 합니다.
언뜻 보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보다 예루살렘에서 있는 사람이 더 만족하고 행복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피신하여 전쟁이 없는 나라에서 평안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족하고 행복한 사람처럼 보여질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이나 예루살렘에서 죄악 가운데 계속 지내기보다는 한 번 쓴 고난을 당한 뒤에 회개하고 하나님 필요한 줄 아는 사람이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는 좋은 무화과로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모습으로만 우리는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현재 어떤 사람이 극심한 어려움에 처하면 "저 사람은 복이 없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어느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실패한 것이 복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까? 우리는 조금이라도 그런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세상적이고, 현세적이고, 결과 중심적이고, 조급한 것입니다. 오늘날 생기는 많은 갈등과 고민과 좌절이 이런 생각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가난하고 실패한 사람 중에 선량한 사람이 더 많아 보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강도는 석방되는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곧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모습으로 사람을 속단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앞으로 우리의 삶에서 얼마나 부활의 역사를 이루어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누가 보통 죄를 많이 짓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건강한 사람, 배부른 사람, 하나님 없이 물질만 가진 사람이 아닙니까? 병든 사람들은 죄를 짓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들은 대개 건강한 사람들입니다. 감옥에 들어간 사람은 도둑질과 사기극을 꾸미지 못합니다. 지은 죄의 결과로 들어가기는 갔지만, 거기에서 전적으로 하나님 마음에 맞는 회개와 돌이킴이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한 미래를 만들어 가는 사람입니다. 미래의 주인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연약한 모습으로 자신을 속단하지도 말고, 다른 사람들을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말로 우리는 사람에 대한 기대를 계속 가져야 합니다. "정말로 저 사람은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틀림없이 그 가능성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 에디슨 이야기
에디슨은 전기를 발명하기에 1000번의 반복된 연구와 실패를 하였답니다. 그가 999번의 실패를 당할 때 그 사람들은 틀렸다고 한다면 잘못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의 눈을 과거에 아니면 현재에 고정시키지 말고, 미래의 시선을 맞추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초라한 사람을 보고 평가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일은 금물입니다.
Ⅱ. 우리의 미래(未來)는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문제는 미래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분입니다. 우리의 미래를 하나님이 창조하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모든 사건에 관여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삶에 지나치게 비중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원망이 나오고 비판이 나오게 됩니다.
가끔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너무 ‘오늘’이라는 현실에 지나친 비중을 두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냉정하게 사람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오늘의 현실이 만족스러운 사람은 의외로 적습니다. 오늘만을 두고 보면 희망이 없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희망을 바라보고 희망을 가지는 삶의 자세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현실도 물론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현실에만 매여 있어서는 안 됩니다. 현실의 배후도 봐야 하고, 현실 이후도 봐야 합니다. 그리고 배후에서 앞으로 펼치실 하나님의 역사를 신뢰해야 합니다. 이러한 안목이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시편 23편을 잘 묵상해 보십시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그 다음에 다윗이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우리의 배후에 하나님이 섭리하시고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여러분! 어떤 사람의 음침한 골짜기를 만나도, 정말 사울과 같은 끈질긴 원수를 만나도 절대 기죽지 마십시오. 다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나의 미래는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믿음을 가진 우리 편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은 우리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노력한 것 이상으로, 기도한 것 이상으로 채워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안목으로만 현실을 바라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현실은 언제나 우리를 만족하게 해 주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손길과 설계가 미래에 있음을 보는 눈들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항상 그러한 시각과 안목으로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세계의 열강들 가운데 바벨론이라는 나라를 사용해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바벨론으로 하여금 이 유다를 집어삼키고 괴롭히도록 버려 두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이 바벨론이 그저 힘이 세어서 이스라엘을 침략한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이 바벨론은 단순한 침략자가 아닙니다. 베벨론 자기들도 모르는 바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유다백성들을 깨닫게 하시려고 이 바벨론을 수단과 방법의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뜻을 예레미야를 통해 전달해 주셨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징계인 겁니다. 그런데 이 징계는 유다백성들을 죽이기 위해 내린 징계가 아닙니다. 이 징계를 통해 유다백성들을 거듭나게 하시고 미래(未來)의 주인공이 되게 하시기 위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시는 고난입니다.
히브리서 12:8에서도 말씀하시기를,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유다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어린아이 까지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징계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하나님,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 죄를 용서하십시오.
바벨론가운데서 징계를 받으면서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미래(未來)를 위하여서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니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시오. 그런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야만 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징계를 통하여 더 좋은 열매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유다 백성들은 그 가장 기본적인 신앙의 자세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 8-10절,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 방백들과 예루살렘의 남은 자로서 이 땅에 남아 있는 자와 애굽 땅에 거하는 자들을 악하여 먹을 수 없는 악한 무화과 같이 버리되, 세상 모든 나라 중에 흩어서 그들로 환난을 당하게 할 것이며, 또 그들로 내가 쫓아 보낼 모든 곳에서 치욕을 당케 하며, 말거리가 되게 하며, 조롱과 저주를 받게 할 것이며,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을 그들 중에 보내어 그들로 내가 그들과 그 열조에게 준 땅에서 멸절하기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관대작이나 아니면 방백들을 부러워하면서 바벨론에 끌려가지 않음을 부러워하고 자시니들은 바벨론에 포로가 된 것을 후회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잘못을 범하는 사람들입니다.
포로로 잡혀가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못하고 현실을 불평 원망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 부류는 왕과 방백들처럼 그리고 거짓 선지자와 제사장들처럼 애굽을 의지하자 애굽을 의지하고 바벨론과 끝까지 싸우자. 싸우다 안 되면 애굽으로 도망가자. 그러는 사람들이 있고 또 한 부류는 우리가 잘못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징계라면 순순히 바벨론으로 가자. 그런 생각을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끝까지 남아서 바벨론과 싸우자고 하는 사람들이 의로운 사람 같고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는 사람들 같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으로 순순히 끌려가자고 하는 사람은 비겁한 사람들 같고 민족의 반역자들 같이 생각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보고 민족을 배신하는 사람이고 예레미야 때문에 국론이 분열된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리고 결국 예레미야를 핍박하고 옥에 가두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예레미야 자신은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문제는 예레미야는 좋은 무화과열매였고 다른 사참들은 나쁜 무화과나무의 열매로 자처하게 된 것입니다.
Ⅲ. 좋은 무화과 열매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렘24:2-3)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있고, 한 광주리에는 악하여 먹을 수 없는 극히 악한 무화과가 있더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무화과이온데 그 좋은 무화과는 극히 좋고 그 악한 것은 극히 악하여 먹을 수 없게 악하니이다
먼저 유다 백성들 중에서 늦게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바벨론 땅에 순순히 끌려가 징계를 받고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나중에 이 좋은 무화과 같이 보기에 좋은 열매가 되게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비겁한 것 같고 민족의 자존심을 구긴 사람들 같지만 사실은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고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버리고 늦게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비록 이제까지는 범죄해서 징계를 받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이들을 다시 회복시키시고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이들을 축복하시되 얼마나 축복하시는가?
① 6절을 보면 돌아보아 좋게 하여 ②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③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④ 심고 뽑지 아니하고
⑤ 하나님이 여호와하나님인줄아는 마음을 그들에게주어서 그들로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고
⑥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같은 일들을 하나님이 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좋은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되는 것은 인간의 의하 여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자율적이 아니고 타율적으로 됨을 말합니다. 진정한 좋은 무화과열매는 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되어 진다는 것을 믿고 순종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반대로 끝까지 남아서 싸우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사람들은 얼핏 보기에 의로운 사람들 같고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들 같지만 사실은 악한 사람들입니다.
이제까지도 방종과 타락으로 살아왔고 지금도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귀를 막고 자신의 편견과 아집으로 버티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기회를 주셨지만 끝까지 하나님께로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이제 하나님께서도 버리시겠다. 그랬습니다. 이들의 결국이 어떻게 되는가?
9절 말씀을 보니까
① 세상 모든 나라 등에 흩어서 ② 환란을 당하게 할 것이며
③ 그곳에서 치욕을 당하며 ④ 말거리가 되며 ⑤ 조롱과 저주를 받게 할 것이며
⑥ 칼과 기근과 염병을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로 내가 그들과 그 열조에게 준 땅에서 멸절하기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맺는 말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1) 우리의 시선을 미래에 두시기 바랍니다
2) 매래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 것을 믿어야 합니다
3) 좋은 무화과나무의 열매는 내가 아닌 하나님에 의하여 되어 진다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유대의 역사를 보면 바벨론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티던 그 백성들은 다 망하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에 순순히 끌려간 백성들은 약속대로 70년이 지나서 회개하고 순종한 사람들은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 이스라엘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진정으로 좋은 무화과 나무의 열매입니다. 신앙인은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의 국화이듯이 이스라엘입니다.
이 이스라엘은 열매를 맺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야 합니다. 문제는 내가 열매를 맺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하여 되어 진다는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좋은 열매가 되어 하나님을 만나는 선민이 되시기 바랍니다.